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군 윤선도 고택(녹우당) 역사탐방
일시:2023년 6월24일 오후4시30분~5시30분
장소:해남군 윤선도고택 (녹우당)
사적(1968년 12월 19일 지정)소재지 전남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5 (연동리)
주최: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해설:윤호상의장
후원:행정안전부
고산 윤선도고택앞 수령 500년된 은행나무앞에서 일동기념촬영
고산 선생 어부사시
녹우당은 일반에게는 고산 윤선도 고택으로 알려져있으나, 500여년 전 입향하여 본관을 얻은 어초은 윤효정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 5대 윤선도(1587-1671), 8대 윤두서(1688-1715) 등 조선시대 인물들을 배출한 학문적, 경제적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이 주택은 전남 지방에 현존하는 주택 중 가장 큰 규모로 1968년 12월 1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500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1972년 지정)이 우거져 있다. 이곳에는 윤두서자화상(국보, 1987년 지정), 『산중신곡집』(보물, 1968년 지정), 『어부사시사집』 등의 지정문화재와 3천여 건의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배치는 갑좌경향(甲坐庚向)주1으로 서향집이며, 동4택(東四宅-안방, 대문, 부엌이 북쪽, 동쪽, 남동쪽, 남동쪽 방향)에 속한다. 집터 뒤에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 안산(案山)으로 벼루봉과 그 바른쪽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다. 남동향으로 낸 솟을대문주3을 지나 사랑마당주2으로 들어서면, 전면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고 서남쪽 담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사랑채는 침방 · 사랑방 · 대청이 一자로 늘어서고 전면에 차양을 달았다. 사랑채의 침방 옆에는 작은 마루를 두고 그 뒤쪽에 곳간을 두어 안채의 부엌 칸과 연속시키고 있다. 사랑채 뒤 동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고, 안채가 ㄷ자형평면을 이루면서 자리잡고 있다. 서쪽으로 부엌 · 안방 · 작은대청을 일렬로 늘어놓고, ㄱ자로 꺾이어 큰대청을 두었다. 다시 ㄱ자로 꺾이면서 방 · 함실아궁이부엌 · 방 · 곳간을 두어 중문까지 연결시켰다. 부엌문을 나서면 안방 동북쪽으로 장독대 · 닭장 · 광들이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에 따로 쌓은 담장 속에 한 채가 있고 또, 담장 밖에 따로 고산사당과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을 세웠다. 외측은 사랑마당 연못의 서쪽에, 내측은 외측으로부터 북쪽에 따로 떨어져 있다. 안채 뒤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진 후원이 있다. 솟을대문 앞쪽에는 노비집이 부엌과 방으로 ㄱ자평면을 이루면서 건축되어 있다.
이 주택의 구조는 민도리집 구조로, 안채는 화강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주4를 세웠다. 가구(架構)는 4량가(四樑架)로 대들보를 두 개의 고주에 걸고 이 대들보주7 위에 판대공주5을 놓아 종도리주6를 받치고 있다. 또 앞면의 평주와 고주 사이에는 퇴보를 걸었다. 도리는 납도리주8이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ㄷ자형 평면의 양측에 합각을 만든 맞배지붕형이다. 특히, 건넌방 사이에 있는 함실아궁이부엌 위에는 한층 지붕을 높인 작은 덧지붕(솟을지붕)이 있다.
사랑채의 구조도 안채와 비슷하여 화강석으로 마무리한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으나 전면 툇기둥은 두리기둥주9을 세웠다. 가구는 4량가(四樑架)로 안채의 가구와 같다. 다만, 사랑채 앞에는 차양이 건축된 바 이의 지붕을 만들기 위하여 사랑채 앞에 따로 기둥을 세우고 이 기둥과 사랑채 기둥 사이에 보를 걸고, 그 위에 작은 기둥을 세워 차양구조의 대들보를 얹고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이 건물은 효종이 윤선도에게 내려준 경기도 수원에 있던 집을 1668년(현종 9)에 이곳에 옮긴 것이다.
오우가(五友歌) - 윤선도 -
내벗이 몇인고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오르니 그이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다섯밖에 더하여 무엇하리.
水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서리 맑다하나 그칠 때가 하도 많다
좋고도 그칠때 없기는 물 뿐인가 하노라.
石
꽃은 무슨일로 피면서 빨리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다가 누르는가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바위 뿐인가 하노라.
松
더우면 꽃피우고 추우면 잎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가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줄 그로 하여 아노라.
竹
나무도 아닌것이 풀도 아닌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고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月
작은것이 높이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밤중의 광명(光明)이 너만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오우가]
고산 윤선도가 56세 때 지은 오우가는 전체 6수의 연시조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 시조의 경지를 한 단계 높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 번째 수인 서시에서는 벗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다음부터 이어지는 다섯 수에서는 수(水-물), 석(石-돌), 송(松-솔), 죽(竹-대), 월(月-달)의 특질을 특출한 시각과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담겨진 자연물들은 모두 윤선도가 추구했던 유교적 덕목과 이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들로서 다른 자연물들과의 대비(물의 경우에는 구름, 바람과의 속성 대비, 바위의 경우에는 꽃, 풀과의 속성 대비 등) 속에 그 특징이 극대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주요 소재와 몇몇 단어를 제외한 전 구절을 모두 한글로 표현하여 자연물이 지닌 관념성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윤선도]
고산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시가인으로 꼽히는 문인이다. 26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나 이후 수차례의 당파 싸움에 휩쓸려 여러 차례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는 윤선도가 당시에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는 서인 세력에 맞서 왕권의 강화를 주장하였으나 이는 서인의 탄압을 받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의 생에 있어서 20여 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배, 은거 기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다지고 빼어난 작품을 세상에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 문학의 특징은 자연 친화, 자연과의 거리감이 극도로 좁혀진 삶을 다루었다는 점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윤선도의 삶을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하지만 윤선도는 여타의 시인들과는 달리 자연을 다루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관념적인 경향으로 빠지지 않고 현장성과 사실성을 살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윤선도였지만, 그는 유배 기간 동안 바라보았던 자연을 단순한 도피처나 일시적인 피난처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을 진실한 삶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자연이야 말로 자신에게 인간 본연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윤선도의 자연친화적 작품들은 단순히 안빈낙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과의 합일을 노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물아일체의 자연관은 윤선도가 지향하였던 엄격한 유교적 윤리 체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가 자연에서 발견한 인간적 가치와 정서는 대부분 유교적 덕목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윤선도의 작품, 인격, 인생관 등 전반적인 이해를 필요로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소학〉이다. 윤선도는 자신뿐만 아니라 왕의 정치이념이나 후학의 양성 등 사회 모든 곳에서 〈소학〉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윤선도의 작품에는 자연과 합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정과 산림을 하나로 파악하여 연군지정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초기의 〈견희요〉, 〈우후요〉나 후기의 〈몽천요〉뿐만 아니라 자연을 노래한 〈산중신곡〉, 〈어부사시사〉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윤선도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작품에 사용된 언어의 아름다움에 기인한 바도 크다. 교과서에 수록된 〈어부사시사〉 외에도 〈만흥〉, 〈오우가〉 등의 작품에는 한글이 지닌 멋스러움과 다양한 표현력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어부사시사〉 등의 작품에서는 조선 중기까지의 시조에서 지나치게 자주 등장하였던 한시구(漢詩句)를 순 우리말로 바꾸어 표현의 난삽함을 극도로 절제하고 한글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밖에도 한글을 통한 여음구, 청유형과 의문형을 적재 적소에 배치하여 시조의 리듬감을 효과적으로 높이는 데에도 성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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