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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사신도님들 수륙재 참여 부탁드립니다.
10월 28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되니 그 이전에 도착해주세요.
차량 소지하신 님들은 선원사 근처에는 주차장이 없으니
터미널에 인접해 있는 주차장을 이용해 주세요.
주차장 주소는
전북 남원시 동충동 26-3
영선사는 오전 수륙재만 참여합니다.
영선사에서 행사장 출발 시간은 오전 8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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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는 양력 10월 28일 오전 09시 부터입니다.
영선사는 당일 오전 행사에 적극 참여합니다.
남원 신도님들은 모두 일정 비우시고 적극 참여해 주십시오.
이행사는 임진정유 조일 7년 전쟁 중
정유년 8월 추석 전후로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몰살을 작정하고 침공한 왜군에 의해 전멸을 당한 1만명의 영령들을 위한 행삽니다.
성중님께 여쭈니 충격적이게도
희생자의 상당수가 구제를 받지 못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이런 억울한 죽음을 방치하면 지역에 주기적인 대형사고가 터질 수 있습니다.
희생자들의 한이 한계를 넘어서면 사고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남원성 내외의 모든 장소가 살육장이었고 무덤이었습니다.
이걸 풀어내야 해요.
지속적인 수륙재를 올리면 구제가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더구나 이수륙재는 성중님들보다 윗분인 어른들이 주시하고 계시답니다.
그러니 꼭 참여해 주세요.
종교적으로는 성현의 관심은 살육전이 있기 100일전에도 기록에 나타납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정유년 음05월 06일 기록에는
충무공의 꿈에 두 분 형님으로 나타난 존재들이
남원성 전투의 1만명 순절을 예고하는 듯한 대목이 있습니다.
1) 충무공 이순신 난중일기 내용
~~六日丙申 晴 夢見兩亡兄 相扶哭痛 且言 襄事未營 千里從軍 誰其主之 痛哭柰何云
此 兩兄精靈 千里追蹤 憂悶至此 悲慟不已
又念南原監獲 是則 未知也~~
우념남원감획 시직 미지야
(정유년, 1597년) 5월 6일(병신일) 맑음.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울면서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 리 밖으로 떠나와 군사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 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어찌하리”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 리 밖까지 따라 오셔서
근심하고 애달아함을 이렇게까지 하신 것이니 비통함을 금치 못하겠다.
“또 남원의 추수 감독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 꿈이 5월 6일 꾸어졌고 실제로 100일 후인 가을 음력 8.15일 추석 전후로
남원에서는 대살육이 벌어졌습니다.
꿈의 염려가 정확히 들어맞았기에 이것은 성현이 우려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수륙재를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하는 대목이죠.
억울하게 사망하신 그 분들이 구제를 못받았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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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참석자님들 조상 영가님도 같이 모시기로 예정되어 있는데요.
현재 영선사는 방침이 정해지진 않았습니다.
확정 되면 조상님 위패 모시는 것을 추가로 공지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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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있는 귀무덤 코무덤의 주인들이 바로 이남원성 전투에서
살육을 당한 호국 영령들이었고 그 분들의 몸에서 떼어낸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참상을 기록한 것은 조선인이 아닙니다.
조선인은 전멸을 당했기 때문이에요.
당시 일본 스님들은 의무병으로 복무했는데
그 분들이 남긴 기록에 의혀면 켜켜이 쌓이 시신으로
그 비참함을 차마 눈뜨고 볼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분들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위로를 해줘야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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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글을 인용하면
"~~ 군복무 중인 의료승려들의 기록에 따르면
"물건을 빼앗고 서로 죽이고 약탈하는 모습조차 볼 수 없다",
"들판과 산, 성이 불에 타 없어졌다",
"밤이 되어 성 밖을 내다보면 길가에 모래처럼 죽은 사람들이 보인다.
이걸보면 일본군이 얼마나 잔인하게 광적인 폭도로 변했는지, 첨딤한 살육전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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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번역기를 그대로 돌린겁니다. 그러니 내용은 정확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밑에 원문을 첨부하니 살펴보시면 됩니다. ----------------------------- 게이쵸의 역할 덴쇼 20년(=몬로쿠 원년: 1592)부터 싸운 일본(몬로쿠의 역할)과 한국과 명나라 사이의 평화를 추진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신인 나이토 뇨야스가 베이징에 입성하여 필사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명나라 궁정은 국가 사절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문로쿠 5년(=경초 원년: 1596년)인 1596년 6월 15일, 명나라 사절 양방형이 한국 부산을 떠났다. 한편, 그의 부사절인 소케이 쉔은 공식 사절보다 일찍 일본에 도착하여 6월 27일 후시미성에서 히데요시와 접견을 가졌다. 사절은 8 월 29 일 오사카에 도착했고, 9 월 1 일 하시바 히데요시는 오사카 성에서 양 팡류 (Yang Fang-ryu)와 셴 웨이 케이 (Shen Wei-kei)라는 두 명의 사절을 만났다. 두 사절은 히데요시에게 명나라 황제의 국책, 펑 왕의 금인과 왕관 예복을 제공했습니다. 이 항목들은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를 대우한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는데, 히데요시는 물론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2일, 히데요시는 명나라 황제가 준 왕관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기분이 좋았다. 흥청망청 끝난 후 사루가쿠가 열렸고 히데요시는 그것이 좋은 성공이라고 느꼈습니다. 잔치가 끝나고 히데요시가 승려 쳉판에게 명나라 황제의 국책을 읽게 했을 때, "특히 명나라를 봉인하고 일본 왕과 함께 하라"고만 말했고, 히데요시가 이전에 명나라에게 요청한 일곱 가지 조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히데요시에게 선물된 붉은 관복은 "황제"보다 계급이 낮은 "왕"의 것이었다. 과거 히데요시의 요구는 일본과 메이코쿠의 친평화 파벌에 의해 평화를 체결하기 위해 '가짜 항복 문서'로 위장했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겸손한 태도로 평화 협상에 접근한 결과는 합리적이거나 관대한 조치일 수 있지만 모두 히데요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작전의 주모자 중 한 명인 유키나가 코니시 (Yukinaga Konishi)는 쳉 판 (Cheng Fan)에게이 책의 "일본 왕"부분을 "다이묘 천황"으로 바꿔달라고 미리 요청했지만 쳉 환 (Cheng Huan)은 일본 왕으로 읽혔다. 말할 필요도 없이 히데요시는 분노했다. 군대는 다시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이 두 번째 한국 파견, 즉 게이 초의 역할의 시작이었습니다. 1597 년 2 월, 히데요시는 한국에 군대를 재배치한다고 발표했는데, 이에 따라 제 1 군과 제 2 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 마사로 대체되고, 경상도 도우 모포와 경상도 석포의 기요 마사로 대체된다. 제3군은 구로다 나가마사, 모리 요시나리, 시마즈 도요히사, 다카하시 모토타네, 다네초 아키즈키, 이토 유헤이, 사가라 요리후사, 제4군은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가쓰시게, 제5군은 시마즈 요시히로, 제6군은 나가무네가베 모토치카, 도도 다카토라, 이케다 슈쿠루시마 미치후사, 나카가와 히데나리, 스가 타츠초를 포함하여 총 141,500명의 병력이 동원되었고, 제7군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이코마 카즈마사, 와키사카 야스하루, 제8군은 모리 히데모토와 우키타 히데이에, 그리고 부산포와 안코포와 같은 다른 장교들은 휴전 후 분로쿠의 역할로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주둔했습니다. 7월 15일,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요시아키,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는 원균이 이끄는 한국 해군과 싸워 거제도에서 격파했다. 그 결과 전라도 남부의 바다를 장악하게 되었고, 상륙 후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의 2군으로 나뉘어 경상, 전라, 충청 3도까지 진격하면서 무작위로 사살했다. 첫 번째 목표는 전라도의 '완전한' 통제였다. 이 전라도는 이전 몬로쿠의 역할로 게릴라로 변한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시달렸던 지역이다. 이것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히데요시는 광기의 화신이 되었다. 한편 명나라 궁정은 일본군의 재침공 소식을 듣고 다시 한국에 지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6월 중순경부터 전라도 남원 인근 방어를 강화했다. 이것이 전라도의 공격과 방어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살상, 약탈, 파괴, 방화, 잔혹 등 온 힘을 다해 진격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좌군은 8월 15일 전라도의 남원성을 공격했다. 군복무 중인 의료승려들의 기록에 따르면 "물건을 빼앗고 서로 죽이고 약탈하는 모습조차 볼 수 없다", "들판과 산, 성이 불에 타 없어졌다", "밤이 되어 성 밖을 내다보면 길가에 모래처럼 죽은 사람들이 보인다. 일본군이 얼마나 잔인하게 광적인 폭도로 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서, 게이 초의이 역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일본군이 수행 한 코 절단과 귀 절단입니다. 게이 초가 살해 된 한국 군인과 사람들의 머리 대신 게이 초의 역할을 맡아 나고야 성의 히데요시에게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시마즈 군대와 다른 사람들은 이미 분로쿠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작업의 규모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게이초가 역할을 맡을 즈음에는 "나는 모든 남자와 여자를 쓰다듬고 매일 코를 자르고 소금에 절인다"는 속담처럼 비전투원, 심지어 신생아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단계에서 바다를 건너는 장군들은 일본에 보낼 수 있는 코의 수를 늘리는 방법과 많은 수의 코로 히데요시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이전에 분로쿠 역을 맡았을 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일본처럼 보이게 하고 아이들에게 "이로하"를 "일본" 한국으로 가르치려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 있었다. 소금에 절인 코와 귀를 통, 통, 항아리에 담아 일본으로 보냈는데, 당시 일본군의 야만적 행위에 의해 살해된 한국인의 수는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보내진 귀와 코는 교토의 도요쿠니 신사 앞 귀마디에 묻혔다. 또한 이것은 Bunroku의 역할 이후로 이루어졌지만 "인간 노출"도 만연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이들을 납치하기 위해 칼에 찔려 죽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납치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일본으로 끌려가 일하거나 "노예"로 사고 팔렸습니다. 이 한국 파견 기간 동안 20,000에서 30,000명의 사람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한국 측도 반격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고된 이순신은 조선해군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들은 이전 해전에서 패배 한 후 13 척의 배만 남긴 채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9월 14일 명량 해전에서 그는 이해관계의 변화를 읽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전투에서 쿠루시마 미치소가 사망하고 도도 타카토라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 결과 바다의 통제권은 한국 해군의 손에 넘어갔고 일본은 해병대의 서쪽 진격을 차단했습니다. 지상전에서는 서울에서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 전주로 남쪽으로 이동한 명나라 군대와 모리 히데모토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가 9월 초 익산에서 충돌했다. 상황은 요동치고 있었지만 군대의 북쪽 진격은 멈췄고 9월 14일 후퇴했다. 경상도에서는 경초의 역할의 주역으로 꼽히는 '울산성 전투'가 펼쳐진다.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유키나가 등은 경상도 울산에 성을 쌓고 기지로 삼았지만, 계약 중간인 12월 22일부터 44,000명의 명나라 연합군과 한국군으로 구성된 대군에게 포위당했다. 몹시 추운 계절이기도 했고, 물이 끊기고 식량이 부족한 가고조 전투에서 기요마사, 유키나가 등은 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598 년 1 월 4 일, 모리 데루 모토가 이끄는 구호대가 니시 오우라에서 도착했고, 명나라 군대는 마침내 포위 공격을 해제하고 후퇴했다. 이처럼 전투는 한국 각지에서 계속 오르락내리락했고, 눈에 띄는 진전 없이 며칠만 지나갔다. 히데요시의 병의 중증도는 게이 초 3 년 7 월경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8 월 18 일에 사망했다는 정확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장군들이 히데요시의 죽음에 화를 내고 사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히데요시의 비밀리에 애도하면서 5 명의 장로와 5 명의 치안 판사에 의해 휴전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지 10일 후, 휴전과 철수 명령이 내려졌고, 10월 1일 도쿠나가 도시마사와 미야모토 도요모리 사절이 부산에 도착했다. 10월 1일, 명나라와 한국의 연합군은 경상도 사천에서 시마즈군을 공격했고, 시마즈군은 그들을 격퇴했다. 같은시기에 순천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일본군도 승리했습니다. 10월 말이 되어서야 마침내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유키나가, 나베시마 나오시게, 구로다 나가마사 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문제는 전투가 물러날 때입니다. 육로로는 이전 전투의 평화 협정에서 군대의 안전이 약속되었지만 해상 전투가 있었고 고니시 유키나가 일행은 순천에서 후퇴하는 것을 막고 마침내 시마즈 요시히로의 도움으로 죽음의 장소에서 탈출했습니다. 이 해전에서 시마즈 해군은 큰 타격을 입어 패배했지만, 게이 초의 마지막 전투에서 그는 일본 해군을 완전히 격파 한 이순신을 격파했다. 11월 20일, 시마즈 요시히로(島水吉大郎)의 군대는 거제섬을 떠나 대마도로 향했고, 이는 제2차 한국 원정과 게이초의 역할을 끝냈다. 종전을 선언하는 평화조약을 체결한 직후 군대가 철수하고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전투의 상흔이 한국 곳곳에 남았고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후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전쟁 포로로 잡힌 사람들로 인해 극적으로 발전했지만 전투의 부산물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저항을 숨길 수 없습니다. 또한 이 두 캠페인 동안 이시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 후쿠하라 나가타케와 같은 "분지 파벌 군벌"과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와 같은 "타케시 파벌 군벌" 사이의 불화가 깊어졌고, 이러한 적대감은 세키가하라의 역할의 꼬리에 기여했습니다. ---------------------------------- けいちょうの役天正20年(=文禄元年:1592)より交戦(文禄の役)に及んだ日本と朝鮮・明国の講和を進める小西行長の家臣・内藤如安が北京入りして必死の弁明に努めた結果、明国朝廷は国使を派遣することに決定した。 文禄5年(=慶長元年:1596)6月15日、明国の冊封正使・楊方亨が朝鮮の釜山を出発した。一方、副使の沈惟敬は正使よりも早く日本に到着し、6月27日、伏見城において秀吉に謁見している。正使が大坂に到着したのは8月29日で、9月1日、羽柴秀吉は大坂城で楊方亨と沈惟敬の2人の使節を引見した。 2人の使節は、明皇帝からの国書、封王の金印と冠服を秀吉に捧げた。これらの品は、明皇帝から秀吉に対する処遇を暗に示す物であったが、秀吉はもちろんそれに気づかない。 翌2日、冊封正使・副使を大坂城に饗応し、秀吉は明皇帝から贈られた王冠を着け、赤装束の服を着て上機嫌だった。酒宴のあと猿楽などが催され、秀吉にしても上々の首尾と感じていたところである。宴が終わって秀吉が明皇帝からの国書を僧・承兌に読ませたところ、「特に爾を封じて日本国王と為す」とあるだけで、秀吉がさきに明に要求した七ヶ条の条件については何もふれられていなかった。秀吉に贈られた赤色の官服とは、「皇帝」よりも格の下がる「国王」のものだったのである。 かつて秀吉が突きつけた要求は日本・明国双方の講和推進派の手によって、とにもかくにも講和を結ぶために「偽の降伏文書」に偽装され、講和を実現するためにへりくだった態度で講和交渉に臨んだ結果といえば妥当、もしくは寛大ともいえる処置であろうが、それらはすべて秀吉の知らぬところで行われたことたっだ。 この工作の首謀者のひとりでもある小西行長は事前にこの国書の「日本国王」という部分を「大明皇帝」と読み替えてくれるよう承兌に頼んでおいたのだが、承兌はそのまま日本国王と読んでしまったという。 秀吉が激怒した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再び朝鮮への出兵が命令されることになった。第2次朝鮮出兵、すなわち慶長の役のはじまりである。 慶長2年(1597)2月、秀吉は朝鮮再出兵の陣立て書を発表したが、それによると第1軍と第2軍は小西行長と加藤清正が交代で務めることとし、行長は慶尚道豆毛浦、清正は慶尚道西生浦から入った。第3軍が黒田長政・毛利吉成・島津豊久・高橋元種・秋月種長・伊東祐兵・相良頼房で、第4軍が鍋島直茂と勝茂、第5軍は島津義弘、第6軍は長宗我部元親・藤堂高虎・池田秀氏・来島通総・中川秀成・菅達長、第7軍は蜂須賀家政・生駒一正・脇坂安治、第8軍は毛利秀元・宇喜多秀家という陣容で、その他に釜山浦・安骨浦など、文禄の役の休戦後も帰国せずに駐屯を続けていた将士を含めての総計で14万1千5百の兵が動員された。 7月15日に藤堂高虎・脇坂安治・小西行長・加藤嘉明・島津義弘らの軍が、元均(ウォンギュン)の率いる朝鮮水軍と戦い、これを巨済島に破っている。これにより全羅道南部の制海権を手中に収め、上陸後の日本軍は左軍と右軍の二手に分かれ、手当たり次第に殺掠しながら慶尚・全羅・忠清の3道へ兵を進めていったのである。 第一の標的は、全羅道の「完全」な制圧だった。この全羅道とは、さきの文禄の役において一揆、ゲリラと化した住民の激しい抵抗に遭い、苦しめられた地域である。これを「完全」に制圧するということは、住民を殲滅することにほかならない。秀吉は狂気の権化と化していた。 一方、日本軍再侵攻の報を受けた明国朝廷では、朝鮮に再び援兵を派遣することを決め、6月半ば頃より全羅道(チョルラド)南原(ナムウォン)付近の防備を固めた。ここが全羅道攻防の要となるからである。しかし日本軍は殺戮・略奪・破壊・放火と暴虐の限りを尽くしながら進撃し、激戦の末に8月15日に左軍が全羅道の南原城を攻め落とした。 従軍した医僧の記録によれば「物を取り人を殺し、奪い合う様は目も当てられない」「野も山も、城は申すに及ばず全てを焼き払い」「夜が明けて城の外を見れば、道端の死人がいさこ(砂)の如し。目も当てられない」などとある。狂暴徒と化した日本軍がいかに残虐な行為に及んだか、窺い知ることができる。 ところで、この慶長の役で特筆し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このときに日本軍が行った鼻切り・耳切りである。討ち取った朝鮮人兵士や民衆の首の代わりに鼻や耳を切り、それを名護屋城の秀吉のもとに送ったのは、なにも慶長の役が初めてではなく、すでに文禄の役においても島津軍などが行っているが、その規模の大きさは比較にならない。慶長の役の頃には、「男女生子迄も残らず撫切り致し、鼻をそぎ其日々塩に致す」とあるように、非戦闘員の、しかも生れたばかりの赤ん坊のものすら含まれていたのである。 この段階で、渡海した諸将たちの脳裏にあったのは、如何にして日本に送る鼻の数を増やすか、その数の多さでいかに秀吉を喜ばせるかであった。さきの文禄の役において、名前を日本風にさせたり、子供たちに「いろは」を教え込んで朝鮮を「日本化」させようとしていたのとは次元が違うのである。 塩漬けや酢漬けにした鼻や耳は、桶や樽・壷などに詰められて日本に送られたが、このときの日本軍の蛮行によって殺された朝鮮人の数は10万を下らないであろうといわれている。 その送られてきた耳や鼻を埋めたのが、京都の豊国神社の前にある耳塚である。 また、これも文禄の役より行われてきたことだが、「人さらい」も横行した。場合によっては子供をさらうために、その子の親を切り殺すことも珍しくなかったようである。さらわれた者は日本に連行されて労働させられたり、「奴隷」として売買された者も少なくなかった。 この朝鮮派兵において日本に連行された者は2万から3万人にものぼるといわれる。 朝鮮側も反撃の様相を見せる。更迭されていた李舜臣(イスンシン)が朝鮮水軍の指揮官に戻された。さきの海戦による敗北で残されたわずか13艘の兵船にて反撃戦を試みるのである。 9月14日、鳴梁(ミョンリャン)での海戦において地の利・潮流の変化を読みきって攻撃をかけ、日本水軍に大打撃を与えた。このときの戦いで来島通総が戦死、藤堂高虎が負傷した。これによって制海権は朝鮮水軍の手に渡り日本水軍の西進は断たれたのである。 また陸戦においては、漢城(ソウル)から忠清道を経て全羅道全州に南下してきた明軍と毛利秀元・黒田長政隊が9月はじめに稷山(イクサン)において激突した。戦況は一進一退だったが日本軍の北進は停滞することとなり、9月14日には後退をするに至る。 慶尚道においては慶長の役の主要な戦いとされている「蔚山城の戦い」が展開される。これは加藤清正・浅野幸長らが慶尚道蔚山に築城をはじめ、そこを拠点にしたのであるが、普請半ばの12月22日から明・朝鮮連合軍4万4千人の大軍に包囲されてしまったのである。厳寒の季節でもあり、水の手を断たれて兵糧も乏しいという過酷な籠城戦で、清正・幸長らも落城はもう時間の問題と考えていた。翌慶長3年(1598)1月4日、毛利輝元らの救援隊が西生浦から到着し、ようやく明軍も包囲を解いて退いている。 戦いはこのように朝鮮各地において一進一退を続け、これといって目立った展開が見られないまま月日だけが経過していった。 秀吉の病気が重いということは、慶長3年の7月頃には伝わっていた。しかし、8月18日に没したという情報は正確には伝えられなかった。秀吉の死ということで諸将が動揺し、士気に関わるという理由であると思われる。 秀吉の喪を秘したまま五大老・五奉行による停戦工作が始められた。秀吉の死後10日経ってから停戦・撤退の命令が出され、その命令を携えた使者・徳永寿昌と宮本豊盛が釜山に到着したのは10月1日のことであった。この10月1日には、明国と朝鮮の連合軍が慶尚道泗川(サチョン)に陣する島津勢を攻撃し、島津勢がこれを撃退するという泗川の合戦があり、まだ戦場では戦いが続行中であった。同じ頃に順天でも戦いがあったが、こちらでも日本軍が勝利している。 10月下旬になってようやく加藤清正・浅野幸長・鍋島直茂・黒田長政らのところにも帰国命令が届けられた。戦いは退くときが問題である。陸路ではさきの戦いの和議において撤兵の安全を約束されていたが、海路においては戦闘があり、小西行長らの隊は順天からの退路を抑えられ、島津義弘の救援によってようやく死地を脱するというありさまであった。この海戦において島津勢の水軍は大打撃を蒙って敗北を喫するが、この慶長の役における最後の戦闘において、日本水軍をことごとく討ち破った李舜臣を討ち取ったのである。 11月20日に島津義弘の軍勢が巨済島を離れて対馬に向かったことにより、第2次朝鮮出兵、慶長の役は終わりを告げたのである。 終戦を宣言する講和条約を結ぶ間もないままに撤兵し、朝鮮とは国交断絶となり、朝鮮各地に戦いの爪あとを残し、多数の人を無残に殺しただけであった。 このあと、捕虜として連行された人々によって日本の陶磁器業は飛躍的に発展することになるが、それを戦いの副産物と呼ぶことに抵抗を隠せない。 また、この2度の戦役において石田三成・小西行長・福原長堯ら『文治派武将』と加藤清正・福島正則・黒田長政ら『武断派武将』の確執が深まり、この対立感情が関ヶ原の役にまで尾を引く一因となるのである。 ----------------------------- (慶長二年八月)十六日ニ城の内の人数男女残りなくうちすて、いけ取物ハなし、され共少しとりかへして有る人も侍りき、むさん(無惨)やな、知らぬうき世のならひ(習)とて、男女老少死してうせ(失)けり、 同十七日ニきのふ(昨日)まてハし(死)すへき事もし(知)らす、けふ(今日)ハ有為転変のならひ(習)なれハ、無常の煙と成りし也、よそにや(ある。 たれも見よ、人のうへとハいひかたし、けふ(今日)をかき(限)りの命なりけり。 同十八日二奥へ陣かへ(替)也、夜明て城の外を見て侍れハ、道のばとりの死人さこ(砂)のこと(如)し、め(目)もあてられぬ気色也、 なんもん(南原)のしろ(城)をた(立)ち出見てあれハ、め(目)もあてられぬふせい(風情)成りけり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