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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에서 당구장을 운영 중인 심성보(38). 현재는 건강이 호전돼 사업과 장애인야구팀를 지도하며 살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주년(周年)은 ‘일 년을 단위로 돌아오는 돌을 세는 단위’다. 주기(周忌)는 ‘사람이 죽은 뒤 그 날짜가 해마다 돌아오는 횟수’를 뜻한다. 올해로 SK는 창단 10주년을 맞는다. 반면 쌍방울 레이더스는 올해가 해체 10주기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러나 우리 곁에 분명하게 있었던 쌍방울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스포츠춘추>와 쌍방울을 기억하는 이들이 해체 10주기를 맞아 ‘돌격대’의 과거를 돌아봤다. 전설이자 역사이며 상처이자 교훈이었던 쌍방울을 통해 한국프로야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보자는 의도다.
<스포츠춘추>의 ‘쌍방울 위클리’는 1편 쌍방울 팬 박동찬 씨가 쓴 ‘지금은 사라진 돌격대를 위하여’ 2편 ‘돌격대의 마지막 거포, 심성보의 회상’ 3편 ‘쌍방울의 마지막 멤버들은 어디서 무엇을?’로 구성될 예정이다.
2000년 1월 7일 새벽 6시. 쌍방울 레이더스의 야수 심성보는 잠을 자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에겐 흔한 일이었다. 당뇨병에 걸린 이후 항상 혀와 입천장이 말라 있는데다 갈증까지 심해 자다 일어나 물을 찾는 날이 잦았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올 시즌만큼은 반드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결의가 지나쳐 자다 ‘번쩍’ 눈을 뜬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1998년으로 돌아가마. 쌍방울의 거포가 누군지 반드시 보여주마.’ 당시 심성보의 결의는 그랬다.
같은 시각. 서울 강남구 도곡동 한국야구위원회(KBO)회관 사무실의 팩스가 갑자기 둔탁한 기계음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팩스에서 A-4 용지 한 장이 얼굴을 내미는데. 용지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금일 자로 (주) 쌍방울은 KBO의 쌍방울 레이더스 법정퇴출을 받아들이기로 했음.’
아마추어 최고의 좌타자, 돌격대의 일원이 되다
1994년 가을. 단국대 졸업을 앞둔 심성보는 느긋하게 프로지명을 기다렸다. 그도 그럴 게 당시 그는 고려대 심재학과 함께 대학 최고의 좌타자로 꼽혔다. 어느 팀이든 그에게 많은 계약금을 안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불안했다. 그즈음 야구판에 해태(KIA의 전신)가 자신을 지명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신인 2차 지명에서 해태, 삼성, OB(두산의 전신) 가운데 한팀이 날 지명할 거란 이야기가 돌았다. 그때 솔직히 해태만은 가기 싫었다. 해태 자체가 싫었다기보다 해태 특유의 엄격한 선후배 관계와 사투리가 무서웠다.” 심성보의 고백이다.
말이 씨가 됐는지 해태는 그를 지명하지 않았다. 대신 쌍방울 레이더스가 그를 2차 1순위로 지명했다. 당시 심재학이 LG에 계약금 2억 1천만 원을 받고 입단한 터라, 심성보도 내심 그 정도 수준을 원했다. 그러나 쌍방울은 팀 사정을 내세우며 그보다 5천만 원이 적은 1억 6천만 원을 제시했다. 사실 그 돈도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계약액이었다. 결국, 그는 쌍방울 유니폼을 입으며 파란만장한 프로생활을 시작한다.
득점권 타율이 유난히 좋았던 심성보는 쌍방울 시절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된 중장거리 타자였다(사진=쌍방울 팬클럽) |
프로초년생이었던 그에게 쌍방울의 첫인상이 어땠는지 물었다.
“고등학교팀인 줄 알았다. 실제로 주변에서 ‘쌍방울 고등학교’라고 불렀다. 그만큼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다.”
당시 쌍방울은 해태 다음으로 군기가 셌다. 신생팀 쌍방울이 다른 팀보다 군기가 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초창기 쌍방울엔 해태 출신 선배들이 많았다. 해태 때 ‘매’로 후배들의 기강을 잡던 분들이 쌍방울이라고 조용히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보단 은퇴를 앞둔 노장 선배들이 이 팀 저 팀에서 온 게 군기가 세진 가장 큰 배경이었다.”
선수층은 얇으나, 투자엔 인색했던 쌍방울은 주로 전성기를 지난 노장들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전력강화를 꾀했다. 그 바람에 선수단 평균 나이가 수직으로 상승했다. 쌍방울 선수들 사이에서 “입단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막내”라는 자조 섞인 불평이 터져 나온 것도 신인보다 노장 선수 영입을 열심히 하였던 구단의 정책 때문이었다.
쌍방울 고등학교로 불린 또 다른 배경은 부족한 구단 지원이었다.
“쌍방울도 프로였던 만큼 지원과 대우는 아마추어보다 나았다. 그러나 다른 프로구단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심성보는 지금도 구단버스를 잊을 수 없다. 당시 쌍방울 구단버스는 일반 관광버스를 그대로 사용한 통에 2명이 나란히 앉아야 했다. 심성보처럼 신참은 서울, 인천 원정 경기라도 마치면 선배의 몸부림을 피해 몸을 바싹 창가에 기댄 채 몇 시간이고 칼잠을 자야 했다. 피로가 풀리기는 고사하고 피로가 가중되기만 했다. 어쩌면 쌍방울의 가난한 살림살이는 이미 예견된 것인지 몰랐다.
제8구단 쌍방울의 탄생과 한계
1985년 1월 제7구단 창립 승인을 얻은 빙그레 이글스(한화의 전신)가 1986년부터 리그에 참가한 이후 프로야구는 4년 동안 홀수 팀으로 운영됐다. 이 바람에 하루에 한팀은 ‘개점휴업’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이 같은 절름발이식 경기일정을 바로 잡으려고 제8구단의 창설은 발 빠르게 추진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89년 2월 이사회에 제8구단 창설에 관한 안건을 내걸고 “제8구단은 1990년 창단, 1991년 정식 출범한다”는 원칙을 정한다.
이후 3월 구단주들은 회의를 통해 연간 5천억 원 이상의 매출액을 기록하는 기업과 3만 5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 신축, 야구연맹 가입비 50억 원을 낼 수 있는 기업을 구단창설 대상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1990, 1991년 2년에 걸쳐 신인 2차 지명 드래프트 때 10명씩의 우선지명권을 주고 기존 구단에서도 주전 22명을 제외한 나머지 보류선수 가운데 2명씩을 지명 트레이드하게 한다는 선수지원방안을 아울러 마련한다.
제8구단 창단 추진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곳은 전라북도였다. 전북애향운동본부를 비롯하여 전주와 군산, 이리, 정주 상공회의소 등 5개 상공인단체가 전북연고의 프로구단 창립을 요망하는 건의서를 KBO에 제출한다.
특히나 전북 연고의 ‘내의 업체’ 쌍방울이 미원과 7:3 공동출자 방식으로 프로 구단 창단신청을 공식 제출하며 제8구단 창단은 급물살을 탄다.
여기서 변수가 돌출한다. 한일그룹이 경상남도 마산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구단 창단 신청서를 제출한 것이다. 당시 한일그룹은 누가 봐도 회사규모와 지명도,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쌍방울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윽고 제8구단 창단 기업을 선정하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4월 10일 쌍방울-미원연합기업이 전북에 창단신청을 공식으로 제출했지만, 한일그룹은 “굳이 표 대결까지 벌이며 유치할 의사는 없다”며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선 것이다.
그로부터 3달 뒤인 7월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임시구단주 총회에서 구단주들은 표결 끝에 재적수 2/3의 찬성으로 마침내 전북에 연고를 둔 쌍방울에 구단 창설권을 부여한다.
1990년 3월 31일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식 장면. 사진 오른쪽 구단기를 잡은 이가 김인식 초대 감독이다(사진=쌍방울 팬클럽) |
쌍방울의 창단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김인식 해태 수석코치와 교섭해 11월 14일 초대 감독으로 정식 계약하고, 기존구단으로부터 김평호(해태), 손문곤 조용호(이상 빙그레), 유동효(태평양), 진동한(삼성), 한오종 이승희(OB), 이재홍(MBC), 이창원(롯데)을 지명 트레이드한다.
그즈음 야구계 일부에서 쌍방울을 1990년부터 당장 1군 리그에 편입시켜 정상적인 정규시즌을 치르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당사자인 쌍방울은 준비가 늦은데다 정규시즌을 치를 만한 선수층이 구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난색을 나타낸다. 이에 KBO는 애초 계획대로 쌍방울에 1990년에는 2군 리그에서 전력을 쌓고, 이듬해인 1991년부터 1군에 가담하도록 지시한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쌍방울의 창단 이면엔 불안의 싹 또한 트고 있었다. 바로 쌍방울과 공동출자하기로 약속한 미원이 창단 이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것이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쌍방울은 당시 가입조건인 연간매출액 5천억 원에 미달하자 자격요건을 갖추려고 미원을 설득, 대외적으로 공동출자를 공표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쌍방울은 처음부터 실탄이 부족한 채 프로야구판에 뛰어든 셈이었다.
'게으른 천재', 김성근과 만나다
1995년 심성보의 데뷔시즌은 평범했다. 아니 그 이하였다. 주변의 높은 기대와는 달리 타율 2할3푼4리, 7홈런, 31타점에 그쳤다. 심성보는 “아마추어와 프로는 확실히 달랐다”라고 말한다.
아마추어에게선 천부적인 재능만으로도 좋은 성적이 가능하지만, 프로는 후천적인 노력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해 쌍방울은 심성보의 개인 성적만큼이나 성적이 저조해 45승 3무 78패를 기록하며 전해에 이어 2년 연속 꼴찌에 머문다.
선수나 팀이나 미래가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성보야. 앞으로 난 여기에 못 있을 것 같다.” 훈련도중 모 코치가 심성보를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는 억대 계약자 심성보의 전담코치 노릇을 하던 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에 못 있을 것 같다니요.” 심성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김성근 감독이 새로운 사령탑으로 올 것 같다”고 말한다.
‘김성근이라, 김성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냥 유명 야구인 정도로 생각했다. 심성보가 주변 이들에게 김성근이 어떤 인물인지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대단히 무섭고, 어마어마하게 훈련량이 많은 이”였다.
1995시즌이 끝나고 김우열 감독대행이 물러난다. 1991년 프로 무대에 뛰어든 이후 5년 동안 꼴찌 3번을 포함, 해마다 6위 이하의 성적을 거두며 쌍방울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쌍방울은 노장 선수들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팀이었다. 재미난 건 현 프로야구 지도자 가운데 쌍방울 출신이 가장 많다는 점이다(사진=쌍방울 팬클럽) |
쌍방울은 김우열의 후임으로 김성근을 내정하고 신인 스카우트에 전해보다 4배나 많은 15억여 원을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며 선수단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김성근 신임감독은 소문대로 훈련귀신이었다. 김 감독은 1995년 11월부터 5개월 동안 일본 오키나와에서 진행한 지옥훈련을 통해 쌍방울의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상상도 못할 훈련이 계속됐다. 타자들은 손바닥이 찢어져 스윙할 수 없는데도 감독님 앞에서 다시 수천 번씩 배트를 휘둘렀다. 내야뿐만 아니라 외야 펑고도 하루 1천 개 이상씩 받았다. 오죽 힘들었으면 휴식일에도 어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만 무리하게 놀아도 다음날 몸이 얼마나 힘들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심성보는 대학시절 한 번도 동계훈련을 받지 않았다. 갖가지 꾀병을 부려 열외 했다. 프로 입단 뒤에도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대충 훈련했다. 그런 심성보에게 김성근 감독은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처음엔 감독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그런데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꾸준히 하다보면 그렇게 안 되는 것도 결국엔 잘 되기 마련이었다.”
1996시즌을 앞두고 많은 야구전문가가 쌍방울을 최하위로 꼽았다. 쌍방울이 시즌 개막전이었던 광주 해태 2연전을 승리로 거뒀을 때도 ‘우연’이라는 반응이 대세였다. 그러나 4월 26일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1위에 오르며 쌍방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른다.
“지난해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SK 선수들이 ‘KIA에 져서 분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 운동한 게 아깝고 억울해서 분했다’고 말한 걸 들었다. 1996시즌 쌍방울이 꼭 그랬다. 우리는 4강에 오르리란 예상도 못 했지만, 떨어지리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0대 10, 0대 5로 지고 있어도 언제든 따라갈 수 있다는 집념으로 경기마다 온 힘을 다했다. 설령 지면 그동안이 악물고 운동한 게 억울하고 아까워서 잠이 오질 않았다.”
팀 연승 기록이 5승이던 쌍방울은 고비마다 4연승(4월), 8연승(6월), 13연승(8월), 6연승(9월)을 일구며 승승장구한다. 전주팬들은 모처럼만에 패배의식을 떨치고 구장을 찾아 신나는 응원을 보여줬다. 전주구장은 사상 처음으로 20만 관중을 훨씬 웃도는 27만 명(전년 대비 40% 증가)을 기록해 선수들을 신명나게 했다.
특히나 오랫동안 해태를 연고지 팀으로 생각했던 전주팬들은 이때를 시작으로 쌍방울을 홈팀으로 받아들인다.
“1996년 전까지 전주구장에서 해태와 경기하면 누가 홈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서울 연고팀인 LG와 전주에서 맞붙어도 우리보다 LG 팬이 더 많을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 1996년 2위를 하기 전까지 쌍방울 팬 자체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선수단 선전을 보고 구단에서도 조금씩 지원의 강도를 높인다.
“경기 전 라커룸이 없어 주변 테니스 코트에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빨래도 누가 해주는 이가 없어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이 입던 옷을 집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성적이 좋아지자 구단에서 라커룸도 짓고, 빨래 서비스도 해주기 시작했다.”
쌍방울의 기적을 이끈 김성근 감독. 어디 그가 이룬 기적이 쌍방울뿐이겠는가(사진=쌍방울 팬클럽) |
쌍방울 돌풍의 중심은 단연 김성근 감독이었다. 1995년 마무리 훈련부터 ‘한 베이스 더 가는 공격’을 강조한 김 감독은 중간계투진과 수비 강화를 통해 전년도 45승에 머물렀던 승수를 70승으로 불리는 기적을 연출했다.
마침내 쌍방울은 70승 2무 54패로 해태에 이어 시즌 2위에 오르며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꺾은 현대만 이기면 한국시리즈를 해태와의 ‘호남시리즈’로 치를 수 있었다.
5전 3선승제의 플레이오프에서 주도권을 잡은 건 쌍방울이었다. 먼저 2승을 올렸다. 그러나.
“당시 현대는 리그 최고의 부자구단이었다. 그래서인가. 이상하게 3차전부터 심판 판정이 석연치 않았다. 선수들 사이에서 ‘저래도 되는 거냐’고 발끈할 만큼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이 이어졌다. 그러다 조금씩 경기가 말리기 시작했는데 결국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꼬이고 말았다.”
2연승 뒤 충격의 3연패로 쌍방울은 한국시리즈 문턱에서 좌절하고 만다. 당시 야구계에선 이를 두고 뒷말이 무성했다. ‘현대가 돈으로 이겼다’는 말이 대표적이었다. 그로부터 11년 뒤 현대가 돈이 없어 해체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돌풍의 끝은 폭풍 IMF 여파로 모기업 쌍방울이 부도처리되고, 야구단 존립마저 불투명해지자 전북지역 야구팬과 쌍방울 임직원들이 전주구장에 모여 "쌍방울 회생"을 부르짖고 있다(사진=쌍방울 팬클럽)
1996년에 이어 이듬해인 1997년에도 쌍방울의 돌풍은 계속 된다. 71승 2무 53패로 다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것이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1승2패로 패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엔 실패했지만, 쌍방울의 2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은 시즌 초부터 끊이지 않았던 부상선수 속출과 팀 매각계획 발표 등 온갖 악조건을 딛고 거둔 기적이었다.
심성보의 성장도 꾸준했다. 이해 그는 타율 2할6푼9리, 15홈런, 73타점을 기록하며 확실한 주전 타자로 발돋움한다. 야구전문가들이 심성보를 가리켜 ‘차세대 김기태’로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러나 쌍방울의 기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IMF 여파로 모기업인 쌍방울이 부도 처리되면서 1997년부터 논의됐던 팀 매각이 1998년에 이르러 공식 추진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팀 운영자금 마련을 위한 ‘선수 팔기’ 역시 시작된다.
“1997년 말이었을 거다. 신문에서 ‘마이클 잭슨이 무주리조트를 산다’는 기사를 봤다. 당시 무주리조트면 모기업 쌍방울의 핵심 사업이었다. 그런 사업체가 외국에 팔리게 생겼다면 뻔한 일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회사가 힘들다는 걸 알았다.”
‘어렵다’는 말을 입에 달았어도 쌍방울의 선수단 지원은 해태보단 좋은 편이었다. 1997시즌까지 메리트 시스템도 있었고, 연봉도 박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IMF 이후 모든 것이 돌변했다.
쌍방울 '선수 팔기'의 출발은 박경완(SK)부터였다. 박경완은 지금도 쌍방울 팬들과 만나 고마움을 전하기도 한다고(사진=쌍방울 팬클럽) |
쌍방울의 ‘선수 팔기’의 출발은 2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자인 포수 박경완부터였다. 중심엔 부자구단 현대가 있었다. 1996시즌을 앞두고 현대는 박경완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쌍방울에 현금 9억 원을 안겼다. 시즌 도중에도 현대는 특급 마무리 조규제를 영입하는 조건으로 쌍방울에 현금 3억+전주구장 광고협찬 3억+가내영, 박정현을 내줬다.
주축 선수들의 이탈로 만신창이가 된 쌍방울은 이해 58승 2무 66패 2무의 성적으로 6위에 그친다. 타율 2할6푼9리, 24홈런, 86타점으로 팀 공격을 이끈 새로운 ‘4번 타자’ 심성보의 맹활약이 있었기에 그나마 꼴찌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영비가 바닥난’ 쌍방울에 성적은 더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1999시즌을 앞두고 쌍방울은 운영비 마련을 위해 팀 공수의 중심인 김기태와 김현욱을 삼성에 현금 20억 원을 받고 트레이드한다. 당시 쌍방울의 고위층 인사는 김기태 트레이드를 두고 걱정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기태의 공백은 심성보가 확실하게 메울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불운의 시작
1996년 6월 23일 대구 삼성-쌍방울 전에서 쌍방울 투수 박진석의 빈볼성 투구에 화가 난 삼성 이만수(현 SK 수석코치)가 박진석의 뒤를 쫓고 있다(사진=쌍방울 팬클럽) |
1998년 최고의 한 해를 보낸 심성보는 자신감에 충만했다. 해마다 성장하는 자신을 보며 대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민 탓에 머리가 아팠다. 군대 문제였다. 현역 입영대상자였던 심성보는 법이 허용하는 내에서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자 그의 말마따나 ‘별짓’을 다한다. 굳이 손대지 않아도 될 어깨까지 수술했다.
하지만, 군 면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입대를 기다릴 즈음. 우연히 받은 검사에서 ‘당뇨 수치가 높다’는 사실을 안다. 할머니, 아버지가 당뇨병을 앓는지라, 심성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병무청에 진단서를 제출한다. 결과는 군 면제.
“어린 마음에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무척 기뻤다. 그런데 이게 웬걸. 심각하지 않은 줄로만 알았던 당뇨 증상이 갑자기 심해지지 뭔가.”
심성보는 “하루에 살이 1kg씩 빠졌다”고 했다. 85kg이던 체중이 1달이 채 안 돼 65kg으로 줄었다.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그나마 먹은 건 죄다 소변으로 나왔다. 혓바닥에 침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곤 했다. 뛰면 힘들고, 체력은 반으로 ‘뚝’ 떨어졌다.”
김성근 감독은 그런 심성보에게 특별 배려를 했다. 훈련 일정도 따로 짜고, 휴식도 충분히 제공했다. 하지만, 김 감독의 뜻을 헤아리기에 심성보는 젊고 어리석었다.
심성보는 전라도 사투리를 무서워하던 충청도 청년이었다. 그러나 쌍방울에서 뛰며 그는 전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고, 전북 야구팬들에게서 '정'을 배웠다. 지금도 그는 전주를 그리워한다(사진=쌍방울 팬클럽) |
심성보는 당시 자신을 “야구는 좋아했어도 운동은 싫어했던 선수”로 평했다.
모 야구해설가는 “심성보가 야구보다 운동을 더 좋아했다면 한국 야구사에 큰 획을 그었을 선수”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 두 가지를 주지 않았고, 그 역시 원하지 않았다.
심성보가 당뇨병으로 선수생활의 내리막을 달릴 때 쌍방울 역시 조금씩 역사의 심연을 향해 침몰하고 있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쌍방울과 심성보
1999년 11월 쌍방울 김종철 구단주는 박용오 KBO 총재를 만나 “더는 팀을 꾸릴 능력이 없다”라고 밝힌다. 사실이었다.
쌍방울은 만신창이 상태였다. ‘선수 팔기’에 그치지 않고 2차 1번으로 지명한 대전고 출신의 투수 마일영의 지명권을 현대에 5억 원을 받고 팔기까지 했다. 3년 연속 직원들은 보너스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월급이 밀리는 건 예사였다.
선수들은 호텔 대신 모텔에서 자야 했고, 간혹 에어컨이 고장 난 모텔에 묵는 바람에 방 대신 옥상과 평상에서 자는 선수도 속출했다. 숙박비 절약을 위해 대전과 광주 경기는 당일치기로 소화했고, 음식은 동네 식당을 이용했다.
2000년 1월부터는 아예 선수들에게 음식도 제공되지 못했다. 선수들은 훈련이 끝나고 샤워조차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말이 프로야구팀이지, 실업팀보다 더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쌍방울은 야구단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구단을 넘기는 조건으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아내겠다는 게 그들의 계산이었다. 특히나 당시 SK가 창단을 고려했던 터라, 쌍방울은 버티면 버틸수록 SK만 불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SK는 “쌍방울 인수가 아닌 창단을 통해 프로야구에 참여할 것”임을 분명히 밝히며 쌍방울의 버티기에 제동을 건다.
쌍방울이 해체된 뒤 여러 해가 지나도록 마스코트였던 '방울이'는 전주구장 구석에 방치됐다. 지금도 그 사체마저 사라진 상태다(사진=쌍방울 팬클럽) |
결국, 2000년 1월 7일 쌍방울은 KBO에 팩스로 항복을 선언한다. ‘돌격대’ 쌍방울의 짧다면 짧은 9년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는 장면이자, ‘돌격대’의 마지막 거포 심성보의 새해 다짐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해 SK는 자유계약선수 영입의 형태로 쌍방울 소속 선수들을 흡수해 ‘SK 와이번스’라는 이름으로 창단식을 한다. 심성보도 자연스럽게 쌍방울에서 SK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나 실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2000시즌 심성보는 20경기에 출전해 타율 1할5푼2리, 2타점의 초라한 성적을 거둔 뒤 방출된다. 당시 SK는 당뇨병으로 심성보의 선수생명이 다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심성보의 생각은 달랐다. 충분히 재기 가능하다고 자신했다.
“‘SK 아니면 갈 팀이 없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오라는 팀도 있었다. 하지만, 몇몇 구단에서 그즈음 잠실구장에서 쓰러진 롯데 임수혁 선배를 예로 들며 ‘심성보가 제2의 임수혁이 될 수 있다’고 말한 통에 날 영입하겠다는 팀이 ‘싹’ 사라졌다.”
선수생활에 미련이 남았던 심성보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당시 제주도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던 김성근 LG 2군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감독은 그때나 지금이나 선수들 사이에서 ‘지푸라기’로 통한다. 김 감독이 전화를 받자마자 심성보가 내뱉은 첫마디는.
“감독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였다.
김 감독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당장 제주도로 내려오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게”하는 말과 함께.
2001년 LG로 이적한 심성보는 97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7푼9리, 2홈런, 34타점을 기록하며 쏠쏠한 활약을 선보인다. 야구계 일부에서 그의 재기를 성공적으로 평가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김 감독님이 2군에서 처음부터 다시 지도해주셨다. 금요일 야간경기 뒤 토요일 주간 경기 때는 경기 시작 30분 전까지 ‘푹’ 자도록 배려하셨다. 그런 배려 덕분에 조금씩 예전의 감각을 찾을 수 있었다.”
SK에서 방출되고 심성보는 LG-삼성을 거친 뒤 조용히 야구계에서 사라졌다(사진=쌍방울 팬클럽) |
하지만, 2002시즌 LG 외야수의 주전 자리는 '기대주' 박용택의 몫이었다.
“2003시즌을 도약기로 삼았지만, 2002년 김 감독님이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고도 해임되는 바람에 나 역시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2003년 심성보는 삼성으로 이적한다. 그리고 그것이 선수생활의 마지막이었다.
‘돌격대의 마지막 거포’, 심성보의 마지막 꿈
2003년 조용히 야구계를 떠난 뒤 한동안 심성보는 야구장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다. 아니 야구의 ‘야’만 들어도 스트레스가 쌓여 병이 악화했다.
“현역시절 스타였거나, 아예 무명이었다면 모른다. 그랬다면 아쉬움이 남을 리 없다. 그러나 당뇨병에 걸리기 전 나는 한창 치고 오르던 선수였다. 조금만 분발하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다. 가끔 TV로 야구 중계를 보다 ‘내가 야구장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지’하는 생각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럴 때면 당뇨병만 더 악화할 뿐이었다.”
심성보는 야구계를 떠난 뒤 가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무척 힘든 시기를 겪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생활에 전념하다 보니 야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심성보는 “2010년 1월 7일이 쌍방울의 해체 10주기”라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쌍방울 시절 전주 야구팬들을 떠올리며 “좋은 분들이었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쌍방울이 해체하고 ‘딱’ 한번 전주에 갔다. 고등학생 때부터 내 팬이었던 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전주구장까진 둘러보지 못했다.”
전주구장에서 언제쯤 우렁찬 "플레이 볼"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전광판은 오늘도 침묵만 지킬뿐이다(사진=쌍방울 팬클럽) |
심성보가 잊고 있던 쌍방울을 다시 떠올린 건 지난해 연말 히어로즈의 ‘선수 팔기’를 보면서였다.
“항간에서 주축선수가 빠지면 더 많은 선수에게 기회가 갈 거라고 하는데, 그건 착각이다. 좋은 선수가 빠져나가면 팀 전력이 약화하고, 결국 고만고만한 선수만 자랄 뿐이다. 주축 선수가 남아있어야지 그 선수를 보며 성장하는 선수가 나오고, 팀 전력이 강해야 개인의 능력도 더 발전할 수 있다.”
심성보는 현재 충청남도 천안에서 스포츠용품점과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는 야구와도 화해해 장애인야구팀을 지도하며 바쁘게 하루를 보낸다. 심성보는 소박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고 했다. 그게 뭔지 궁금했다.
"사업이 잘 돼 김성근 감독님을 다시 뵙고 싶다. 마음 같아선 명절 때마다 찾아뵙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질 못했다. 지금보다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감독님을 찾아뵐 생각이다. 저, 감독님은 건강하게 잘 계시나?"
지금은 사라진 '돌격대'를 기억하는 야구팬의 마음이 심성보와 같을 것이다. 심성보가 김성근 감독에게 애잔한 감정을 품고 있듯, 많은 야구팬이 쌍방울을 그리워한다. 쌍방울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다.
첫댓글 사실,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김성근씨의 말 한 마디를 주워듣고 내가 발전한 경험이 있다. 많다. 자동으로 그의 팬이 됐다. 그를 더 알아갈 수록 그의 야구인생이 과소평가내지는 왜곡되는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