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61
5월18일[부활 제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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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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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8T9GV0KSvRA
[서울대교구 박용준 사도요한(청담동성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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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저는 참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참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날카로운 시선이 항상 가까운 이웃에게 머물렀습니다. 저 자신의 허물이나 약점은 조금도 성찰하지 않고 이웃들의 부족함에 가슴치고 분노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느님 보시기기 다 그놈이 그놈인데,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 나무란다고, 그렇게 사는 제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웃으셨을까 생각하니 큰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한 수도원에 공공의 적처럼 살아가는 수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베드로였습니다. 몸집이 육중하다 보니 동작도 굼뜨고, 공동 작업 시간에 사고만 치지 별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가?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들 조용히 침잠해있는 묵상 시간에 코까지 골면서 잠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식사 시간만 되면 얼굴에 활기가 되살아났습니다. 다른 수사들은 더 먹고 싶어도 꾹 눌러참고 딱 밥 한 공기만 먹는데, 이 수사는 평생토록 삼시 세끼 단 한 번도 안빠지고 꼭꼭 밥 두 공기씩 챙겨 먹었습니다.
겉으로 대놓고 말하지 못했지만 다른 수사들은 주님 앞에 이렇게 여쭙곤 했습니다. “주님, 저 베드로 수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은 쥐꼬리만큼 하고 밥은 나발처럼 흡입하는 베드로 수사에게 구원이 가당한 일입니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다들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토록 주님 안에 갖은 고행과 보속을 다해온 까닭에 삐쩍 마른 다른 수사들이, 그 결과로 천국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 멀리 맞은 편에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오는데, 얼굴이 낯이 익은 것입니다. 가까이서 봤더니, 아니 글쎄, 베드로 수사였습니다. 화가 벼락같이 난 수사들은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베드로 수사가 천국이라니, 이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사람마다 지닌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주어진 몫이 다르고,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사실 살아있을 때 저 베드로 수사는 사실 매끼 네 공기씩 밥을 먹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절제하고 또 절제해서 두 공기씩만 먹은 것이란다. 평생 그런 노력한 베드로 사도가 천국에 오지 않으면 누가 천국에 오겠느냐?”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서서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제 공생활의 절정기도 지나가고 예수님의 행렬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들 떠나가고,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 사도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경쟁 관계 속에 살아가던 예수님의 애제자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를 지목하며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시원시원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사랑받는 제자의 운명에 대해 베드로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시선은 언제나 이웃들의 결핍과 실수에 가 있습니다.
이웃을 향했던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어 우리 자신의 발끝을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남의 인생은 본인에게 대폭 맡겨두고, 우리 각자의 인생을 더 적극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 추종의 방식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사랑받는 제자의 경우 평생토록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했지만, 성모님의 노년을 동반해드리면서, 순교가 아니라 자연사하였습니다. 모든 길이 다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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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앙은 일대일 관계>
인터넷에 이런저런 고민을 열어놓고 상담하는 내용들 중에 이런 고민을 보았습니다. 한 20대 초반의 여대생인데 학과 공부 보충을 위해 학원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때 30대 초반의 잘생긴 강사분이 오셨습니다. 학생시절엔 다 그렇듯이 같이 배우는 친구들끼리 장난으로 “저 샘은 내꺼!”라며 막 쫓아다녔다고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선생님이 멋져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호감이 생긴 김에 이것저것 더 물어보게 되었고 1:1로 남아서 수업을 해 주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저녁때라 자연스럽게 밥과 술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조금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 선생님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신호가 왔습니다.
수업이 끝나더라도 계속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종강을 하고도 볼일이 있어 근처에 왔으니 함께 밥이나 먹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 여대생의 마음이 좀 뒤숭숭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을 바랐는지도 모르지만, 막상 그런 일이 닥치니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지도 아직은 모르겠고,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볼 것이며, 또 나이차도 너무 많이 나고, 집도 서울과 지방이기에 만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사귀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이 고민에 대해 밑에 사람들이 답글을 달아준 것을 보니, 더 깊어지기 전에 헤어지라는 말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극복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막상 그것을 바랐지만 그것이 실제 현실이 되었을 때 겁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미리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 대해서 깊이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던 상황이 막상 닥치게 되면 당황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재미로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부담이 분산되지만, 모든 관계란 결국은 1:1로 깊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것에 대한 더 큰 책임을 지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날까지도 고민을 한다고 합니다. 1:1의 만남은 엄청난 책임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사람들과 함께 여럿이 만날 때는 부담이 없다가도 어쩌다가 단 둘이 남게 되면 왠지 어색해짐을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1:1의 관계에 대해 익숙해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많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는 거의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시는 예수님께 “그럼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오지랖이 넓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그에게는 신경 끄고 네 일이나 잘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역시 베드로도 그리스도와 1:1로서 맺는 관계가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주연의 짐 카비젤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을 찍기 직전 의사로부터 심장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멜 깁슨 감독은 계속 찍을 것이냐고 짐에게 물어봅니다. 짐은 대답합니다. “이것은 저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주의하라고 오늘 베드로에게 충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누구의 덕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날 각자 혼자 일대일로 그분 앞에 서야합니다. 그리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분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 번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도록 살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여기서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의 눈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노라고 또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살 자격이 있다고 대답하기 힘들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라면 그분을 많이 사랑했다고 고백하면서도, 막상 그분을 1:1로 만나면 입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부터 나와 그분의 1:1 관계가 자연스러운 삶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판단하고 신경 쓰고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에게 갖는 우리의 호기심 앞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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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나 드라마가 재미있으면 끝이 가까울수록 아쉽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도 그렇습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못내 아쉽습니다. 헤어짐이 아쉬워서 서로, 상대방의 집으로 데려다주기도 합니다. 예전에 중곡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제가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던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어느덧 직장인이 되었고, 자동차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중곡동에서 식사하고, 저는 봉천동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봉천동에서 입가심으로 한잔 더하고, 돌아오는데 저를 중곡동까지 데려다준다고 하였습니다. 교사와 학생의 만남이 이럴진대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더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50일 동안 주님의 ‘부활 시기’를 지냈습니다. 부활삼종기도를 하였고, 부활 성가를 불렀습니다. 7주 동안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갈망, 믿음, 말씀, 착한 목자, 포도나무와 가지는 우리가 부활 시기에 들었던 주님 말씀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님 승천 대축일에는 또다시 ‘갈릴래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활 시기에 우리는 ‘사도행전’을 독서로 읽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면, 교회에 위기가 찾아올 때면 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려움과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주님 부활의 체험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었던 베드로 사도,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이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서, 요한이 전한 편지, 요한 묵시록’을 남겨 주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은 마귀를 쫓아냈고, 병자를 고쳐주었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교의 월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전화위복(轉禍福)’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서품 성구도 시편 126장을 정했습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래서 아담의 죄를 ‘복된 죄’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아담이 죄를 지어서 우리에게 ‘원죄’가 주어졌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모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쩔 수 없이 로마의 법정에 상소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당시 가장 힘이 센 로마의 심장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원망하면 원망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깁니다. 기뻐하면 기뻐할 일들이 생깁니다. 2024년 부활 시기는 이제 연중시기에 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2025년 부활을 기다리며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 놓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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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20-25: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예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따라라”(19절) 하셨을 때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라고 하신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신다. 행동적인 신앙은 주님의 수난의 본을 보고 완전하게 배웠으니 주님을 따라야 한다. 지금 막 시작된 구원은 주님께서 오실 때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로 73년을 더 살며 트라야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다른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평화롭고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너의 것, 곧 네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따르기나 하라고 하신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단 한 권의 복음서만을 남겼다. 요한은 묵시록도 썼으며, 또한 매우 짧은 서간도 한 편 남겼다. 지금 성경에 있는 세 편의 서간은 모두가 요한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세 편을 다 합쳐도 100줄이 되지 않는 글이다. 이 복음을 자신이 썼다고 드러내는 이유는 그는 복음을 제일 마지막으로 썼고 복음을 쓴 이유가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셨고 자기 기록이 믿을만한 것이며,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지혜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지혜는 한계가 없으므로(시편 147,5 참조)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은 무한한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 안에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말씀을 읽고 실천해야 한다. 끊임없이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들을 잘라 버리고 선을 실천하여 성숙해짐으로써 자신을 밝게 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 자체이신 주님을, 하느님을 차지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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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이제 지난 7주 동안 계속된 부활 시기가 끝나 갑니다. 독서와 복음도 각 책의 마무리 부분이 봉독되는데,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요한 복음서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맨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사도단의 대표들이 부활 시기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선정된 요한 복음서의 마지막은 이 책의 저자와 저술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두 번이나 되풀이되며 이질감을 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는 이 물음이,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는 데에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옮긴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그것이 너에게 무엇이냐?”입니다. 주변과의 비교나 경쟁, 불필요한 견제에 휘말림 없이 나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삶의 자세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독서에서도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 그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지만 불안과 공포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칩니다. 주변의 상황이나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는 모범을 누구보다도 훌륭히 실천한 것입니다.
“남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책을 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언제나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날마다 그날의 말씀을 붙잡고 나의 길을 가는 것, 비교에 휘둘리거나 경쟁하느라 소모되지 않는 것, 내 삶에 집중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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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교회 공동체>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 21,20-25)
1)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순교를 예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는,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요한 사도의 일이 궁금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각자 자신이 받은 소명을(탈렌트를) 충실하게 수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는 “내가 재림할 때까지”입니다.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내가 재림할 때까지 그가 수행해야 할 어떤 일을 내가 맡겼다 하더라도”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베드로 사도를 무시하신 것 같은, 또는 베드로 사도의 질문을 무시하신 것 같은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그의 소명을(탈렌트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존중’은 일치와 협력을 위한 일입니다. 만일에 남의 일에 전혀 관심 갖지 않고 자기 일만 한다면, 그것은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고, 일치가 아니라 분열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 전체를 다스리고 돌보는 일을 맡기셨습니다.(요한 21,15-17) 요한 사도에게는 당신의 행적과 말씀을 문서로 기록하는 일을 맡기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사도의 임무는 경쟁 관계도 아니고, 대립 관계도 아니고, ‘예수님의 일’이라는 ‘하나의 큰 일’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입니다. 따라서 그 일들은 모두 사실상 하나의 일이고, 같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존중하면서 함께 협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사도들의 일도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에페 4,15-16)
3) 주님께서 제자들에게(신앙인들에게) 각각 다른 소명을(탈렌트를) 주신 것은 ‘공동선’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1코린 12,7)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12.18.26)
그래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큰 성령의 은사’는 ‘사랑’입니다.(1코린 12,31) <만일에 사랑이 없는 채로, 또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으면서, 혼자서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한 몸인 공동체입니다.>
4) 24절-25절의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나 말씀들이 ‘성경’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전(聖傳)’으로도 전해진다는 것을 나타낸 말인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나 말씀들은, 처음에는 입에서 입으로, 즉 구전으로만 전해졌다가, 그 가운데 일부가 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일들이나 말씀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사도들의 편지나 다른 문서들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전도 거룩한 계시로 믿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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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동원 요셉 신부님]
“너는 나를 따라라”
요즘 저 개인으로서는 늘 둘째, 넷째 주말이 되면 은근히 걱정을 합니다. 왜냐면 초중고 학생들이 2, 4주 토요일은 수업이 없어 학교를 가지 않으니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간다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만 가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시간도 좋겠지만 그래도 주일을 지키면서 가족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혼자서 걱정을 한답니다.
5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날들을 보내며 서로에게 기쁨과 감사, 그리고 사랑을 나눴던 이 시간도 벌써 다 지나가고 토요일 주말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생명과 세상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시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 새로운 모습으로 영원한 참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부활의 시기도 이제 곧 다가 올 성령강림 대축일 맞이하며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시기는 이제 곧 마치게 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삶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에게도 주어질 마지막 그날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베드로에게 들려 주신 말씀처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너는 나를 따라라”하시며, 부활을 체험한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살아온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알려진 모든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세상과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삶 전부를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삶과 그들의 기록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할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제자들처럼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나 자신뿐 아니라 앞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순간까지 또한 우리에게도 주어진 사명이기도 합니다.
각각 다른 모습과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삶안에서 예수님과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을 따를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을 받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될것이며, 그 사랑을 고백하고, 전하며, 나누는 삶을 통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때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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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조성호 라우렌시오 신부님]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최고의 무기>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며,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이 구원받는 길임을 보여준 요한. 비록 덧붙여진 부분입니다만,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주는 가르침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길을 가다가 예수님 곁에 있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를 봅니다. 그 스스로 주님께 수장이 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음에도 그의 모습이 사뭇 궁금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 21)
우리는 나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이가 어떻게 될런지 궁금합니다. 지금의 삶에 감사하면서 내 삶을 충실히 살아가면 되는 것을 그래도 다른 이가 궁금합니다.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궁금한가 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죠?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 22)
당신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최고의 무기는 ‘비교’라고 합니다. 그렇게 비교하는 사이 주님을 따르는 순수성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됩니다. 그가 팔자 걸음을 걷든, 뒤뚱거리며 걷든, 그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다면, 동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나의 길을 충실히 걸으면 됩니다.
그가 어떻게 되는가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 나와함께 하는 이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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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 합니다. 그동안 부활시기 내내 요한복음 13장 후반부부터 시작되는 다락방 고별담화와 예수님의 기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 베드로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곧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라고 하시며, 그가 순교 당하여 죽게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으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초대교인들에게 그 진원지를 밝히면서 이러한 소문이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은 찬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 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고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 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 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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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
멈추다가 떠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휩쓸리다가 가야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
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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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1,22)
사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조금은 마음이 불편하고 심난甚難합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제 마음 밑바닥을 건드렸기에 당혹스럽습니다. 제 속내가 드러나고 그런 속내를 주님께서 꿰뚫어 보신 듯싶어서 주님을 떠나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왜냐하면 어제와 달리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베드로 사도가 동료인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 대한 열등감이나 질투심을 드러내는 듯 느껴지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척 차갑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열등감의 하나입니다. 열등감에 빠진 사람이 질투하는 것은 남들보다 더 잘나고 싶어서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크기의 접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가’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이를 말씀하신 듯 싶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1,22) 물론 복음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나오는 장면이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으며, 그런 상황 때문에 본의 아니게 경쟁자로 비춰질 수도 있겠습니다. 긍정적인 시선에서 보면 신구세대의 보완 보충의 역학관계로 보입니다만.
베드로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21)라는 궁금증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깊은 어둠이 그늘이 깔려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제 생각으로 가장 아픈 단어는 ‘편애’라고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신도가 사제에게, 그런데 이런 인간의 내면적 욕구에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계기는 사랑받고 싶은 그 사람이 자신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한다고 느낄 때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고 수긍할 수 없으며 부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약자인 사랑 받아야 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편애 곧 사랑의 치우침’은 본의 아니게 형제나 동료 간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만들어 버리고 이를 통해 생애 동안 보이지 않는 내적 전쟁이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편애는 모든 악의 온상과도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편애가 형제간에 비교하고 경쟁하게 만들어 갑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심한 열등감을 품게 되고 이 열등감은 인생을 살면서 한 사람의 삶의 그림자와 어둠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에서 가장 뿌리 깊은 그림자는 바로 열등감이며, 이 열등감에 빠진 사람은 하느님도 구제할 수 없구나, 라고 제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제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교 의식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나요. 저희 가정에서도 공동체에서도 그 어둠이 밝은 기억, 사랑의 추억마저 삼켜버릴 만큼 그 파도가 강력합니다.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은 우월감으로 이 둘은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질투심과 경쟁심, 비교 의식, 이 모든 것이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기에 저를 조금은 불편하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요한은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 궁금해서 예수님께 물어보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21,23) 이 표현은 오래전에 보았던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에서 이영애가 출소하는 장면에서 기다리던 목사와 신도들에게 “너나 잘하세요!”라는 표현을 떠오르게 합니다. 세상 말로 하자면 ‘남 신경 쓰지 말고 네 앞길이나 신경 쓰세요.’라고 들립니다. 베드로 역시 무척 당황스럽고 황당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싶었을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나 잘하세요!’
그러므로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하시는 말씀은 이런 뜻일 겁니다. ‘한눈팔지 말고 오직 너의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꿋꿋이 너는 너만이 걸어야 할 길을 통해 나를 따르렴!’하고 말씀하신 듯싶습니다. 결국 우리가 가는 길이 다른 이의 길보다 험하고 힘들고 거칠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이에게 어떤 일이 맡겨지고 어떤 길을 걸어가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라,는 말씀이라고 알아듣습니다. 그러니 타인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고 오늘 주님의 사랑 안에서 다만 내게 맡기신 일을 충실히 하면서, 주님 안에서 누군가의 길이 아닌 나의 길을 걸어가도록 합시다. 한눈팔지 말고 똑바로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갑시다. 나만 잘하면 됩니다.
“주님, 제가 저 자신답게 사는 것은 누구와 비교하거나 경쟁하기 위함이 아니라 저답게 사는 것이, 당신의 뜻이고 저의 삶의 긍극적 소명이며 존재 이유라고 믿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어느 누구답게가 아니라 나 자신, 준수 아오스딩답게 살게 하여 주시고 그렇게 살렵니다. 그런 삶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이는 삶이고 저희 구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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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대 그리스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인가가 창조되는 ‘목표’, 또는 ‘목적’을 뜻하는 ‘텔로스’에 대한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도토리가 자라나 떡갈나무가 되고, 새끼 고양이가 자라서 성인 고양이가 되면 그것들의 텔로스가 달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텔로스는 무엇일까요? 즉 우리 삶의 목표, 목적은 무엇일까요?
가톨릭 교리를 보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서 그분을 섬기고, 하늘 나라에서 그분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궁극의 행복인 것이고, 우리 삶의 목표이며 목적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야 ‘인간의 텔로스’를 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이 길을 벗어납니다. 신앙생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인데도, 자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할 수 없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결국 우리 삶의 목적에 다다를 수 없게 됩니다.
삶은 많은 유혹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화려하고 편한 것들 사이에서 그와 반대로 볼품없고 힘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있습니다. 문제는 화려하고 편한 것만 자기 삶의 첫 번째라고 외친다는 것입니다.
나의 텔로스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도 떠올려 보십시오. 자기 텔로스를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후회와 슬픔만 간직하지 않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로 유명한 요한 사도를 가리키면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보기에, 요한 사도는 특별한 지위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부활의 순간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의 미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미래가 중요했습니다. 즉, 남의 텔로스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의 텔로스를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자기의 목표, 목적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같은 모습만을 보이면서 자기의 목표와 목적을 잊어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따르면서, 특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나의 목표, 목적에 완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미래가 훨씬 밝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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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인생>
우리 각자에게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고유함이 있습니다. 각자는 하느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요한21,20). 그런데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21,21)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삶의 모습에 대해 많은 관심을 지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너는 너의 갈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라라.”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제자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비교하지 마라.’ ‘너는 너대로 사랑을 받으면 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따름의 방법도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쓸모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호기심은 걸림돌일 뿐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예수님만을 따르는 추종의 길을 걷고, 베드로는 뒤를 돌아보는 주저함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9,62) 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걷는 발걸음에 복이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하다지만 사랑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이랍니다. 당신이 없으면 시간도 사랑도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요.” 누구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하지 말고 실제로 행복하십시오. 예수님을 모시게 된 것이 복입니다.
“남의 떡은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과 비교하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떨기도 하고 분수없이 지낼 때가 있습니다.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건만 그것이 마음 같지 않아 힘들어 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서로에게 주어진 고유한 인생을 주님의 마음에 들게 사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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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걸어야 길벗이지요>
요한 21,20-25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와 베드로, 엮은이의 맺음말)
그때에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을 걸으니 길벗이지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길이 있어
길을 걷고
길을 걷다
벗을 만나
함께
길을 걸어야
길벗이지요
앞선 길벗
붙잡지 않고
뒤선 길벗
가리지 않으며
더불어
길을 걸어야
길벗이지요
길벗에게 마음
빼앗지 않고
길벗에게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길을 걸어야
길벗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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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꽃자리>
“주님은 당신 성전에서, 하늘의 어좌에서,
세상을 굽어보시노라,
당신 눈은 인생을 살피시느니라.”(시편 11,4)
계속되는 5월 성모성월, 파스카 축제시기이고 내일은 대망의 성령강림대축일로 부활 파스카 축제시기도 끝납니다.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신록의 기쁨 충만하고 끊임없이 피어나는 다양한 꽃들입니다. 말그대로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파스카의 꽃처럼 살라고 부단히 피어나는 온갖 꽃들입니다. 거룩하게 살았던 성인들은 하늘의 별들로 떠오르고, 착하게 살았던 신자들은 매해 끊임없이 꽃들로 피어나나 봅니다. ‘땅의 행복’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눈만 열리면 어디나 구원의 꽃자리이며 펼쳐지는 축제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꽃자리에서 행복한 축제인생을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 권리가 있습니다. 이래서 만세칠창으로 시작하는 하루요, 마감하는 하루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또 이어 떠오르는 ‘구원의 꽃자리’라는 시입니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자리 찾지 않는다
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구원의 꽃자리이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랏빛
파스카의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 축제인생이다
찬미와 감사다
절망은 없다”-2001.4.18.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요즘 저의 기쁨이자 행복은 면담고백성사후 집무실 옆 꽃길에서 사진을 찍어나누는 일입니다. 사진과 더불어 주고 나눈 메시지입니다
“사진처럼 예쁘고 행복하게 사세요.”
“신부님을 뵌 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한길만을 걸어오신 삶이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나누고 싶습니다.
“한 사람을 기르는 것은 하나의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눈앞의 아이에게서 다가올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다산>
“일년의 계획은 곡식을, 십년의 계획은 나무를, 일생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관자>
모 정치인의 “궤멸적 저출생, 패싸움만 할 것인가?” 언급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정치의 양극화, 이념의 양극화, 정서적 양극화. 빈부의 양극화등 풀어야할 산적한 양극화가 끝이 없습니다. 성령이 희망입니다. 성령에 의한 내적혁명, 영적혁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저녀녁기도 찬미가는 성령강림청원 찬미가였습니다. 7절까지 내용이 참 풍부합니다만 2절만 나눕니다.
“우리들의 위로자며 천주주신 선물이라, 온갖 샘의 근원이며 타는사랑 주시도다”
성령의 희망, 성령의 기쁨, 성령의 위로...성령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끝이 없습니다. 교회를 풍요롭고 충만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은총이요 제가 매일 강론을 쓸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은총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전통의 달인 수제자 베드로, 선교의 달인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사랑의 달인 애제자로 이뤄진 교회의 풍요로움을 묵상합니다.
모두가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몫입니다. 오늘로서 끝나는 부활시기, 복음의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와의 대조가 흥미롭습니다. 머지 않아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베드로입니다. 애제자가 어떻게 될 것인가 묻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전통의 달인이자 활동가인 수제자 베드로에게 본연의 일에 충실하며 애오라지 주님만을 따르라 하십니다. 불필요한 관심에 대해 마음을 접고, 마음을 닫고 네 본연의 섬김의 책무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익명의 애제자입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꼭 함께 등장하는 익명의 애제자 사랑의 달인입니다. 말그대로 활동과 관상의 조화를 상징하는 두 제자입니다.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있는 익명의 애제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 애제자가 상징하는 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교회의 심장처럼, 교회의 보물처럼 숨겨져 있는 사랑의 관상가라 합니다. 애제자들은 언제 어디에나 교회의 중심부에 익명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드러나는 지도자 베드로가 전통과 활동의 상징이라면 이런 애제자는 관상과 사랑의 상징입니다. 어느 저명한 신학자의 통찰이 고맙습니다.
“실제적 인간으로서, 사랑받던 제자는 어느 시점에 죽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킴으로 예수님에 의해 사랑을 받았던 모든 이들을 상징하는 완전한 제자로서 그는 예수님이 내림시까지 머물러 있어야 한다. ‘교회는 결코 그 애제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The Church must never be without him)
잘 보십시오. 멀리 갈 것 없이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잘 들여다보면 이런 애제자를 발견할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이 바로 애제자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교회의 심장같은 사랑의 달인이자 관상가인 애제자들이 있어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전통의 장상을 상징하는 수제자 베드로 역할이 익명의 숨겨진 사랑의 관상가 애제자와 같을 수 없습니다. 서로 보완하므로 풍요롭고 충만한 교회공동체입니다. 여기에 선교의 달인 바오로가 추가되니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순교의 죽음을 목전에 둔 바오로는 세계의 중심부 로마에서 복음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미미하게 시작되지만 유럽대륙을 산불처럼 휩쓸 복음의 불이 될 것입니다. 비록 쇠사슬에 매어있는 수인 바오로이지만 말씀을 묶어둘 수 없습니다. 구원의 꽃자리에서 복음 선포에 전념한 선교의 달인이요 그 모습이 참 자유롭고 아름답습니다. 구원의 주님은 늘 그와 함께 하셨음을 봅니다.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년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였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어디에서나 구원의 꽃자리로 삼아 복음 선포에 전념하며 축제인생을 살았던 이런 선교의 달인 바오로와 전통의 달인 수제자 베드로, 그리고 애제자 사랑의 달인이 잘 조화된 교회는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운지 감탄하게 됩니다.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각자 구원의 꽃자리에서 사랑의 달인 애제자가 되어 축제인생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의로우신 주님이기, 정의를 즐기시나니, 올바른 자, 당신 얼굴을 뵈옵게 되리라.”(시편 1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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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상관하지 않아 방해 받지 않는>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오늘로써 부활 시기를 끝내는 우리 교회는 사도행전과 요한복음도 끝부분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최후를 두 성경이 들려줄 법도 한데 그러지 않고, 아무 방해받지 않고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얘기와 아무 상관 말고 주님 따르라는 말씀을 베드로 사도가 듣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은 영화나 소설에서 결말을 짓지 않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것과 같은 수법일까요?
제 생각에 이것은 그런 것이기보다는 주님을 따름과 복음의 선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되기 위해서는 누구에 의해 그만두지도 않고, 내가 그만두지도 않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방해하는 사람이 진짜 아무도 없었다는 그런 뜻일까요?
그런 뜻일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방해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바오로 사도가 방해받지 않은 겁니다. 그것은 복음 선포의 일념으로 누가 방해해도 상관하지 않은 결과이고, 총탄이 아무리 빗발쳐도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전사와 같은 것입니다.
상관하지 않기에 방해받지 않는 것, 이것이 오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고,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러니까 죽기 전까지는 본받아 살아야 할 점입니다.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은 우리에 의해서 계속돼야 한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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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 21,24)
<사랑의 사도!>
오늘 복음(요한21,20-25)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을 두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의 끝부분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부활시기 내내 우리는 사랑의 사도가 전하는 요한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였기 때문에 사랑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시기 내내 독서로 루카 복음사가가 기록한 베드로와 바오로 등 사도들의 행적인 사도행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 압송되어 온 소식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끝부분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의 끝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2)
사도행전은 끝맺음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또 하나의 사도가 되어서 우리를 통해 사도행전이 계속 씌여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사도가 되어서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핵심인 하느님 사랑'입니다. 주어진 그 사명을 이루려면, 요한 사도처럼 내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느끼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 체험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합시다! 그리고 나의 사도행전을 써 내려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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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 22)
방금
감사해야 할
하루가 힘차게
시작되었습니다.
어차피
하느님과
우리자신의
관계가
중요한 감사와
믿음입니다.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고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이
건강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구경꾼들이
결코 아닙니다.
살면서 깨닫고
아파하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어리석은
실랑이를
이제는
멈춥니다.
그래서
믿음은
힘겨루기가
아닙니다.
간섭과 결박의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의
간섭에도
상관없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나친 간섭과
지나친 눈치는
언제나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삶이란
저마다의 길을
걸어가며
드라마틱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간섭이 아니라
변명이 아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줄 뿐입니다.
그래서
소란스럽지
않으며
하느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은
간섭의 길이며
가야할 길은
믿음과 감사의
길입니다.
우리의 오늘이
예수님과 함께
빛나는 만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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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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