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의 산
삼척 다랫봉 (1,171.4m)
비가 온다. 장마다. 하늘이 찢어져라 뇌성번개가 친다. 오두재(879m) 턱밑 비탈에 선 다섯 가구가 사는 오두촌의 전용수씨 농가를 찾았다.사랑채 방문을 열어놓고중3쯤 돼뵈는 여식은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젊어뵈는 엄마는 문지방 가까이 앉아 길쌈을 하고 있다. 모녀의 애틋한 정이 집안 가득 몽유도를 접한 듯하다. 안방에 있던 바깥주인이 동해안지방 사투리로 객을 맞는다.
"지금은 저기 보이는 비탈에다 고랭지 채소를 심었지만 예전엔 강냉이, 수수, 조, 콩 같은 잡곡을 심었드랬어요. 지금은 나무가 있는 저 숲에도 화전을 일궈 잡곡을 심고 메밀도 뿌리고-. 보릿고개에는 나무껍질이나 송구도 벗겨먹고 그렇게 연명하며 살았지요, 뭐. 그런데, 다랫봉이요? 어찌 알았어요?"
잠자코 있자 주인장은 이내 말을 이었다.
"다랫봉은 월봉이라고도 하는데요,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여기까지 쫓겨와서 다랫봉 꼭대기에 열세 명이나 숨어 있었다고 그래요. 예비군들이 올라가다가 위에서 내리갈기는 총소리에 모두 납작 엎드렸지요. 50m 전방이니 다행이지. 한 사람이 다리에 총상 입은 것 말고는 모두 무사했으니까. 예비군들은 각자 총알이 몇 발 되지 않으니 모두 후퇴했지요. 공비들은 저 산등을 타고 청옥산 고적대로 도주했다데요."
술술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에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줄기도 잊었다. 424번 지방도가 지나는 오두재 말랑에서 배낭을 걸쳐 메니 울부짖던 우뢰 소리도 멀리 도망가고 빗줄기도 조금 잦아든 듯하다. 오두재 북쪽은 갈미봉(1,168.9m)이고, 남쪽이 다랫봉이다. 깎아지른 양 절개지에는 낙석방지용 푸른색 그물이 있다. 남쪽 철망 오른쪽 끝에서 숲길로 들어선다.
아찔한 발 아래로 둔전리의 중촌이 구름 속에 오락가락이다. 빗물을 흠뻑 머금은 나뭇가지들이 초장부터 얼굴을 때리는 된비알이다. 5분여 기어오르다시피 하자 깃대가 쓰러진 곳에 측량점이 있다. 조망이 좋다. 올라가야 할 다랫봉 정상이 기우뚱 쏟아질 듯하고, 백두대간상의 고적대9, 청옥산이 멀리 나래를 펼쳤다.
가르마 같은 능선을 따라간다. 숲이 짙다. 앞선 사람이 "수그리(수그려)!" 큰소리로 외치더니 다음에는 "아까멘치로(아까처럼)!"를 연발하며 숲을 뚫고 나간다. 빗물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스듬히 누운 노란색이 도는 붉은색 꽃을 피운 중나리가 청초하다. 꼿꼿하게 하늘을 쳐다보며 꽃봉오리를 맺은 하늘말나리는 지천이다.
서서히 고도를 높여 나가는 마루금은 점점 경사를 더한다. 빗줄기가 잠시 소강상태다. 땀과 빗물을 훔치며 뒤를 돌아본다. 흰 실타래를 풀었다 감았다 하듯, 백발의 긴 수염을 휘날리는 백두옹 같은 산산 봉봉...
"발밑에 물먹은 바위 조심하세요!" 하며 백금석씨(50)에게 위험한 곳을 일일이 짚어주며 오르던 김장래씨(49, 태백시청 근무)가 명언을 한마디 한다. "여자는 잠옷 입었을 때, 산은 구름띠를 둘렀을 때가 아름답고 신비롭다."
수목에 가린 바위들이 나타난다. 석회암 지대를 좋아하는 댕강나무들이 앞을 막는다. 들머리에서 45분쯤 걸은 뒤, 이윽고 암봉에 닿았다. 동쪽 방향으로 높게 올려다뵈는 정상이 기를 죽인다.
폐가 두 채만 마을이었다는 증거로 남아
잠시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가풀막이다. 올라갈수록 길이 희미해진다. 감각으로 마루금을 놓치지 않도록 애쓰며 짚어 나아간다. 정선분취가 무리지어 꽃대를 세웠다.
안부를 떠난 지 50분쯤 지나 하늘이 열리며 삼각점이 있는 다랫봉 정상이다. 주위에 큰키나무들을 제거하여 시야가 좋다. 빙둘러 보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산봉들이 구름에 흘러가고 있다. 조망을 즐기고 하산하려니 다시 빗줄기가 굵어진다.
남족 능선을 따라 심운골을 보고 평촌으로 하산할 예정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기이 희미하다. 나뭇가지에 붉은색 비닐끈이 띄엄띄엄 길을 안내한다. 처음엔 조심하며 표식을 따라가 본다. 능선이 좁아지며 절벽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절벽을 피해 내려선 후 표식기는 왼쪽 절벽 아래로 산짐들이나 다녔음직한 지형으로 내려간다. 숲이 울창하여 하늘도 보이지 않는 이곳을 잘 아는 근동에 사는 사람이 매달려 지난 것 같다.
나뭇잎을 세차게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하다. 약 50분간 표식기를 따라 내려서자 심운골이다. 12가구가 살갑게 살았을 마을이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고랭지 배추밭으로 변했다. 집터도 밭으로 둔갑하였고, 쓰러져 가는 폐가 두 채만이 마을이었다는 증거로 남아 있다.
12년 3개월 전, 1993년 4월에 여기 왔던 기억이 새롭다. 평촌에서 시작하여 심운골을 찾았을 때다. 골짜기 어귀부터 폭포가 줄을 이었고, 아흔아홉 굽이를 돌아 대문 같은 좁은 지형을 벗어나자 가마솥처럼 생긴 분지가 나타났다. 혹시 여기가 무릉도원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때는 집을 비운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화전민들이 나무로 만든 가재도구와 농기구들이 남아 있었다.
11가구의 빈 집을 지나 12번째 집에 이르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주인 김용구씨(당시 55세)는 정선에 볼일 보러 가고, 철포에 앞다리가 잘린 누렁이 복실이와 김옥녀씨(당시 57세)가 반겼다. 알루미늄 둥근 산에 차려준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버섯된장찌개, 달래무침, 도라지무침, 씀바귀무침, 동치미, 김구이, 고추장 등등,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한 상 받은 기억에 집터에 남은 주춧돌을 보니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그때 김옥녀씨가 한 말이 기억난다.
"마을 복판에 있는 성황목 밤나무에 동네에서 동짓달 초닷새, 정월 초사흘, 그리고 오월 단오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제 우리마저 떠난다면 저 성황님께 누가 제를 올리누."
눈물을 그렁이며 언덕까지 나와 손짓으로 배웅하던 인심 좋고 정 여렸던 그이는 지금쯤 어디서 복 많이 받고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평촌까지 시오리 무인지경을 걸어 내려가다가 비닐포장을 치고 늦은 중식을 한다. 평촌에서 오두재까지는 아스팔트 포장길을 6~7km는 족히 걸어야 한다. 오두재에 놓아둔 차를 가지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방수가 잘 된다는 등산화도 이 장맛비엔 별무효과다. 신발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난다. 2.5km쯤 걸어 역둔 장터거리에 이르자 슬그머니 빗속을 걷기가 싫어졌다. 그런데, 역시 강원도 두메의 인심은 최고다. 역둔 장터거리에서 공짜 트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구멍 뚫린 하늘에선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산행안내
오두재~다랫봉 정상~심운골~평촌까지는 2시간40분쯤 걸리고, 평촌에서 다시 역둔 삼거리 지나 오두재까지 도로만 따르면 2시간이 더 소요된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헷갈릴 곳이 없다. 남릉으로 비닐끈을 찾아 하산하면 심운골이다.
*교통
대중교통편이 불편하므로 자가용 차량을 가져간다. 대중교통편은 정선을 출발하여 역둔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 하장, 임계 방면으로 가는 버스가 하루 2회(08:00, 14:00) 뿐이다. 삼척시 하장면 터미널(033-552-0552)에서 오두재를 경유하는 정선 방면의 버스 역시 하루 2회뿐(13:00, 17:45). 정선시외버스터미널 전화 033-563-9265.
*숙박
다랫봉 주변에는 숙식할 만한 곳이 없다. 장전, 하장, 백전, 화암으로 나가야 한다. 하장의 현대식당민박(033-552-0046), 장전의 길목식당민박(553-3033), 삼거리쉼터(552-0213). 숙식문의 역둔장터거리담배집 552-0451.
글쓴이:김부래 강원도에서 나고 자랐으며, 40여 년간 강원도 오지산골을 누비고 다닌 산꾼이다. 태백한마음산악회 회원. 숲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