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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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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정여립의… 꿈> - 기축옥사(己丑獄事)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42 15.11.06 23: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여립의… 꿈> - 기축옥사(己丑獄事) 이야기

천반산
    정여립이 말을 타고 뛰어 넘었다는 뜀바위(우측)
    건너편 대덕산(좌측)과 그 사이로 흐르는 금강
    그리고 계곡속의 작은섬 죽도
    시진출처:블러그/약수의 산행포토에세이
<정여립의 꿈… 정중부를 본 꿈>

정여립(鄭汝立)의 아버지 정희증(鄭希曾)은 
대대로 전주 남문 밖에서 살아왔다. 
처음 정여립을 잉태할 때에 꿈에 정중부(鄭仲夫)가 나타났고, 
태어 날 때에도 또 같은 꿈을 꾸었다. 
친구들이 와서 축하하였으나, 그는 기뻐하는 빛이 없었다. 
--후략--
<연려실기술 -이긍익 저> 제14권

이처럼 조선 중기의 사상가인 정여립의 태몽은 아버지인 정희증에게 
고려의 무신난을 일으킨 정중부가 나타난 꿈으로 알려져 있는 바, 
역모사건으로 자결하게 되는 일생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정여립(鄭汝立, 1546년 ~ 1589년) 전라북도 전주부에서 태어났다. 
전주의 명문 출신으로, 
정극호(鄭克豪)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정세완(鄭世玩)이고, 
아버지는 첨정과 익산군수(종4품)를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며 
어머니는 박찬(朴纘)의 딸이다.

15세 때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때 
아전들이 군수보다도 더 어려워했다 한다.
자라면서 체격도 늠름한 장부가 되었으며,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다.

이이와 성혼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년)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 2년 24살) 식년 문과 을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냈다. 
처음에는 서인으로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 사후에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으로 전향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선조는 그의 탈당을 불쾌히 여겼으며, 
이를 안 정여립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전향 원인)
그가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한 사정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이가 그를 무척 아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오히려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당수 이발(李潑) 등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이이와 성혼의 제자였고 이이 등의 각별한 후원을 받았음에도 전향하여 
스승인 이이를 비판한 점 때문에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그는 배신자나 반역자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1623년 인조반정이후 서인과 그 후신인 노론이 대한제국 멸망 시까지 
집권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 기회는 주어지지 못했다.


이후 정여립은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1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1587년에는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 양명학자)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1589년(선조 22) 기축년(己丑年) 10월에 정여립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역모를 꾸민다고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이 고변(告變) 하였다.  


서인은 정여립이 역모를 꾸몄다고 했고, 
동인과 그 후신인 남인에서는 
그가 모반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팽팽히 맞섰으며,
이로인해 동인과 서인과의 정쟁이 3년여 간 진행되었다.
(이런 당쟁의 폐해가 임진왜란(1592)의 빌미가 되지 않았나?) 

이후 선조는 사건의 형관으로 송강 정철을 임명 했는데, 
처음에는 80여 명이 체포 연행되었다가 
옥사가 점점 커져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최영경(崔永慶)등 
동인의 주요인물이 대거 연루되어 제거되었으며 
이때 숙청된 인사는 1,000여 명에 달했고 
그 가족과 관계자들까지 체포, 투옥되면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정여립의 모반사건, 기축사화(己丑士禍) 등으로도 부른다.

기축 옥사의 처결 과정에서
이발의 팔순 노모와 열 살이 채 안된 어린 아들들까지도 
국문을 받다가 죽음으로써, 
동인(이산해,윤선도 등)들은 이 사건으로 서인들, 
특히 정철과 배후의 인물들에게 대단한 원한을 가지게 된다.

정철은 기축옥사를 처결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관에 녹훈되었고,
또,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인을 더욱 약화 시키고 서인이 집권하게 만든다.

정여립은 정권을 잡으려는 야심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도참설을 퍼뜨려 모반을 꾀하려다 탄로 나자 도주하여 자살하였다. 

정당은 서인이었으나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다.

정여립이 주도한 대동계의 주요 활동 근거지가 
전라도 지방이어서 전라도 유림사회가 초토화 되었다. 
호남의 유림사회에서도 이 사건 이후로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은둔하는 경향들이 나타났고, 
이후 조정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활약할 때까지 
전라도를 반역향이라고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도 제한되었다.

정여립은 43세의 젊은 나이로 불운한 인생을 마쳤고, 
그를 매개로 발발한 기축옥사는 조선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 조작설
조작설에서는 정여립의 옥사를 조작한 인물로 정철과 송익필을 지목한다. 
서인 출신 예학자 김장생(金長生)이 엮은 〈송강행록〉(松江行錄)에서,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 등이 모반한다는 고변이 있자 
일반인은 그의 상경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했다'는 내용을 들어, 그의 도망을 미리 안 이유는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지휘자라는 주장이다.

또한,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송익필(宋翼弼)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은 정승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의 첩(노비)이 
낳았다는 서녀와 평민 출신 갑사 송린의 아들이었다. 
노비의 후손인 송익필은 문장력이 뛰어나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 인을 환천(還賤)시키고 
동인의 이발·백유양(白惟讓)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정철(鄭澈, 1536년 ~ 1593년 12월 18일)
조선시대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 정치인, 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또는 迎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가사 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한국 시가 역사상의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성산별곡(星山別曲)》,《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훈민가(訓民歌)》 등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가사와 한시, 단가를 남겼다.

그는 직설적인 성격으로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였으며, 
타인의 뒷담을 즐기는 것을 불쾌히 여겼다. 
그러나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화법은 원수를 많이 만들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율곡 이이는 그에게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평가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의 공화주의적 사상을 두고 
“동양의 위인”이라 칭송하였고, 
역사학자 이이화는 정여립을“전도된 가치를 바로잡고 불평등과 
차별의 세상을 뜯어고치고자 온몸으로 현실에 부딪친 진보적 지식인이었고, 
선진적 사상가였으며, 민중에 토대를 둔 개혁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담수어 꾹저구에 대한 일화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 중 1580년(선조 13년) 
강릉부의 한 연못에서 발견한 담수어에 꾹저구라는 이름을 붙였다. 
강릉 연곡을 방문했던 그는 어느 백성이 선물로 대접한 탕을 먹게 됐다. 
이때 백성이 선물로 대접한 탕이 바로 꾹저구로 끓인 탕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 지역 현감은 관찰사를 접대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맛있는 물고기로 만든 별식을 마련하라고 지시하였으나 
그 무렵 장마철이라 고깃배가 전혀 출어하지 못해 마땅한 해산물이 없었다. 
백성들은 할수 없이 인근 연곡천에 흔하던 작은 물고기를 잡아 
탕을 끓여 올렸다. 이를 매우 흡족히 먹은 그는 
"맛이 시원하고 담백하다." 며 무슨 물고기로 끓였느냐고 물으니 
그때까지 이름없이 대하던 작은 물고기라 백성들이 주저하였다. 
이후 연곡천에서 저구새(雎鳩물수리)가 물속에 부리를 훑으며 
잡아먹던 것을 본 정철은 "저구새가 꾹 집어 먹는 물고기"라 하여 
"그러면 앞으로 이 고기를 꾹저구라 부르면 되겠다."고 하여 
이름을 꾹저구라 지었다.

기생의 이름시
술과 풍류를 즐기던 정철은 기녀의 이름을 따서 시를 지었는데, 
기녀가 그의 시를 되받아, 
운을 따서 화답시를 짓자 기녀의 재주에 놀라게 된다.

근악槿樂

옥이 옥이라 하거늘
번옥(燔玉)으로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이 분명하다
내게 송곳 있으니
뚫어 볼까 하노라

철(鐵)이 철(鐵)이라 하거늘
잡철(雜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이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있으니
한번 녹여볼까 하노라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노래 : 박수정/나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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