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흐르는 애니멀스(The Animals)의 이노래는 우리시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즐겨듣고
흥얼거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블루스풍의 키타연주는 수많은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어
후에 에릭크랩톤, 지미페이지,리치블랙모어등 세계적인 키타리스트들이 모두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로 명연주곡으로 남아 있다.
이노래가 탄생한건 60년대이지만 우리나라에서 한참 사랑을 받았던건 70년대 초중반이었는데
특히 나이트클럽등에서 춤곡으로 유행하여 한잔술에 취해 들어보는 이노래는 수많은 청춘들을
腦殺시키기에 충분 했다.
가사 자체에서 느끼는 소외된 삶의 반항적인 요소가 그 시절 젊은이들의 가슴에 와 닿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던 어둠속의 청춘들에겐 이노래를 들으며 젊은 날의 아픔과 고독을
달랠수 있었던 것이다.
중고등학교때 팝음악에 빠져있던 나에게도 이노래는 한 때 어두웠던 집안 사정과 더불어 가슴깊이
파고 들었는데 잘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붙잡고 이노래 연주에 밤을 새우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노래를 오래도록 기억케 해준 계기는 군대 생활을 함께 했던 원병장이란 동료 때문이었는데
나와 군번이 비슷했던 그는 부산출신으로 키가 크고 조금은 우락부락하지만 맘씨 고운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노지심과 비슷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졸병생활을 최전방 철책선(GOP)에서 하였는데 주로 야간경계 근무를 서고 대낮에 취침을 하는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을 하였다. 그곳은 개인별 소총과 실탄을 휴대하며 생활하는 터라 사고 방지를 위해
군기도 엄격하여 절대 금주지역으로 술을 입에 댈 수 가 없었다.
산간지대에 민통선 안이라 민간인 조차 볼 수 없었던 그때 매일 밤 머리맡에 수없이 쏟아지던 별빛을
맞으며 고향생각에 부모님 생각, 두고 온 애인생각에 군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곤 하였다.
그래도 힘든 작업 같은게 끝나면 가끔씩 회식 같을 것을 하였는데 그 때 마신 것이 소주대용의
칠성사이다와 해태 맛동산이었고 소대의 유일한 오락기구는 세고비아기타 한대 였었다.
그러나 피끓는 청춘들에겐 소주 대신 마셔댄 사이다에도 그 기분에 취해 내무반이 들썩일 정도로 춤을 추며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로 키타를 튕겼는데 그 회식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원병장의 스트립쇼였다.
쇼의 배경음악으로 언제나 이 노래를 키타로 연주케 하였는데 코메디언 이주일의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하나씩 벗어내는 군복에 우리는 함께 흐느적거리며 뜨거운 열정을 태우곤 했었다.
그 후로도 그 친구의 스트립쇼는 몇번이고 계속되었는데… 일년이 지나고 부대 위치가 바뀌며 훼바라고
하는 약간은 후방지역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거기는 주로 훈련을 받는 곳이라 부대에 PX도 있었고 막걸리도
마실수가 있었다. 진짜 알코올이 들어 가면서 원병장의 스트립쇼는 점점 노골적이 되어갔으며 급기야 쇼가
클라이막스에 달하면 심각한 얼굴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춤에 빠져 들어 가곤 했다.
우리는 평소 쾌할 했던 그 친구의 속마음을 알수 없었고 그는 늘 내무반의 스타로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 같은 친구로만 기억 할 뿐이었다. 그 친구와 지냈던 함께 할 수 있었기에 나의 군생활도 그리 심심치
않았나 싶다. 그러나 나보다 1개월정도 고참인 그에게 내무반에서 말 놓거나 하는건 내무반의 규율상 허락치
않았던 까닭에 서로가 마음을 터 놓고 얘기를 해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우리도 전역을 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전역을 앞두고 부대 PX에서 소주를 한잔 하고
못내 아쉬워 소주 한병을 주머니에 넣고 군 막사 뒤쪽의 언덕으로 올라 갔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은
두 사람의 마음을 열어 놓기 충분했고 우리는 입대전의 얘기며 제대후의 계획들을 얘기 했다.
그리고 우리를 즐겁게 즐겁게 해주었던 부대의 명물인 스트립쇼에 대한 얘기도 나눴는데 난 그때 그의 가
슴 아픈 사연을 듣게 되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때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집안이 어려워지자 학업을 포기한 후
부산 서면등의 유흥업소에서 웨이터 생활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모호텔의 나이트클럽에서 일 할 때 한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 여자가 바로 그 나이트클럽의 스트립댄서 였던 것이다.
나이트 클럽 밴드의 해뜨는집 반주에 맞추어 스테이지위에서 춤추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 그는 막무가내로
매달린 눈물겨운 사랑에 두살위의 그녀도 마음을 허락하여 둘은 서면의 어느 달동네에 방을 얻고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기를 가지게 되었고 그녀도 댄서직업을 접고 미용실에 취직하여 아기도 태어나고
어려웠지만 꿈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뿐 그녀의 옛 직업에 얽혔던 어떤 사연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전화 한통화후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돌이 지난 아이를 어머니께 맡기고 그는 서울로
왔다고 했다. 그녀를 찾기 위해 밤마다 나이트클럽을 돌며 발 품을 팔았지만 허사였고 결국 군입대 영장을
받고 입대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날밤 후 우리는 그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가 왜 해뜨는집 노래에 스트립쇼를 하며 눈물을 뿌렸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제대 직전에 어머니와 함께 면회를 왔던 그의 아들을 처음 보았다.
군에 있는 사이에 아이는 다섯살 되었고 아빠를 본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아빠품에 안겼다.
그 때 우린 마음속으로 그 어떤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에 삶의 아픔과 회한을 안고 있었던 그의 사연은
지금도 이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 찡하게 생각나곤 한다.
이제 그의 아들도 군대를 제대할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흐르는 세월이란게 참으로 무심하여 지금껏 이노래를
기억하며 추억을 회상할 뿐 그에 대한 소식은 알려고 하지 않고 살아 왔다. 그래도 추억은 늘 새롭고 존재의
의미를 주며 내일을 준비케 한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했던가? ^^*
남들이 싫어 한다는 군대 얘기를 꺼집어 내어 카페 가입 기념으로 옛추억에 얽힌 노래 한 곡 올려본다.
첫댓글 중학 1학년생이던 1972년 마포구 염리동에 살았던 저는 지금은 도심재개발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도 없는 달동네 도화동의 친구집에 자주 놀러 갔지요.그 당시 Pop Song이 뭔지도 모르던 내게 그 친구는 이 노래를 자주 들려주곤 했는데 아마도 그 친구에겐 그 당시 도화동 자신의 집이 현실에서 뛰쳐 나가고 싶은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는.도우님의 군 시절 얘기를 읽자니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그 시절로 되돌아 가는 느낌입니다.추억의 음악,추억의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전 그때 마포구 합정동 쪽에 살았지요. 도화동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판잣집들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
가사 뜻도 모르고 따라 불렀던 어린 시절의 노래가 이제는 그 가사의 깊은 뜻이 가슴 속으로 전해지면서 새로운 감정이 또 일어나기 대문에 옛날 노래가 좋은 가 봅니다.
아마도 인생이란게 노래가사처럼 늘 망설임의 연속이 아닐까 해요. 한발은 기차에 한발은 플랫폼에 있는 노래의 가사 처럼요.
이런 곡 들으면 60년대 판자집 하꼬방 한지붕 7가족 여러부류의 인생들 생각들이 납니다.노래따라 인생간다고...이런 노래는 듣지도 부르지도 말아야 하는데...지금도 부를곡 칠곡 없으면 만만한 게 이곡이네요.Am C D F Am E7 Am E7^^ 도우님 덕에 감상에 젖어봅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언젠가 같이 한번 불러 봐야 되겠군요 ^^;;
군대에서는 팔도에 사는 친구들이 다 모여서 그런지 각가지 사연들이 있는것같아요.....내용이 제대로의 스토리가 있어서 퍼 온줄 알았습니다......그 군인(?)도 잘 살고 있겠지요....언젠가 명동지기님하고 도우님의 "듀오"가 기대 됩니다~~
그러게요. 그 친구 아들 벌써 서른살은 되었을것 같네요. 진작 그 친구의 안부는 생각도 못하고 살아 왔습니다. 만나면 정말 반가울테죠.
본문의 사진을 바꾸었어요. 스트립쇼에는 잘 어울리지만 점잖은 카페에서는 좀...ㅎㅎㅎ 바뀐 사진은 그 때 실제 부대 생활을 했던 경기도 연천군 대광리 역부근의 몇해전 사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