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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s Letter(200) 2018. 3. 30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부부에게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소식을 전합니다. 만물이 소성하는 부활의 계절에 모두들 잘 지내고 있는지요? 캠퍼스에는 벚꽃이 만개하였습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의 전령인 개나리와 벚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선교편지 200호입니다. 시작할 때에는 100번을 계획하였었는데, 쉬엄쉬엄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들의 격려와 영적 유익이 되리라는 소망가운데 때론 힘들게도 느껴지곤 하였지만 은혜로 계속되었습니다. 금년에는 처음 보내는 소식인 것 같습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보내고자 합니다.
이번 주가 주님의 고난 주간입니다. 오늘이 성(聖) 금요일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날입니다. 오는 4월 1일이 부활절이니까요. 주님께서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아침을 바라보며, 마지막 운명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신 것일까요? <다 이루었다>는 말 속에는 조금도 후회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다 끝났다는 허무한 감정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모든 것을 끝냈다는 성취감의 만족이 넘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수많은 남겨진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도 불완전하였고, 굶주림에 허기 찬 백성들은 여전히 5병2어의 기적을 기대하고 있었고, 사랑하는 어머니는 울고 계셨으며, 예수님의 치료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병자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고자 메시야를 간절히 고대하던 무리들은 실망감에 사로잡혀 그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인지를 묵상하여 보았습니다.
(1)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다 나타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다 이루었다”는 만족감이라고 생각합니다. (2) 아버지의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성취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차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사명의 기초를 다 이루었다는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3) 소망 없이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장차 천국에 들어갈 소망의 삶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아닌지요? 그러므로 주님은 믿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행복한 삶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누리며(Something to love), 감당해야 할 사명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고(Something to do), 장차 주어질 천국의 소망(Something to hope)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복된 삶을 다 이루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 달에는 지난 2월 설날 연휴 때 가졌던 수양회 메시지 첫 번째를 정리하였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리하여 전하고자 합니다.
이곳의 형제 자매들은 신학기에 되어서 사역 가운데 분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2018학번의 교제 가운데 함께 하는 새로운 영혼들을 바라보며 큰 기쁨과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충성된 제자들이 지속적으로 팀교제에 징모되도록 기도하여 주세요.또한 반가운 소식들은 네비게이토 2세들의 대학 입학이 확정되었습니다.
김병기 형제 자녀(에스더)는 경북대학교 간호학과, 박국필 형제 자녀(홍규)는 강릉 원주대학교 치의예과, 류철 형제 자녀(창민)는 서울의 숭실대학교 컴퓨터학과, 임승빈 형제 자녀(영은)는 대구과학대학 간호학과, 이승철 형제 자녀(예희)는 대전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하여 잘 다니고 있습니다. 일본의 성열완 형제 자녀(지규)는 동경신학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김사헌 형제 자녀(한나)는 재수의 도전을 통해 더 좋은 장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각 가정에 귀한 자녀들을 허락하여 주시고, 그들을 향하여 가장 선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가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캠퍼스 시절에 팀 교제에 함께 하여 주님의 좋은 제자들로 성장하기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은혜와 소망이 각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기를 소망하면서 박 남 규 부부 서신
거룩한 열망(Holy Desire)
<들어가는 말>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는 바사(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 1세의 수산 궁에서 술을 따르는 일을 맡은 관원으로서 영향력 있는 지위에 있었다. (BC4654-424)
그는 BC444년 자기 동생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겪고 있는 참상을 전해 듣고 슬퍼하며 수심에 가득차 있던 중 왕의 허락을 받고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참상은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되고 성문들은 불에 탔고, 그곳에 있는 동족들은 환난과 능욕을 받고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성과 마찬가지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벽이 훼손되고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수치이며 모독이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수치를 받지 말자고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느2:17)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훼손되는 것이다. 훼손된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회복하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과업이다.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나단 푸시(Nathan Pusey)는 우리 시대를 4무(無) 시대라고 하였다. 첫째, 흔들 수 있는 깃발이 없는 시대. 둘째, 믿을 수 있는 신조가 없는 시대. 셋째,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는 시대. 넷째, 따를 수 있는 지도자가 없는 시대라고 하였다. 올바른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삶의 분명과 목적과 비전 없이 살아가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흔들 수 있는 깃발과 믿을 수 있는 신조와 부를 수 있는 노래와 따를 수 있는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느헤미야서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깊이 묵상하며 삶과 사역에서 따를 수 있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느헤미야는 믿음과 신념의 사람이며, 경건한 신앙심을 겸비한 지도자이며, 불타는 민족애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다.
성경 전체의 주제와 비전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The Kingdom of God>이다. 자주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4 복음서에서만 무려 119번, 사도행전에서 8번이나 나온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하나님 나라이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발전하게 된다. 주기도문의 내용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에서 “뜻이 하늘에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유대인의 관념은 하늘은 하나님과 천사의 세계, 땅은 인간의 세계를 말한다. 마귀는 인간과 하나님의 중간에서(공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순종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다. 이런 마귀의 세력을 배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데 이 기도의 의미가 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절대 순종하는 것처럼, 인간세계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다 이루어지셨다.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 바로 사역이며 선교다. 하나님의 선교비전은 죽은 사람을 살리고, 훼손당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백성,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이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외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완성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완성되었다. 선교와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전이 실현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을 순종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이루어졌고,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이 땅에서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가고 있다. 대단원(Climax)은 예수님의 오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 그 언약의 말씀을 이루는 놀라운 특권을 받았다. 세상은 우리들을 멸시하고, 핍박하고 존중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존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그릇들이다. 성경전체의 스토리가 하나님의 선교비전이 차근차근 이루어져나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새롭게 해야 한다.
1. 기도의 불로 열망을 회복하라
느헤미야가 자기 조국 유다의 처참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1:4) 느헤미야는 울면서,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어떤 눈물의 기도인가?
(1) 자신과 자기 조상들의 범죄에 대한 회개의 눈물
주님을 향한 열망은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먼저 자신을 청결케 할 때 영적인 소생함이 일어난다. 결코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간의 범죄, 삼손의 범죄, 엘리 제사장의 범죄, 사울 왕의 불순종과 범죄를 인하여 이스라엘의 패배와 멸망이 주는 교훈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느1:6)
영적인 부흥(Revival)은 회개에서 시작된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역사는 길선주 장로님의 회개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장대현 장로교회의 유력한 장로, 길선주 씨가 일어나서 자기 죄를 자백할 때에 회중은 모두 크게 놀랐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약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 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 내 아내는 무능하니까 말입니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중 미화 100불상당의 금액을 나는 사취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그 미망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무겁게 짓누르던 방해의 장벽은 별안간 무너져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여 주셨음이 알려졌습니다. 죄책감이 청중을 휩쓸고 말았습니다. 그 주일 밤 예배는 7시에 시작되었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도 끝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수다한 교인들이 일어선 채로 울면서 자기 죄를 자백할 차례를 기다리는 형편이었습니다. 그일 후 날마다 연이어 신도들이 모여 들었으며 정결케 하시는 영이 언제나 그 성전에 계시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성령이 휩쓴 부흥의 불길에서 인용>
지난 1997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 기념 설교에서 고 옥한흠 목사는 “한국교회를 잘못 인도한 이놈이 죄인입니다”는 설교로 모든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성벽 재건을 마무리하고, 백성들의 영적 부흥(소생)을 위한 첫 번째 성회에서 한 활동이 바로 회개의 기도이었다.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느9:2-3)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51:10-13)
(2)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위한 기도의 눈물
우리의 영적 삶의 회복과 부흥은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고 난 이후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에 있다.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었다. 이스라엘의 왕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아사, 요시야, 아마사, 여호사밧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 이스라엘의 축복의 역사이었다.
현재 훼파된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나타난 현상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느1:8-9) 자기 백성들과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받는 것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마치고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영적 삶을 바로 세웠다.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느13:23-28) 정들었던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내어 보내는 아픔보다도 더 시급한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다. 하나님이 말씀의 회복이었다. 인간적인 고통이나 정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고통과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죄 문제를 처리하였다. 우리 삶에 최우선 과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다. 느헤미야는 이 일을 위해 헌신하였고 과감하였다.
(3)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는 감사기도
기도가 무엇인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회상하며 묵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으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다.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1:5)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great and awesome God)
(능력의 하나님, 영광스러운 하나님, 출15:11)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천대까지 영원히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때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목자없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며 민망히 여기셨다.(마9:36) 긍휼의 마음을 품었다. 긍휼(Compassion)이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의 경우를 말한다. Mercy/Compassion은 생명의 원천적인 사랑, 자비, 유연함, 사랑스럽고 애처로움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는 속마음과 실제적인 사랑의 행동을 의미한다. (예) 부모의 사랑, 혹은 혈육 간의 사랑을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깊은 사랑,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시는 Agape적 사랑을 말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신30:3)
긍휼의 문자적 의미는 심장, 폐, 간장, 신장을 말한다. 구약 시대는 희생제물의 내장은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헬라인들은 이 내장들을 사랑, 분노, 격한 감정이라고 간주하였으며, 히브리인들은 심장이나 여성의 생식기관을 긍휼, 우정, 감정의 기관으로 표현하였다. 성경적 “긍휼”은 타인의 고통, 상처, 슬픔, 고독을 깨닫고 함께 나누는 것, 즉 Empathy(Sympathy를 훨씬 능가함)이다. 자신의 심령 깊숙한 곳에 그것을 느끼는 강력한 생명력 있는 유기체적인 감정이입을 뜻하고 따라서 희생적인 행위가 따르게 된다.
한자에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있다. 즉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으로 큰 고통과 아픔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중국의 <세설신어>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전쟁 때문에 ‘환온’이라는 장수가 병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물살이 센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한 병사가 강가에 늘어진 덩굴 줄기에 매달려 장난을 치던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원숭이 한 마리가 강기슭을 좇아 배를 따라 오면서 계속 슬프게 울어댔다. 병사들은 원숭이가 우는 이유를 잘 몰랐고, 물살이 센 나머지 배를 멈출 수가 없어서 한 참을 가다가 겨우 강기슭에 배를 댔다. 그때에 따라오던 그 원숭이가 그 배로 훌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몹시 고통스러워하다가 비통한 울음소리를 내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병사들은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 원숭이는 왜 이렇게 배를 따라 온 것일까? 그리고 배에 오르자마자 왜 죽은 것일까? 눈으로 보아서는 겉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이 너무나 궁금해서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았더니 원숭이의 창자가 토막토막 잘려져 있었다. 병사들이 자기 새끼를 잡아가자 그것 때문에 그 먼 길을 따라오는 동안 너무나 애가 타고 슬퍼서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끊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새끼 원숭이는 풀어주고, 죽은 어미 원숭이는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 긍휼하심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요3:16, 마9:36) 긍휼에 바탕은 둔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개인과 온 백성을 위한 것이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다. 세리와 창녀들을 용서하셨다. 목자 잃은 양 같은 백성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셨다.(벧전2:25)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마다 크고 두려우신 영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회상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도록 해야 한다.
2. 열망으로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라
1994년 2.9-11일, 청천 다락원에서 지도자 세미나를 가졌다. 그 때는 개인적으로 산 기도시간 5번, 팀 기도 시간 1번, 메시지 4번, 밥은 직접하여 같이 먹고, 연탄불 피우고, 장작 피우고, 아침 6시에 기상, 밤 10시 30분 취침할 때까지 빡빡한 일정으로 수양회가 진행되었다. 주님을 향한 열망이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였다. 열망이 식을 때 여러 가지 핑계들이 많이 생긴다. 열망에 가득한 사람은 어떤 장애물도 넉넉히 극복한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의 경주에서 우리나라 윤성빈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코스 신기록을 세웠다. 우리나라 환경에서 과연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는가? 어떻게 연습하였을까? 그의 스켈레톤에 대한 열정이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였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느헤미야의 열정이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였다.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한다.” 《프랑스 혁명사》를 쓴 영국의 역사가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말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평생의 소원은 《프랑스 혁명사》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쓴 책을 통하여 유럽 땅에 더 이상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아름다운 민주주의 문화가 꽃피우기를 원했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2년 동안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프랑스 혁명사》의 원고를 탈고한 후, 그것을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이자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에게 읽어 보라고 주었다. 스튜어트 밀은 서재에서 친구가 보낸 원고를 검토하다가 너무 피곤하여 원고를 그대로 나둔 채 침실로 들어가 잠을 잤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 집 하녀가 서재를 청소하다가 방에 흩트려져 있는 원고지를 보고 쓰레기인 줄 알고 한꺼번에 집어서 불 속에 넣어 버렸다.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창백한 얼굴로 칼라일을 찾아갔다. --중 략-- 토마스 카알라일의 그 길고 긴 노력과 수고는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낙담한 채 서너 달 동안 자는 것과 먹는 것조차 하지 않고 고민에 빠졌고 생의 의욕조차 완전히 잃어버렸다. 비 오는 어느 날, 그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비가 서서히 그치자 자기 집 앞에 새로운 집을 짓는데 일꾼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그들은 터를 닦고 줄을 놓은 후 벽돌을 하나하나 쌓았다. 그러다가 벽돌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다시 허물고 다시 쌓고 하였다. 허물고 쌓는 일을 반복하면서 차근차근 벽돌 쌓는 것을 보던 토마스 카알라일은 무릎을 쳤다. 집 한 채를 짓기 위해서도 저토록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데 유럽의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일에 내가 다시 땀을 흘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는 고된 작업을 다시 시작한 7년 만에 드디어 완성하였다. 마침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프랑스 혁명사》를 완성하였다. 처음에 쓴 것보다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다.
요즈음 세대들은 전도의 열망이 식었다. 사역에 대한 열망이 사라졌다. 그 핑계가 전도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사역을 해도 결과가 없다는 것이다. 전도를 하거나 하지 않으나 결과는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태여 그렇게 고생하면서 할 필요가 있는가하며 스스로 위안한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신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영적 반응이 미미한 일본이나 문제는 추수할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언제, 어떤 상황이나 어디에서나 추수할 것은 많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도의 환경이 아주 척박한 일본에서조처도 주님을 찾고자 하는 영혼들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부족한 것이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은 대적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52일 만에 완성되었다. 수백년 동안 폐허가 되어 방치된 채로 둔 성벽이 불과 52만에 완성되었다. 끊임없는 대적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최단기간에 완성되었다.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자 하는 거룩한 열정이었다.
◾대적들(방해꾼들)
-외부 대적(느2:10,19, 4:1-3 )
호론 사람 산발랏(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종(참모장)인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주된 대적들이었다. 이들은 유다인들을 업신여기고, 성벽재건 공사를 비웃고, 조롱하고(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이다 등), 왕을 배반한다고 모함하고 위협하였다. 이것은 반역의 죄목으로 위협하기 위한 것이다.
-내부의 적(원망, 불평)(느5:1-)
이들은 생활고 문제, 흉년의 문제, 과한 세금, 부채로 인한 자녀들이 종으로 팔려가는 인신매매 문제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였다.
<대비책>
◾하나님이 형통케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사마리아인, 아라비아인은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하여 그들이 거할 기업이 없고, 그럴 명분도 없다고 잘라 거부함) 예수님께서도 때론 발의 먼지도 털어버리고 단호하셨다.
◾설득하였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문제를 장애물(Obstacles)이 아니라, 기회(Opportunity)로 생각하여야 한다. 흔히 말하는 성공의 걸림돌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성공의 디딤돌로 바라보아야 한다. 장애물이 아니라 목표에 초점을 맞추라.(Focus on Objectives, not Obstacles) 최대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사고의 전환이 중요하다.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목표지향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물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취해야 할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부정적인 태도는 불평과 원망과 올무에 빠지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모세에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어주셨다.(모세와 함께 할 70인의 장로들) 또한 하나님께서는 풍성하게 공급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민11:18-20) 모세의 12정탐꾼들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목표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민13:31)
◾감투정신(A Fighting Spirit)으로 임해야 한다. 히스기야 왕은 전심과 일심으로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감투정신을 보여 주었다. 감투정신이란 도저히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굽힘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다.(대하30:10, 20) 느헤미야가 감투정신의 좋은 본이다.(느4:9, 6:2-4) 대적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조롱과 방해에도 굴복하지 않고 성벽 재건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훌륭한 군사의 특징은 적으로 하여금 겁에 질려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다.(느6:15-16)
3. 열망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느헤미야는 불타는 열망을 가슴에만 품고 막연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 열망을 현실적으로 성취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느헤미야는 구체적 행동으로 옮겼다.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준비하였다.
(느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즐겨하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언제 어떻게 행할 것을 먼저 기도가운데 생각하고 준비하여 왕에게 답변하였다. (How long? How to do? What to do?) 뿐만 아니라, 치밀한 사전답사를 통하여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될지를 숙지하고 있었다. 항상 먼저 깨어 있었다.
(느2:11-12)
►마지막 날 구체적인 토의를 통하여 금년의 개인적인 사역 계획을 세워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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