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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경수행의 의미
간경은 경전을 통해 불법을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으로만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통해 그 말씀이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수행인 것이다. 따라서 간경수행자는 진리를 익혀, 안으로는 끊임없이 마음을 향하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행실을 가다듬도록 해야 한다.
이에 선가귀감에서는 "경을 보면서 마음 속을 향해 공부하지 않는다면, 만 권의 글을 모두 보아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을 보면서 마음으로 살피지 않는다면 어디 이익이 없는 데만 그치겠는가? 필경 사견과 아만을 키우고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마구니가 될 것이다.
육조께서는 법달이 문구 외우는데만 급급하여 헐떡거릴 뿐 번뇌와 망상의 분별심을 쉬지 못함을 보시고 참 독경이란 경의 뜻이 마음 가운데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마음을 밝히어 성품을 보는 것을 보살이라 하였다. 또한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면 이것이 경을 굴리는 것이지만,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못하면 이것은 경에게 굴림을 받는 것이라 하였다.
마음이 미하면 법화가 굴리고
마음을 깨달으면 법화를 굴리나니
오래 읽어도 밝히지 못하면
경 뜻과 원수 되리라.
생각이 있으면 생각이 삿되니
유무를 다 안 따지면
백우거(일불승) 길이 놀리라.
수행을 위한 간경을 특히 전경(轉經)이라고 하여 법을 굴린다고 하는데, 경전을 읽고 그 뜻을 마음으로 깨달으면 경을 굴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지식을 쫓아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사구게 하나라도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기고 몸소 실천하여 깊은 뜻을 스스로 체득하여야 참다운 간경 수행이라 할 것이다.
간경수행의 원리
모든 불교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에 있듯이 간경수행의 목적도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 성불하는데 있다. 그러나 진리란 말로써 전해질 수 없거니와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언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경전은 일반적인 글이 아니다.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것이니 부처님은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를 다시 중생의 근기에 맞게 언설로 표현한 분이다. 그러므로 모든 깨달은 분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 속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이 간경수행의 원리이다.
문 : 많이 듣고 널리 읽으며 배워 익히고 기억해 가지며, 또한 글뜻을 따라 궁구하는 등으로 어찌 견성할 수 있으리오.
답 : 만일 말을 따라 견해를 내고 글과 함께 알음알이를 지으며, 언전(言詮)에 집착하여 지취(旨趣)를 잊고 교(敎)를 좇아 마음을 미해 손가락과 달을 분간치 못한다면 곧 성품을 보기 어려우려니와, 그렇지 않고 말을 인하여 도를 깨닫고 교를 빌려서 종지(宗旨)를 밝히며, 지혜롭게 언전에 들어 깊이 부처님의 뜻을 탐구한다면 실로 다문(多聞)에 나아가 보장(寶藏)을 이루며 적학(積學)으로써 또한 지혜의 바다를 삼을 것이니, 범부로 좇아 성인에 듦이 모두가 현학(玄學)의 힘을 인함이요, 위태한 곳에 처하여 평안함을 얻음이 다 묘음(妙旨)의 공(功)으로 도운 것이다.
말이란 도에 드는 계단이요, 교는 사정(邪正)을 가려내는 먹줄이니, 그러므로 <화엄경>에 이르기를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머물게 하려 한다면 반드시 무장애해탈지를 떠나지 말 것이니, 이 무장애해탈지는 일체법여실각(一切法如實覺)을 떠나지 않았으며, 일체법여실각은 무행무생행혜광을 떠나지 않았고, 무행무생행혜광은 선선교결정관찰지(禪善巧決定觀察智)를 떠나지 않았으며, 선선교결정관찰지는 선교다문(善巧多聞)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관찰해서 요지(了知)한다면 정법(正法)을 더욱 배로 하여 부지런히 닦아 익힘을 구할 것이니, 종일을 언제나 법문 듣기를, 법에 기뻐하기를, 법을 즐기기를, 법에 의지하기를, 법에 따르기를, 법을 알기를, 법에 순하기를, 법에 도달하기를, 법에 머물기를, 법을 실행하기를 발원할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부지런히 불법을 구해서 있는 바 온갖 재물을 아낌이 없고 또한 따로 귀중하고 얻기 어려운 물건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다만 오직 불법을 선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 근심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법화경>에서 "만일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가 명료한 사람에게라면 다문강식(多聞强識)이라도 그를 위해 설할 수 있으리라"하신 말씀을 論에 해설하기를 "지혜가 있으나 다문함이 없으면 곧 실상을 알지 못할 것이니, 비유하면 캄캄한 곳에서 눈은 있으되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다문하나 지혜가 없다면 또한 실상을 알지 못하리니, 흡사 밝은 데서 다시 등불까지 있으나 눈이 없어 못보는 것과 같다. 또한 많이 듣기도 하고 겸하여 지혜도 맹리(猛利)하면 곧 가르친 바를 능히 받아 지닐 수 있으려니와, 그러나 들음도 없고 지혜도 없다면 이를 일러 사람몸이 소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원교(圓敎)의 이품(二品)엔 선관(禪觀)에 겸하여 독송하기를 권하였으니, 이것은 위(位)에 거하여 물러나지 않으면 비로소 듣는 법에 싫어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듣는다면 관력(觀力)을 돕게 되고 바로 배우면 종지(宗旨)의 공(功)을 이루는 것인데, 일부러 소나 양 같은 눈을 지어서 방향을 가리지 못하고 또한 어리석고 고지식한 마음에 처하여 숙맥(菽麥)을 분간치 못해서야 되겠는가.<만선동귀집, 제2장>
간경수행을 통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그 핵심은 경전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경전을 지식을 쌓는 수단으로 대하느냐 부처님이 직접 나에게 설법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경전을 지식을 쌓는 수단으로 여긴다면 경전을 보는 것이 오히려 아만을 쌓고 무수한 시비분별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장애가 될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한말씀 한말씀을 헛으로 듣지 않으며 언제나 마음으로 잊지 않고 생각하여 몸으로 익히는 중에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이 무엇일까.하고 부처님의 참뜻을 이해하고자 하는 한가닥 진실한 의문을 가슴에 담고 몸과 입과 생각으로 언제나 오로지 하다보면 문득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는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깨달아 가다보면 드디어 모든 이치가 밝아지고 번뇌업장이 눈 녹듯 사라지고 밝은 지혜가 솟아날 것이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통달하여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아지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일시에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간경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하는 원리이다.
간경수행의 필요성
이와같이 간경수행을 통해 본성을 찾는 길이 분명하니 간경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선가에서 불립문자라 하여 교를 배우는 것을 꺼리고 경전마저 멀리하니 그것은 눈뜬 장님을 만드는 결과로써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두운 밤길을 등불도 없이 가는 것처럼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립문자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즉 문자에 갖히지 말라는 것이지 문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현재 부처님과 만나서 부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니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어찌 허물이 되겠는가. 허물이 있다면 보는 자가 지혜로써 궁구하지 아니하고 생각으로 분별하고 지식을 쌓는 데만 급급한 것이니, 같은 물을 먹어도 소는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드는 것과 같다. 모든 이치가 그러하겠거니와 더구나 경전은 부처님의 현신일진데 어찌 그길을 통하지 않고 도에 이를 수 있겠는가.
간경의 필요성과 바른 태도를 간명하게 밝히신 죽창수필의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이 글은 계율의 부흥과 선정일치를 강조하신 명대의 주굉스님(1535~1615)이 말년에 후학들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공부하는 자에게 아주 요긴한 말씀들이다.
나도 소시에는 선비들이 불교를 비방하는 것을 보고, 선입견과 경솔한 판단으로 깨닫지 못했었다. 그 후 우연히 계단(戒壇)과 강당(講堂)에서 몇 권의 경을 구하여 읽어 보고는 비로소 크게 놀라며, '이같은 책을 읽어보지 못했던들 거의 인생을 허송할 뻔하였다'하고 생각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눈에 스쳐본 적이 없는 자들이 무수하다. 실로 보배산을 눈앞에 두고도 찾아나서지 않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비록 읽기는 하지만 말만을 따라 이야깃거리로 삼거나, 자신의 문장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데 불과하며,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잠시도 그 이치를 궁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 보배산을 찾아 나서기는 했으나, 그 보배를 찾아 취하지 않는 자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비록 토론하고 강연하기는 하지만, 또한 글자나 풀이하고 문장을 해석하면서 서로 아만을 내세우는데 불과하여,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잠깐도 진실하게 수행하고 실천하지 않는다. 보배를 취하여 손에 가지고 놀거나 감상하며, 혹은 품 속에 넣고 옷 소매 속에 간직했다 도로 내버리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식전(識田)에 물들면 마침내 道種을 이루게 될 것이니, 그러므로 불경을 불가불 읽어야 한다.
또 다른 한 편의 글에서는
어떤 참선에 대하여 자부하는 자가
"달마는 문자를 세우지 않았다. 견성하기만 하면 그만이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염불을 자부하는 자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분을 만나는 것이다. 어찌 반드시 경전이 필요하랴" 하였다. 이 두 사람이 진정으로 얻은 것이 있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면 굳이 더 논할 일이 아니거니와, 실제 얻은 것이 없이 이런 말을 한다면, 이런 일들은 대개 자신의 교리에 통달하지 못한 허물을 숨기려 하는 자들일 것이다.
나도 평소 염불을 숭상해 왔으나, 애써 사람들에게 경전을 읽기를 권하고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염불의 가르침이 어찌 저절로 온 것이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경전 속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중생들이 어떻게 10만억 찰 밖에 아미타불이 계신 줄 알 수 있겠는가. 또한 참선하는 이들은 교 밖에 따로 전한 것이라고 핑계하고 있으나, 교를 여의고 참구하는 것은 삿된 因이요, 교를 버리고 깨닫는 것은 삿된 견해임을 알지 못하였다. 비록 그대가 참구하여 깨달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경교로써 인증해야 할 것이요, 교와 더불어 합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두 邪見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교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육경과 사서로써 표준을 삼아야 하고, 불교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삼장 십이부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경전이 아니라면 어떻게 불법을 만날 수 있으며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경전을 멀리하는 것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린 아이가 부모 곁을 떠나 멀리 가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낱 미망을 벗어버리지 못한 범부중생으로써 부처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늘 경전을 보고 마음에서 잊지 않아야 몸과 마음에 허물이 생기지 않고 불법을 향해 올곧게 나아갈 수 있다.
간경수행의 갈래와 방법
서사 / 공양 / 시타 / 제청 / 피독 / 수지 / 개연 / 풍송 / 사유 / 수습
서사(書寫)
서사는 부처님이 설하신 경율론를 옮겨씀으로써 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이어가면서 내면적으로는 자신을 살펴보는 공부법이다. 경전을 옮겨 쓸 때에는 가장 깨끗한 바탕에 가장 깨끗한 도구로 써야 하며, 옮겨쓰는 글씨의 모양이나 속도도 한결같아야 한다. 경을 쓰면서 그 글자를 마음 속에 같이 쓰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경전을 옮겨 쓰기 시작하거나 끝낼 때나 갈무리할 때 개경게나 개법장진언 등을 염송하는 것이 좋다. 옮겨 쓴 경전은 아무렇게 방치하지 말아야 하며, 깨끗하게 싸서 잘 갈무리해야 한다. 경전을 옮겨 쓰는 것은 부처님의 상을 조성하여 널리 받들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므로, 옮겨 쓴 경전도 이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이에게만 전해줄 수 있다. 다만 경전을 옮겨 쓸 때 반드시 한 경전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다 옮겨 쓴 다음에 다른 경전을 옮겨 쓰도록 한다.
간경 수행의 대표적인 한 방법으로 사경은 널리 행해지고 있어, 사경법회를 정기적으로 하거나 사경을 주된 수행법으로 하는 사찰도 있다. 또한 사경은 계층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실천되고 있으며,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호응이 좋은 수행법이다. 요즘은 사경 교재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있으므로 그런 것을 이용하면 더 쉽게 할 수 있다.
공양(恭養)
공양은 부처님의 경전이 있는 곳을 불사리가 있는 곳처럼 공경하고 존중히 공양하는 것이다. 경전이 곧 부처님이므로 공부하는 이는 거기에 실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부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바, 그것이야말로 간경수행의 기초가 될 것이다. 다른 글을 보듯이 쉽게 경전을 읽으려 드는 것은 부처님을 스승으로 받드는 예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경전이 곧 부처님임을 믿으며 그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공부법이다.
시타(施他)
시타는 경전을 자기 개인의 전유물로 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베풀어 이익을 주는 실천공부이다.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수행법으로 보시가 있다. 따라서 그러한 말씀이 담겨있는 경전을 보고 오히려 그것을 아끼는 마음에 베풀어 주지 않는다면 어찌 바르게 읽었다 하겠는가.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주어 읽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법보시라는 이름하에 경전이나 불서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특히 천도재나 49재를 지내는 경우 후손들은 망자를 위해 많은 양의 경전류를 사찰이나 동참대중에게 보시하기도 한다.
제청(諦聽)
제청은 다른 이가 읽고 해설하는 일체 경법을 듣고 깊이 애락(愛樂)하며 진심을 다하여 살피고 자세히 듣는 공부법이다. 옛적에 보살님이 몸을 나투셨으나 자기의 상에 빠져 뵙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언제 어느 모습으로도 오실지 모른다. 자신의 상에 빠지지 말고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이 들리는 곳이면 모두 부처님의 또다른 현신으로 여기는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경전에 실린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더라도 때로 부처님의 말씀과 같은 말을 들으면, 그를 선지식으로 여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도 물론 제청에 해당한다. 수행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부처님이 여러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음을 알게 되는 바, 자신이 가진 상으로 말미암아 타인이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올바른 간경행자라 할 수 없다. 기회있을 때마다 법을 청하며 법을 연설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 즐겨 들어야 한다.
피독(披讀)
피독(披讀)은 경전을 언제나 펴서 보고 읽어 손에서 놓지 않는 공부법이다. 한번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거든 잊지 말고 기억하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인바 이를 위해 손에서 놓지 않고 경문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은 스승께 한 마디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다 들어 깨우치기 전에 또다른 말씀을 들을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처럼 한 번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반드시 그 말씀을 올곧게 깨우쳐야 할 것이며, 그 말씀이 스쳐지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바, 이를 위해서는 늘 부처님의 말씀을 떠올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피독의 수행법이다.
수지(受持)
수지(受持)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교법을 스승으로 좇아 이를 본받고 잘 갈무리하여 잊지 않도록 하는 공부법이다. 앞의 피독이 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는 것이라면 수지는 다시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 속에서도 잊지 않고 받아지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피독과 수지는 간경 수행자의 필수적인 행법이라 하겠다.
개연(開演)
개연(開演)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때때로 언제나 연설하고 열어 보여 사람들에게 믿어 알도록 하는 공부법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름대로 깨침이 있었을지라도 그 깨침이 자기만의 쓰임일 수 없으니,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지 기회 있을 때마다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다.
수지를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자기 나름으로 갈무리했다면, 개연을 통해 그것을 바로 비추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어느 한 쪽에만 매달리면 원만한 공부가 되지 못할 수도 있는 바, 이 두 가지를 늘 아울러야 한다.
풍송(諷誦)
풍송(諷誦)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일체의 도법을 널리 범음으로 소리내어 맑게 읊어 선양함으로써 널리 사람들로 하여금 듣기에 즐겁게 하는 공부법이다. 풍송을 할 때는 가장 깊고 맑은 소리를 내야 하는바, 잡념과 삿됨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히 하며 호흡을 잘 가다듬어 발음을 정확하게 하고, 중간에 경전의 말씀을 한 소리라도 빼지 않도록 한다.
풍송을 할 때 목탁 등을 사용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풍송하기 편리하게 하고, 또한 주변을 장엄하게 하여 마음에 깊이 새기려는 것이다.
사유(思惟)
사유(思惟)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깊이 헤아려 이치를 터득하는 공부법이다. 즉, 불법의 이치를 터득하는 비결은 사유를 통해 사유를 깨고 뛰어 넘는 데 있다. 따라서 아름알이식의 생각이 아닌 깊고 깊은 의문으로 한마음이 될 때 문득 이치가 환하게 알아질 것이다.
수습
피독과 수지는 경문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으며 마음에 새기고 받아지녀 명심하는 공부법임에 비해 사유와 수습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실제로 이치를 터득하고 그것을 몸에 익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대로 엄밀하게 닦아 그 열매를 맺는 공부법이다.
사유를 통해 이치를 알았다면 다시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이 되도록 수습하는 단계를 거쳐 깨달음을 완성한다. 선종에서도 화두참구 후에 보림을 하는 것도 다 그 이유이다.
간경수행의 공덕 _ 금강경에서
간경수행의 공덕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누누히 말씀하셨다. 그 가운데 먼저 금강경에서 밝히신 몇 구절을 들어보겠다.
"수보리야, 이 경이나 아니면 그 가운데 4구게 만이라도 마땅히 알아라. 이곳은 일체 세간의 천상과 인간과 아수라가 다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하는데, 어찌 하물며 사람이 있어 능히 다 받아지니며 읽고 외움이랴.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가장 높은 제일가는 희유한 법을 성취하리라.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과 존중하신 제자가 계심이 되느니라."
"수보리야, 장차 오는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능히 이 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면 곧 여래가 불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가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되리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아침에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써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다시 저녁 때에도 또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무량백천만억겁 동안을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이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으로 거슬리지 아니하면 그 복이 저보다 수승하리니 어찌 하물며 이 경을 베끼고 받아지니며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하여 해설해줌이랴."
간경수행의 공덕 _ 법화경에서
법화경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 못지 않게 우리 나라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경 가운데 하나가 법화경이다. 법화경은 사상적인 탁월함뿐만 아니라 경문이 비유가 많고 평이하게 쓰여 있어 사람들에게 쉽게 감응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불보살님의 위신력과 다양한 진언과 행법들, 그리고 어느 경전보다 법화경 수지독송의 공덕을 강조하여 법화경을 하나의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숙왕화야, 이 '법화경'은 능히 일체 중생을 구원하며, 이 경은 능히 일체 중생의 모든 고뇌를 여의게 하고, 이 경은 능히 일체 중생을 크게 이익케 하여 일체 중생의 소원을 충만케 하나니, 맑고 시원한 못이 일체의 목마른 사람들을 채워 주는 것과 같으며, 추워 떨던 사람이 불을 얻은 것과 같고, 벗은 이가 옷을 얻은 것과 같으며, 상인이 물건의 주인을 얻은 것과 같고, 아들이 어머니를 만난 것과 같으며, 나루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고, 병든 이가 의사를 만난 것과 같으며, 어둔 밤에 등불을 만난 것과 같고,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으며, 국민들이 현명한 지도자를 만난 것과 같고, 행상이 바다를 얻은 것과 같으며, 밝은 햇불이 어둠을 제거하여 주는 것과 같느니라.
이와 같이 '법화경'은 중생들의 일체 고통과 일체 질병을 여의게 하여 능히 일체 생사 속박에서 해탈케 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법화경'을 듣고 스스로 쓰거나 만일 다른 사람을 시켜 쓰면, 그 얻는 공덕은 부처님의 지혜로 그 많고 적음을 헤아리어도 그 끝을 알 수 없느니라. 혹은 이 '법화경'을 써서 꽃. 향. 영락. 소향. 말향. 도향과 번개. 의복과 가지 가지의 등인 소등. 유등. 향유등. 첨포유등. 수만나유등. 바라라유등. 바리사가유등. 나바마리유등으로 공양하더라도 그 얻는 공덕은 또한 한량 없느니라.
숙왕화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약왕보살의 본사품을 들으면 또한 한량 없고 가이 없는 공덕을 얻을 것이며, 혹은 어떤 여인이 이 약왕보살의 본사품을 듣고 받아 지니면, 그가 여인의 몸을 마친 뒤에는 다시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으리라.
만일 여래께서 멸도하신 후 오백년에 이르러 어떤 여인이 이 경전을 듣고 그 설한 바와 같이 수행하면, 그 목숨을 다 마친 뒤에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큰 보살 대중들이 둘러 있는 곳에 가서 연꽃 가운데의 보배 자리에 태어나리라.
그리하여 다시는 탐욕하려는 번뇌가 없고, 성내고 어리석은 번뇌도 없으며, 또한 교만하고 질투하는 여러 가지의 더러운 번뇌가 없으리라. 그리고는 보살의 신통과 무생법인을 얻어서 눈이 청정해지며, 이 청정한 눈으로 칠백만 2천억 나유타 항하의 모래같은 열 부처님 여래를 보게 되나니, 이때 여러 부처님들이 멀리서 칭찬하시기를 '착하고 착하도다. 선남자야, 너희들이 능히 석가모니불의 법 가운데서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사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설해 주면, 그 얻는 바의 복덕은 한량 없고 가없어 불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물도 능히 빠뜨릴 수 없느니라.
이러한 공덕은 1천 부처님들이 다함께 설한다 할지라도 능히 다 할 수 없으며, 너희들이 이제 여러 마군을 파하여 생사를 벗어나니, 여러 가지 다른 원수는 자연히 멸하느니라.
간경수행의 공덕 _ 기타
관자재보살은 약차 나찰을 위하여 법을 설했다.
너희들은 잘 들으라. 대승의 경이 있는데 이름이 대승장엄보왕이다. 만약 몇 구절을 듣고 잘 받아서 가지고 독송하여 그 뜻을 해설하고 마음에 항상 생각하면 그 복덕은 한량이 없을 것이니라.
선남자야, 모든 티끌수는 내가 능히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으나 만약 대승장엄보왕경에 일사구게를 능히 받아 지닌다면, 그 거두는 복덕은 내가 능히 그 수량을 헤아리지 못하며, 만약에 큰 바다에 모든 물은 내가 능히 그 물방울 수를 헤아릴 수 있으나 만약 이 경에서 능히 일사구게를 받아 가지는 그 복덕은 내 능히 그 수량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가사 십이긍가하의 모래수와 같은 여래응정등각을 십이겁 동안 함께 한 곳에 모시고 항상 의복, 음식, 와구, 탕약과 다른 모든 자구로써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께 보시하고 공양하여 얻는 복덕은 그 수량을 다 말할 수 없다. 오직 나뿐 아니라, 흑암처에서도 다 설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남자야, 또 만약 사대주의 사람이 각각 자기 사는 집으로써 정사를 만들어서 그 안에 천금보로써 천개의 불탑을 하루에 다 만들고, 여러 가지로 공양하여 얻은 복덕이 이 경 가운데 일사구게를 잘 수지하여 얻은 복덕만 같지 못할 것이다. 선남자야, 오대하가 큰 바다에 들어가듯 이와 같이 흘러들어 가는 것이 다함이 없는 것과 같이, 만약 이 대승경전의 사구게를 지니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 얻는 복덕의 흘러 들어 가는 것도 또한 다함이 없느니라.
이같은 유정들이 마음으로 오직 이 경의 이름만 생각해도 이러한 이익과 안락을 얻는데 만약 이 사람이 이 경을 듣거나, 능히 서사하여 수지독송하거나 공양하고 공경하면 이와같은 사람은 항상 안락을 얻을 것이다. 혹은 이 사람이 이 경 중에서 한 글자만 서사하여도 이 사람은 당래에 윤회의 고를 받지 않고 영원히 도아와 괴회 등 이러한 하천한 짐에는 태어나지 않고, 태어난 몸은 영원히 곱사와 앉은뱅이와 언청이와 문등병 등의 기뻐하지 않는 형상을 받지 않고, 신상이 원만함을 얻으며 제근(諸根)이 구족하여 큰 세력이 있는데, 하물며 구족하게 받아지니고 독송하고 서사하며 공양하고 공경하는 사람의 얻는 공덕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승장엄보왕경>
선남자여, 이 경을 받들어 지니는 이는 그 마음을 얻고 잃는 것이 없이 항상 범행을 닦으리라. <금강삼매경 총지품>
경을 듣는 일, 귀를 거치는 게 인연일 것이니 그 결과 기쁜 복이 있으리라. 환상같은 몸뚱이야 사라지더라도 참다운 행실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선가귀감>
이상의 인용들은 모두가 곧 금구(金口)의 정성스럽고 진실하신 말씀들이요, 중생의 허망심으로 맹랑하게 이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극한 마음으로 독송하는 사람은 영험이 헛되지 않은지라 언제나 부처님께서 가만히 드리워 호념해 주심을 받을 것이니 혹은 '선재로다'하고 칭찬도 하시고 손으로 이마도 쓸어 주시며 함께 여래의 옷을 덮어 섭수하고 부촉하여 위신력의 가피로 따라 기뻐하심은 물론 또한 신왕이 보호하고 하늘의 선인들이 모시며 금강신이 옹호해 따르고 제석신이 꽃비로 찬탄할 것이다.
복덕이 되는 인유(因由)를 성취함이 법계 허공의 크기와 같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뛰어나서 나아가서는 항하의 모래와 같은 칠보로 인연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또한 신체가 영통하여 무너지지 않으며 연꽃과 같은 혓바닥에 입에는 자단의 향내가 날 것이니 한 구절만 들어도 반드시 보리심에 나아가고 반 게송만을 외워도 공덕이 부처님과 같아지리라.
이와 같아서 만일 경전을 써서 펴낸다면 욕계천상의 과보를 받고, 지니고 읽고 외우며 수행하는 사람을 공양하면 복덕됨이 부처님보다 더욱 지나리니 이를 일러서 법위덕력('法威德力)의 생각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 가지 상서와 천 가지 영험이 이로 인하여 감통하며 또한 삼현(三賢)과 십성(十聖)도 이로부터 나는지라 끝없는 옛적부터 오늘날에 이르도록 아울러 범부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삼업으로 공양하고 십종으로 받아가져 참된 말씀을 받들어 전해 오면서 면면히 끊이지 않거늘 어찌 비방하는 마음만 일으켜서 올바른 법륜을 단절케 하겠는가. <만선동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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