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나침반불교성전 96쪽, 제3분2품3장5절(믿음)
1. 수고와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열리는 불도성취의 길
사랑하는 불자 여러분!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왜 나만 희생을 해야 하고, 왜 나만 수고를 해야 하고, 왜 나만 손해를 봐야 하고, 왜 나만 불행하게 살아야 하냐며 자신의 괴로운 신세를 한탄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나 직장에서, 가족 간의 생활에서도 꼭 나만 희생하는 것 같고, 나만 수고하는 것 같고,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나만 불행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어차피 태어난 인생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산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때가 있었거나 지금 그런 마음을 품고 계시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세존의 법문을 특별히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백복장엄의 팔을 태워 약왕보살이 된 일체중생희견보살
❰법화경 제23, 약왕보살본사품❱에 보면 ‘일체중생희견(一切衆生喜見)’이란 보살이 등장합니다.
일체중생희견보살이란 ‘모든 사람들이 한 번 친견하기만 해도 기뻐하고 좋아한다’는 그런 뜻을 가진 보살입니다. 일체중생희견보살이 믿고 따르고 귀의한 부처님은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이었습니다. 일월정명덕이란 ‘해처럼 빛나고 달처럼 청정한 공덕을 가졌다’는 그런 뜻의 부처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번 친견하기만 해도 기뻐하고 좋아하게 되는’ [일체중생희견보살]은 ‘해처럼 빛나고 달처럼 청정한 공덕을 가진’ [일월정명덕불]을 스승으로, 구세주로 모시며 그의 법을 받들고 그에게 공양을 올리며 무수한 세월 동안 변치 않는 신심으로 일평생을 수행정진했다고 하였습니다.
일월정명덕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일체중생희견보살은 세상 각처에다 팔만사천 개의 보탑을 세워 일월정명덕 부처님의 사리를 탑 속에 모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탑 앞에서 백복장엄비(百福莊嚴臂), 즉 ‘백복으로 장엄한 팔’을 72,000년 동안이나 태우면서, 무수한 사람들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향해 발심하도록 힘썼으며, 그들이 끝내 일체현색신삼매(一切顯色身三昧)에 머물도록 사람들을 제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법화경 제23품 약왕보살본사품》은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사람들을 위해 이러한 백복으로 장엄한 팔을 태워 헌신하고 수고하고 희생한 그 공덕으로 마침내 모든 중생들의 병고를 치유하는 약왕보살(藥王菩薩)로 뛰어올랐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주목할 점은, 무수한 사람들을 부처님의 깨달음을 향해 발심하도록 하기 위해 칠만 이천년이란 긴 세월 동안이나 <백복으로 장엄한 팔>을 일월정명덕불의 보탑 앞에서 태웠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백복으로 장엄한 팔>이란 어떤 팔이냐 하면, 마치 관세음보살께서 천 개의 손으로써 중생을 건지듯이, 일체중생희견보살 또한 중생들을 위해 칠만 이천년이란 긴 세월 동안 수고의 팔, 구제의 팔, 헌신의 팔, 작복의 팔……. 이렇게 세상을 구제하는 헌신적인 팔을 펼침으로써 갖춰진 온갖 복덕과 공덕으로 장엄한 팔이 이른바, <백복으로 장엄한 팔>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는 점은, 이러한 백복으로 장엄한 팔을 ‘태웠다’는 말이 가지는 숨은 의미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김동리 선생의 소설《등신불》의 내용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백복으로 장엄한 팔을 태웠다는 것은 바로 등신불에서처럼, 일체중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공양’으로 기꺼이 내놓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끝없는 헌신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의 삶이, 하루하루 수고하는 나의 삶이 바로 백복으로 장엄하는 팔을 태워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작은 씨앗이 마침내 거목으로 성장하는 법입니다. 희생을 당하는 것 같고,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불행하게 생각되는 것 같은 나의 하루하루의 수고와 헌신이 저 거룩한 부처님, 저 위대한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이룩한 백복으로 장엄한 팔을 태워가는 그런 희생, 그런 수고, 그런 정진이라는 사실입니다.
제불보살도 처음에는 미미한 작은 씨앗과도 같은 발심보살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나고 죽기를 끝없이 반복하면서 끝없는 보살행을 닦고 닦아서, 마침내 제불보살의 높고 거룩한 지위에 올라섰던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살아가면서 왜 나만 희생을 당해야 하나, 왜 나만 손해를 봐야 하나,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 여겨지는 나의 지금의 희생과 수고와 헌신의 의미를 깨닫자는 겁니다. 나의 하루하루의 삶이 곧 예배가 되고 수행이 되고 정진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인생은 원래가 고해(苦海)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고해라는 말은 세상살이가 원래 힘들고 괴롭다는 말입니다.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에 힘쓰고, 예배에 힘쓰고, 보시에 힘쓰면서 백복으로 장엄하는 팔을 태우는 인생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해를 넘어 성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 사회에서 나만 희생한다, 나만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분은 지금 손해를 보고 희생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희견보살처럼 위없는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는 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배고픈 백성을 구하여 천상의 보살로 뛰어오른 국왕 - 설두건녕
또한 불경 가운데 ❰현우경❱의 [제24화]에 ‘가뭄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고기로 환생한 국왕 - 설두건녕’이 등장합니다.
12년간의 길고 긴 가뭄으로 말미암아 온 백성들이 굶어죽는 고통을 받자 이를 보다 못한 그 나라의 임금 - 설두건녕은 스스로 백성의 밥이 되기를 발원하면서 “저로 하여금 커다란 몸을 가진 물고기가 되어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간절한 기도가 천지를 감동시켜 국왕 - 설두건녕은 커다란 물고기로 환생하게 됩니다.
굶주림의 고통에 허덕이던 백성들은 이 커다란 물고기를 발견하고는 먹을 것이 생겼다고 모두들 좋아했습니다. 그 때 물고기가 사람들에게 말을 합니다.
“내 살점을 베어 먹으면 그 자리에 다시 새살이 돋아날 것이니, 굶주린 백성은 조금도 염려치 말고 나의 살점을 베어 먹어라.”
이에 배고픔에 허덕이던 백성들은 물고기의 부탁대로 그의 살을 베어 먹으니 물고기 몸에서 금방 새살이 돋아나고 또 돋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 - [설두건녕]은 몸을 무수히 베이는 아픔을 참아내며 굶주린 백성들의 희생공양(犧牲供養)이 됨으로써 그들을 모두 구하였고, 그는 이 공덕으로 마침내 천상의 보살로 뛰어올랐다고 현우경은 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희생과 헌신과 수고를 통하여 마침내 백복으로 장엄하는 팔을 갖춘 <일체중생희견보살>을 보면서, 물고기로 변한 자기 몸을 배고픈 중생들에게 내어주면서 마침내 천상의 보살로 뛰어올랐다는 <임금 - 설두건녕>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러한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이러한 임금 - 설두건녕과 같은 분이 어찌 불경 속에만 등장하겠습니까? 눈을 돌려 나 자신과 세상 사람들을 살펴보면, 바로 우리 가까이에서 자기희생을 통하여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보살들을 무수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진리의 눈을 뜨고 보면,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가르치기 위해 매일같이 온갖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세상 모든 부모들이 바로 희생과 헌신의 거룩한 보살들입니다.
진리의 눈을 뜨고 보면 “내 일생 조국을 위하여” “선진조국 창조” “하면 된다” 는 정신으로 보릿고개의 가난에 허덕이는 이 땅의 동포를 위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말씀하면서 장기집권으로, 철권통치로 독재자라는 오명도 마다하지 않은 채, 새마을운동을 비롯한 경제개발계획을 단계별로 착착 진행하여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박정희 대통령 역시 백복장엄의 팔을 태운 일체중생희견보살처럼, 베고픈 중생들에게 자기 몸을 내어준 엄금 - 설두건녕처럼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보살입니다.
사람들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논밭에서... 자기 직분을 완수하기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고 헌신할 때 유독 나만 수고하고 희생하고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생각을 돌려서 “아, 내가 지금 진짜 보살행을 잘 하고 있구나!” 이렇게 깨닫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오늘의 나의 삶이 바로 성불의 길로 나아가는 보살행입니다. 성불은 갑자기 주어지는 선물이 결코 아닙니다. 끝없는 수고와 헌신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거룩한 열매가 성불인 것입니다.
2. 숲을 이뤄야만 높이 자라는 나무들처럼
가족이라는 인연, 직장이라는 수고의 공간에 감사를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하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일체중생희견보살’에게 고난 받는 무수한 중생들이 없었다면, 만약 ‘국왕 – 설두건녕’에게 배고픔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없었다면 더 높은 단계로 보살 지위로 뛰어오를 수도 없고, 성불의 열매를 거둘 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불의 길로 나아가는 신앙생활, 수행정진은 이처럼 너와 내가 더불어 함께하는 가운데 완성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희생을 요구하고 수고를 요구하고 헌신을 요구하는 가족이 있는 것에, 직장이 있는 것에 고마움을 느껴야 합니다.
불가에 총림(叢林)이란 말이 있습니다. 총림이란 초목총림(草木叢林)의 준말로서, 숲속의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져 서로를 의지하며 올곧게 성장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들판에 홀로 선 나무는 옆으로 퍼지지만 울창한 숲을 이루어 자라는 숲속의 나무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지지하면서 하늘을 향해 더 높이, 더 곧게 자랍니다.
초목총림을 이룸으로써 위대한 성장, 거룩한 불도성취를
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있듯이, 사람으로 이루어진 숲이 있습니다. 바로 석림(釋林), 거사림(居士林), 보살림(菩薩林)이란 숲입니다. 이들의 이름 속에는 모두 수풀 림(林)이 들어있는 것은 이들이 사람으로 이루어진 숲이기 때문입니다.
석림(釋林)이란 《팔만대장경》 속에 담긴 석가세존의 말씀을 영양분으로 삼아, 그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여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제도하기에 힘씀으로써 성불도중생을 발원하는 스님들로 구성된 숲을 말합니다.
거사림(居士林), 보살림(菩薩林)이란 즉 세속의 현장, 곧 가정과 직장에서 주어진 생업에 충실하면서도 항상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법문을 받들어 실천함으로써 세상 속에서 이웃들과 함께 성불을 꿈꾸는 남녀신도들로 구성된 숲을 말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초목총림을 이뤄 함께 성장할 거사요, 보살이란 자각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비록 세파에 쉬 흔들리는 연약한 나무에 불과할지라도 여러분 모두가 초목총림을 이루는 한 그루 보리수가 되어 서로 의지하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나가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세상살이에는 저마다 자기 앞에 주어진 직분과 책무가 있습니다. 진정한 불자라면 그 책무와 직분에 대하여 불평불만과 원망을 앞세우기보다 기꺼이 수고하고 헌신하는 원력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초목총림을 이루는 원력보살이 되어 중단 없는 정진을 해나갈 때 위대한 성장, 거룩한 불도성취가 가능한 법입니다. 우리 모두 위대한 성장, 거룩한 불도성취를 다음 생으로 미루지 말고 금생에 이뤄내십시다.
3.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불자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할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백복장엄의 팔을 태우는 자기희생을 통하여 중생을 구함으로써 약왕보살로 한 단계 더 올라선 일체중생희견보살과, 배고픈 백성을 살리기 위해 커다란 물고기로 환생하여 백성을 구함으로써 천상의 보살로 뛰어오른 설두건녕이란 임금을 통해, 희생과 헌신이 결코 손해가 아니요, 불도를 완성하는 길인 줄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직장에서, 세상에서, 내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희생을 하고 헌신을 요구받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거나 불평하기보다 이로써 복을 짓고, 이로써 공덕을 짓고, 이로써 불도를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만났구나 하고, 감사하는 우리가 되십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더불어 성장하는 초목총림의 원리를 통해, 우리 불자들이 함께 모여 법회를 모시고, 함께 모여 기도를 하고, 함께 모여 법문을 듣고, 함께 모여 정진에 힘쓰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법화경과 현우경의 말씀을 통하여 신심이 더욱 증장되고, 무엇보다 부처님의 뜻에 더욱 일치하는 불도성츼의 삶을 이루어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하면서, 마지막으로 나침반 불교성전 96쪽, 제3분2품3장5절의 믿음에 대한 세존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믿음은 반성하고 같이 기뻐하고 간절히 원하는 세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이는 깊이 자신을 반성하여 죄업과 더러움을 참회한다. 믿음이 있는 이는 남이 행하는 착한 일을 보면 내가 행한 것처럼 기뻐하고 그 사람이 그러한 공덕을 더욱 쌓아 물러섬이 없는 수행을 이루어, 그러한 수행을 통해 결국에는 깨달음의 세계에 들 수 있도록 기원하는 마음을 가진다. 믿음이 있는 이는 언제나 붓다의 거룩한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겨 붓다의 바른 진리로부터 물러서는 일이 없으며 언제나 붓다와 함께 하는 삶을 원한다. 믿음은 지극한 마음이고, 지성한 마음이고, 깊은 마음이고, 기뻐하는 마음이니 붓다와 붓다의 거룩한 가르침, 그리고 스님을 믿는 그 믿음의 힘에 의해 붓다의 나라로 인도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설법일지 ; 2024-08-27(화) 미륵도용궁사 월보 제263호 이 달의 설법 2011-09-04(일)11;00 통영룸비니회 9월 정기법회 법문. 2011-04-10(일)10;30 통영거사림 4월 정기법회 법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