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을 느껴 보았는가.머리가 쭈뼛 서는 전율을 느껴보았는가.8000만 한국인은 그 순간 하나가 됐다.한국축구가 태산(泰山)을 넘었다.기대가 현실로 변하는 순간,선수들도 환호하고 시골 촌부의 목도 멨다.
한국축구사에 길이 남을 2002년 6월 14일.인천 문학경기장에서 경기종료휘슬이 길게 울리는 순간 그라운드의 선수도,스탠드의 관중도,전국 방방곡곡을 붉은 물결로 채운 5000만 국민도 모두가 너나 할 것없이 뜨겁게 서로를부둥켜 안았다.
광복 이후 가장 기쁜 날.한국축구가 월드컵 본선 도전 48년 만에 감격적인 새 역사를 만들어냈다.열흘 전 본선 첫 승의 감격이 채 가시지기도 전에 그토록 멀고도 험난했던 세계 16강의 길을 마침내 뚫었다.
세계도 한국의 16강 파란에 경악했다.한국은 이날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벌어진 2002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조별리그 D조 마지막 경기서 후반 박지성의 통쾌한 결승골을 앞세워 FIFA랭킹 5위인 세계의 강호 포르투갈을 1-0으로 격침하고 2승1무,승점 7점을 확보하며 당당히 조 1위로 16강 관문을 돌파했다.
포르투갈은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와 남미 최강 아르헨티나의 탈락에 이어 또 다시 우승후보가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충격에 휩싸였다.
미국은 대전에서 폴란드에 3-1로 패해 탈락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한국이포르투갈을 격침한 덕분에 승점 4점으로 D조에 남은 한 장의 16강 티켓을 거머쥐는 행운을 안았다.이로써 한국은 오는 18일 대전에서 G조 2위 이탈리아와 8강 티켓을 놓고 격돌하게 됐다.미국은 17일 전주에서 G조 1위 멕시코와8강진출을 겨룬다.
한편 공동개최국 일본도 H조 마지막 경기에서 튀니지를 2-0으로 꺾고 조 1위를 차지해 한·일 양국이 나란히 16강 토너먼트에 오르는 아시아축구의 새 장을 열었다.월드컵 본선에서 아시아의 두나라가 동시에 본선 2라운드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H조의 마지막 16강티켓 한장은 러시아를 3-2로꺾고 1승2무를 기록한 벨기에게 돌아갔다.
◆서정원(수원삼성 선수,94,98월드컵 출전)=무엇보다 선수들이 집중력과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해줘서 이른 쾌거다.16강 위업은 국민들이 성원으로 이룩된 것이다.“축구란,월드컵이란 이런 것이구나”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계기가 될 것이다.그동안 월드컵때 열기가 치솟다가도 끝나면 금세 식어버린 게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이런 축구사랑과 관심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이회택(90이탈리아월드컵대표팀 감독)=이렇게 기쁜일이 또 있을까.내 축구인생에 있어 가장 기쁜 순간이다.비록 직접 뛰거나 벤치를 지키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내마음은 선수들과 똑같다.90년 3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귀국길에 올랐을때의 참담한 기분과 한을 후배들이 시원하게 풀어줬다.선수들이 자랑스럽고 그들을 성원한 국민들의 지극한 정성에 숭고함을 느낀다.
◆고정운(스포츠서울 월드컵 자문위원,94미국월드컵 출전)=축구인 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희망을 안겨준 쾌거다.대단한 일을 해낸 후배들이 자랑스럽다.이제 우리의 일차 목표를 이뤘으니 앞으로는대표팀 뿐만 아니라 프로팀,특히 유소년팀 등 한국축구 전체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인적·물질적·제도적 뒷받침을 했으면 한다.16강 진출 자체도중요하지만 이번 월드컵에 거둔 성과가 백지화되지 않도록 뒷마무리와 정리작업도 제대로 돼야 한다.
◆고종수(수원삼성)=우리나라가 월드컵 본선에 무려 다섯 번 연속으로진출했는데 이번에 이런 큰 일을 해준 선수들에게 축구선수의 한 명으로서너무 감사하다.온 국민을 대신해서 뛰었다고 생각한다.기왕 16강을 진출했으니 8강 4강까지 진출해서 한국의 새로운 월드컵 역사를 계속해서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그리고 덧붙이자면 선수들에게 병역혜택이라는 선물이 돌아갔으면 좋겠다.
이주일 휠체어 탄채 한-포전 현장응원
○…폐암 투병중인 코미디언 이주일(61)이 14일 밤 휠체어를 탄 채 인천문학경기장에 도착,한국대 포르투갈 예선 최종경기를 관람했다.병상의 이 씨가 월드컵 경기를 관전한 것은 지난달 31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프랑스-세네갈 개막전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SBS TV는 문학경기장에서 직접 응원에 나선 이 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15일 오전 8시5분 ‘토요특집 생방송 모닝 와이드’시간에 방영할 예정.
*아무도 예상치 못한 히딩크 감독의 ‘히든 카드’가 위력을 발휘했다.히딩크 감독은 16강 진출의 최대 고비였던 14일 포르투갈전에서 김태영에게 포르투갈 공격의 핵 주앙 핀투를 전담마크하게 하는 변칙수비전술로 5천만 국민들의 꿈을 현실화했다.부상이라며 ‘연막전술’을 편 박지성을 선발출장시켜 포르투갈 수비진의 얼을 빼놓았다.히딩크 감독의 지략이 완승을 거둔 현장을 직접 연결해 숨가빴던 90분 동안 팬이 느꼈을 궁금증을 풀어본다.
―김태영이 핀투를 전담마크하는 변칙수비전술을 구사했는데.
이영표 홍명보 최진철 송종국으로 이어지는 포백라인 중 김태영에게 포르투갈의 공격형 미드필더 주앙 핀투를,송종국에겐 왼쪽 날개 루이스 피구를각각 따라잡도록 했는데 이것이 맞아 떨어졌다.전반 27분 주앙 핀투가 박지성에게 백태클해 퇴장당한 것도 김태영의 철벽수비와 신경전의 결과로 볼 수 있다.사실상 다섯명의 수비수가 뛰는 것처럼 보인 변칙수비전형은 핀투가퇴장당한 뒤 스리백으로 바뀌었다.
―황선홍 대신 안정환이 선발출장하고 부상 후유증이 염려되던 박지성이 정상적으로 경기했는데.
히딩크 감독은 10일 미국전에서 골을 기록한 안정환의 상승세를 살리고 싶었다.또 상대 수비진의 핵이자 주장인 코투와는 세리에A에서 네 차례나 격돌한 경험이 있는 안정환을 좀 더 많이 뛰게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을 이겨야 자력으로 16강 진출이 가능했던 포르투갈이 초반부터 강하게 밀고 들어올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히딩크 감독은 일종의 맞불작전을 쓴것으로 보면 된다.박지성의 선발 기용은 경기 당일 오전 코칭스태프 회의에서 최종 결정됐다.히딩크 감독은 경기 전날 훈련을 정상적으로 소화한 박지성을 하룻밤을 지샌 뒤까지 상태를 지켜보겠다고 했는데 선발투입을 결정했다.박지성은 후반 24분 선취골을 터뜨려 히딩크 감독의 판단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전반 27분 주앙 핀투의 퇴장에 포르투갈 선수들이 주심에게 거세게 항의했는데.
핀투가 미드필드 오른쪽에서 드리블하는 박지성에게 백태클을 가한 뒤 양발로 박지성의 오른발을 묶여 쓰러뜨리는,명백한 퇴장성 반칙을 했다.전반 23분 설기현에게 한 반칙을 해 경고를 받았던 베투는 후반 20분 이영표에게위험한 태클을 해 경고 2회로 퇴장당해 이후 한국은 11대9로 수적인 우세 속에 경기를 벌였다.
―포르투갈이 후반 32분 안에 세 명의 교체선수들 모두 활용한 반면 한국은 후반 막판 안정환을 이천수로 교체하기만 했는데.
16강행의 기로에 놓인 포르투갈 올리베이라 감독은 베투의 퇴장 뒤 안드라제,사비에르를 투입해 수비를 강화하다 선취골을 내준 뒤엔 미드필더 페티트를 공격수 누누 고메스로 바꿔 동점골을 노렸다.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16강전에 대비해 팀워크를 강화하고 힘을 비축하기 위해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황선홍을 끝내 아낀 것과 후반 막판 안정환 대신 이천수를 투입한 것은 이때문이다.특히 이천수 투입은 시간을 끌면서 한 골이 급한 포르투갈의 기를빼놓으려는 의도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