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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반격에 대비하여 그날 밤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요소요소에 고지 근무를 하도록 병력을 배치해놓고 차기 작전 채비로 이진찬 보급 주임을 전북 도경 본국(本局)으로 급파하였다.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진지를 공격하다가 사살당한 공비들의 사체를 확인하고 있다. 병력을 재정비, 야음을 틈타 고지와 지서, 그리고 발전소를 포위 공격했던 것이다. 50미터, 근처까지 육박 해왔다. 아군이 탈환했던 선왕봉 고지가 이중 삼중으로 포위되고 후방의 보급로가 차단되었다는 연락병의 긴급 보고를 받았다. 함께 예비로 남겨 두었던 실탄까지 모두 지급했다. 대원들도 한 둘씩 생겼다. 실탄을 수령하러 간 이 진천 보급 주임의 신속한 귀대뿐 이었다. 그러나 공비들이 칠보에 이르는 각 도로망을 차단해 버렸다는 정보에 우리의 낙담과 불안은 커졌다. 공비들의 보급로 차단으로 태인에서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운명이었다. 그 때 아군에게 남은 실탄은 소총탄 1인당 4,5발,경기관총탄 60발, 소련제 기관총탄 5발뿐이었다 들어오라!” 이 주임은 불안한 어조로 대답했다.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염려 말고 즉시 태인을 출발하라!” 노려보았다. 내가 전우를 속인 것이 아닐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멸의 위기에 있는 부대원들을 구하기 위한 부득이 한 거짓말이 아니겠는가! 공비들의 비트에서 노획한 총기들. 가능하다. 1분, 2분, 3분이 지난 뒤 침묵을 깨고 일제 사격을 명령을 내렸다. 포위망을 뚫고 칠보 지서에 도착하였다. 했지만 이미 트럭은 사지(死地)를 빠져 나간 뒤였다. 탄약들을 각자의 진지로 운반해갔다. 가슴에 명중해서 사망케 하고 자동차의 엔진을 관통해서 운행 불능상태로 만들었다. 화력을 쏟아 부었다. 공비들도 지지 않고 응전해왔다. 칠보 발전소와 지서를 이중삼중으로 포위했던 적을 물리친 것이다. 전과는 적 사살 68명이었고 노획 무기는 개인화기 12정이었는데, 이중 3정이 M1, 소제 모신 나강이 2정, 수류탄 5개, 실탄 600발이었다. 부상 22명이었다. 옷을 벗어 보니 살갗이 따끔따끔 아리고 빨갛게 총알이 스친 자국이 여럿 있었다. 되었을 것이 아닌가! 전선에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단 1,2센티의 거리차이였던 것이다. 취수로에 짚단을 대량 던져 넣어 차단하고 발전기의 모터와 터빈을 파괴하여 가동 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기술자들과 함께 복구 공사에 착수하였다. 마음대로 구하지 못해서 우리 대원들이 옷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있는 짚단들을 빼내다가 몸이 얼어들면 잠시 나와 불을 쬐곤 다시 들어가 복구 작업을 했다. 넘어지면서도 노력한 끝에 취수로를 복구하였다. 못지않은 것이었다. 탈환 한 뒤에 경찰 1개 대대가 경비했던 칠보 발전소-1953년 사진 위해서 인근 공비들을 소탕하는 후속 작전을 구상하였다. 안전은 담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계속 도착하여 조직적이고 기동력있는 작전 계획을 수립할 수가 있었다. 독고봉이었다. 정읍군당의 정예 기포병단이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난공불락의 요지이기도 했었다. 그 때마다 희생만 컸을 뿐 실패를 거듭했었다. 노획한 소제 기관총 -사진의 데그챠레프 [떽뚀로쁘] 경기관총- 50여발을 쏘며 공격을 개시하여 드디어 세시간만에 목표를 점령했다. 부터 산외면을 향해 공격하고, 2중대는 내가 직접 지휘하고 고지를 우회하여 적의 정면을 공격하는 작전에 따라 행해졌다. 멀리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실로 감개무량한 생각이 들었다. 정비를 하면서 열흘정도 소강상태의 기간을 가졌다. 인솔하에 위문 예술대가 우리의 부대를 찾아 왔다. 정읍군 칠보면 지회장 서 순자씨,김 외준 정읍 서장도 동행했다. 전북 도지사의 표창장과 정읍군수, 발전소 직원일동,정읍 칠보 면민 일동의 감사장 수여식후 공보실 위안대의 위문 공연이 있었다. 일품이었다. 전선에서 무디어진 전투 경찰들의 마음에도 흘러간 노래는 훈훈하고 신선한 혈맥을 감돌게 해 오랜만에 즐겁고 유쾌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미 수복지인 정읍군 산외면과 산내면의 탈환이었다. 면 행정기구가 비로소 기능을 발휘하게 하였다. 근거지를 둔 도당 직속의 카츄샤 병단과 번개 병단을 계속 추격 격멸하여 산내면을 탈환하였다. 소련제 경기관총 1정, 소련제 모신 나강 소총 2정외 총기 10정, 일본도 3조, 사이드 카 1량, 박격포탄 7발, 수제(手製)수류탄 2발이었다. 맞아 쓰러진 권 홍문 경위가 있었다. 전사한 전투경찰 박 원기의 귀향과 어머니의 서러운 통곡 보지 못하고 전사한 것이 전우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산내면의 치안 회복에 주력하였다. 영위하고 있었는데 남자들은 모두 길게 머리를 땋은 총각들이 흔치 않게 보이는, 그야말로 전통적 전통과 농촌 전래 풍속이 그대로 살아있는 18세기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울리며 탈환 작전의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공비들이 몰려들어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는 등 극심한 횡포에 시달려 왔었다. 리는 토벌 때마다 공비 아지트에서 몰수한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주민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작전상 또는 발전소 공사 진행상 주민의 노력 동원이 필요할 때는 부대의 주,부식을 절약해서라도 우리가 품삯을 주자 처음에는 희귀한 이롤 여기는 듯했다. 내륙지방의 취약지구를 회복한 뒤에 20일 가까이 평정 사업을 전개했던 우리는 이 지역의 위협이 제거 되었다고 판단되자 1951년 3월 3일 명에 의해 작전 종료를 하고 전주로 철수하였다. 대응하러 출동하던 1월 13일 부터 따져 보니 무려 50여일 만의 본대 복귀였다. 보는 순간 대원들은 눈물이 나올 만큼 가슴이 뭉클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