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에 즉위한 예종은 남이를 죽이고싶을 정도로 시기하고 있었다. 예종은 수양대군의 차남으로 어
릴 때부터 아둔하고 용렬하여 왕재가 못되었지만, 형 의경세자가 요절한 덕에 어부지리로 보위에 오
른 인물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4녀 정선공주의 손자인 남이는 어릴 때부터 대궐을 제 집처럼 드나들
었는데, 용모‧됨됨이‧문무‧친화력 등 매사에 자기보다 뛰어나 비교가 되곤 했었다. 심지어 부왕인 수
양조차도 아들인 자신보다 남이를 더 총애했었다.
남이 장군은 수양 13년(1467) 8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평정비(平定碑)
를 세우고 그 뒷면에 <북정가(北征歌)>를 새겨두었다.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 바위는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男兒二十 未平國 사나이 20세에 나라를 평온하게 하지 못하면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대장부의 웅혼한 기백이 가슴을 탁 틔워주는 호방한 애국詩다. 수양이 죽자 훈구대신들은 수양이 임
명한 병조판서 남이를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다. 훈구대신들은 유자광을 포섭하여 제거방안을 수립하
도록 요청했다. 유자광도 새 임금에게 신임을 받을 묘책을 찾고 있던 중이었는데, 옹졸한 예종이 인
척인 남이를 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 참에 훈구대신들이 모의작당을 제의해왔
던 것이다. Call! 그는 즉각 잔머리를 가동했다. 남이의 <북정가> 중에서 ‘未平國’을 슬쩍 ‘未得國’으
로 바꿔 역심(逆心)을 품은 시로 조작했다.
옥사(獄事)가 벌어져 선혈이 낭자했다. 예종의 시기심과 훈구대신들의 기득권 고수, 그리고 간신 유
자광의 점수 따기 작전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참혹한 살해의 장이었다.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던
남이는 형리의 과도한 고신(拷訊)으로 양 무릎이 박살나자 죽음을 택했다.
“신이 자복하지 않은 것은 몸을 아껴두었다가 훗날 나라를 위해 오랑캐를 무찌르고자 함이었는데, 이
제 양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으니 무엇을 두려워하리까. 신이 반역을 꾀했으니 속히 죽여주시옵소서!”
“역신 남이를 속히 환열하라!”
남이의 자복이 떨어지자마자 예종은 다른 자들의 진술은 들어보지도 않고 싸잡아 처형을 명했다. 의
금부 앞마당에서 남이를 비롯하여 수양 재위 때 벼슬에 올랐던 신진 관료 26명이 한꺼번에 환열형(轘
裂刑)을 당했다. 목과 사지를 각각 황소가 끄는 수레에 묶어 몸통에서 분리하는 가장 잔인한 처형방
법이었다. 예종은 남이를 죽인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그의 어머니조차 끌어다 능지처참刑에 처했
다. 현재 춘천 남이섬에 있는 남이 장군의 무덤은 누군가 갈가리 찢긴 남이의 시신 가운데 한 부위를
몰래 모셔다가 장사를 지내준 흔적이다.
영웅을 무고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유자광은 익대공신 일등에 책록되어 무령
군 자헌대부에 봉해졌다. 왕족이 아닌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급이었다. 남이의 저택이 부상
으로 주어졌으며, 덤으로 남이와 함께 처형된 관료들의 아내와 딸들을 性노리개로 하사받았다. 그러
나 유자광의 새로운 ‘기댈 언덕’ 예종은 즉위 13개월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예종의 치적은 국가의 동
량인 남이와 그 동료들을 부당하게 처단한 일이 전부였다. 인수대비는 한명회와 결탁하여 자신의 둘
째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인 자을산군을 보위(성종)에 올렸다. 인수대비와 한명회가 의기투합하여
한 궁녀로 하여금 예종의 수라에 독을 타게 했다는 설이 잠시 떠돌았지만 유야무야되었다.
1471년 3월 성종이 즉위했다. 유자광은 역모로 고변을 받고 잠시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성종이
수렴청정을 물리고 친정에 들어가면서 김굉필‧김종직 등 사림파를 중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
하자 유자광은 다시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유자광은 사림파보다 한 발 앞서 한명회를 탄핵했다.
“한명회가 수렴청정을 거두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했습니다. 신하로서 역심이 없고서는 저지를
수 없는 망발이니 엄히 다스려주시옵소서.”
그러나 아직은 때가 일렀다. 주상의 장인인 한명회의 입김이 조정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히려 유자광
이 삼사의 탄핵을 받아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곧 해배되었다.
성종은 벌떼 같은 반대를 물리치고 유자광을 도총관(정二품)에 제수했다. 그러나 행패가 너무 심했
다. 유자광은 결국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공신직첩을 박탈당한 채 남원으로 유배되었다. 성종은 이번
에도 3년 만에 그를 해배하고 공신직첩을 돌려주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둔한 군주는 간신을
필요로 한다. 성종 14년(1485) 한명회가 은퇴하여 가장 강력하던 견제장치가 사라지자 유자광의 활
동반경이 더욱 넓어졌다. 유자광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자청하여 두 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
로 다녀오는 등 꾸준하게 경력을 다졌다.
재위 25년(1494) 성종이 승하하고 열여덟 살의 패기만만한 연산군이 즉위했다. 즉각 실록청이 설치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들어갔다. 사관으로 선발된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에 넣었다는 정보가 유자광의 귀에 들어왔다. 유자광은 어전회의에서 김종직의 문집을 꺼내 들고 열
변을 토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항우가 의제(=초나라 회왕)를 시해한 것처럼 수양이 단종을 시
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행위를 힐난하는 뜻이라는 해석이었다. 수양의 정통성을 부정하면 예종-성종-
연산군으로 이어져온 보위도 정통성이 없어지는 법, 다혈질인 연산군은 전후사정을 따져보지도 않고
유자광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즉각 국청을 열어 김종직 계열의 사림들을 결딴냈다. 김일손을 비롯한
수많은 관료들을 삭탈관직하고 참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에 처했다. 역사
는 이를 무오사화라고 한다.
무오사화로 훈구파의 대표주자가 된 유자광은 폐비 윤씨 문제로 훈구파가 대거 숙청된 갑자사화 때
도 줄타기를 잘하여 살아남았다. 이어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도 전광석화같이 반정파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수양의 눈에 띄어 관직에 오른 뒤 중종까지 5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리
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너무 많았다. 정권이 안정되자 중종 2년(1507) 4월,
삼사의 관원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반군수괴 박원종까지 유자광 탄핵에 가담하자 중종은 유자
광과 그의 자식, 손자 전원을 삭탈관직하고 전국 각지로 뿔뿔이 유배에 처했다. 얼자로서 온갖 영화
를 누린 간신의 말로 치고는 매우 후한 결말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우리 인생의 가을은 어느 정도인지 그 완숙과 풍기는 멋으로 가늠 된다지만 내세울것 없는 긴 세월만 보낸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만큼의 건강으로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인 삶을 엮어가는 평범한 일상이 대변하고 있는것 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의 풍경을 담아가는 감사의 마음으로 이 가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