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 천불산에 자리한 운주사는 1000개의 석불·석탑과 와불(누워있는 불상)등을 간직한 신비한 절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천불산 석탑. |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사원은 수천 년 동안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계승 발전해온 보물창고이다. 사찰은 대체로 일주문에서 사천왕문, 금강문과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가람배치 구조와 함께 대웅전 앞에는 한 개 혹은 두 개의 불탑을 세우는 것이 법칙인데, 특히 불탑은 인도에서 열반한 부처와 그 제자들을 기념하는 상징물로서 공을 반으로 자른 형태로 흙과 돌로 쌓다가 꼭대기 부분을 약간 평평하게 하고 그 위에 네모난 돌난간을 두르고 중앙에 세운 기둥에는 둥근 지붕을 씌워서 고대 인도어로 스투파(stupa: 한자로는 솔탑파(率塔婆)라고 한 것이 기원이다.
스투파가 파리어(巴梨語)로 변하면서 투파(thupa)라고 했는데,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던 4세기 초 스투파는 한자어로 탑파(塔坡) 또는 탑(塔)이라고 표기했으며, 현재와 같은 여러 층의 건물형태를 취한 탑과 스투파를 구별하였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탑(pagoda)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절집 한곳에 수십, 수백 개의 부처와 1000여 개의 불탑이 세워진 사찰이 있다는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千佛山)의 운주사(雲住寺)가 그렇다.
천불산이란 지명조차 천개나 되는 부처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여서 이곳에는 오래 전부터 수많은 부처가 있은 절로 널리 알려진 것 같은데, 신라 말인 52대 효공왕 때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선(道詵; 827~898) 국사가 한반도를 커다란 배로 비유하며 서쪽인 호남 지방이 동쪽인 영남 지방보다 산이 적어서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여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세웠다고도 하고, 또 운주(雲住)라는 스님이 세워서 운주사라고 했다는 설, 마고 할매가 세웠다는 설 등이 전해오고 있다.
운주사는 ‘구름이 머무는 절’이라는 의미이지만, ‘배를 움직인다’는 뜻의 운주사(運舟寺)로 불리는 운주사의 정확한 사적기는 없다. 1481년 조선 성종 때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운주사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운주사를 ‘천불천탑(千佛千塔)의 사찰’이라고도 하는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화순군)에도 ‘현의 남쪽 이십오리 떨어진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1000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운주사는 아마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많이 훼손되었을 것을 짐작되는데, 일제강점기이던 1942년까지도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석불 80기와 석탑 22기만 남아있다. 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와 두 차례의 학술조사를 했지만, 운주사의 창건시기와 사찰 조성배경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순천 송광사의 말사다.
운주사를 찾아가는 길은 약간 복잡한데, 그것은 그만큼 운주사가 심산유곡에 자리 잡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화순읍에서 능주를 거쳐 822번 지방도로 서쪽 도곡으로 내려가다가 도암면 소재지인 원천사거리에서 남쪽으로 강리 중장 터로 가면 운주사가 있는데, 광주 광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매 시간마다 출발하는 운주사행 318번, 218번 버스를 타는 것도 좋지만, 자가용으로 갈 경우에는 호남고속도로 동광주IC에서 광주 제2외곽순환도로를 따라가다가 소태IC를 빠져나가서 29번 국도로 화순읍과 능주를 지나 곧바로 도곡으로 가면 된다. 또, 광주에서 너릿재 터널을 지나 화순읍까지 22·29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화순중앙병원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능주까지 가서 지방도 822호선을 따라가다가 도암면소재지에서 월전마을, 용강저수지를 지나 우회전하면 되는데, 최근 광주대학교에서 칠구재 터널을 지나 전남학숙과 도곡온천을 경유하여 평리사거리로 가는 도로가 신설되었다
운주사 입구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거치면 대웅전이 있는데, 다양하고 수많은 석불과 석탑은 주로 일주문에서 사천왕문 사이에 많이 배치되어 있고, 운주사의 양쪽 산기슭에 집중되어 있다.
먼저,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가는 길가에는 2기의 9층 석탑(보물 제796호)과 1기의 원형 석탑(보물 제798호), 그리고 사천왕문 입구 부근에는 돌집을 지어서 앞뒤로 2기의 좌불을 모신 탑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보물 제797호), 이런 모습은 국내 어느 절집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오른쪽 길가에는 자연암벽에 기댄 채 수많은 석불들이 도열해 있는데, 부처들의 모습이나 크기가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 등 매우 다양한 모습들이다. 사람들은 이 부처들을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부르지만, 이런 불상 배치와 제작기법은 운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제작하다가 중단한 부처와 석탑의 부자재가 널려있다.
둘째, 운주산의 오른편 천불산에 올라가서 공사바위에서 운주사를 내려다보는 곳에도 역시 높다랗기만 하고 조금은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석탑 2기가 있고, 왼편 산에도 소나무 숲사이에 거대한 와불(臥佛)과 7개의 칠성바위가 있다. 양쪽 산꼭대기까지 나무계단을 만들어서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했으며, 거대한 와불 옆에는 와불 전체를 촬영할 수 있도록 철제계단으로 포토 존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운주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왼편 산꼭대기의 자연암반에 새기다 만 길이 12m, 폭10m에 이르는 거대한 와불인데, 전해오는 이야기는 도선 국사가 신통력으로 하늘의 도공들을 불러서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만들도록 할 때 건너편 공사바위에서 돌을 날라다주던 동자승이 너무 힘들어서 거짓으로 ‘꼬꼬댁’ 하며 닭 우는 소리를 지르자 도공들이 날이 밝은 줄로 알고 와불을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부부와불이라고 하는데, 남편와불은 길이가 12m 정도이고, 아내와불은 약9m쯤 되는데, 얼굴 길이만도 3m나 된다. 또, 이 와불이 세상을 바꾸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를 가져오는 미륵불이라고도 하지만, 아마도 돌부처를 제작하다가 중단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와불 아래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시멘트로 만든 둥근 맨홀처럼 잘 다듬어진 7개의 큰 바위가 널려있는데, 가장 큰 것은 지름이 3m나 된다. 사람들은 7개의 둥근 바위가 배치된 모습이 북두칠성 별자리와 같아서 ‘칠성바위’라고 하지만, 이것도 돌부처의 초석으로 삼으려고 원형으로 다듬던 바위를 미처 완성하지 못한 것 같다.
이렇듯 천불산 계곡의 운주사 석탑과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인 부처의 모습들, 부처나 석탑의 돌 재질이 그다지 좋지 않은 점, 한 곳에 부처와 불탑들이 밀집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면, 운주사는 이른바 맞춤식 부처와 불탑이 아니라 인근의 크고 작은 사찰에 석탑과 부처를 공급해준 사찰 전용의 석재공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절집에 그렇게 무수한 석탑과 불상이 밀집해 있고, 또 제작하다가 중단한 석탑과 불상, 그리고 제작하다가 깨진 석불들을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운주사의 수많은 석탑과 부처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부셔져서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석공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고려 후기에 토착화되고 보편화된 중소규모의 사찰이나 암자 그리고 개인불교신자 가정에 공급해준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