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학사로 보는 세상] 시대가 질병을 만든다
2023.01.31 10:02
● 의학이 과학이라고?
의학은 생물체(사람)를 대상으로 하므로 물리나 화학법칙과 다르게 때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이야기는 “코로나 백신 여러번 맞아야 하는 이유”라는 글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의학이 과학적 법칙에 좌우되는 과학의 한 분야라면 예외없이 설명이 가능하거나 예외의 이유를 찾기 위해 학자들이 계속 노력하고, 그 성과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의학은 19세기 말부터 의학적 연구방법을 이용하여 크게 발전한 학문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학문이다.
진로탐색을 위해 의과대학을 방문하는 고등학생들에게 의학이 무슨 학문이냐고 물으면 흔히 “질병을 해결하기 위한 학문”이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몸에 이상이 없더라도 병원을 찾아와서 건강검진을 받는 경우처럼 정상인도 의학의 대상이 된다. 치료보다 예방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학문”이라 한다.
세상이 바뀌면 학문의 정의도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에는 원자가 “더 이상 깨지지 않는 물질의 기본 입자”라 했지만 지금은 사이클로트론과 같은 기계를 이용하여 원자를 깨는 것도 가능해졌다. 과학의 진리도 그 시대상황을 반영할 것일 뿐 절대적 진리는 아닌 것이다.
● 구별하기 어려운 질병과 건강
지금은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했지만 미세먼지가 극심했던 2016년 6월 21일 환경부장관은 “건강한 사람은 미세먼지 걱정 안 해도 된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세먼지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사람은 평소에 건강하지 않아서 생긴다는 말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됐고 건강한 사람이 미세먼지에 의한 피해가 없다는 게 사실이 아니므로 또 문제가 됐다.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어제까지 건강하던 중년 남성이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어깨 관절을 움직이려 하자 통증을 느낀다면 건강하지 못한 것인가. 평생 혈액내 저밀도 지단백 수치가 정상이던 사람이 최근 신체검사에서 정상범위를 살짝 벗어났다면 건강하지 못한 것인가. 또 3년간 연속해서 저밀도 지단백 수치가 계속 상승하여 정상치의 최고수준까지 올라갔지만 아직은 정상범위내에 있다면 건강한 것인가.
건강과 질병을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관이 “건강한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건강한 사람은 미세먼지로 가득한 나라나 도시를 마스크도 끼지 않고 돌아다녀도 좋다고 한 것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었다.
또 질병의 원인과 위험인자를 구별하지 못한 발언이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폐암 발생률을 크게 증가시키지만 반드시 폐암이 생기는 것은 아니므로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 아니라 위험인자라 해야 옳다. 하지만 폐암 발생 가능성을 크게 증가시키고, 폐암이 인체에 치명적인 질병이므로 그 위험성을 강조한다는 뜻에서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는 표현도 사용하곤 한다.
미세먼지도 여러 가지 질병의 원인이라 해도 큰 문제가 없을 만큼 건강을 위협하는 위험인자이므로 “건강한 사람은 걱정할 필요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수축기 혈압을 기준으로 고혈압 여부를 판정하는 것도 그리 과학적이지 않다. 사람마다, 민족마다, 인종마다 평균치가 다른데 한 가지 숫자를 기준으로 질병유무를 결정할 수는 없다. 단지 이해와 판단이 쉽도록 기준치를 정해 놓았을 뿐이다.
● 과거에는 질병이 아니었지만 현대에는 질병이 된 현상
질병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르고 나라에 따라 다르며 개인에 따라서도 다르다.
수십년 전만 해도 허리가 굽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래 산 것만 해도 축북받은 일인데 평생 고된 일을 하느라 허리가 굽은 것은 받아들일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과 비교하면 수명이 약 20년이나 늘어났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단순히 수명이 연장되는 것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기간이 길어지기를 기대하므로 생활에 조금이라도 불편이 있다면 바로잡는 게 현대의학이 할 일이다.
나이가 들면 사람의 몸에 탄력을 부여하는 결합조직이 감소한다. 이에 따라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주름살이 생기는 것은 자연현상이다. 미용과 기능, 어느 목적이든 다양한 의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지금은 피부를 더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연스런 노화를 사람의 몸에서 바로잡아야 할 이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다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준을 정하고 그에 따라 결정된다. 위에 헬리코박터균을 가진 사람이 반이 넘는다고 해서 헬리코박터균을 가진 것이 정상이고 없는 것이 비정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통풍이 잘 되지 않는 군화를 하루종일 신고 있는 군인들의 발에 무좀이 생기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허리가 유연하여 몸이 잘 굽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할 때 비정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 질병과 건강을 구분하는 기준은 일종의 약속이자 합의일 뿐이다.
● 질병에 대한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학자들
서양의학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활약한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377?)를 “의학의 아버지”라 한다. 그 이전에도 의사가 있었는데 그를 의학의 아버지라 하는 것은 뭔가 특별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이전에는 사람들이 “질병이란 신이 내린 벌”이라 생각했다. 질병의 원인이 신에게 있으니 병에 걸린 사람이 신에게 질병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조치였다.
신에게 기도를 할 바에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신전을 지어놓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왕이면 신전도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위한 신전이면 치료에 대한 기대가 더 컸을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는 코스섬에서 태어난 히포크라테스는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의술을 접했다. 또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의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갔다.
그가 내린 결론은 “질병은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사람 몸 내부와 외부의 부조화(불균형), 또는 사람 몸 내부에서의 부조화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부조화를 바로잡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히포크라테스는 인체의 부조화를 바로잡기 위한 약초를 찾아 정리하고, 각종 의료기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하자는 대로 해 본 결과 질병 치료효과가 전보다 훨씬 좋아지자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히포크라테스를 받든 제자들은 의학을 더 공부하고 연구했고, 이에 따라 의학은 더 발전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역사상 의학 발전에서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발견은 수시로 나타났다. 16세기에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는 앞선 학자들이 써 놓은 내용을 믿지 말고 무엇이든 직접 확인하라고 했다. 권위자(의학에서는 2세기 로마의사 갈레노스)가 남겨 놓은 지식을 무조건 믿고 따르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것이다.
17세기에 하비(William Harvey)는 관찰과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피가 온몸을 순환함을 보여 주었다. 그 전까지는 피가 음식을 이용하여 간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그와 경험론을 주장한 베이컨(Francis Bacon)의 유지를 받든 후대학자들은 영국 왕립협회를 창립하여 과학적 사고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19세기에 피르호(Rudolf Virchow)는 세포의 이상이 병을 일으킨다고 주장했고, 코흐(Robert Koch)는 세균이 감염병의 원인이라 주장하면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4원칙을 정립했다. 이 둘의 업적에 의해 세포병리학과 세균학이 크게 발전했다.
의학이 한층 업그레이드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발견에 도움이 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인 패러다임을 올바르게 바꾸는 것은 의학을 크게 변화시켜 발전으로 이어지곤 한다.
● 질병관이 의학의 범위를 결정한다
의학에 대한 패러다임은 질병을 대하는 견해, 질병관을 결정한다. 앞에서 질병과 건강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 것처럼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질병인지 아닌지, 의학이 담당해야 할 범위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찌뿌둥하게 느껴지는 것은 의학적으로 해결해야 할 질병인가, 그냥 몇 시간 지내다 보면 낫게 되는 일시적인 문제일 뿐인가. 또 이런 현상이 중년을 지나면서 흔히 나타난다면 장차 더 심하게 되는 걸 막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무시해도 될 일인가.
의학적으로 쉽게 해결가능한 증상이라면 무엇이든 개인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바로잡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인체에 사소하지만 의학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문제 또는 고치고 싶은 뭔가가 있다면 그건 질병이 아니라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상황이라면 의학자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겠지만 말이다.
장대익 교수가 책 제목으로 쓴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라는 표현에 적극 동의한다. 필자는 “의학은 과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과학적 연구방법을 이용하여 크게 발전한 학문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학문”이라 주장하지만 이렇게 긴 표현으로도 의학을 완전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과학뿐 아니라 의학에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의학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학문”이지만 건강과 질병은 그 시대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병관과 건강관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의학을 정의하기 어렵고, 의학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생각이 서로 다르고 변화하는 이유다.
※참고문헌
1. 자크 주아나. 히포크라테스. 서홍관 역. 아침이슬. 2004
2. 신동원, 여인석, 황상익, 강신익. 의학 오디세이. 역사비평사. 2007
3. 2016년 6월 21일, 환경부장관 기자회견내용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교수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빈대 잡는 대체 살충제 8종 승인…"가정 방제 위한 사용 안돼"
다시 감소한 코로나19 양성...전주보다 2% 줄어
[바꿔쓰자!과학용어] ⑧질병유전자→유전자변이...차세대한림원이 꼽은 용어
국내 말라리아 환자 올해 700명 넘어…12년만 최다
#질병#의학#의학과학#히포크라테스
관련기사
美, 1년에 한번 코로나 백신 접종...과학자들 "변이 대응 효과 의문"
인도에서도 한파…북극소용돌이발 아시아 추위 2월엔 물러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