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라는 책이 얼마전 베스트셀러가 되었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막상 화를 내지만 그것이 근원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으며 ‘분노’라는 감정의 원인을 잘 살피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였다. 현대인에게 감정은 거의 모든 스트레스 상황의 중심에 있다. 인간을 때론 버겁게 짓누르고, 때론 마술처럼 행복하게 만드는 감정 뒤에는 과연 뇌의 어떤 메커니즘이 숨어있을까?
아이오와 주립대의 인지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감정과 의식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 온 그는 ‘감정이란 단지 인간의 이성을 갉아먹는, 불필요한 뇌의 악세사리같은 기능이 아닌 인류 진화에 큰 몫을 해 온 중대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희노애락에 대한 과학적인 해부를 시도한 그의 이론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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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쁨의 스위치, 슬픔의 스위치
파리의 한 수술실에서 뇌수술을 받던 60대 노인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너무 슬프다. 내 상황은 절망적이다. 살고 싶지 않다”며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세였다. 파킨슨병을 앓던 그 노인은 치료를 위해 뇌에 작은 전극을 꽂는 수술 중 이었는데, 의료진의 실수로 원래 자극을 주어야하는 지점에서 약간 왼쪽 부위가 건드려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자극이 제거되자, 시작과 똑같이 급작스럽게 아주 양호한 기분 상태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이 환자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우울증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증언했다. “갑자기 너무 슬픈 느낌이 몰려왔어요. 그리고는 절망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죠….”
흔히 감정의 작용기제를 설명할 때 슬픈 생각이 먼저 일어나고 이에 따라 슬픈 감정이 생긴다고 여겼었는데, 이 사례는 이와는 반대이다. 슬픈 감정이 먼저 생기고 다음으로 ‘내가 슬플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줄이어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했을 때 난데없는 박장대소를 터뜨린 사례도 있었다. 간질 치료를 위한 뇌수술을 앞둔 환자에게 의료진은 뇌의 언어영역 등 주요 부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뇌 여러 부위를 전극으로 자극하여 점검 중일 때였다.
그런데 한 환자가 뜬금없이 깔깔대며 웃기 시작한 것이다. 그 웃음은 상당히 진실해서 옆 사람들조차 그 웃음에 동화될 정도였다. 가령 말의 사진을 보여주면, “말이 너무 웃기다”며 깔깔대고, 의료진을 보면서 “당신들 거기 그렇게 서 있는 게 정말 우습다”며 키득거리는 식이었다. 전기 자극에 이런 반응을 보인 뇌의 부위는 좌측전두엽에서 2×2cm 정도 차지하는 영역이었다. 마찬가지로 자극이 멈추어지자 웃음은 멎었고, 그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고 밝혔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폴 에크만 박사는 이런 사례들을 실험적으로 뒷받침하는 연구를 하였다. 그는 실험자들에게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이라고 지시하며 실험자들의 감정 변화를 살폈는데, 제시된 움직임은 행복이나 슬픔, 두려움의 전형적인 얼굴 표정이었다. 그러나 실험대상자들은 이를 모른 채 얼굴 근육 움직임 하나하나에만 신경을 썼다. 그 결과 실험자들이 보고한 느낌은 각각의 감정에 해당하는 표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다시 말하면 행복한 척 했더니 행복해지고, 두려운 척 했더니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다마지오 박사는 영화 ‘왕과 나’에서 여주인공이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 두려움이 자신감으로 바뀐다”고 말한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음이 신경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두렵지 않은 척 남들을 속이면, 나 자신까지도 속이게 된다”는 명제처럼 말이다.
#2 감정의 기승전결
다마지오 박사는 감정을 ‘뇌와 마음이 주변 상황을 파악하여 그에 따라 반응하여 적응하도록 하는 자연적인 도구’라고 정의한다.
그는 감정의 생성과정으로 4단계를 제시했는데 그 첫 번째는 출현(presentation) 단계로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만일 커다란 곰이 눈앞에 나타나면 누구나 결과적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껴 도망칠 것이다. 이 때 ‘곰이 시야에 나타나는 것’이 출현단계로 볼 수 있다.
감정유발 자극에는 인류가 진화하면서 유전적으로 공유된 본능적인 자극의 매개체도 있지만 개인적 경험으로 쌓인, 한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매개체도 많다. 특별히 좋은 추억이 깃든 장소에 가면 이유없이 기분이 좋은 것이 이런 예이다. 인간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감정적으로 중립적인 물체가 세상에 거의 없을 정도로 주변 환경이 감정적으로 채색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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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생성단계 중 두 번째는 유도(triggering)단계이다. 눈의 망막에 ‘곰’이라는 감정자극체가 잡히면 뇌의 시각피질은 이를 파악하고, 감정과 연관된 뇌의 여러 영역을 자극하게 된다. 이 때 주목할 점은 아무 자극이나 뇌의 감정영역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고, 열쇠에 꼭 맞는 자물쇠가 따로 있듯 적합한 자극만이 뇌의 감정선을 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감정에 반응을 보이는 대표적인 뇌 부위는 변연계 깊숙한 곳에 위치한 편도체(amygdala)이다. 편도는 적절한 자극에 자물쇠가 열리듯 반응하여 감정의 여러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는 마치 바이러스 같은 항원이 혈관에 침투했을 때, 면역체계가 작동하여 항원을 무력화하는 항체를 형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때 감정자극은 항원이고, 이에 대한 감정적 반응은 항체에 해당한다. 편도체는 특히 두려움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유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편도가 감정자극에 대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폴 왈렌 박사의 뇌스캔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극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편도체는 이미 활성화되기 시작한다고 한다.
전전두엽의 일부(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도 감정을 유발하는 뇌영역이다. 보다 복잡한 감정자극인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죄의식 같은 사회적 감성에 관여하는 부위로, 개인적 경험으로 채색된 감정자극에도 이 영역이 작용한다.
감정 생성의 다음 단계는 실행(execution)단계이다. 이 때는 실제로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도파민이나 세레토닌 등의 호르몬이 분비되고, 얼굴근육의 변화로 표정이 바뀐다. 시상하부, 전뇌기저부, 뇌간이 이 과정에 동원되며, 웃거나 찌푸리거나 도망가는 행동이 취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마지막 단계인 감정상태(emotional state)에 온전히 들어가게 된다.
사실 감정의 4단계는 문자 그대로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나는 일. 이렇듯 미묘하고도 복잡다단한 인간의 감정을 칼로 무 자르듯 분석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감정 조절에 골머리를 앓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연구들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인체를 해부하면서 의학이 발달했듯 뇌의 감정에 대한 메커니즘은 인류가 꿈꿔온 영원한 행복에 대한 힌트를 던져줄 지도 모르겠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글│정호진 hojin@powerbrain.co.kr 도움받은 책│〈스피노자를 찾아서-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뇌〉안토니오 다마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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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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