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35-2]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3)
화제작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라는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이렇다. 우리 言衆들이 말에 숨어 있는 의미를 통해 우리말에 재미를 좀 많이 느꼈으면 좋겠다. 쓰는 말의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말을 친근하게 여기고, 그에 따라 더욱 (그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 그렇게 되면 글과 말이 더욱 재밌어지고, 국어 실력도 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우리말의 70% 이상이 漢字語에서 왔다해도 우리말인 말들은 당연히 쌔고쌨다. 그 예를 들어보자. ‘흉보다’의 흉이 한자어 凶인 것같지만 아니다. ‘흉’은 헐거나 다친 곳의 아문 자리라는 우리말. 凶은 아주 끔찍한 재난 등을 뜻한다. ‘외상’은 옛날 관아에서 받아야 할 곡식이나 돈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뜻하는 토박이말. 外上은 이두식 표현이다. 자작나무의 ‘자작’이 한자어같으나 불이 ‘자작자작’ 타는 나무여서 그렇고, 한자어는 白樺木. 울음소리를 딴 소쩍새와 부엉이, 꾀꼴새, 개구리 등도 그렇다. 수월하다는 ‘쉽다’와 ‘얼’에서 ‘ㅂ’이 탈락된 합성어. 고요하다는 ‘괴괴하다’와 ‘외롭다’의 ‘괴외하다’에서 ‘고요하다’로 진화된 우리말. 반갑다, 반기다의 ‘반색하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속을 뜻하 는‘애가 타다’의 애는 ‘슬플 哀’가 아니다. 얄팍하다의 ‘얇’은 한자어 薄, 익숙하다의 ‘익’은 ‘熟’자의 우리말.
그런가하면, 한자와 우리말이 섞인 단어들도 많다. ‘어중이떠중이’의 어중은 ‘가운데’를 뜻하는 於中에서 왔고, ‘떠’는 떠돌다 ‘이’는 사람을 뜻한다. ‘고지식하다’도 곧다와 이가 어울려 ‘고지’이나 식은 ‘알 識’에서 왔다. 흔들리지 않은 곧바른 앎에서 지금은 '융통성이 없다'는 뜻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개차반’은 개와 茶飯의 합성어로, 개가 먹는 음식처럼 거칠고 나쁘다는 뜻. 이를 닦는다는 뜻의 ‘양치질’도 옛날엔 이를 버들가지(楊枝)를 꺾어 닦은 데서 유래했는데, 양지에 질을 합하면서 양치가 됐다. ‘커피가 진하다’의 진은 ‘나루 津’이지만, 침이나 땀과 같은 체액과 풀이나 나무에서 분비되는 액체를 말하며 ‘松津’이나 ‘興味津津’처럼 ‘넘쳐 흐르다’는 뜻으로 쓰인다. 또한 ‘동네방네’의 동은 ‘마을 洞’자이고 방은 ‘坊’이다. 같은 마을인 ‘洞內’나 작은 마을의 ‘洞里’도 여기에서 파생된 말. ‘야밤중’의 야는 ‘밤 夜’이고 ‘오밤중’의 오는 자정을 뜻하는 ‘午’이다.
이밖에도 서양 학문이 동양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처음 번역을 한 학문 이름(과학, 수학, 철학, 사회, 국어, 자연 등)들을 생각하면, 지금은 빼도박도 못하게 정착돼 쓸 수밖에 없지만 쓴웃음도 짓게 한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philosophy’를 처음 번역할 때 ‘철학’(哲學)이라 하지 않고 ‘격물치지(格物致知)’라며 한동안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수학용어들도 영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代數’ ‘幾何’ ‘積分’등으로 정한 것이다.
아무튼, 言語는 存在의 집이라는 말처럼, 말이라는 게 생각을 담는 그릇이어서 生滅(사라지고 생겨남)은 피할 수 없는 일. 이미 사라져 쓰지 않은 우리 토박이말도 많고, 새로이 만들어지는 말도 부지기수이지만, 살려 쓸 수 있는 말은 살려쓰면 좋겠고, 만들어지는 말들은 우리의 생각을 담는데 부족함이 없이 잘 다듬어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중요한 말들을 메모 형식이라도 노트에 적어놓거나 筆寫도 하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낀 이 책은 ‘인문필수 대중교양서’라 하겠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