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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1호 : 홍천물걸리석조여래좌상(洪川物傑里石造如來坐像) 1971.07.07 지정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소재의 대승사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으로 얼굴은 마멸이 심해 세부표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것 같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표현이 분명하지 않다. 옷은 양 어깨에 걸치고 있고, 가슴에는 띠모양의 매듭이 보인다. 어깨는 둥글지만 두껍고 투박하게 보이고, 상체는 평판적이고 왜소한 편이어서 당당한 양감이 사라져버린 모습이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놓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분된 8각형으로 하대에는 각 면마다 무늬가 있고, 향로와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은 8각의 각 면에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고, 상대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파손으로 인해 신체표현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장식성이 강조되는 9세기 중엽 이후의 전형적인 대좌 양식을 보여주고 작품이다.
제542호 : 홍천물걸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洪川物傑里石造毘盧舍那佛坐像)
대승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외에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불대좌 및 광배 4기가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크게 솟아 있다. 약간 고개를 숙인 얼굴은 풍만하지만 턱이 뾰족하여 단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긴장감이나 탄력적인 모습이 사라진 채 다소 투박하고 무겁게 늘어진 모습이 역력하다. 옷주름은 어깨에서 두 팔을 거쳐 무릎에까지 나타나 있으나 평행선으로 되어 약간 형식적으로 처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손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손모양과는 반대로 되어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8각 연화대좌로 상대·하대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에는 부처에게 공양을 드리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향로 등이 새겨져 있다.
양감이 없는 평판적인 신체, 긴장감이 사라진 무겁고 해이한 옷주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제543호 : 홍천물걸리불대좌(洪川物傑里佛臺座)
대승사에 있는 이 불대좌(佛臺座)는 불상은 없어지고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대좌는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구분이 뚜렷한데 현재 머리광배 부분은 없어졌으며, 안쪽에는 덩쿨무늬를,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표현하였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 대좌로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에는 향로와 새 모양의 조각이 있는 8각의 받침돌 위에 아래로 향한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석이 놓여 있다. 중대에는 8개의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을 새기고, 그 안쪽에 머리광배를 갖춘 보살입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을 이루고 있는 상대는 연화좌로 3중의 연꽃이 조각되었는데, 연꽃잎 안에 다시 꽃무늬를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제544호 : 홍천물걸리불대좌및광배(洪川物傑里佛臺座및光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대승사에 있는 것으로, 불상은 없고 광배와 대좌만 남아 있다.
완전한 배(舟) 모양의 광배는 가운데에 연꽃무늬와 덩쿨무늬가 새겨지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모양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윗부분과 좌우 등 9곳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는데 각기 손모양을 달리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광배를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는 3단으로 구성된 8각 모양이다. 맨 아래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각 면에 새겨져 있고, 모서리에는 작은 귀꽃이 있다. 중간의 각 면에는 불상과 악귀를 쫓아준다는 신장상이 새겨져 있다. 대좌의 맨 윗부분은 연꽃이 활짝 핀 반원형 모양이고 연꽃 안에 작은 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광배 및 대좌의 양식이 9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것들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제545호 : 홍천물걸리삼층석탑(洪川物傑里三層石塔)
물걸리 절터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이다. 절터에 남아있는 많은 유물들로 보아 이전에는 이곳이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세운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2층은 5단이나, 3층은 4단으로 줄어들었다.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모서리선이 뚜렷하여 끄트머리에서의 들림도 날카롭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지고 이를 받쳐주는 노반(露盤)만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탑이나, 기단 각 면의 가운데기둥이 하나로 줄어든 것이라든지, 3층에서의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 아래층과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한 점 등으로 보아 시대가 조금 떨어지는 9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인다.
제546호 : 청풍석조여래입상(淸風石造如來立像) 청풍문화재단지
제547호 : 예산김정희종가유물(禮山金正喜宗家遺物)
제548호 : 퇴도선생필법1책부퇴도선생유첩(退陶先生筆法一冊附退陶先生遺帖) 안양
『퇴도선생필법』은 조선 명종 11년(1556)에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그의 제자인 송암 권호문(1532∼1587)에게 글씨체본으로 써준 것이다. 대, 중, 소자의 크고 작은 체와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체를 따로 구분하여 썼다. 이것은 표지를 제외하고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해서체가 13첩, 행서체가 14첩, 작은 해서가 6면, 작은 초서가 4면, 중간 초서가 2면, 또 행서가 3행이고 그 다음에 2장이 떨어져 나가고 끝에 또 작은 해서 1첩이 있다. 맨 뒷장에 ‘낙인구서첩’이란 제목 아래에 당시唐詩) 9행이 있으나 퇴계의 글씨가 아닌 듯하다.
『퇴계선생유첩』은 2책으로 장첩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퇴계선생이 권호문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놓은 것이다.
제548-2호 : 이황 필적-선조유묵첩(李滉 筆蹟) : 진성이씨 상계종택
이들 서첩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자손에게 보낸 서한을 비롯하여 자신의 시문 원고, 타인의 저작을 베낀 것, 당송의 시를 서예적으로 쓴 것 등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필적을 모은 것으로 표지에 ‘선조유묵(先祖遺墨)’으로 제목이 되어 있다. 표지 숫자가 “卄三”까지 되어 있어 원래 23첩 이상이었으나 현재 제2, 7, 10, 21, 22첩은 없고 18첩만 전한다. 각 면 왼쪽 상단에 장수(張數)가 표시되어 있다. 제13첩 말미에 1565년에 손자 안도(安道)에게 여러 잠명(箴銘)을 써주었다는 이황의 글이 실려 있듯이 곳곳에 [이안도장(李安道章)]이란 인영(印影)이 있으며, 제12첩과 제18첩 말미에 9대손 이지순(李志淳)의 발문이 있다.
제549호 : 권주종손가문서(權柱宗孫家文書) 안동시(한국국학진흥원 보관)
연산군 때의 학자인 화산 권주(1457∼1505)선생의 종손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문서들이다.
권주는 성종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중국어를 잘하여 요동에 질정관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후에 도승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연산군 10년(1504)에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평해로 귀양한 뒤 극형을 당하였다. 중종반정이 있은 후 우참찬에 추증되면서 억울하게 되집어 쓴 누명을 벗게 되었다.
문서는 2건으로 하나는 「한성부황화방소재가대매매문서」이며, 다른 하나는 「재산양도문서」이다. 이 두 문서는 조선 전기의 경제 및 가족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549-1호 : 권심처손씨분금문기(權深妻孫氏分衿文記)
제549-2호 : 한성부황화방소재가대매매문서(漢城府皇華坊所在家垈賣買文書)
제550호 :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 (재)아단문고
이 책은 조선 세종 때 유학의 대가인 양촌 권근(1352∼1409)이 지은 목판본으로, 그는『양촌집』이외에『입학도설』,『오경천견록』을 지었다. 권근은 공민왕 17년(1368)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이 커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인쇄판의 양식은 매우 고형으로 행간에 계선(界線:투영도에서 정면과 평면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횡선)이 없고, 글씨체는 고려시대의 간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양순체에 가깝다. 또한 서문과 발문이 없고, 다만 권마다『주역천견록』이라는 표제 다음줄에 ‘양촌후학권근저’라고 하고 있고, 다음에 첫권은 「역설상경」, 둘째권은 「역설하경」, 끝권에는 「역설계사」로 표시하였다. 처음에는 한 권으로 되어 있던 것을 소장자가 3권으로 나누어 놓았다.
『주역천견록』은 권근의 성리학적 사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제551호 :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재)아단문고
향악의 악보를 기록한 악보집으로 1권 1책이다. 향악(鄕樂)이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하던 궁중음악의 한 갈래로, 삼국시대에 들어온 당나라 음악인 당악(唐樂)과 구별되는 한국고유의 음악을 말한다.
악장을 비롯한 민요, 창작가사 등의 악보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악보가 있는 가사(歌詞) 총 26편이 실려 있다. 1장에만 수록되어 있는 26편의 가사 중에 「상저가」, 「유구곡」을 비롯한 16편은 다른 악보집에 전하지 않아 제목조차 알려지지 않은 고려가요이다. 새로이 발견된 16편에는 순 한문으로 된 「생가요량」, 한글로 된 「나례가」, 「상저가」등이 있고, 「구천」, 「별대왕」등과 같이 가사가 아닌 ‘리로노런나 로리라 리로런나’와 같은 여음(餘音)만으로 표기된 것도 있다.
이 책의 앞부분 4장은 원본이 아니라 영인본을 베껴 쓴 것인데, 아마도 1954년 연희대학교에서 이 책을 영인 출판하기 위해 책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원본의 앞부분 4장이 없어진 듯하다. 만들어진 시기와 펴낸 사람을 알 수 없으나, 다만 조선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552호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재)아단문고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송나라 주희가 사마광이 지은『자치통감』에 대해, 춘추(春秋)체재에 따라 사실(史實)에 관하여 큰 제목으로 강(綱)을 세우고 그 사실의 기록을 목(目)으로 구별하여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이다.
세종은 이 책을 애독하여 집현전 문신에게 훈의(訓義)를 만들게 하는 한편, 세종 20년(1438)에 이를 간행토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강(綱)에 사용한 큰 글자는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명하여 주조한 병진자로, 중간글자와 작은글자는 갑인자로 찍어『훈의자치통감강목』을 간행하였다.
이 판본은 총 139권 권19하(下)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뒤에 간행된 책들은 병진자의 원래 활자를 쓴 것이 없고 거의 목판본으로 바뀌었는데, 이 책은 그 유일한 활자본으로 보물 제5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책 맨 끝장에 ‘옥연묵장’이라는 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북 안동에 있던 옥연재라는 서애 유성룡 선생의 서재에 소장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제553호 : 예안이씨충효당(禮安李氏忠孝堂) 안동시 풍산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고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문 바깥에 평행하게 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뒤에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간에 비하여 넓고 튼튼한 문틀을 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이 많아 흥미롭다.
서쪽에는 一자형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가진 ‘쌍수당’이라는 별당이 있다. ‘쌍수당’이란 충과 효를 한 집안에서 다 갖추었다는 의미로, 이홍인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한 충의를 기리고 그 후손 한오의 지극한 효를 기리는 것이다.
제554호 : 태고정(太古亭) 대구 달성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제555호 : 평저주형토기(平底舟形土器) 리움박물관
배 모양을 본 뜬 토기로 높이 9.1㎝, 길이 27.9㎝의 크기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다른 것들에 비하면 긴 편이고 바닥 또한 수평으로 길다.
전체의 모양은 거의 좌우 대칭을 이루었고 양쪽 배 끝 부분은 길게 연장되다가 끝이 높게 들려서 반원형을 이루었다. 이 반원형 부분에는 구멍이 2개씩 있으며, 배 끝 부분에는 거의 다 부러졌지만 노를 걸었던 꼭지가 여러 개 달려있다. 배 안에는 좌우로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3곳에 칸막이가 있어서 사공이 이곳에 앉아 노를 젓게 되어 있다. 배 좌우 바깥 측면에는 지그재그형으로 점선이 반복되어 전체에 새겨져 있다. 어두운 녹갈색의 자연 유약이 선체의 양면에 일부 씌워져 있다.
이 배 모양의 토기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운반하는 신앙의 표현으로, 무덤 속에 묻었던 의식용 그릇의 하나이다.
5∼6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출토지를 알 수 없으나, 고대 선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제556호 : 토이(土履) 리움박물관
신발 모양을 한 길이 23.5㎝, 너비 6.8∼7.2㎝의 토기이다. 삼국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금속제의 장식용 신발과 같은 성격을 띤 껴묻거리(부장) 토기이지만 형태는 전혀 다르다.
앞쪽은 코가 우뚝 들려있고, 양 옆과 뒤는 수직으로 서 있다. 바닥은 뒷굽 이 없이 편평하며, 뒤쪽 위에는 턱을 만들어 벗겨지지 않도록 하였다. 코 뒤에 작은 구멍이 하나씩 있고 좌우에도 한 짝은 4개, 다른 짝은 5개의 구멍이 나 있어서 끈을 매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좌우 구멍 위에서 코에 걸쳐 점선으로 한 쪽에는 사선, 다른 한 쪽에는 물고기 뼈와 비슷한 무늬를 얕게 새겼다.
이 신발은 무녕왕릉에서 나온 금속제 신발과 달리, 당시에 실제로 사용했던 신발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제557호 : 금귀걸이(金製耳飾) 리움박물관
출토지 불명의 금으로 만든 귀고리로 길이 9㎝, 큰 고리의 지름 3.6㎝이다.
큰 고리에는 금실로 거북 등모양을 만들고, 그 선 좌우에 금으로 만든 쌀알 같은 금립(金粒)을 붙인 누금세공(누金細工)을 하였다. 거북등 껍질의 분기점과 안쪽 중앙에 각각 금실과 금립으로 된 원을 배치하고, 이 원을 중심으로 작은 나뭇잎 모양을 금립으로 각 모서리를 향해 6개씩 붙였다. 큰 고리에 연결되는 타원형의 중간 고리에도 음각된 무늬가 있다.
중간 고리에 걸어서 늘어뜨린 장식에는 하트 모양의 작은 장식을 여러 개 금실로 달았다. 이러한 장식이 상·하 2단으로 있고, 끝에는 큰 풀 열매 모양이 달렸다. 풀 열매 모양의 장식 표면에는 금립을 이용한 세공이 전체에 표현되어 있다.
이 귀고리는 누금세공으로 큰 고리의 표면 전체를 장식한 보기 드문 화려한 작품이다.
제558호 : 청자상감운학모란국화문매병(靑磁象嵌雲鶴牡丹菊花文梅甁) 리움박물관
청자상감이란 흙으로 그릇을 빚어 표면에 무늬나 그림을 새기고, 그 자리를 백토나 자토로 메운 뒤 유약을 발라 구운 후, 투명한 청자 유약을 통해 흰색 또는 검은색 무늬가 보이도록 한 것으로, 12세기 전반에 발생하여 12세기 중엽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높이 32.2㎝, 아가리 지름 7㎝, 밑지름 14.5㎝인 이 병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상감청자 매병들에 비해, 어깨가 처져서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밑이 넓어서 안정감이 있다. 유약은 잘 녹아서 투명하며, 색깔도 매우 아름답다.
아가리는 작고 위가 약간 바깥으로 말리면서 곧게 서 있고, 어깨에는 흑백으로 상감된 연꽃무늬를 둘렀다. 굽 위에는 번개무늬를 두르고 바로 그 윗부분에는 다시 연꽃무늬 장식을 넣었다. 그릇 몸통에는 흑백으로 된 원 안에 모란과 국화 한 가지씩을 두었고, 원 사이사이에는 구름과 학이 있다.
제559호 : 유문칠우(有紋漆盂) 리움박물관
칠우(漆盂)란 옻 칠을 한 넓다란 그릇인 바리를 말한다. 칠기는 서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동양 특유의 공예품으로, 지금도 귀한 그릇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이것은 높이 9㎝ 아가리 지름 24㎝의 크기로 평안남도 대동군 대석암리에서 출토되었다. 안쪽에는 붉은 칠을 하고 밑바닥에 몇 개의 동심원을 그렸다. 중앙에서부터 붉은색·청색·녹색의 용을 그렸고, 그 위로는 검은색·청색·녹색의 구름을 그려 넣었다.
그릇의 아가리 주변에는 푸른색·녹색·황색으로 점선을 그린 후, 그 위를 동(銅)으로 덮었다.
그릇 바깥쪽에는 흑칠을 한 다음 상·중·하 3곳으로 구분하였다. 윗부분에는 황색과 갈색으로 구름무늬를, 가운데에는 청색과 녹색으로 구름과 산, 짐승을 그렸고, 밑에는 구름무늬를 돌렸다. 그릇 외곽 2곳에 동으로 만든 짐승 모양의 고리를 달아 손잡이 구실을 하였고, 그릇 안쪽에 매미 모양으로 손잡이를 그릇에 부착시켰다.
아직도 채색된 그림이 선명하고 여러가지 색이 조화로우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제560호 : 진솔선예백장동인(晋率善濊伯長銅印) 리움박물관
중국 한대(漢代) 이후 이웃나라 왕에게 수여한 도장으로서, 높이 2.5㎝ 한변 길이 2.3㎝이다. 중국 진(晋)나라 때 만든 것으로, 경상북도 영일군에서 청색의 유리옥 10개와 함께 출토되었다.
전면에 푸른 녹이 두껍게 덮혀 있고, 도장찍는 면(인장면)에 약간의 손상이 있어 실제로 사용된 듯 보이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정사각형의 인장면 위로는 원숭이 모양의 동물이 손잡이 구실을 하고 있다. 꼿꼿이 세운 얼굴에는 두 눈이 움푹 패였고, 입은 앞으로 튀어 나와 있다. 인장을 밟고 있는 4발 가운데 앞발은 조금 움추린듯 하고, 앞발과 뒷발 사이의 허리 아래로는 빈 공간을 두었다. 특히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이어진 곳에는 짧은 가로선들이 여러 개 음각되어 있다. 인장면 바닥에는 ‘晋率善濊伯長’이라고 예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제561호 :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 기상청
빗물을 그릇에 받아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헌종 3년(1837)에 만들어진 측우기가 유일하다.
높이 31.5㎝, 지름 15.3㎝의 이 측우기는 원통형의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눈에 띤다.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여기에 주척이라 부르는 자가 있어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쟀다. 중앙의 두 마디 사이에는 6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래 충청남도 공주에 있던 것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반환된 문화재이다. 공주 박물관에는 이 측우기를 받쳤던 것으로 전해지는 정사각형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제562호 : 환성사대웅전(環城寺大雄殿) 경산
환성사는 팔공산 기슭에 있는 절로 흥덕왕 10년(835)에 심지왕사가 처음 지었으나 고려 후기에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조선 인조 13년(1635)에 신감대사가 다시 지었으며, 광무 원년(1897) 항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환성사의 중심 건물로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만 굵고 높거나 크지 않고 건물의 앞면과 옆면 길이가 거의 같기 때문에 매우 안정된 비례를 이루고 있다.
내부에는 뒤쪽으로 화려한 불단이 있는데 목공예적인 장식으로 아름답다. 1976년 낡은 목재를 갈아내고 단청 무늬와 퇴색된 색채에 비슷하게 보수하였으며, 바깥쪽 단청은 새로 칠하여 옛 것과 새 것의 색이 섞여있다.
제563호 : 흥국사홍교(興國寺虹橋) 여수시 흥국사
흥국사 입구에 있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이다.
개울 양 기슭의 바위에 기대어 쌓았는데, 부채꼴 모양의 돌을 서로 맞추어틀어 올린 다리밑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을 이루고 있다. 양옆으로는 둥글둥글한 돌로 쌓아올린 벽이 학이 날개를 펼친 듯 길게 뻗쳐 조화를 이룬다. 홍예의 한복판에는 양쪽으로 마룻돌이 튀어 나와, 그 끝에 용머리를 장식하여 마치 용이 다리밑을 굽어보고 있는 듯하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다리로, 지금까지 알려진 무지개형 돌다리로서는 가장 높고 길며, 주변 경치와도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다리이다.
제564호 : 영산만년교(靈山萬年橋) 창녕
마을 실개천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돌다리로, 실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불리운다.
개천 양쪽의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암 석재를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이루고 있다. 그 위로는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다리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노면은 곡선을 그리며 양 끝을 길게 늘이고 있어 다리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해준다.
조선 정조 4년(1780)에 처음 쌓은 것을 고종 29년(1892)에 다시 쌓아 놓은 것으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통행할 만큼 튼튼하여 홍수 등에도 전혀 피해가 없다고 한다.
제565호 :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深福寺石造毘盧舍那佛坐像) 평택
제566호 : 유근초상<71세상>(柳根肖像<七十一歲像>) 괴산 유해익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유근(柳根)의 추상화로, 가로 89㎝, 세로 163㎝ 크기이며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유근(1549∼1627) 선생은 문장에 뛰어나 외국사신들에게 이름을 떨쳤으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많은 일을 하였다.
이 초상화는 정장 관복 차림을 하고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손은 앞으로 모아 소매 안에 넣은 자세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높이가 상당히 낮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기 관모의 형태를 반영한 것이다. 얼굴은 엷고 밝은 살색을 띠고 있으며 가슴에는 공작과 모란무늬가 수놓아진 흉배를 하고 있다. 관복의 오른쪽으로는 트임이 있어 청색과 녹색의 안감이 드러나 있다. 바닥은 여러 가지 짙은 빛깔로 화려하게 꾸민 양탄자가 깔려 있다.
이 영정은 선생이 71세가 되던 해인 광해군 11년(1619)에 그려졌는데,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신 공으로 진원부원군에 봉해져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진본이다. 17세기 공신초상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엄중한 표현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제567호 : 평택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平澤 萬奇寺 鐵造如來坐像)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만기사에 있는 이 철조여래좌상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臺座)는 없고 불신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오른팔과 양 손은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고 원래의 것은 절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있다. 갸름한 얼굴의 세부표현은 분명하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은 편이다. 어깨 부분에서는 크게 접어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었고, 팔과 다리 부분에도 주름을 표현하였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부분에 놓고 있는 모습이다.
제568호 : 윤봉길의사유품(尹奉吉義士遺品) 예산 충의사
일괄 68점이 제568-1호 부터 제568-13호 까지 분류,지정되어 있다.
제569호 :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
이것은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여순감옥에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 옥중에서 휘호(揮毫: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이르는 말)한 유묵(遺墨:살아있을 때에 써 둔 글씨나 그린 그림)들을 일괄해서 지정한 것이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기도 했다.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후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여 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권총을 쏴 3발을 명중시켰다. 여순감옥에 수감된 후 1910년 3월 26일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문화재들은 각각의 소재와 소유자가 서로 다르고, 형식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물 제569호의 1호인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 보물 제569호의 2호인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보물 제569호의 14호인 ‘제일강산(第一江山)’ 등이 있고, 보물 제 569호의 26호에 이르기까지 총 26편이며, 끝에는 모두 안중근이 썼다는 글과 장인(掌印: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
이 문화재는 독립운동사 연구 및 안중근 개인사(個人史)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570호 : 전 고령 일괄 유물(傳 高靈 一括遺物) 리움미술관
경상북도 고령지방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2종류의 일괄유물이다. 고령지방은 삼국시대에 있어서 대가야국의 근거지였으며, 신라 진흥왕 23년(562) 신라의 침입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화려한 가야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오늘날 고령읍 지산동을 비롯하여 주변 지역에 가야의 무덤이 많이 모여있다. 이 일괄유물은 당시 가야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