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周易)으로 읽는 예레미야서 . 김종길 / 구약학(Ph. D.)
1. 주역의 기본 개념과 원리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어린 시절에 부르던 동요입니다. 태극기(太極旗)를 아십니까? 1876년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 당시 일본 측이 조선의 국기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이에 조선의 역관인 오경석은 유수영 정문에 있는 태극(太極) 문양이 국기라고 임기응변으로 대답했습니다. 그 뒤에 1882년 일본
수신사 박영효가 국기를 제작하였고, 1883년에 고종은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하고 공포하였습니다. 1949년 정부는 국기제작법을 고시하고, 현재의
국기를 제작하였습니다. 아름답게 펄럭이는 태극기의 형성 과정에는 슬프고 아픈 역사가 배어 있습니다. 인정하든 거부하든, 태극기에서 보듯이,
주역사상은 조선과 대한민국의 정신적 토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기에는 동양철학의 원천인 주역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역(易)은 고대 중국인의 우주론이자 세계관입니다. 역은 경험과 현상을 근거로 변화와 관계를 다룹니다. 여기서 주역의 기본 개념과 원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는 상태인 ‘태극’은 사물의 잠재태 내지 아르케(arche)입니다. 태극에서 대칭성의 파괴와 회복을
뜻하는 음과 양이 나옵니다. 음과 양이 조합하여 괘를 이룹니다. 소성괘인 8괘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사물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면, 건(乾,
☰)은 하늘, 태(兌, ☱)는 연못, 리(離, ☲)는 불, 진(震, ☳)은 우레, 손(巽, ☴)은 바람, 감(坎, ☵)은 물, 간(艮, ☶)은
산, 곤(坤, ☷)은 땅(○○ 같은 어떤 것)을 나타냅니다. 8괘가 중첩되어 64개의 대성괘를 만듭니다. 대성괘는 사물의 시공간 방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괘와 하괘가 만나서 시공 세계의 현상을 드러낸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64괘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사건들의 유형입니다.
상경 30개의 괘는 우주자연을 중심으로 배치되고, 하경 34개의 괘는 인간사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주역은 우리에게 자신과 세계를 보는
틀(frame)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64가지 기호를 해석함으로써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이란 우주의 질서와 함께 인간
삶의 갖가지 양태입니다. 각 괘를 구성하는 효의 모양이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갖가지 상황을 상징하고, 인간 사회와 사물의 모든 원리를 망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사를 괘상화하여 상황을 파악하면 보다 적절하게 변화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주역은 '변화'의 관점에서 우주만물을 이해합니다. 주역을 이해하려면 먼저 주역의 바탕을 이루는 음양론(陰陽論)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음양론의 기본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음양대대(陰陽對待): 음과 양이 서로 마주하며 서로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대대관계란 서로 대칭을
이루면서 서로 의존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② 상반상성(相反相成): 서로 반대가 되는 것들이 서로를 도와서 완성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서로
대립하면서도 어떤 조건에서는 통일을 이룹니다. ③ 물극필반(物極必反): 사물의 전개가 궁극에 도달하면 반드시 반전합니다. 음에서 양으로 변하고,
양에서 음으로 변하는 것이 모든 사물의 근본 법칙입니다(一陰一陽之謂道). 이러한 음양론은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dualism)과
실체론(substantialism)을 극복하는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역(易)에는 ‘변화,’ ‘불변,’ ‘쉬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易’이란 ①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변역(變易), ② 변하는 현상 속에는 변하지 않는 이치가 있다는 불역(不易), ③ 삼라만상의 현상을
64괘와 384효로 간단하게 나타낸 간이(簡易)를 말합니다. 앞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대로, 주역의 핵심 원리는 ‘대대(對待)’와
‘변역(變易)’입니다.
주역은 점을 치는 ‘역술’과 철학사상을 연구하는 ‘역학’으로 구분됩니다. 역학은 상수역학과 의리역학으로 분류됩니다. 점술과 관련된
상수역학은 우주 운행의 변화를 상징화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측하고, 의리역학은 인간과 역사의 변화를 통해 인간의 도와 덕을 추구합니다. 이
글은 주로 의리역학을 따릅니다. 하지만 점술을 이해해야 주역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점(占)은 고대인의 사고방식이며 생활양식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도 다양한 점술이 나타납니다. 민간에 통용된 제비뽑기는 점의 일종입니다. 대제사장의 흉패 안에 보관되어 있는 ‘우림’과 ‘둠밈’은
하느님의 뜻을 묻는 신탁도구입니다(레 8:8). 대제사장은 국가의 대사를 앞두고 우림과 둠밈으로 점을 쳐서 하느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을 통하여 미래를 점쳤습니다(삼상 23:1-6).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를
앞두고, 불안했던 사울은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점을 보았습니다(삼상 28:8-14). 점에 관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입니다.
융(C. G. Jung)은 심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 사이에 비인과적 관계가 있다는 공시성(Synchronicity)의 원리를 제시하여 점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였습니다.
점술서로 출발한 주역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심오한 사상서로 발전하여 갔습니다. 거기에는 당면한 난관을 헤쳐 나가는 고대인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인류의 정신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축의 시대(axial age)’에 형성된 주역과 구약성서는 인간 세계에 주어진 귀중한
유산입니다. 주역과 성경은 만날 수 있을까요? 양자는 대화를 통하여 서로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세계관은 주역의 내용을 보완하고,
주역의 실재관은 성서해석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드루 대학교의 고 이정용 박사님은 “역(易)의 신학”을 주장하셨던
것입니다(이정용, <역의 신학: 동양의 관점에서 본 하느님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 대한기독교서회, 1998). 이제 우리는 주역의
눈으로 예레미야서를 읽고자 합니다. 주역의 관점에서 예레미야서를 중심으로, ‘야웨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정체성’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주역의 빛에서 본 예레미야서
(1) 곤(困)의 선지자 예레미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박팔양이라는 시인이 봄의 선구자인 진달래를 노래했습니다. 시인은 아직도 찬바람이 부는 산비탈에 미리 피어 봄을 맞는
진달래를 예찬했습니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정말 꽃이라.”
시인은 봄소식을 전하고는 모진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진달래를 통하여 식민지 백성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선지자는 진달래처럼 하느님의
마음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남보다 먼저 시대의 징조를 느끼고 아파합니다. 예레미야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으로 시대를 앞서
내다보았습니다. 주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한 그는 쇠퇴하는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언자들이 보기에,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가 좋은 때는 광야 시절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광야 시절을 “청년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렘 2:2)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기름진 땅”에 들어와서는 도리어 그 땅을 더럽혔습니다(렘 2:7). 이스라엘의 악행은 “생수의 근원되는 야웨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렘 2:13)입니다. 신실하지 않은 유다 왕국은 재앙을 자초하였습니다. 요시야 제13년(626년)부터 시드기야 제11년(587년)까지
40여 년 동안 사역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백성이 행한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인하여 큰 재앙이 도래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레미야의 역할은 여러
왕국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는 것이었습니다(렘 1:10). 그는 파괴와 멸망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역설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생애를 주역에 나오는 64괘 가운데 택수곤(澤水困, ☱☵)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곤괘의 위는 연못을 상징하는
‘태괘’이고, 아래는 물을 상징하는 ‘감괘’입니다. 연못에 물이 빠져서 메마른 형상입니다. 예레미야의 처지도 택수곤처럼 아주 궁핍하고 곤란한
상황입니다. 첫째 효사는 “엉덩이가 나무 그루터기에 끼이고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는(臀困于朱木 入于幽谷)” 형국을 묘사합니다. 예레미야 32장
이하의 배경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10년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유다 왕국에 침공하여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습니다.
일 년 반 뒤에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다스린 10년 동안 대부분을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즈음에도 예레미야는 시위대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뚜껑 씌운 웅덩이”(렘 37:16)나 시위대 뜰에 있는
“말기야의 구덩이”(38:6)는 환경이 아주 열악합니다. 예레미야가 갇힌 구덩이는 예언자의 상징적 행동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치러야 할 포로생활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곤(困, ☱☵)의 괘사를 살펴봅시다. “곤경에 처했지만 형통할 수 있다. 올곧은 뜻을 굳게 지키고 큰 도량을 품으면 길하고 허물이
없을 것이다. 반면에 불평과 변명을 일삼는다면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다(困 亨 貞 大人 吉 無咎, 有言 不信).” 여기서 “貞”과 “大人”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고달픈 현실 속에서 균형 감각을 지니고, 지조와 절개와 아울러 도량과 융통성을 갖추어 처신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곤경에
처한 사람의 말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습니다(有言 不信).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을 감화시키는 방법은 정성과 공경과 믿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뿐입니다. 불우한 처지에서 예레미야는 불의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사람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꿋꿋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선지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전한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렘 23:33) 때문에 동족들은
그를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민족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비겁한 매국노였습니다.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갇힌 이유는 바로 항복과 포로에 관한
메시지 때문입니다(27:1-22). 반면에, 하나냐 같은 거짓 선지자는 희망과 평화를 선포했습니다(28:1-5, 11). 거짓 선지자들은 호국
신앙과 함께 적극적 사고와 긍정의 힘을 유통시켰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설교 유형입니다.
넷째 효사에서 “천천히 오면서 쇠수레 속에서 고생한다(來徐徐 困于金車)”고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생애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더디게 이루어져갔습니다. 그는 삶이 스스로의 뜻대로 되지 않음에 이렇게 탄식합니다.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10:23). 그래서 그의 고달픈 삶을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20:7). 예레미야는 ‘고난받는 종’의 전형이었습니다. 그의 말년도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효사는
이어서 “어려움을 겪지만 끝맺음이 있다(吝 有終)”고 말합니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예레미야는 훗날에야 유대 공동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학사상은 신명기역사서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易의 하느님 야웨
구약성서에 나타난 야웨 하느님은 어떤 분일까요?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을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היהא רשׁא
היה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야웨(הוהי)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대체로 예언자들의 하느님
인식은 이 구절로 요약됩니다. 성경마다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를 다양하게 읽습니다. 우리말 성경(개역)에서 이 구절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리스의 신개념인 ‘제일원인’ 또는 ‘부동의 동인’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역동적인
언어로 옮겨야 합니다.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느님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역 자체(易自體)’입니다. 역이란 양과 음의 조화를 뜻합니다. 음양이
조화하는 역 자체는 ‘움직이는 동인자(moving mover)’로서 창조와 생성의 근원입니다. 역으로서의 하느님은 양극성, 곧 양극과 음극을
포괄합니다. 하느님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입니다. 하느님은 부성과 아울러 모성을 지닙니다. 하느님은 정의로 심판하시면서, 자비로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 나타난 히브리 사람의 하느님 야웨는 역동적이고 포괄적인 하느님입니다.
독일의 자연철학자인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kolaus Cusanus)는 유한한 세계의 모순이 무한의 영역에서 해소된다는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를 제시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자인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차별과 대립과 갈등은
소멸하여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주역의 음양론에서 영감을 받은 보어(Niels Bohr)는 “반대되는 것은 서로 보완이 된다(Contraria
sunt complementa)”고 주장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전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맞느냐
틀리느냐, 있느냐 없느냐, 선이냐 악이냐 등과 같은 양자택일의 생각이다. 우리가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한에는 어떠한 새로운 것도 창조할 수
없다.” 양자택일은 서양적 도식입니다. 동양적 사고방식은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에서 ‘이것도 저것도’(both…
and)에로 나아갑니다. 양극성적인 하느님은 양자택일을 지양하고 ‘이것과 저것을 모두’ 변증법적으로 통일합니다.
(3) 이스라엘의 정체성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은 대대 관계에 있습니다. 선민과 이방민은 상대적입니다. 이스라엘은 실체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관계적이고 가변적입니다. 히브리는 혈연이나 민족 개념이 아니라 하층 계급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기준이 혈연이나 민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민과 이방인을 가르는 이분 구도는 위계적 질서로 전락합니다. 인간을 두 범주로 분류하는 것은 그 둘을 차별적이고 대립적인
실체로 고정합니다. 뫼비우스(Moebius)의 띠처럼, 선민과 이방인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음과 양은 서로 구분되지만 서로 연결됩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과 열방은 구분되지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결속하는 고리가 ‘언약(베리트, תירב)’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언약을 맺음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깨뜨리면 성민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한 번 선택되더라도 그 신분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왕조가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릇된 선민사상에 집착했습니다. 성전 설교(렘 7:1-15)에서 드러나듯이, 예레미야는 유대 신앙의 두
기둥인 ‘다윗 언약’과 ‘예루살렘 성전’을 가차없이 비판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7:4).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고 멸망당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7:15). 그와 반대로, 이방인이라도 율법에 순종하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역할은 야웨의 “증인”(사 43:10)과 “이방의 빛”(사 49:6)이 되는 것입니다.
(4) 변역(變易)의 역사
주역의 역사관은 순환적이고, 기독교의 역사관은 직선적입니다. 여기서 역사관의 시시비비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양자는 역사를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체계로 파악하고, 변화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습니다. 주역에 따르면,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고 했습니다.
궁(窮)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곧 양적 축적과 양적 변화가 극에 달한 상태입니다. 거기서는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하는 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통(通)의 뜻입니다. 개방하고 소통하는 개인이나 조직은 오래 지속됩니다(久). 주역의 가르침은 사물의 기미나 낌새를
알아차려서(知機), 시기와 상황에 알맞게(時中), 변화에 대처하라는 것입니다(變通). 그것은 카이로스(kairos)와 일맥상통합니다. 조짐을
알아채지 못하여 기회를 놓치고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멸망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변역(變易)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기본적인 역사관입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은 대대와 변역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통치하던 시대를 전성기로 평가합니다. 남북의 지파들이 하나로 통일되고, 국가의
제도가 정비되었습니다. 법궤가 시온에 안치되고, 예루살렘 성전도 완공되었습니다. 부국강병을 이룩한 통일 왕국은 안정 상태였습니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통치한 시대를 주역의 괘상에 비기면, 지천태(地天泰, ☷☰)로 보입니다. 그들은 태평성대를 이룬 듯했습니다. 그러나 왕국의 영적
상태는 화려한 겉보기와는 달리 문제가 많았습니다. 부족동맹체를 유지하던 사사시대에 비하여 왕정시대에 야웨 신앙은 왜곡되고 쇠퇴하여 갔습니다.
정복 전쟁을 통하여 확보한 영토를 다윗 왕이 공신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토지가 하느님의 기업이라는 고백을 약화시켰습니다. 야웨 하느님과 다윗
왕이 맺은 영원한 언약은 통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습니다. 솔로몬 왕의 통치에서 보듯이, 야웨 신앙은 이방 종교와 혼합되고, 백성의 삶은
고달팠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나라는 없습니다. 역사의 전성기에 이미 분열과 멸망의 조짐이 드러났습니다. 르호보암 왕은 앞뒤가 꽉 막힌
천지비(天地否, ☰☷)의 지도자였습니다. 주역의 통찰은 예리합니다. “태극비래(泰極否來),” 태괘(☷☰)에 이어서 비괘(☰☷)가 옵니다. 안락이
다하면 재난이 찾아온다는 것이지요.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권력을 남용한 북왕국의 아합 왕이나 남왕국의 므낫세 왕은 주역의 괘상으로 보면, 택천쾌(澤天夬, ☱☰)입니다. “연못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澤上於天)”는 <상전>의 표현처럼, 살짝 건드려도 곧 터져서 물이 쏟아질 것 같은 형국입니다. 권력을 장악한 양(陽)은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가 끝에 남은 음(陰)을 떨어치고자 합니다. 소인배가 지나치게 높은 곳에 있으며, 내려올 시기를 잃었습니다. 쾌(☱☰)에서
상육의 효사는 이렇습니다. “무호 종유흉(无號 終有凶),” 호소할 데가 없으니 마침내 흉할 것이다. 소통할 줄 모르고 아집과 독선을 내세우면,
지나친 권력은 결국 배척당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정국도 택천쾌(☱☰)에 가깝습니다. 하늘과 인민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권력자를 두고, 중천건(重天乾, ☰☰)의 상구는
“항룡 유회(亢龍 有悔),” 곧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고 충고합니다. ‘항룡 유회’는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는 권력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부정한 수단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세월호 희생자의 가족이 흘리는 눈물을 외면하며,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여 역사를 왜곡하고자 하는
박근혜씨는 주역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근래에 감리교단과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발생한 비상식적인 사태도 역사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들이
정도와 분수를 지키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 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 줄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고전
10:12).
성왕으로 평가받는 요시야 왕의 괘상은 수화기제(水火旣濟,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제(☲☵) 괘는 중(中)과 정(正)을 갖추고,
모든 효가 제자리에 있습니다. 요시야 왕은 하느님의 말씀을 붙잡고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괘사는 “기제 형(旣濟 亨),”
모든 일이 해결되고 형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초길 종란(初吉終亂)”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처음에는 좋지만, 나중에는 어지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국제정세를 오판하여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유다 왕국의 마지막 통치자인 시드기야 왕의 괘상은 화수미제(火水未濟,
☲☵)였습니다. 모든 것이 어그러졌습니다. 방향을 상실한 지도자가 이끄는 왕국은 결국 멸망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활동한 시대는 역사의 격변기였습니다. 기원전 609년에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야 왕이 죽고,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이 애굽을 이겼으며, 587년에 유다 왕국이 멸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레미야는 특히 갈그미스 전투의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국제 정세의 흐름을 보아서 유다 왕국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야김 제4년, 곧 갈그미스 전투를 기점으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회개’에서 ‘항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유다 왕국은 지기(知機), 시중(時中), 변통(變通)의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줄기차게 “돌아오라”(슈브, בושׁ)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가 한계를 넘어선 이후로, 예레미야는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신앙의 두 기둥인 ‘다윗 왕조’의 몰락과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를 예언했습니다. 그는 멸망 이후를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한편, 창조와 역사의 주님이신 야웨 하느님은 슬픔과 아픔을 겪는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는 말씀과 아울러, 만물이 다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물극즉반(物極則反)’이라는 주역의 원리를 되새기고 싶습니다. 포로기 중에도 새 언약의 역사는 진행되었습니다. 달이 차면 기울고,
해는 또 다시 떠오릅니다. 한겨울에 봄이 시작되고(☷☳), 한여름에 가을이 시작됩니다(☰☴). 흉함은 길함으로 바뀌고, 길함 속에 이미 흉함이
싹트고 있습니다. “비극반태(否極反泰),” 비괘(☰☷)가 다하면 태괘(☷☰)로 바뀐다. 불운이 극한에 이르면 행운이 돌아온다는 뜻이지요.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 않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하느님은 새로운 창조, 제2의 출애굽을 진행하셨던 것입니다.
(5) 바벨론 포로기
유대가 살 길은 하느님의 심판을 수용하고, 바벨론 제국에 항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예견했습니다.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 25:11). 역설적으로, 심판은 은혜의 다른
표현입니다. 파괴와 파멸은 은혜의 시작입니다. 예레미야 30-31장은 심판 이후에 임할 회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방법은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그다음에 건설하고 심는 것이었습니다(1:10).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도 하느님 나라는 건재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유다 왕국이 망해야 이스라엘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면, “교회가 죽어야 하느님 나라가 산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예레미야는 심판과 ‘새 언약’을 연결합니다. 절망적인 시기에 하느님은 새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1:31-33). 새 언약은 율법을 내면화하는 것이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를 기점으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
이스라엘 역사에서 바벨론 포로기는 감괘가 포개어져 있는 ‘습감(習坎, ☵☵)’과 들어맞습니다. ‘감(坎, ☵)’은 물 또는 구덩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습감’은 거듭 구덩이에 빠지는 설상가상의 형국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물’이나 ‘구덩이’는 고난과 시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69:1-2, 14-15). 습감의 괘사에,
“습감(習坎) 유부(有孚)”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여기서 부(孚)는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으로, 미쁜 마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어려울수록
성실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생에서 당면하는 거대한 구조적 모순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요? 부조리한 운명에 믿음/성실(에무나,
הנומא)로 맞서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유심 형(維心亨),” 오직 마음이 형통해야 합니다. 구덩이 속에서 수양하며 정신적 내공을
쌓으라는 것이지요. 마음이 죽지 않는다면 어떠한 구덩이에서도 마침내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셋째 효사에서 “물용(勿用)”이라고 충고합니다.
괘효사에 종종 등장하는 ‘물용(勿用)’은 사용금지 또는 비행동을 의미합니다. 물구덩이에 빠졌으면, 쓸데없이 힘쓰지 말고 물이 차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바벨론 포로기는 습감괘의 여섯째 효사대로, 바벨론의 생활은 “동아줄로 묶여서 가시나무 숲에 갇힌” 형국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음먹고 내면의 영성을 함양하는 기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바벨론 포로기는 신학적으로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구약성서가 포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 기사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체험한 고난의 역사를 반영합니다. 창조 기사는 우주의 생성에 관한 과학적 사실을 보도하지
않습니다. 상징과 은유로 표현된 성서구절은 궁극적인 신앙의 진리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본문의 본의를 찾으려면
‘비신화화(demythologizing)’와 ‘탈문자화(deliteralization)’ 작업이 요구됩니다. 히브리 성서는 다음의 구절로
시작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근래에 학계에서 창세기 1장 1절을 독립절로 볼 것인가, 종속절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권위 있는 영어번역성경인 신표준역(NRSV)은 1절을 종속절로 읽습니다. 1절을 종속절로 보면, 2절은 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이
구절은 바벨론 포로기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혼돈,” “공허,” “흑암” 등은 당시 유대인들이 겪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은 감(☵)에
해당됩니다. 삶이 혼란스럽고, 고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미래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경험한 고통과 혼돈과
좌절이 그들의 삶에 운행하시는 하느님의 손에서 새로운 창조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혼돈에서 질서가 나타나고, 공허에서 의미가 발견되며,
흑암 속에서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포로기는 비참한 체험이면서, 은총의 기간이었습니다. 바벨론에 끌려온 유대인들은 거대한 신전과
신상을 보고 압도당했습니다. 바벨론에는 오래 전부터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 같은 창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바벨론의 종교에 언감생심 대항하지 못했지만, 포로기를 거치면서 야웨가 유일한 참 하느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신화를 창조적으로
변용하여 야웨 하느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아나브(ונע)’와 ‘아니(ינע)’는 ‘가난한,’ ‘괴로운’이라는 뜻과 아울러
‘온유한,’ ‘겸손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수형 ‘아나빔’ 및 ‘아니임’은 가난한 사람들 또는 겸비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적당히 가난하고 어려울 때 겸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는 고난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듬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3. 맺는 말
주역과 성경이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양자는 서로 다르지만 조화한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구약성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필자는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주역을 읽게 되었고, 주역을 통하여 위로를 받았습니다. 앞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대로, 역(易)은 경험과 현상을
근거로 변화와 관계를 다룹니다. 역의 핵심 원리는 대대(對待)와 변역(變易)입니다. 동양의 음양론은 서구 사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신학은 고대 페르시아 종교 및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과 실체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릇된 전제로부터 많은 오류가 도출되었습니다.
주역의 도움을 받아서 기독교신학의 오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은 실험적으로 주역의 눈으로 예레미야서를 읽어본 것입니다.
주역의 비실체적 실재관은 올바른 신관을 제공합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제일원인’ 또는 ‘부동의 동인’이 아니라 ‘움직이는 동인자’로서
창조와 생성의 근원입니다. 하느님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양과 음의 조화를 뜻하는 ‘역 자체(易自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서의 하느님은
양극성, 곧 양극과 음극을 포괄합니다. 하느님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입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히브리 사람의 하느님 야웨는 역동적이고 포괄적인
하느님입니다. 주역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은 대대 관계에 있습니다. 선민과 이방민은 상대적입니다. 영원한 선민도 없으며 절대적
이방민도 없습니다. 선민과 이방인을 가르는 이분 구도는 위계적 질서로 전락합니다. 인간을 두 범주로 분류하는 것은 그 둘을 차별적이고 대립적인
실체로 고정합니다. 양자는 언제든지 변환이 가능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릇된 선민사상에 집착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폐쇄적 선민의식을 부수고자
했습니다. 역은 우리에게 자신과 세계를 보는 틀을 제공합니다. “궁즉변 변즉통(窮則變 變則通)”은 주역의 역사관입니다. 사물과 역사는 궁극에
도달하면 변합니다. 주역의 가르침은 사물의 기미나 낌새를 알아차려서(知機), 시기와 상황에 알맞게(時中), 변화에 대처하라는 것입니다(變通).
조짐을 알아채지 못하여 기회를 놓치고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멸망하게 됩니다. 옛 지혜는 형통할 때 조심하고 근신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왕정사에서 반면교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됩니다. 바벨론 포로기에서 배울 수 있듯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게
합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우리가 겪는 쓰라린 경험까지도 쓰임 받을 것입니다. ☯
(金宗吉 jpic1990@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