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
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
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수 있는 나이에 스
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던 레너드 그 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첫 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속된 말로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던 거지요. 제 어머니 줄리아는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고,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오빠 토비와 언니 바네사, 저 그리고 동생 애드리안이 줄줄이 태어났지요.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서 아홉 명 아이와 두 어른이 아옹다옹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봉사정신이 무척 강한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구완하러 다니느라 정작 집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셨지요. 큰애가 작은애를 알아서 잘 돌보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 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 닥쳤죠. 어머니는 이웃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주던 이복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저와 언니 바네사가 신경질이 나날이 심해지시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것이야 뭐 그래도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붓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총 65권에 달하는 대영전기사전의 책임 집필자여서 집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했고,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 주셨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유서를 마지막으로 쓰고 강물로 걸어 들어간다. 돌멩이 몇 개를 주머니에 집어 넣고...
버지니아 울프가 떠난지 60년이 되었지만 여성의 처해진 상황은 지금도 그다지 변한 건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드럼 세탁기가 나오고 무선 다리미가 발명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명품냉장고를 앞에 두고 ‘여자라서 행복해요’라고 말하는 류의 착취 이데올로기만 강화시켰을 뿐이 아닌가. 권력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 관계를 엮어주는 기호만이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을 뿐이 아닌가. (장작) 아궁이에서 (수백만원짜리) 가스오븐으로.
너무나 서럽고 처연한 삶, 제1세계 백인여성의 상황이 그러하다면 다른 곳의 여성들은 어떠한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가 있겠는가.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이것은 버지니아가 꿈꿔온 유토피아일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를 누가 죽였을까? 그 절박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 차별과 폭력을 당연한 일상의 것으로 생각하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고 가끔씩은 거울에서도 볼 수 있는…바로 그 사람.
첫댓글우울증 ㄱㅣ억상실증, 환청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녀 버지니아 울프.. [The Hours]란 영화를 보면 서로 ㄷㅏ른 세대를 살아가는 세 ㅇㅕ인이 등장합니다. 나비샘께 강력추천해드리는 감명깊은 영화입니다. 버지니아울프역의 니콜키드만연기와 잔잔히 흐르는 피아노 소곡들.....그녀를 누가 죽였단 말인가..???
첫댓글 우울증 ㄱㅣ억상실증, 환청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녀 버지니아 울프.. [The Hours]란 영화를 보면 서로 ㄷㅏ른 세대를 살아가는 세 ㅇㅕ인이 등장합니다. 나비샘께 강력추천해드리는 감명깊은 영화입니다. 버지니아울프역의 니콜키드만연기와 잔잔히 흐르는 피아노 소곡들.....그녀를 누가 죽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