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의 효찰(孝刹), 화산 용주사(華山龍珠寺) ②
드디어 대웅보전이 눈앞에 보입니다. 대웅보전 안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그렸다고 하니 자못 흥분된 마음으로 들어
섰습니다.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인데, 보경당(寶鏡堂) 사일
(獅馹)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
습니다.
또한 정조(正祖)의 명으로 실학자로서 박학다식하여 문장에 명성을 떨쳤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을 겪으
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대웅보전에도 창건시의 주련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당시의 주련 글귀는 다음과 같으니, "팔만 사천 법문으로 다같이 피안에 이르고, 이백오십
대계로 다함께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세."
그후 대웅보전은 1900년 성용해(成龍海) 총섭(總攝)이 중수하고 1931년에 강대련 주지,
1965년에 전관응 주지, 1987년 서정대 주지께서 수리하였습니다.
대웅보전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사원건축양식을 지닌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식
으로 공포(拱包)는 각 기둥과 평방위에 설치한 다포계(多包系)양식입니다. 처마는 2중의 겹
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를 세웠으며, 문은 빗꽃살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사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제치므로서 불전내부의 성역공간과 외부의 세속공간이
차별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합니다. 외벽의 3면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를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건물의 규모는 57평으로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장중한 위엄과
함께 산뜻한 조화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993년 5월에는 모든 전각의 외부에 단청불사를
하여 가람이 마치 갓지은 건물처럼 산뜻함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이 날씨 관계로 희미해서... 흐흐흐 ~ ^^

정조대왕이 하사한 글씨를 양각한 현판

우보처 아미타불 본존 석가모니불 좌보처 약사여래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용주사 홈페이지의 정보를 옮겨 봅니다.
대웅보전내의 삼세불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입니다. 석가불을 주존으로 동
쪽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협시하는 삼세불로서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었는데 재질
은 목조이고 높이 110㎝로 2006년에 개금하였습니다.
대웅전의 닫집속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을 보면 불상조성의 시말을 알 수 있는데, 불상조성
은 상계(商界)ㆍ설훈(雪訓)ㆍ계초(戒初)ㆍ봉현(奉玹) 등 20명의 스님이 참여하여 1790년 8월
16일 처음 시작하여 9월 30일에 완성하였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10월1일에 나라안의 명승
을 초빙하여 점안식을 거행하였고, 또한 위의 기록보다 후에 작성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
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서방아미타불은 전라도 지리산 파근사(波根寺) 통정 봉현(奉絃)이 조성하고, 동방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통정 상식(尙植),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 통정 계초(戒初)가 각
조성하였다." 삼세불상은 이처럼 조각자가 다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분위기를 지
니고 있습니다만 석가여래와 아미타불은 상호가 네모졌고, 약사불은 둥근 형태를 지니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각각 전라도와 강원도 조각승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됩
니다.
모두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풍만한 얼굴에 짧은 목,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 등
에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습니다. 나발에는 정상계주(頂上髻珠)와 중간계주
(中間髻珠)가 크게 박혀 있고 옷주름은 굵고 두터운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수인
은 석가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마왕(魔王) 파순(波旬)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 아미타
불이 극락세계에서 대중에게 설법하는 설법인 그리고 약사여래는 오른손에 약그릇을 들고
왼손에 설법인을 쥐고 있습니다 .
한편 당시 대구 동화사(桐華寺) 승려였던 인악대사 의첨(義沾, 1746~1796)스님이 왕명으로
삼세불상의 복장문인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株寺佛腹藏奉安文)>을 지었는데, 국왕의 성은
을 칭송하고 왕실의 안락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이 기록과 함께 스님이 찬한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경찬소(慶讚蔬)>가 《인
악집(仁嶽集)》에 전하는데 정조가 이 글들을 읽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고 합니다. 석가, 약사,
아미타부처님은 우리 나라 불교사의 흐름에서 보면 민중의 신앙으로서 꾸준히 신앙되어 왔
습니다. 특히 약사신앙은 중생의 질병구제와 장수를 기원하고, 아미타신앙은 염불 만으로도
서방극락왕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이행도(易行道)로서 크게 신앙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 김홍도가 그린 후불탱화
용주사 홈페이지의 글을 정리해서 올려 봅니다.
대웅보전의 삼존상 뒤에 위치하는 삼세불의 후불탱화입니다. 세로 440㎝, 가로 350㎝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로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이 협시합니
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동일하게 원형으로 두광ㆍ신광을 나타냈고 석가모니불만은 주형
(舟形)으로 처리하였습니다. 화면의 하단에는 석가모니불 아래에 제자 아난과 가섭이 수학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바로 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약사불 아래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각
각 화려한 보관과 영락을 지니고 시립해 있고 하단의 좌우 가장자리에는 증장천왕(增長天
王)과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숭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한편 하단 중앙의
문수ㆍ보현보살 사이에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자궁저하수만세(慈宮邸下壽萬
歲)' 왕비전하수만세(王妃殿下壽萬歲' '세자저하수만세(世子邸下壽萬歲' 라는 은자서(銀字
書)의 축원문이 적혀있어 후불탱화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가 왕실에 미치기를 기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상전하는 정조, 자궁전하는 생모인 혜경궁 홍씨, 왕비전하는 왕비인 효의왕후 김
씨, 세자저하는 순조입니다.
화면의 상단 좌우 가장자리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역시 불법을
수호하고 중앙의 석가모니불 두광 좌우에는 화불(化佛)이 보이고 곳곳에 여러 제자와 천녀
상이 위치하여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불화는 원칙적으로 한치의 여백도 없이 꽉찬
구도를 묘사하는데 이는 불법의 세계가 법과 지혜로 충만된 완전의 공간이므로 이를 묘사
한 불화는 마땅히 빈공간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불화의 전체적인 특징으로는 먼저 색조에 있어서 일반적인 불화의 주조색인 적색ㆍ녹색
위주에서 벗어나 옅은 청색과 갈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선의 처리는 다소 필력이 약하여
박진감과 생동감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시대 불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평면적, 도
식적인 기법과는 거리가 멉니다. 과장없는 인체비례, 사실적인 얼굴표현, 침착한 설채법(設
彩法) 등이 불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인물이 표현에 음영법을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불화는 서양화법과 같은 원근법, 명암법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
는 것이 상례인데, 후불탱화의 인물표현에 음영을 나타냈다는 것은 불화를 그리는 전문적
인 화승(畵僧)의 작품이 아니라 당시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문인화가에 의해 이루어졌음
을 말해줍니다.
불화의 제작자에 대해서 과거부터 김홍도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그가 아닌 다른 사
람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이론도 있는데, 즉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願文) 중의 "민
관(旻寬)ㆍ상겸(尙謙)ㆍ성윤(性允) 등 25인이 탱화를 그렸다"라는 기록을 증거로 김홍도가
아니라 25인의 화승들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입니다만 이러한 이설에는 다소 무리가 따릅니
다.
미술사가 최완수(崔完秀) 선생의 말을 빌리면, '우선 탱화에 표현된 불보살 및 그 권속들의
얼굴표현이 바로 단원풍의 얼굴모습들이며 길쭉한 정도로 긴 윤곽에 우리 얼굴치고는 코가
너무 크다고 할 만큼 우뚝솟은 콧날을 가진 청수한 용모가 그것인데 이 얼굴 모습은 아마
단원 스스로의 용모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유연하고 날렵하게 젖혀지는 손목의 표현
이나 그에 비해 무미하다고 할 만큼 아무 변화없이 미끈하게 처리하는 팔뚝표현도 단원만
이 가지는 인체표현의 특징이며 세장한 손가락과 고운 발 맵시 역시 단원 인물화에서 보이
는 품위있는 표현법이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맞은 옷자락인 듯 유려하게 휘날리는 당풍세
(當風勢)의 옷자락 표현이 또한 단원 인물화임을 증명해준다.'
김홍도(金弘道 1745~ ?)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로 진경산수(眞
景山水),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풍속화 등 여러 방면에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독창적 화
풍을 이룩함으로써 한국화 발전에 커다란 획을 그었습니다.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
진(御眞)과 당시 왕세자였던 정조의 초상을 그렸고,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인 1788년에는
왕명으로 금강산 등을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으며 용주사가 창건된 직후인
1791년에는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해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
감에 임명, 정조에게서 "그림에 관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관하게 했다."고 할 만큼 총애
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정조대에 최고의 화가였고 또 왕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가 용주사의 창건에 직접
적으로 관여했음은 당연한 일이고,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고 또 그 능사로써
용주사를 세우는데 당대 최고의 승려와 각종 기술자를 초빙하고 물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
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홍도는 대웅보전 의 후불탱을 제작했고 1796년에는
《불설부모은중경판》의 변상도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절에 소장되어 있는 4폭의
김홍도가 그린 병풍도 이 무렵에 왕에게서 하사된 것입니다.
결국 용주사 대웅보전 후불탱은 왕명을 받은 김홍도의 주관 아래 민관ㆍ상겸ㆍ성윤 등의
25인이 참여하여 제작됐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후불탱의 은자서 축원문은 사자관 글씨체
인데 김홍도가 주관자였으므로 그가 직접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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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보살상(護明菩薩)과 삼장탱화(三藏幀畵)
대웅보전에 들어와서 오른쪽 벽면에 서면 특이한 탱화 하나를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불화인 삼장탱화입니다. 지장탱화가 발전하여 확대된 형태라고 여겨
지는 이 불화는 삼장탱화 혹은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라고 불리며 지장도, 십왕도(十王圖)
와 함께 지옥계(地獄系) 불화에 속합니다.
삼장은 천장(天藏)ㆍ지장(地藏)ㆍ지지보살(持地菩薩)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 세 보살의 법
회를 동시에 한 화면에 도설한 것이 삼장탱화입니다. 천장ㆍ지지ㆍ지장보살은 각각 천상ㆍ
지상ㆍ지하의 삼계교주(三界敎主)로 신앙됩니다.
이 삼장탱화는 1790년 용주사 창건과 함께 민관(旻寬)ㆍ관인(寬仁)스님에 의해 바단 화폭에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합장한 보살상은 여섯 개의 어금니를 가진 코끼리 등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호명
보살로 여겨집니다.

신중탱화. 1914년 조성.

황심행님, 겨우 잡았습니다.

청안님, 어디를 보십니까?

멋진 묘법님.

범종각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하였으며, 종각 안에는 국보 제120호로 지정된 범종
이 있습니다.

국보 제120호인 범종

좁은 창살틈으로 찍은 겁니다.
범종을 살펴보면, 종의 정면 아래 부분에 연꽃을 아로새긴 당좌(唐座, 종을 치는 부분)와 종
신의 양쪽 옆에 자리한 비천상을 대할 수 있습니다. 고려초기의 범종이라고 하지만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이며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종의 정상부에는
신라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뉴와 용통이 있습니다. |
용머리는 종 정상부의 보주(寶珠)를 물어서 두발로 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을 잡고 종 전
체를 들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용통은 연주문(連珠紋)을 돌렸습니다.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唐草紋)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천판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상대와 하대의 무늬는 서로 다른 무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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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半圓圈)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종밑에 돌린 하대에는 연속된 당초 무늬로 장식
하였습니다. 또 하대에는 연속된 당초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종신에는 비천을 두 곳에 새겼고, 그 사이 사이에는 연화좌위에 결가부좌한 삼존불상을 조
각하였습니다.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追刻)한 명문에 의하면 원성왕 16년(854)년에 주
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아 신라 시대의
동종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저기 비니초님이 범종각의 설명을 보고 있는 듯

법고각(法鼓閣)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단칸 3평의 아담한 건물로 내부에 북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법고(法鼓)
법고는 홍고(弘鼓)라고도 하며 보통 북이라고 합니다. 북은 예불과 의식에 쓰이는 사물(四物)
의 하나로서 짐승세계의 중생들을 위하여 소리를 냅니다. 또한 북소리가 널리 퍼져나가는 것
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든 이에게 참다운 이치를 전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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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3부, 부모은중경탑입니다. 명상곡 '무상의 세계'

향기로운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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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갑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 정조의 효심이 안 닿은 곳이 없네요. 당대의 김홍도, 이덕무... 사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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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묘법이 사진도 있내요....나무묘법연화경()()()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딴 데로 가지 마시고 저의 주변에 같이 하셔야 모습이 드러나는데 어디 계셨는지요


다음 번엔 명심하세요. 
_()_
김홍도가 그렸다는 탱화가 다른 탱화와
리 입체감을 느낍니다. 
뭔가 좀 색다른 느낌이 들지요
화풍이 좀 다른 데가 있습니다. 
_()_
정조대왕의 현판 글씨가 참으로 힘차게 느껴져요. 법당안의
존불을 뵙고 부처님 뒤의 후불탱화가 김홍도 작품이라고 알려 줘서 새
들여다 보니 분위기가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범
이 국보라고 해서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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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글씨가 참 명필이더군요. 사전에 후불탱화가 김홍도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가서 그런지 들어설 때부터 설레는 마음이었습니다. 범
은 문살 틈으로 카메라를 넣어서 잡아 보려고 했지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