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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묵상글 (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 순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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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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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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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9월 25일 연중 제25주 화요일 강론글입니다.
김레오나르도 2018.09.25 03:15
- 순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이제는 오늘 주님 말씀을 가지고 오해하거나 헛소리하는 사람 없을 겁니다.
이 말을 가지고 마리아를 당신을 낳아 준 분 이상으로 의미 부여하는 것을
주님께서 거부하신 표시라고 하거나 그래서 마리아를 너무 공경한다고
가톨릭을 비판하는데 깊은 의미를 안다면 오해이고 헛소리일 뿐입니다.
제 생각에 이 말씀을 더 완전하고 깊이 이해를 하면 이런 것이 될 겁니다.
곧,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는 뜻도 되지만
그보다는 ‘내 어머니 마리아처럼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면
여기 있는 이 모든 사람이 다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다.’는 뜻이 될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당신 어머니라고 하신 것은
좀체 들으려고도 하지 않던 우리가 듣게 되거나
듣고도 실천치 않던 우리가 이제 좀 실천을 하게 되면
이제 당신의 어머니라는 말씀 정도가 아닙니다.
그저 주인의 말씀을 듣는 것은 종도 듣고
주인 말대로 실천하는 것도 종은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종처럼 순종을 잘하라는 말씀 이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종처럼 두려워하며 듣고 실천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연인이나 어머니처럼 사랑으로 듣고 실천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어머니처럼 그러니까 마리아처럼 듣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근자에 젊은 부부들을 만났습니다.
애 키우는 어려움이 얼마나 큰 지 애 엄마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애 아버지까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애를 또 낳으라고 하면 못 낳을 것 같다고 얘기하는 거였습니다.
하나 더 낳으라는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 입막음을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말도 못 꺼냈는데 아무튼 이 경우 애를 낳으라고 제가 말하면
이 때 말을 듣는 것은 곧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리고 이 때 아이를 낳기로 할 경우
제 말에 순종해서 낳을 젊은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서로 사랑하기에 아이를 낳거나 아이를 사랑해서 아이를 낳거나 하겠지요?
한 인간 아이를 낳는 것도 이러한데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를 낳는 것은
더더욱 사랑이 아니고 순종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보겠는데
이 역시 순종으로 실천하는 것 이상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순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실천한다는 것이 도대체 뭘까요?
그래서 제가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봤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지금 내 옆에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며
성부의 뜻에 순종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싫어하는 일을 순종 때문에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싫어하는 일이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싫어하는 사람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이요,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아주 구체적인 말씀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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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연중 25주 화요일 강론입니다.
김레오나르도 2023.09.26 03:03
- 마리아처럼 하면 어머니가 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주님의 모습과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도 주고 도전도 줍니다.
우리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고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의 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종이 아니라
어머니와 형제가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런데 어머니와 형제가 되는 데 공짜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뜯어보면 당신 어머니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야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고 하시니 공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영광이자 도전입니다.
이것은 마치 챔피언에게 도전할 기회가 영광스럽게 주어진 것과 같이
대단한 영광이요 행운이요 기쁜 일이지만 도전의 어려움이 앞에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
그것은 어떤 도전이고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것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주님의 종이라고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해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되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실천하면 어머니가 된다는 말씀은
실천하기 어렵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어머니가 되라는 초대를 마리아처럼 받았으니
마리아처럼 응답하여 주님의 어머니가 될 것인지,
마리아처럼 하면 어머니가 된다는 도전을 받아들일 것인지,
결단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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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연중 25주 화요일 강론입니다.
김레오나르도 2020.09.22. 03:09
-어떤 명사보다 명사이신 주님, 어떤 명언보다 명언이신 주님 말씀
어디를 가다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을 들르면 거기에
명사들의 명언이라는 것이 걸려 있는데 그 명언이라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참 보잘것없는 것이어서 '뭐 저런 것을 명언이라고 걸어놨나?'
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판적 시각으로 보다가 비판의 화살을 저 자신에게 돌리면,
명사들은 비록 하잖은 말일지라도 그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실천하여
명사가 된 데 비해 저는 그것들보다 훌륭한 말씀들을 많이 알고 있어도
그걸 실천치 않아 이모양 이꼴이라는 자조적인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명사들의 명언이라는 것들보다 더 금과옥조로 여길 주님의 말씀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오늘 잠언의 가르침들도 실로 금과옥조들인데도
명사들이 주님보다 더 명사들이라고 여기기에 주님의 말씀을 명언 삼지 않고
명사들의 말을 길잡이 삼아 살아가고 좌우명으로 게시하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 잠언 중의 한 구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여기서 사람의 길이란 주님의 길이 아니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이시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발을 비추는 등불인데 그 길이 아니라
자기가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가거나
다른 사람이 제시하는 길을 다른 사람의 말을 등불 삼아 가지요.
여러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만나기 전에
저는 편력을 많이 했고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제일 처음 불교에 심취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음으로 인도 철학과 명상법에서 평안을 얻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음으로 노장 사상을 통해 무위자연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한마디로 이것들을 통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얻는 법,
곧 도를 닦으려 했지 하느님께로 가는 구원의 길을
그리스도교 신자임에도 그리스도에게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십년을 편력을 하고 방황을 하다가 비로소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가기로 제 인생의 행로를 정하였으며,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씀은 이제 저에게 큰 의미가 없고,
그래서 다른 책이나 글은 거의 읽지 않지만 문제는 그 실천인데
앞서 봤듯이 명사와 저의 차이가 바로 이 실천입니다.
명사가 붙잡고 놓지 않았고 또 초지일관 실천하였던 말보다
더 훌륭한 주님 말씀을 붙잡고 있지만 실천에 불성실했으며
그래서 주님 말씀이 제 안에서 자라지 않고 체화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제 안에서 체화되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저도 하느님 말씀의 실천으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겠습니다.
내게 주님은 뭇 명사들보다 명사이시고,
주님 말씀은 어떤 명언보다 명언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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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16년,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즉,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를 금지하는 법입니다. 이 법은 사회를 더욱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제정된 것임을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후, ‘어떻게 하면 법에 걸리지 않는지, 법망을 피할 수 있는지’ 등의 문의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또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이루어지고 피할 수 있도록 하는 책도 출판되었습니다.
법의 기본 정신과 취지는 보려고 하지 않고, 걸리냐 걸리지 않느냐를 따지는 상황이 너무 우스워 보입니다. 그리고 작년(2023.2)에 물가 상승률 감안 및 내수 진작 차원에서, 이 법을 손질하는 방안(음식값 3만 원을 5만 원으로 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습니다. 청탁 금지를 위한 것인데, ‘5만 원 정도는 괜찮다’라는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라며 죄짓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힘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타협해서는 주님께 절대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에 가까워질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알려줍니다. 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당연히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얼른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혈연, 민족, 인종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 관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고 타협한다면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새로운 가족 관계가 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과 타협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우리가 되어, 하느님과의 참 가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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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신의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에게는 인생의 목표가 있지요(토마스 칼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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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여전히 어제 복음의 맥락에 이어,(렉시오 디비나의 맥락에서 보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선포와 경청, 등불의 비유-묵상과 기도, 영적 가족-관상)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다는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루카 9,48;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해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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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새로운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가끔 신자 분들께서 신부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 딸, 아들 딸, 아들’입니다. 남녀의 밸런스도 좋고 3년 터울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자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 이라고 하면서 진정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진정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영적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가 육적으로 맺은 관계보다 결코 더 낫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셨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따라서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영적인 결합과 통교가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이웃과의 관계도 새롭게 형성됩니다.
예수님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인사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또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브2,12-13).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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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서는 1권의 책이지만, 73권의 책이기도 합니다. 구약이 46권 신약이 27권입니다. 이 성서의 제목 중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사무엘, 다니엘, 이사야와 같이 구원의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전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대부분이 남자의 이름이지만 여자의 이름으로 된 책도 2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스테르와 룻입니다. 에스테르는 페르시아 왕국의 왕비였습니다. 에스테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는 하만의 음모를 알았고, 하느님께 의탁한 에스테르는 용감하게 왕 앞으로 나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였습니다. 룻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룻은 남편이 죽어서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겼습니다. 룻은 보아즈를 만나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이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나라의 왕비였던 에스테르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이방인 여인이었던 룻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느님 앞에 지위의 높고 낮음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업적의 크고 작음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혈연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저의 사제 생활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갔던 곳은 경기도 적성 성당입니다. 그곳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미사 예물과 사무장 급여를 교구에서 지원받았습니다. 주방을 도와줄 식복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3년간 저와 함께 지내면서 청소, 세탁, 식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5명 정도 나왔고, 주일미사에도 50명 정도 나왔습니다. 군인이 오거나,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태권도를 시작했고, 농산물 직거래도 했고, 비디오 대여도 했고, 차량 봉사 팀도 만들었습니다. 3년이 제게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부족한 능력이지만 교우들과 알콩달콩 사목의 기쁨을 알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사목 체험을 발표했고, 그 소식이 교구에 전해져서 다음 임지는 교구청이 있는 명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구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사목국에서의 업무는 적성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구역장 교육에 지구마다 700명이 넘게 왔습니다. 남성 구역 봉사자 교육에는 2,000명이 넘었습니다. 예산 규모도 달랐고, 만나는 사람도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적성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명동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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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머니와 형제들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구절 때문에 많은 성모님에 대한 오해가 생겨났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 때문에 성모님이 동정녀가 아니라는 주장이 생겼습니다.
또 다른 오해는 예수님도 성모님을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모님은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위해 배를 빌려준 여자일 뿐이지 그 여자를 성모님으로,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모실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이 왔다고 사람들이 전하니까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만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도 성모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은 성모님을 더 확실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을 듣고 실행한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사람, 믿음이 강했던 사람,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의 뜻에 내던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모님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천사들과 엘리사벳은 ‘은총이 가득한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의 말씀 주제는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다.’
듣기는 듣습니다. 그런데 실천하지 않습니다. 듣기는 듣는데 믿지 못합니다. 듣기는 듣는데 그것이 다른 쪽으로 다 빠져나갑니다. 들을 때만 좋습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전과 똑같아집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주님의 형제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모님을 가슴에 담아봅시다. 언제나 믿음을 실천하셨던 그 모습을, 그리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길,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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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차이
샹차이는 중국말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고수’입니다.
처음 중국에 들어갔을 때 고수를 먹을 줄 몰랐습니다.
한국 사람의 일반 가정에는 쉽게 볼 수 없는 채소가 ‘고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살며 그 나라의 음식 문화를 접하다 보니 거의 모든 곳에 ‘고수’가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며칠 여행하고 돌아갈 사람이라면 들어가 있는 고수를 빼고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타향살이에 마냥 그럴 수만은 없었습니다.
어느날 마트에 갔습니다. 그리고 고수를 한 봉지 푸짐하게 샀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고수와 고추장을 반찬으로 밥을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먹다 보니 또 먹을만했습니다.
지금은? 잘 먹습니다.
어려움은 가끔 극복해야 합니다. 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계속 만나야 하는 어려움이라면 극복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 앞에 어려움을 그대는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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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예수님의 참가족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새롭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걸었던 길을 아까워하지 말고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다산>
회개에 신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므로 뉘우침에 이르지 않으니 길하다.”<주역>
늘 깨어 살 때 큰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제목 “예수님의 참가족”이 맘에 들어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혈연 가족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참가족의 이상이 참 원대합니다. 예수님의 품은 그대로 온 인류를 품에 안는 하느님의 품임을 봅니다. 인류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마음을 넓고 깊게 멀리 개방해야 함을 봅니다. 교회가 날로 예수님의 큰 품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자 누군가 예수님께 전달합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즉각적인 답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화두입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말씀인지요!
그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시공간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파를 초월하여 진리를 실천하며 참으로 반듯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도 넓은 의미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혈연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품, 하느님의 품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교회요 우리 마음이면 참 좋겠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참가족의 생생한 증거가 교회공동체요 이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감하는 사실입니다. 미사한번만 함께 하면 국적, 인종과 상관없이 한가족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디에서나 미사에 참여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 한가족임을 체험하지 않는지요! 도대체 미사전례가 아닌 그 무엇이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을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을런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사가 아니더라도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를 듣고 실행하여 사는 이들은 그가 어디에 있던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를 사랑하여 듣고 공부하며 실행에 옮기는 삶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참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은 단 하나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에 속하는 것뿐이요, 부단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평생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전 삶을 요약하는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시종여일(始終如一), 한결같이 평생 하느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실행한 “예스맨(yes-man)”이 바로 마리아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 잠언의 현자가 말하는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손(in God’s hands)’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의 지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려는 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임금의 마음은 주님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이끄신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계획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그러니 말씀에 맛들여 잘 듣고 실행하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세상맛이 돈맛이 아닌 하느님맛에 살게 하는 말씀맛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으란,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라는 시편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제가 피정지도시 자주 드는 예에 웃습니다만 대부분 공감합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하느님 믿음을 북돋우는 ‘말씀맛’만이 ‘돈맛’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119장은 “주님의 법”이라는 제하에 무려 176절에 이르는 제일 방대한 시편입니다. 흡사 ‘말씀 찬가’같은 시편입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이 더욱 말씀 사랑과 실행을 고무합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가르침을, 길이길이 지키오리다.”
말씀이 사람이 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고 온전하고 충만한 참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자 영이요 주님의 현존입니다. 히브리서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우리의 갈망은 시종일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고 주님을 닮아 참내가 될 때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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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가족>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믿음의 참가족은 믿음입니다
희망의 참가족은 희망입니다
사랑의 참가족은 사랑입니다
진리의 참가족은 진리입니다
정의의 참가족은 정의입니다
자유의 참가족은 자유입니다
기쁨의 참가족은 기쁨입니다
온유의 참가족은 온유입니다
자비의 참가족은 자비입니다
함께의 참가족은 함께입니다
품음의 참가족은 품음입니다
돌봄의 참가족은 돌봄입니다
섬김의 참가족은 섬김입니다
베풂의 참가족은 베풂입니다
살림의 참가족은 살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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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18,19-21)
예수님의 새 가족은 말씀을 듣고 행한다
이 교훈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만복의 근원임을 가르칩니다...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당신 말씀에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하신 방법을 설명해 드리지요. 우리 모두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최고로 공경하고 완전하게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받아들이는 자세만큼 더 온전한 사랑을 내리시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 아닙니까? 그분은 그들에게, 온전한 복종으로 당신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기꺼이 당신의 멍에를 질 열망을 품도록 하실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복이야말로 삶의 알맹이다. 삶 자체가 복이다. 복은 삶의 모든 측면을 포함한다. 복은 긍정적인 생명력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은 무엇보다도 다산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엑카르트가 이러한 다산의 복을 본서의 셋째 오솔길에서 대단히 길게 전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우리의 출산 소명을 상세히 설명한다. 베스터만은 액카르트가 설교 7에서 말한 것을 메아리처럼 되풀이하면서 영혼의 능력이 본질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한다.
한 인간의 “영혼” 전체는 그 사람의 삶의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 곧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만일 그의 영혼이 강건하다면, 그 영혼은 그가 떠맡는 모든 일에 흔적을 남길 것임에 틀림없다. … 축복은 모든 향상을 몰고 오는 영혼의 능력이다. 이 말은 축복이 지혜와 관계가 있음을 의마한다. … 축복의 행위인 베레크(berekh)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력을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축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영혼을 어느 정도 주는 것이다.(244)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모든 형제들아, 즐겨 노래하며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세
어서 와 천사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그분께 경배하세
어서 가 경배하세 어서 가 경배하세
어서 가 주 그리스도 경배하세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는 빛
보라, 동정녀의 태중을 택하시어
창조되지 않고 태어나신 참 하느님
천사들의 무리들아, 노래불러라
기뻐하며 노래불러라
하늘 위의 모든 사람아 노래불러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주님! 이 행복한 아침에 태어나신
당신께 문안드리나이다.
예수님, 아버지의 말씀이 이제 사람이 되어 나타났으니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
(믿기를 거부하고 자기 안전을 위해 마음을 닫아걸으며, 심지어 성탄절에 예수님을 찾지 않는 이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271)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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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43년 전 일본 나가사키 우라카미 주교좌 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이내 저는 광주 화정동 피정센타의 피정 지도자의 소임을 받고 활동하면서 ‘성직자, 수도자 부모님 피정’을 지도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성직자·수도자 어머님들의 모임(=현 광주대교구 농심회)이 결성되었는데, 제 어머니도 다른 교구 사제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모임에 참여하셨죠. 그런 계기로 다른 신부님들의 어머님들로부터 아들 신부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때론 함께 만나시던 사제의 어머니께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아들 신부의 환속 때문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제 어머니에겐 걱정 아닌 걱정이 생기셨고 그래서 늘 저를 위해서 사제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셨습니다. 저로 인해 부모님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시고 세례를 받으셨지만, 참으로 열심한 신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사시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는 바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더 심화시키면 성직자·수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분은 하느님이시겠지요. 수도자이며 사제인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수도자·성직자들은 부모와 가족들을 떠났다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부모와 가족을 되찾은 것이라 봅니다. 흔한 표현으로 신부나 수도자보다 더 효자가 없다, 하는 표현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수도자나 사제에게는 영원히 부모와의 관계 이외의 어떤 가족이 없습니다. 형제도 자매도 결혼하면 다 자기 가족이 생기지만, 수도자에게는 참으로 남는 것은 부모님뿐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부모님에게서 멀어졌지만, 하느님 때문에 부모님께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었으며, 혈연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새롭게 부모님과의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젊은 날의 저에게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복음의 내면을 깊이 숙고하지 않은 저의 체험 부족과 연륜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첫 장면, 곧 어머니와 형제들이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고”(8.19), 또 “밖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이 제겐 너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구도로 보자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어머니와 형제들은 가장 먼 밖에, 멀리 서 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이전의 내용들 곧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를 통해서 볼 때,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과 주님의 말씀을 등불처럼 실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될 것입니다.”(8,15.18)라는 말씀을 전제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비추어 볼 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참된 가족 관계는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루카 사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 범주에 포함하려고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혈연적 관계이면서도 예수님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위치해 놓고 상대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의 중요함과 그 실행 여부가 바로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조건임을 이런 영적 원근법을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다시 오늘 복음을 유심히 살펴보면, 예수님과 형제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고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아들인 예수님께 다가설 수 없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런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린 한 사람, ‘그 어떤 이’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8,20)하고 환기喚起시켜 드립니다. 어쩌면 그 ‘어떤 이’의 의도는 만나야 하는 가족을 만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예수님께 귀띔해 주었으리라 봅니다. 아마 우리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그 사람’처럼 했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런 생각 자체가 지나치게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인간적인 관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영적 관계를 여는 새로운 지평이며 이를 위한 포석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답변은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오겠지만, 신앙적이고 영적인 면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사실 성서학의 발전으로 성서의 중요한 영성의 본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이 따름의 요소는 떠남과 버림인데 이러한 추종 영성의 모범인 분은 다름 아닌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이미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선택과 주님을 잉태한 순간부터 ‘주님의 여종’으로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듣고 실천해 오신 분이셨으며, 그 순간뿐만 아니라 아드님 예수의 마지막 삶의 순간, 십자가 밑까지 동행하시면서 인간적이며 모성적인 측면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모질고 힘든 순간도 신앙으로 이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수용하고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표현은 역설적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비하하는 말씀이 아니라 칭송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이후에 이 말씀을 전해 듣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 어머니와 같이 인간적인 관계와 인습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강한 의향을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단지 말씀을 들음으로만 듣지 않고 들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실천할 수 있는 신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신자信者란, 곧 말씀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고, 말씀이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주님, 저에게도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계셨고, 그분들과 저는 혈연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였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하느님의 백성이며 가족이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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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혈육보다 신앙의 어머님이신 마리아 /
박윤식 [big-llight] 2024-09-23 ㅣNo.176201
왜 살며 지금의 삶은 어떤가? 가끔은 이런 질문을 떫게 여기면서 그 답변을 피하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그 답은 있어야만 삶이 분명해질 게다. 그 답변 가운데 하나는 분명 가족이 걸린단다. 배우자와 자녀, 부모 형제 때문에 산다나. 그렇다. 가족이라는 인연만큼 소중한 건 이 공동체란 세상에는 없다. 그들과 기쁨으로 사는 게 삶의 어느 면에서는 정말 중요할 게다. 그렇지 못하면 주님 개입을 청해야만 하리라. 그 기쁨은 주님 은총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기에.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 많은 군중 때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아예 없었다. 그래서 그 중 누가 예수님께 나아가,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하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런 사람들이다.”’
얼핏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 가족들을 멀리하시는 것처럼 보이기에 많은 이가 두고두고 의아하게 생각할 게다. 그러나 이의 초점은 그분께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멀리하셨다는 것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을, 새로운 가족과 형제로 삼으셨다는 데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가족 공동체를 만드시려고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 사랑의 법칙을 따르는 이들만이 당신 가족이 된다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를 의미할 게다.
사실 예수님은 어린 열두 살 되던 해에 부모님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 축제가 끝나고 나자렛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사흘이 되어서야 당신을 찾으신 부모님께 ‘저를 왜 찾으셨습니까?’라며 부모님께 쾌나 섭섭하게 해 드린 적이 있었다. 이처럼 하느님 뜻에 따르려면 혈육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소시 적부터 의당 예고하신 거다.
지금 예수님은 그때 그 모습이나 별반 다름 아니시다. 아들이 보고 싶어 왔으나 그분께서는 만나려 하지 않고,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다.’라고 냉정히 말씀하신다. 이런 예수님께 성모님은 그 옛날 섭섭했던 그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셨는지도 모를게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작은 가족 대신 한없이 큰 가족을 품으셨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가족을 떠나는 게 크고 보편적 사랑, 더 많은 이를 형제자매로 맞아들이기 위해서일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하나가 될 수가 있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외아들을 잃는 그 자리에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도 성모님을 제자에게 맡겨 드리면서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라 단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 관계를 바라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먼저 떠나는 불효자가 아닌, 성모님을 혈육을 넘는 진정한 신앙의 어머니로 만드셨다. 혈육에만 매달려서 그 큰 하느님 뜻을 모르시면,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매인 게 아닌 하느님과의 뜻을 이루려는 관계임을 분명히 보이셨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이해타산에만 젖는 안타까운 가족 관계를, 주님 말씀으로 다져진 찐한 혈육의 참된 가족으로 거듭 나야만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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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서 8장 19-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군중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밖에 서 계실 때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고, 11장 27-28절에서는 군중 가운데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말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오늘의 화답송인 시편 119(118)편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176절에 걸쳐 율법에 대하여 말하는 이 시편은 “행복하여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복음의 여러 곳에서 말하듯이 자신을 버려야 하는 길이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이지만, 그것은 또한 행복의 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어리석어 보이는 길인데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 외에는 다른 무엇도 나를 지배하지 못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처럼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같은 표현들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주님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삶의 방식으로 이해될 때, 그 길은 기꺼이 달려갈 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일컬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이 예수님의 식구들보다 더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을 내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결합되어 새로운 가족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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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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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형제들이라는 표현에 집중하자면
예수님과 형제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아버지를 모신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과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말씀은
종에게 하시는 명령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키기 힘든,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명령이 아니라
사랑 가득한 조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배려하시는 마음이 그 안에 있기에
우리가 그것을 버겁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맞춰서 바꿔주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복음 환호송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행복을 가지고 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이 세상에서 이미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키지 않아서
벌을 받을까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말씀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말씀이며
그것으로 우리가 행복을 살아갈 수 있도록
초대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그 말씀이
쉽지 않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때에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심을 갖고
그 사랑 관계에 머무르려는 노력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우리도 기꺼이 그 말씀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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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나 깊이 새기고 곱씹고 묵상해야 할 예수님 말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때로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정확한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랜 시대적 간극, 문화나 언어 습관의 차이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의 시선이 지극히 인간적이거나 편협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자렛 출신으로 마리아에 의해 잉태되시고 출산되신 한 인간 존재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신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지극히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존재이십니다.
작은 고을 나자렛에 머물러, 혈육이나 지연에 묶여 평생을 지내셔야 할 분 절대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혈육이나 인연, 지연이나 학연을 초월하는 크신 분, 세상 만물, 인류 전체를 주관하고 구원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서 다음의 예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위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사촌들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아직 예수님의 애매모호한 말씀의 진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서 들으면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향한 극찬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 무수한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주님 말씀을 충실히 듣고 묵상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실행한 사람은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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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그분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강생하시는, 그래서 나에게 있어 그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을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만든다.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21절) 하신다. 예수께서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으셨다거나, 당신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과 형제들을 최우선으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더욱 들어 높이셨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신앙이 구세주를 낳아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믿음을 갖고 산다면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해주는 마리아와 같이 된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의 형제도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성모님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신앙인들이 마리아를 공경하는지, 또 마리아를 닮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살 때 우리는 올바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닮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당신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알았다. 오늘과 같이 각박하고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을 다시 한번 반성하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신앙을 점검하도록 하자. 즉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면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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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결국 가족의 결속력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핏줄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칫 핏줄이나 지연, 학연 등이 우리 공동체의 결속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사상과 체제 속에서 산다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결속력이 있는 공동체에 머무느냐에 따라 우리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사랑의 말씀이 결속력의 근원이 되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 (이전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루크는 평화 수호자들 편에서 일하고 다스 베이더는 악의 원흉인 다스 시디어스의 부하입니다.
결국 루크와 다스 베이더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스 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라는 설정입니다.
다스 베이더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제다이 기사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쌍둥이를 임신한 아미달라까지 잃게 될까 봐 평화만 유지하는 일에 점점 신물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을 점점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아는 시스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데, 그 힘을 이용하려면 더 분노하고 더 악해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점점 변하게 되는 아나킨을 떠난 아미달라는 혼자 남녀 쌍둥이를 낳고 죽습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다스 베이더는 더 극악무도해집니다.
다스 베이더의 두 자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몰래 키워집니다.
둘 안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포스가 작용하고 있었고 결국 루크도 제다이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손목이 잘리고 자신이 다스 베어더의 아들임을 알게 된 루크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레아 공주도 자기 동생임을 알고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다시 나섭니다.
시스는 스스로 찾아온 루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스 베이더와 대결을 시킵니다.
다스 베이더가 이번에는 루크에게 쓰러집니다. 그러나 루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라는 시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스가 루크를 죽이려 합니다.
이때 부상을 당한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의 중심인 시스를 죽입니다.
이렇게 예언대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악과 선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인물이 되어 죽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할까요? 이 이야기 안에는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는 하늘에서
오는 ‘말씀’과 ‘혈육의 관계’가 대결합니다.
결국 혈육이 하나로 뭉치려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악인이 되던가 둘 다 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녀가 눈이 빠지면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만약 자동차가 자신을 만들지도, 고치지도 못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고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운명은 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핏줄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가족은 핏줄이 같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줄어듭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핏줄이라도 선을 따르는 사람과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합니다.
아들은 가진 옷을 다 아버지에게 주고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며 수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허락하시고 충실한 신앙인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안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핏줄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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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예언적 가르침과 치유 기적의 능력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염려와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 23)라는 말씀대로 먹을 것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돈도, 금이나 은도, 신발도 없이 보내신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다니며 가져다주는 은총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우리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서 나그네를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알았고 또한, 이를 통해 축복을 받았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음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5절)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묻은 먼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더럽히지 않고 하느님의 집에 더러운 것이 묻어 들어가지 않도록, 새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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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8,19-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성당에서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호칭을 참 자주 사용합니다. 그와 내가 피가 섞인 가족은 아니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영적인 가족이 되었음을, 주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로 묶여 영적인 친교를 이루고 있음을 그런 호칭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그 사람들과 정말 영적인 형제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기가 조심스러워집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용서와 사랑에 힘 입어, 세례성사의 은총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내가 나와 같은 교회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정말 ‘가족’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러지 못할 때가 너무 많아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오늘 복음 말씀이 참으로 아프게 다가오지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21)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자주 오해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가족들과 거리를 두시며 차갑게 외면하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과 거리를 두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혈연 관계 바깥에 있는 우리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을 계기를 만드시려고 하신 말씀인 겁니다. 사실 우리는 출생 신분으로 따지면 주님의 가족이 되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이들입니다. 가족이란 같은 본성을 지니고 서로 닮은 이들인데, 부족하고 약한 인간인 우리를 전능하신 하느님과 한 가족으로 묶는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게다가 예수님과 우리는 시대와 민족, 출신이나 환경 등 물리적인 부분에서 서로 통하는 ‘공통분모’라는걸 찾아볼 수가 없으니,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참으로 멀어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우리에게는 한 가지 크고 중요한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가족이라고 말이지요. 이 말씀을 통해 ‘가족’이라는 말이 지닌 의미가 새롭게 정립됩니다. 예수님은 ‘핏줄’이라는, 본인의 의지와 선택으로 정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조건을 기준으로 당신 가족과 타인을 구분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참으로 믿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믿음을 실행에 옮기는 삶을 통해 ‘하느님의 가족’이 되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요. 누군가와 가족이 된다는 건 그와 내가 특별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인데, 그런 관계를 하느님과 맺으면 그분께서 누리시는 생명과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되니 그 자체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저 하느님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하면서, 스스로가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있다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야고 1,22 참고)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마음에 간직해야 하고 마음에 간직한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단순히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순명과 실천 덕분이었음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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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 ”
탈무드에서 세 친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임금이 使者를 보내어 어떤 사나이에게 곧 출두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세 사람의 친구가 있었다.
그 사람은 첫째 친구가 가장 친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자기와
동행하자고 하니까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친구는 첫째에 비해서 덜 친했지만 그래도 이따금 왕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둘째 친구에게 자기와 동행해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성 앞까지만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평소에
별로 친하지 않은 세 번째 친구에게 동행할 수 있느냐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셋째 친구는 쾌히 동행에 승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친구는 돈이고 둘째 친구는 친척인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선행이었습니다.
돈은 죽기까지 친구이고 친척은 죽기까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행은 죽은 후에도 그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 사람이 평소에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처럼 당신을 만나러 왔던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에서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열처녀의 비유’ (25,1-13),
‘탈렌트의 비유’ (25,14-30)에 이어 ‘최후의 심판’ (25,31-46)을 들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 앞에서 일어나는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임금은 양들과 염소를 갈라놓고 심판을 하시는 것이지요. 주님께서하시는 심판의 조건은
역시 선행, 말씀 실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평소에 불쌍한 이웃을 위해 얼마나 베풀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웃이 배고 팠을 때
먹을 주는 것, 목 말랐을 때, 마실 물을 주는 것을 주는 것, 헐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는 것,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는 것,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 해 드리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일상생활에서 선행하는 것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닌데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선행도 주님께서는 기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잠언의 여러 말씀 중에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13)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입과 머리로는 복음 정신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실천해야 하는 순간에는 여러 가지로 가려 미루거나 넘겨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 안에는 나의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속셈이 들어 있기 때문이진요. 선행을 미룬다는 것은
결국 실행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내가 베풀고 나누어야 할 이웃을 바라보며 따뜻한 마음을 가집시다.
마음을 다한 친철한 마음도 또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마음도 큰 선행 중에 하나이지요.
오늘 하루 주님의 복음을 나누며 베푸는 내 자신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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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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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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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명에 충성하는 삶
<2024.9.24>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2:1~21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명에 충성하는 삶❞
❚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열을 감당해 나아가기 위해 보이지 않는 우상을 제거하고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 말씀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사역을 감당하여야 합니다(1~8절).
북이스라엘 왕 예후 제 7년에 유다의 요아스가 7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40년간 통치하였습니다. 요아스는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당연히 수렴청정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왕좌에 앉힌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히 여호야다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신실한 제사장의 지도를 받고 있었기에 요아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1~2절). 그러나 솔로몬 때부터 이어진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고, 이 일로 부정적인 평가 또한 받게 되었습니다(3절). 요아스는 아달랴가 바알을 섬기며 방치했던 성전을 수리하며 개혁을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사용하여 성전을 수리하라고 명령합니다(4~5절). 그런데 요아스가 왕이 된 지 이십삼년이 되도록 제사장들은 그들의 성전을 수리하지 않고, 책임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요아스는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강하게 책망하고, 은을 담당하는 자들이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성전 수리하는 자들에게 직접 성전 수리 비용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제사장들은 백성들로부터 직접 돈을 받지도 않고 성전을 직접 수리하지도 않기로 동의하였습니다(6~8절).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평가받을 때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얼마나 정직히 행했는가를 기준으로 우리의 모든 공적을 평가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기준으로 아무리 많은 공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헌신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풍요와 정치적인 성공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을 수리하고 재건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역에 대하여 무책임한 자세로 그저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영적 성장에 우선순위를 두는 성실한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에 들어오는 다양한 종류의 헌금과 헌물을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사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역에 사용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사역을 감당하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 안에서 투명하게 재정이 사용되어야 합니다(9~16절).
요아스의 성전 수리에 대한 열정에 대하여 제사장들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지만, 그 계획을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요아스는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기 위애 더욱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합니다. 첫째는 백성들이 가져오는 은을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헌금 궤에 직접 넣도록 하였습니다. 둘째는 왕의 서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은을 계산해 봉한 다음 성전을 맡은 자에게 주어 그가 수리하는 일꾼에게 직접 주고 성전 수리에 필요한 물건을 사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백성들이 드린 은을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게 하여 성전 수리에만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반면에 속건제와 속죄제에 바친 은은 성전 수입으로 계산하지 않고 제사장들의 몫으로 주도록 하였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직분자로 세워 헌금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집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가 갈등을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 중에 바로 재정의 투명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재정을 총 관리하는 사람이나 목회자가 투명하게 헌금을 사용하지 않는 문제로 인하여 불신의 벽이 쌓여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적 헌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헌금을 사용하데 있어서 사역자들이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청지기로서 교회 재정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관리하고 사용하여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처럼 투명한 재정 정책과 성실한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 말씀 안에서 이중적인 신앙을 개혁하여야 합니다(17~21절).
그 무렵 아람 왕 하사엘이 군사를 모아 요아스를 공격해 옵니다. 요아스 왕은 아람에 맞설 능력이 없었기에 막대한 보물을 아람 왕에게 보내 아람의 공격을 피하게 됩니다. 이때 성전과 왕궁에 있던 금과 은의 대부분이 아람으로 보내졌습니다(17~18절). 요아스는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정작 상단을 제거하지 않은 까닭에 백성들은 여전히 신당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요아스는 이중적인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요아스는 40년 동안 통치하면서 하나님께 정직히 행한 왕이라는 칭찬도 들었고, 성전 수리에 열성을 다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신하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영적으로 급선회하여 우상 숭배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반대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였기 때문입니다(대하 24:17~22). 요아스는 장사된 후에 다윗 성에 장사 되었고,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만의 우상을 만들어가는 이중적인 모습은 없는지 늘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더더욱 이중적 신앙은 교회 공동체에 더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현장에서는 사역을 하실 때에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목회자들이 은퇴를 앞둔 시점에서 그동안 쌓아 왔던 그분의 헌신과 열정과 영향력들이 종이짝처럼 사람들로부터 버려지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을 목격하게 됩니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아름다운 은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말씀을 따라 마음을 지키고 언약에 충성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지 못하면 사람들의 평가와 요구에 의해 풍랑 가운데 위태로운 배처럼 요동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이중적 신앙을 개혁하고, 말씀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끄는 리더십을 회복하는 신앙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공동체 안에 남아 있는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투명한 사역자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의존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앙 안에서 말씀을 따라 영적 개혁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2:1~2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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