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말
독일의 철학자 칸트도 "사람은 원래 야수와 같으나 교육에 의해 인간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우리들의 선조들은 결혼관부터가 종족의 보존과 건강한 자손의 생산에 큰 의미를 부여했으며인간의 양육은 태교를 통해서 잘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여 훌륭한 분들은 이러한 교육을 지혜롭게도 잘 실천했다하니 어느 면으로는 미래지향적인 가정관과 사회관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로부터 역대 왕들은 통치자로서 성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덕치를 중시하였다. 자기 수련과 제도적 교육이 개별적이면서도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왕조계승에 있어 부족함이 없는 후계자로의 양성은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어 이를 위해 원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이 있었다.
삼국시대에서부터 나라별로 특색을 지니면서 왕세자 교육이 시행되다가, 고려조 후기에 들어 정착한 후에 조선조에 이르러 유교의 교육정신이 통치이념으로 등장하면서 궁중에서도체계적인 왕자교육이 정비되었다. 왕으로서 국정을 이끌어 갈 자격을 갖추어야 했다. 왕으로서 덕목을 갖추기 위한 교육은 매우 중요했다. 왕과 왕비의 정성과 교육열은 대단하였고 또한 왕세자 교육은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과업이었다.
부모로서 절제하고 잉태를 준비하는 임신 전 태교로부터 잉태기간 중에 부모의 마음가짐과 정서, 음식 그리고 언행 등을 구별함으로써 장차 태어날 아이나 원자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하려는 임신 중의 태교가 적극적으로 시행되었다. 유학이 고려 말에 들어오면서 6세기경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부분적으로 태교를 다루고 있는 열녀전 등이 전해져 읽혀왔고 이를 통해 선조들은 태교를 실천하였다.
태교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 말기 정몽주의 어머니 이씨가 쓴 <태중훈문>을 들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허준<동의보감>을 비롯하여 율곡 이이가 쓴 <성학집요>,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등에서 태교를 다루고 있다. 체계적인 태교연구는 사주당 이씨에 의해 집대성된 <태교신기>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소학>, <열녀전> 등과 함께 지금까지 태교를 실천하는 주요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보양청이 원자의 보호와 양육을 담당했다. 좋은 음식과 바른 말 그리고 바른 일 등을 보고 들으며 자라 성군으로서 인의예지의 덕이 몸에 베어 장차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리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3세에서 4세가 되어 인지가 발달하고 글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이면 세자 책봉 전 조기교육을 위해 국가에서 임시기구로 <강학청을 설치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다. 강학청에서 원자는 아침 점심 저녁에 매일 3회씩 정규적으로 수업을 받았는데 <천자문>, <동봉선습>, <격몽요결> 등을 가르쳤다.
원자가 성장하여 대략 8세에서 10세 혹은 15세쯤 되면 세자 책봉례를 행하게 된다(세자로 공식 임명서를 수여하는 의식). 세자 책봉에 관하여는 <국조오례의>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왕세자가 입학례를 거행하기 이전에 보조교육(대체로 소학을 수강할 수 있는 수준)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입학례는 오늘날의 취학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며 유교적인 의전절차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길일을 잡아 성균과에 가서 공자에게 절하고 스승이 될 박사에게 사부가 되어줄 것을 청한 후 박사가 강의하는 논어를 따라 읽고 뜻을 풀이하며 수업의식을 진행한다.
성균관 입학례를 마친 왕세자는 시강원에서 본격적으로 개별교육이면서도 평생교육 개념의 특수교육을 받았다. 성군과 효자, 효제가 되기 위해 <효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주역>, <예기>, <춘추좌전> 등 유교의 옛 경전 등을 익혔다. 군주로서 요구되는 식견과 능력을 배양하는 제왕의 통치술도 아울러 배웠다.
양녕대군이 공부를 게을리 하자 세자의 공부시간, 학습 방법, 지도 교사 등에 대해서도 관여하며 간섭했다. 폐세자가 되어 셋째인 충녕대군, 즉 4대 세종에게 세자의 자리를 물려주어야 했다.
교육에 있어서의 후천설 - 즉 태어날 때의 유전적 요소보다도 태어난 후 사회환경과 교육이 아이의 성장에 있어 정서, 지능, 성품 등을 형성하는 데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1장
원하는 아이를 낳는 왕실 태교
동양에서는 아기의 인간형성을 태아 때부터라고 여겼기 때문에 태교를 중요시해 왔다.
태교란 뱃속에 있는 태아를 교육한다는 뜻이다. 임신부는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여 태아에게 정서적, 심리적, 신체적으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임신 중인 어머니의 마음가짐과 언행이 곧바로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P.18). 태교는 한 인간의 올바른 인성을 만드는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이다.
중국을 통해 태교가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는 왕족이나 상류에서만 특별하게 이루어지다가, 점차 서민층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P.19).
1. 문헌에 나타난 전통 태교
우리 나라는 유교사회이기 때문에 유명한 다산사회였다. 결혼은 곧 자식 농사로 이어가는 것이었다.
전통사회에서 임신부가 실천해야 할 올바른 말과 행동, 마음가짐에 대해금기사항을 들어가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P.20).
늘 자세를 바르게 하고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라는 옛 가르침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태교는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이어져 왔다. 태교에 관한 가르침이 최초로 나오는 우리 나라의 문헌은 고려 말기 정몽주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이 쓴 <태중훈문>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여인이 아기를 가지게 되면, 옛 성현들의 훌륭한 가르침을 배우고 본받으며 실천하는 것을 주요덕목으로 여겼다(P.21).
숙종 때 학자였던 송시열은 <계녀서>에서 태교의 중요성을 말한다: ... 대개 자식은 그 어머니를 닮게 마련이다.
어머니가 하는 말과 행동, 생각은 그대로 태아에게 전해지므로, 임신부는 항상 바르고 단정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왕명에 의해 이율곡이 편찬한 <성학 집요>의 <교자>편에는 임신부가 지켜야 할 행동에 대해 자세하게 쓰고 있다:(P.22) " ... 잠자는 것,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바르면 태어나는 아기의 모습도 바르고 용모가 단정하며 재주가 뛰어나다."(P.23)
<동의보감>이나 <규합총서>, <태교신기>와 같은 문헌에서 태교에 대한 가르침이 전해져 온다.
<동의보감>:"수태 몸에 어머니가 화를 내면 태아의 피가 병든다. 어머니가 두려워하면 태아의 정신이 병들고, 근심하면 기운이 병들고, 크게 놀라면 태아가 간질을 갖게 된다."(P.24)
<규합총서>:"일은 과하게 하여 몸을 상하게 말고 .... 많이 자거나 오래 누워 있지 말고 때때로 거닐어라. 달이 찬 뒤에 머리를 감지 말고 높은 뒷간에 오르지 말라."
200년 전에 이미 적절한 휴식과 운동이 유산이나 조산을 예방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P.25).
<태교신기>는 사주당 이씨가 4명의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실제로 겪은 경험을 토대로 만든 책으로 동서양을 통틀어 태교에 관한 전문서적으로는 최초의 문헌으로가치가 높다. ... 남편에게도 태교의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P.26).
<태교신기>에서 말하는 7정이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일곱 가지 감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쁨, 성냄, 설움, 주림, 사랑함, 미움, 욕심을 일컫는다(P.27).
"임신부는 굿거리, 잡 노래와 시장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와 아낙네 잔소리와 꾸중, 술 주정, 분한 욕질하는 소리와 서러운 울음 소리를 듣지 말 것이며,오직 마땅히 사람이 들어서 좋은 글을 외우고 읽거나 거문고를 켜거나 들을 것이다."
<태교신기>
정서적인 긴장을 유발하는 불안이나 공포, 스트레스는 태아의 성장을 방해하고 심하면 유산, 조산, 사산 등을 일으키기도 한다(P.28).
유교적 농업국가에서는 게으른 것은 죄악시 되었다(P.29).
임신부에게 경솔한 행동은 금물이다(P.30).
태교란 평소 얼마나 몸과 마음을 바르게 관리했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통 태교에 관한 책을 쓴 사람들은 당시 덕과 학문을 겸비한 훌륭한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결과는 우연이 아니라 훌륭한 어머니의 올바른 태교와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있는 것이다. ... 아기는 어머니의 거울이므로 태교는 뱃속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태어난 후 성장하는 과정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P.31).
태교의 진정한 시작은 어머니가 아기를 갖기 전으로 거슬러 간다. .... 사람답게 가르쳐야 한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 관점은 출산, 임신 중에서도 특히 아버지의 태교로 잘 나타나고 있다.
태교의 도가 남녀 간의 교합에서부터 연유하여 그 책임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있음을 일찍이 인식했기 때문이다(P.32).
부성 태교의 중요성을 강요한 전통 태교
아버지의 태교는 뱃속에 있는 아기의 지적 신체적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훈날 가문의 흥망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비의 낳음과 어미의 기름과 스승의 가르침이 모두 한 가지다. 의술을 잘하는 자는 아직 병들지 아니함을 다스리고, 가르치기 잘하는 자는 태어나기 전에 가르친다. 그러므로 스승의 10년 가르침이 어미가 잉태하여 10달 기르는 것만 같지 못하고, 어미 10달 기름이 아비 하루 낳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P.33)
부부가 합방해서는 안 되는 날
임신 전의 태교 방법은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태교신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P.34).
태교와 관련한 여러 문헌을 보면 부부의 합방을 금하는 날은 대개가 예사롭지 않은 기상이나 천재지변과 관련이 깊다. ... 임신 전 태교란 한마디로 정서적, 심리적,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임신에 힘쓰라는 것이다.
* 큰 비가 내리거나 큰 바람이 부는 날(P.35)
* 천둥번개가 치는 날(P.36)
* 안개가 짙게 낀 날(P.37)
* 몹시 춥거나 더운 날
* 일식과 월식이 있는 날, 이 밖에 초하루날이나 보름날, 그믐날도 합방하지 않았다(P.38).
* 병중이거나 앓고 난 후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듯이 심신이 고루 편해야 부부관계도 즐겁고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과음, 과식이나 허기졌을 때(P.39).
* 집안에 상을 당했을 때
* 크게 기쁘거나 신경 쓸 일이 많을 때
* 불빛이나 달빛, 별빛이 비치는 곳(P.40)
부부관계란 오로지 훌륭한 자식을 낳기 위한 머나먼 고행의 시작이다. ... 건강하고 총명한 자식을 얻기 위해 좋은 날을 택해 합방을 하는 예비 부모의 심정은 엄숙하고 진지하게 이루어진다(P.41).
- 간택으로부터 시작하는 왕실의 임신 전 태교
배우자의 선택과정은 매우 까다로워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등 모두 세 단계의 엄정한 심사를 거친다.
왕가의 배우자를 선택하고 혼례를 치르는 의식은 국조오례의라는 왕실의례서를 만들어 혼례의 절차를 명문화했고, 혼례를 주관하는 임시 관천인 가례도감을 설치해 혼례를 치렀다(P.42). ... 삼간택에서 최종적으로 선택된 처자는 곧바로 별궁으로 들어가 궁궐에서의 예의범절, 말씨, 교양 등을 50여일간 가례를 치르는 날까지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2) 임신 중의 태교: 눈 가리고 귀 막고 버어리로 10개월(P.43)
태교는 어머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비롯하여 온가족의 관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임신부가 보지 말아야 할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P.44)
* 광대나 원숭이를 보지 말라
* 병든 새, 싸우는 모습, 생물을 해치는 모습을 보지 말라(P.45)
* 일식이나 월식, 무지개, 유성을 보지 말라(P.46)
* 천둥번개 치는 것을 보지 말라
*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을 보지 않는다(P.47)
* 죄인이나 죽은 사람을 보지 않는다
* 홍수나 태풍같은 자연재해를 보지말라(P.48)
* 음란한 장면을 보지 않는다(P.49)
- 임신 중에 듣지 말아야 할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 시장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지 말라
* 술 주정하거나 욕하는 소리를 듣지 말라(P.50)
* 서러운 울음소리를 듣지 말라
* 서럽게 우는 벌레울음소리를 듣지 말라(P.51)
* 저속한 잡담을 듣지 않는다(P.52)
*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듣지 않는다: 태아는 분명히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듣고 심지어는 기억까지 한다. ... 태아의 존재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다루는 마음이 곧 태교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P.53)
- 임신 중에는 어떤 말을 하지 말아야 할까?
* 거짓말하는 것을 금한다
* 아랫사람이나 동물을 꾸짖는 말을 삼간다(P.54)
* 귀옛말이나 헛소문을 옮기지 않는다
* 모진 소리나 욕설을 삼간다(P.55)
* 말할 때 손짓하거나 웃을 때 잇몸을 보이지 않는다: 전통 태교에 따르면 임신부는 아무리 좋은 감정이라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을 금하고 있다. 좋은 것도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하듯이 늘 적절한 감정의 표현이 태아에게 가장 편하고 안정된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P.56)
- 임신 중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 임신 중에는 부부관계를 금한다(P.57)
* 엎드리거나 구부린 자세로 잠자지 말라(P.58)
* 여름 한낮에 낮잠을 자지 않는다: 임신부는 특히 날씨의 변화에 민감하여 쉽게 지치고 짜증을 많이 낸다(P.59)
* 문틈쪽으로 눕지 않는다
* 너무 많이 자거나 오래 누워 있는 것을 금한다(P.60)
* 배불리 먹고 자는 것을 금한다
* 취침시간의 반은 왼쪽으로, 반은 오른쪽으로 누워라(P.61)
* 해산달에는 똑바로 눕지 말고 머리를 감지 마라: 전통 태교에 따르면 해산달에 임신부가 기대어 자면 순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P.62)
* 침과 뜸, 탕을 함부로 쓰지 말라
* 올라가거나 내려올 때 천천히 움직인다(P.63)
* 한 발로 서거나 기둥에 기대어 서지 말라
* 위태로운 곳을 밟지 않는다
*급히 달리거나 뛰어다니지 말것(P.64)
* 우물을 엿보거나 무덤 근처에 가지 않는다
* 차가운 곳이나 더러운 곳에 앉지 않는다(P.65)
* 밤이나 바람 부는 날, 비오는 날은 외출을 삼간다
* 무거운 것을 들지 않는다
* 높은 데 오르거나 깊은 데 가지 않는다(P.66)
* 기운 빠지는 일을 하지 않는다
* 칼로 생물을 베지 않는다(P.67)
* 많이 먹거나 옷을 덥게 입지 말라
전통 사회에서는 개인의 감정보다는 가족, 집안, 가문의 명예를 우선하였다(P.68).
2. 유별난 왕실 태교
태교의 유래는 중국 문헌인 <대대예기>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 태교가 왕족이나 상류사회에서만 이루어지다가, 차츰 서민사회로 전해졌다(P.69).
태임은 중국 주나라의 건국 시조인 문왕의 어머니로,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좋은 어머니의 본보기이자, 태교의 표본으로 삼았던 여성이다.
"태임의 성품이 단정하고 한결 같으며 정성스럽고 장중하며 오직 덕행을 하다가 임신을 했는데, 눈으로는 나쁜 빛깔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탕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입으로는 오만한 말을 하지 않으며 태교를 실천하였다."
<열녀전>(P.70)
조선의 태임이라고 할 수 있는 신사임당 역시 율곡이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 길렀다. ... 태교의 핵심은 임신부의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 데 있다.
1) 전통 태교에 바탕을 둔 왕실 태교
조선시대의 아들을 낳기 위한 노력은 노비집안에서부터 평민, 양반, 왕실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이 진실한 사안이었다. 조선사회에서는 부모의 생명을 잇는 것은 오로지 집안의 큰아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P.71).
- 가야금, 거문고 연주를 듣는다
길일을 정해 합방한 다음날부터 왕가에서는 아들이 들어서는 데 좋다는 음식을 가려서 왕비에게 먹이고,(P.72) 여러 가지 노력을 들인다. ... 왕실에서는 먼저 조용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조용한 별궁에서 지내면서 좋은 음식과 음악, 글을 늘 접하면서 신선처럼 지냈다. 왕실에서는 궁중아악의 잔잔한 음률이 임신부를 정서적으로 안정시키고 태아의 정서에도 좋은 영향을 끼친다하여 적극 권장하였다(P.73).
장단에 따라 높낮이가 심해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며 격하고 예민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피리독주를 금하였다.
잔잔한 클래식을 듣는 것이 여러 모로 좋다는 것이다. 출산을 앞두고 모짜르트 CD를 10장 정도는 구비해 놔야 사려깊은 부모라 하지 않을까?
- 임신 전후 단 것을 금한다
임신부가 단 것을 많이 먹으면 태어날 아기의 머리가 나빠진다는 설이 왕실에서는 전해져 오고 있다.
- 임신 2개월, 입덧 음식 만들기에 전전긍긍(P.74)
입덧이 심하게 되면 음식이 먹고 싶지 않고 신것이 먹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신 음식은 폐의 기능을 강화시킨다. 임신을 하면 심폐 기능이 자연히 강화되어야 태아에게도 충분한 산소를 공급해 줄 수 있다. 동양의학에서는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P.75).
- 임신 3개월, 본격적인 별궁생활 시작
이것은 뱃속의 아기를 미리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태교신기>에 기록되어 있다(P.76).
왕비는 늘 조용히 묵상하듯이 바르게 앉아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좋은 이야기만 들으며 올바른 언행을 실천하여 시, 서, 화 수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P.77)
- 임신 5개월, 태아를 위한 경서공부 시작,
임신 6개월, 태아를 위한 모의글방 진행
태동이 시작되면 임신 5개월이 되면, 왕비와 태아를 위해 목청 좋은 내관들이 왕비의 방 앞에서 4서 3경을 읽는 일과가 생긴다. 왕비의 마음을 평정시키고 수양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이보다도 더 태아의 조기교육이라는 명목의 경서공부 시작이 주목적이었다.
임신을 한 후 6개월이 되면 왕실에서는 당직 내시들이 묻고 답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모의 글방을 차린다(P.78),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을 해설까지 붙여가며 낭랑한 목소리로 낭독하여 왕비에게 들려주었다. 이는 태아 때부터 덕을 쌓고 바른 길을 가르쳐 총명한 군주로 키우기 위한 왕실의 엄격한 태교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 임신 7개월, 콩으로 된 음식을 먹는다
임신 7개월이 되면 왕비는 아침 식사하기 전에 왕실주방에서 나오는 순두부를 먹는다, 콩으로 만든 순두부가 뇌를 발달시킨다는 것이 당시 왕궁의 정설이었기 때문에 주로 콩으로 된 음식을 먹었다(P.79). ... 이밖에 새우나 조개, 생선, 김, 미역 등의 해조류를 먹었다. 해산물 중에서 특히 게나 문어 등은 기피하는 음식이었다(P.80).
- 임신 9개월, 여양관리에 집중한다
현대의학에 의하면 인간 뇌의 무게는 임신 9개월에서 출생시까지 극도로 늘어난다고 한다. ... 궁중에서는 아기의 탄생 1개월 전인 9개월부터 왕비의 영양관리를 담당할 내명부 전담 상궁의 수를 두배로 늘렸다.
- 해산달, 비상근무에 들어가는 왕실
예정일보다 서너 달쯤 전에 산실청이라는 출산기관이 설치되고 동시에 의정부의 3정승과 내의원의 숙련된 어의들이 왕비의 출산 때까지 왕실에 머물며 비상근무를 한다(P.81).
3. 요즘의 태교 풍속도
진정한 태교는 임신부의 올바른 마음자세에 달려 있다(P.83).
부모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자질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항상 올바르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생활 속에서 훌륭한 아기가 태어난다.
1) 임신부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어라(P.84)
임신 6개월부터 태아의 청각이 반응하므로, 이때부터는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태아에게 좋다. 태아에게 가장 좋은 태교음악은 아버지가 직접 불러주는 노래다. 오후 8-11시는 태아의 청각 신경이 가장 예민한 시간대이므로 이 시간을 이용하여 음악을 들려주거나 태아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금상첨화다(P.85). ... 임신부와 가족들은 태아가 5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2) 태아와 많은 대화를 나누어라
태아와의 대화는 임신부와 태아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나아가 태아의 뇌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외부의 적절한 소리 자극은 태아 뇌의 포도당과 산소의 양을 높여 준다(P.86).
태아가 청력을 갖추게 되는 임신 6개월이 되면, 태아에게는 예민한 청각기능과 말의 억양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에 목소리에 곧잘 반응을 보인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태아의 정서적 안정에 가장 도움이 되며, 태아의 뇌 기능에 더욱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 부모의 음성은 태아의 뇌 발달과 청력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아와 대화를 할 때는 부드럽지만 분명한 말투로 하는 것이 좋으며, 말의 높낮이를 살려서 말하는 것이 좋다. 조용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 주거나 대화를 나누는 태교는 태아가 세상에 태어난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유아교육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P.87).
3) 평온한 마음을 가져라
임신부가 정신적으로 불안하여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뇌하수체에 스트레스 호르몬이 증가하여 태아의 뇌 세포 성장을 억제하므로 뇌 발달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현대의학은 밝히고 있다(P.88).
임신부가 즐겁고 명랑한 기분을 유지하면 태아 뇌의 신경전달물질계가 자극을 받아 뇌 발달을 촉진한다. 임부의 감정에 가장 깊은 영향을 주는 사람은 아기의 아버지이므로 임신부가 평온한 마음과 자세를 가지도록 항상 배려해야 한다(P.89).
4. 전통사회에 있어서 훌륭한 태교 아야기들
교육의 시작이며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이 가정교육이며 그 가정교육은 훌륭한 태교로부터 시작한다. ... 자신과 가정에서의 신뢰회복을 통해 가정에서의 성공을 보장받아야 하고, 이는 곧 직장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우리의 동양사상 중 균형잡힌 원칙중심의 성품교육과 상통하는 점이며, 가정교육에서부터 시작하는 수신제가를 생각나게 한다.
* 요석공주
신라시대의 유명한 고승이었던 원효대사가 출가하여 수도하던 중에 요석공주를 만나 낳은 이가 설총이다(P.90).
* 문왕의 어머니 태임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은 태교를 자신의 덕목으로 삼고 열심히 실천했다.
*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자신이 시문에 능하고 글과 그림에 뛰어났을 뿐아니라 남편에게는 현숙하고도 어진 아내였으며, 자식들에게는 엄하고도 자상한 어머니였다. ... 태교와 양육의 모범이 되어 동방의 현인이라 칭송받는 이율곡선생과 천재 여류시인 매창 등 일곱 남매를 모두 훌륭한 재사요 효자로 키워 한민족의 어머니상을 보여 준다(P.91).
* 정몽주의 어머니
인간의 수태, 태중, 출산의 각각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태교를 실천하기에 이르렀다(P.92).
* 강감찬의 아버지
* 사주당 이씨
유희의 어머니인 이씨는 어릴 적부터 박통 경사하였으며 행동도 단정하였다. <태교신기>라는 명저를 남겨서 세인들의 태교 교육과 실천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 공자의 어머니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의 어머니는 노나라의 니구산을 찾아가 아들을 위한 기도로 잉태하였다.
* 맹자의 어머니
맹자의 어머니는 전국시대 사람으로 요순을 본받으며, 잉태 후에 말과몸을 조신하였고 출산 후에도 아들을 위하여 교육환경을 위하여 세 번 이사를 하는 삼천지교를 실천하여 맹자를 훌륭한 인물로 길렀다(P.93).
5. 과학으로 증명된 전통 태교
아기의 지능지수는 부모의 유전인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궁내의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였다. 특히 태내에서 충분한 산소와 영향분을 공급받고 심신이 편안한 모체에서 태어난 아기일수록 지능지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P.94).
임신 24주가 되면 태아의 뇌 세포가 조직화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태아도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5감을 느낄 수 있으며, 5감을 통해 배운 것을 학습할 수 있다고 한다. ... 태아는 소리와 전통을 통해 외부의 소리를 듣기 때문에 5감 중에서도 특히 청각에 대한 기억을 가장 본능적으로 느낀다. ... 임신 7개월쯤 된 임신부의 배에 강한 불빛을 비추면 태아가 꿈틀거리는 것도 태아가 외부의 빛을 시각적으로 인식한다는 증거다(P.95).
태아는 엄마의 말과 생각은 물론 보고 듣고 먹는 모든 일을 정서적으로 함께 공유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나 가려서 해야 한다.
유태인의 자녀교육 및 교육의 지혜로부터
- 가장 많이 놀면서도 가장 똑똑하게 키우는 유태인의 자녀교육 - (P.96)
유태인을 유태인답게 키우고자 하는 종교적인 삶의 실천 의지 그리고 책을 귀하게 여기고, 자녀교육에 대한 열린 마음을 실천하며 모범을 보이는 유태인의 자녀양육의 지혜교육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97).
- 부모에게서 받은 만큼을 부모에게 말고 자식에게 베푼다
- '어리니까'라는 관용적 태도보다는 소유권을 명확히 구별시킨다(P.98)
- 많이 먹도록 자꾸 권하고 편식하지 않도록 한다
- 식탁 근처에서나 식사 시간에는 텔레비젼을 켜지 않는다(P.99)
-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삶의 기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살도록 시간관리를 공부의 기초로 한다
- 자녀들의 잘못은 신념을 가지고 매로 다스린다(P.100)
- 침묵은 매보다 효과적이며 최고의 벌은 침묵이다(P.101)
- 성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간결하게 가르쳐 쓸데없는 망상을 하지 않도록 한다
어린아이들은 4-5세 때부터 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 유태인 부모들은 성과 섹스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자녀들의 성교육에도 그대로 적용시킨다.
- 세대가 다른 친척들과 친밀하게 접촉할 기회를 제공한다(P.102)
유태인들에게 있어 가족이라고 할 때에는 자녀들과 부모뿐만 아니라 조부모, 그밖에 삼촌이나 숙모를 포함한 사촌형제까지를 일컫는다. ... 대가족 제도를 통하여 유태인들의 지혜는 각 세대와의 단전없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예를 들어 하이네가 있다. 그 곳에서 데카르트, 헤르몬트, 네테스하임 등의 철학자들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되었다.
- 평생을 가르치겠다는 마음으로 어려서 놀 때는 마음껏 놀게 한다(P.103)
놀이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이들의 성격 형성과 사회성 그리고 지능개발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유아교육이나 발달심리학 등에서 연구 보고 되었었다. 대자연은 아이디어 보따리이며 과학이므로 기발한 생각과 창조적 아이디어는 자연을 응용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학문의 탐구는 어른이 된 다음부터 이루어진다고 유태인들은 생각한다. ...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육관을 기본으로 하는 유태인들에게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시기에는 마음껏 놀게 해두라는 것이 기본적인 교육관이자 부모 자식간의 관계 설정에 기초를 이룬다.
- 하찮은 장난감이나 도구일지라도 감각적, 지적자극제가 될 수 있는 선택을 한다
유태인 부모 특히 어머니를 '교육만을 위한 엄마'로 일컫기로 한다. 그러나 자녀들을 과잉되게 열성적으로 가르치지도 않으며, 수재교육이다, 영재교육이다, 천재교육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에 집어넣어 남보다 특별나게 가르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P.104).
학교공부와 관련되는 교육완구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찮은 장난감이나 도구일지라도 어린이의 품성과 두뇌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선택하여 적용 여부에 따라서 기발한 지적 자극제가 되도록 노력한다. 한 살부터 세 살까지의 어린이들에게는 감각적인 자극을 주며, 특히 소근육과 운동신경을 발달시킬 수 있는 장난감을 선택한다. 또한 세 살경부터 여섯 살까지의 어린이에게는 지적 자극을 주는 장난감을 선택하도록 한다.
- 빠를수록 좋은 외국어 교육은 어릴적부터 습관화시킨다(P.105)
유태인은 보통 2개 국어 이상을 한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전세계에 흩어져, 때론 떠돌아다니며 살아야 했던 특수한 환경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외국어를 사용하는 친척들과 자주 교류하다보니, 어렸을 때부터 외국어를 듣고 따라 해보면서 자연스레 언어교육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P.105). ... 외국어 조기교육의 필요성은 취미생활하듯 지속적이면서도 적절한 시기에 체계적인 훈련이 주어진다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자녀들의 배움을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먼저 배우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P.106)
한석봉의 어머니와 신사임당이 모범적인 부모 역할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
- 다른 아이보다 뛰어난 점이 아니라, 다른 아이와 다른 개성을 개발시킨다
유태인 어머니들의 교육관은 각자 타고난 개성을 존중하며 다양한 가치관을 지니고 긴 안목으로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있다(P.107). 그는 남과 다른 개성을 중요시하는 부모의 사랑과 신뢰 속에 이런 취급을 아랑곳하지 않고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유클리드, 데카르트, 뉴톤 그리고 스피노자와 같은 수학자, 과학자 그리고 철학자를 독파했다.
모든 인간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평등과 평화가 가득한 낙원에 살게 될 것이다(P.108).
2장
왕세자는 어떻게 교육 받았을까?(P.109)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1970년대부터 영재교육에 관심을 기울여온 데 비하여, 우리 나라는 이때부터 거꾸로 아동들을 똑같이 취급하는 획일적인 평준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물론 창의성과 사고력에서 하향평준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내 아이의 장점과 소질을 개발하여 이끌어주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역할임을 잊지말아야 한다(P.110).
자녀는 어렸을 때부터 능력과 소질과 취미에 맞는 방향으로 장려해야만 큰 인물로 키울 수 있다고 신사임당은 강조했다. 이미 500년 전부터 조기교육과 적성교육을 중요하게 여겨왔다
조기교육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조선시대 왕실의 왕세자 교육에서 대표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조기교육기관으로는 보양청과 강학청이 있다. 임금이나 세자의 첫아들인 원자가 태어나면, 그때부터 보양청이 설치돼 유아교육을 담당했고, 3-4세가 되면 현재 유치원에 해당하는 강학청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등을 가르쳤다.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면 시강원에서 본격적인 '왕 만들기' 교육을 실시하였다.
왕실의 유별난 태교를 시작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른 다음에도 계속되는 왕실의 단계별 교육에 대해서 알아보고, 요즘의 현실에 맞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P.111).
1. 왕세자의 교육은
1) 갓난아기씨 교육:보양청
장차 한 나라를 이끌어 갈 예비 왕은 태아 때부터 덕을 겸비한 총명한 군주의 제목으로 키워지기 위해 엄격한 태교의 시간을 거친 후 비로소 태어난다. ... 남성 위주의 장자상속이 존재하던 조선 사회는 아들의 탄생을 기뻐했다.
- 아기씨 탄생 직후, 약물에 목욕시킨다(P.112)
어머니의 탯줄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부터 바로 보통 인간을 뛰어넘는 신성한 존재로서 받들어지며, 점차 왕실의 엄격한 지도자 교육으로 단련된다.
- 유모 손에서 자라는 아기씨
유모는 대체로 자신도 젖먹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당연히 젖이 풍부하고심성이 고우며 지혜로운 여성을 대비전에서 엄격하게 선발하는 것이 상례였다(P.113). 유모는 공식적으로 종1품의 품계를 받고 봉보부인이라는 칭호를 하사받는다. 종1품은 조선시대 최고의 품계인 정1품 영의정의 바로 아래 등급에 해당되며, 정2품인 육조판서보다 높은 품계를 받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보호와 양육을 전담하던 보양청(P.114)
보양청이란 원자를 보좌하고 교도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태어난 직후부터 3세까지의 원자를 교육시키는 왕실기관이었다.
보양청은 원자가 먹을 음식과 입을 옷, 교육에 필요한 서책을 공급하고 관리하던 곳이었다. 보양청의 책임자인 보양관으로는 종2품 이상 3명의 고위관료에 임명된다(P.114). 와의 특명에 의해 의정부의 3정승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겸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자의 음식과 의복 등의 관리실무를 맡기 위해 서책공급 담당자, 숙직 담당자, 글씨 담당자, 심부름 담당자 10여명이 배속되었다.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등 실질적인 양육은 왕비나 유모, 궁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 정서교육에 주력했던 보양청
- 두뇌를 자극하는 곤지곤지, 잼잼(P.115)
영이들의 놀이인 곤지곤지나 잼잼, 도리도리, 짝자꿍, 부라부라좌법 등의 고조선 때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우리 나라 고유의 신선몸짓이라는 것이다(P.116).
2) 원자 교육:강학청
강학청은 대개 4살부터 6살까지의 원자가 교육을 받던 곳으로 어린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운영되던 왕실 기관이었다. 정2품 이상의 보양관들이 그대로 스승으로 임명되지만, 학력이 뛰어난 사람이 추가로 특명되기도 했다.
강학청은 오늘날 초등교육이 시작되는 단계이다.
- 수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원자 나이 5세가 되면 한자 교육으로 초기 영재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뜻글인 한문의 교육이 두뇌발달에 매우 중요하다고 현대과학은 설명하고 있다. 음악이나 한문글씨가 조기 영재교육에 끼치는 긍정적인 점은 이미 근대 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P.118).
강학청의 교육은 <천자문>, <소학>, <격몽요결> 등을 교재로 삼은 유교 교육이 중심을 이룬다. 한자 교육이 주를 이루었으나 한글(언문)과 체조도 함께 가르쳤다. 강학청의 수업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때에 각각 한 차례씩 세 번을 했으며, 수업시간은 대략 45분 가량이었다. 철저한 반복교육이었다.
원자가 여덟 살 이후가 되면 세자가 책봉된다(P.119).
3) 왕세자 교육: 서연
서연은 세자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교육제도로 유교가 왕성했던 중국에서 경연과 함께 도입되었다. 우리 나라에 들어 온 시기는 고려 중엽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것은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서연은 왕세자를 위한 교육제도로 왕이 받던 교육제도인 경연과 구별된다.
한 나라의 국와으로서 갖추어야 할 학문과 덕목에 대한 교육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다. 조선 왕실의 제왕학을 보면 왕은 철저한 교육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왕은 즉위하기 전부터 왕의 권자에 오르고 난 이후에도 끊임없는 교육으로 왕으로서의 자질과 식견을 길러야 한다. 와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왕실의 단계별 교육은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최고 관료들에 의하여 철저하게 진행된다(P.120).
- 시강원의 스승들은 어떤 사람인가?
세자의 교육을 세자시강원에서 전담하였다. 정1품인 영의정이 세자의 사로 좌의정과 우의정 중에서 한 명이 부로 종1품인 좌우찬성 한명이 이사로 임명된다.
세자시강원의 전임관료는 보덕(종3품), 필선(정4품), 문학(정5품), 사서(정6품), 설서(정7품) 등 5명으로 구성된다. 문학은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에 치중하였다(P.121).
국왕의 자리에 오른 대부분의 왕들은 세자시절에 자신을 가르쳤던 전임관료들을 높은 자리에 임명하거나, 중요한 나랏일을 결정할 때 정책고문으로 모셔 자문을 구하는 등 스승의 예우를 다했다(P.122).
- 시강원에서 세자가 배우는 것은?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에게 효도하고, 피를 나눈 형제들과 우애있게 지내는 방법과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침식을 살피는 절차를 몸에 익히도록 교육받는다. 유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효를 우선 가르쳤다.
세자가 배우는 교재는 경연과 마찬가지로 유교경서와 역사책이 주를 이룬다.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효경>을 먼저 공부한 다음, 차츰 <논어>, <맹자>, <중용>, <대학> 4서와 5경 <시경>, <서경>, <상서>, <주역>, <예기>, <춘추> 중에서 <상서>와 <시경>을 주로 배운다. 역사책으로 <통감>과 <강목>을 공부한다. 수기치인을 위한 왕의 자질을 가르치는 성리학 서적도 아울러 배웠다.
- 세자의 하루 일과는?
열심히 공부하고 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문안 인사하는 것이 세자의 하루 일과이다.
세자는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고(P.123) 바로 오전공부인 조강에 참석하기 위해 세자시강원에 간다. 오전공부는 복습이다. 세자는 책을 덮고 배운 것을 암송해야 한다. 참석한 관료 중에서 관직이 높은 사람이 점수를 매겼다. 암송하지 못하면 꾸지람이 뒤따른다.
세자의 복습 시간이 끝나면 전임관료 중에서 상급자가 그 날 배울 교재의 본문에 나오는 글자의 음과 뜻을 풀어주고 문장의 뜻을 해설한다. 전임관료가 읽고 해설하는 것을 세자는 되풀이하며 따라 읽는다. 세자가 모르면 질문하고 전임관료는 답한다. 전임관료가 그 날 배운 문장을 다시 한 번 낭독하고 세자가 따라서 읽는다. 그것으로 오전공부는 끝난다.
오전공부가 끝나면 점심식사를 하고 곧장 오후공부인 주강에 들어간다. 수업방식은 아침공부와 마찬가지다. 오후공부가 끝나면 저녁공부인 석강에 들어간다. 그후 저녁식사를 한다.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올린 다음 하루일과는 끝이 난다(P.124).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방학이 있다. 왕실의 제사가 있는 날이나 왕의 생일과 같은 나라의 공식행사가 있는 날은 세자의 수업도 휴강이다.
정1품인 사, 부와 종1품인 이사가 참석할 때는 세자도 이들을 스승의 예우로 극진하게 대하였다.
왕세자의 입학식은 세자가 관례를 치를 무렵, 성균관의 대성전에 모신 성현들의 신위에 잔을 올리고, 명륜당에서 스승에게 예물을 바치고 수업을 받는 의식이다. 수업을 받을 때는 책상을 사용하지 못하고 책을 바닥에 놓은 채 엎드려서 읽어야 한다. 세자도 유교를 배우는 학생으로서 스승에 대한 기본 예절을 먼저 익혀야 한다(P.125).
세자의 신분으로는 정치에 관여하거나 인사에 개입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했다.
2) 국왕 교육: 경연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제와 철저한 장자상속에 의해 유지되었다. 왕, 양반, 중인, 양인, 천민의 신분은 선천적으로 결정되었고 이들의 신분은 자손 만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신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극장을 중심으로 한 강격한 중앙집권적 통치수단이 필요했다(P.126).
세자시강원에서 서연 강의를 받다가 때가 되어, 세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서연은 바로 경연으로 바뀐다. 경연이란 왕에게 유학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교육제도를 말한다. 경연은 국왕이 정치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왕으로서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가지기 위해 학식과 덕을 겸비한 신료들과 함께 경서나 사서를 읽고 토론하는 자리를 일컫는다.
조선시대의 모든 교육기관을 지도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국왕을 위한 교육은 담당 기관과 과목, 학습방법이 단계별로 잘 짜여져 있었다(P.127).
1) 경연의 강의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경연의 강의는 아침에 조강, 정오에 주강, 오후에 석강으로 이어지고, 국왕의 소집요구에 따라 수시로 가졌던 소대와 야간에 열렸던 야대 등의 비정규적인 강의가 있었다.
경연의 진행방식은 최고 권력자인 왕이 참석하므로 3정승과 승지들, 홍문관의 관료들이 겸직으로 자리를 같이 했다.
경연에 참여한 관직을 통틀어 경연관이라고 하는데, 경연관은 주로 국왕에게유교의 경서를 강론하고, 한문지도와 치도 강론을 하였다. 경연관은 정1품인 3정승을 비롯하여 종1품에서 9품에 이르는 약30명의 관료와 관리로 이루어졌다. 실제 강의는 주로 홍문관 관원이 맡았다(P.128).
조강에는 국왕을 비롯하여 의정부, 육조, 스정원, 홍문관 등 권력의 핵심부가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경연은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협의하는 기구로 발전하였다.
강의가 끝나고 국왕과 관료들이 정치 현안들을 협의하는 것이 관례였다. 왕은 제왕학을 연마하기 시작하여 죽는 순간까지 지속되었다(P.129).
2) 경연의 강의교재
경연의 강의교재는 4서 5경을 비롯한 경전과 사기통감과 같은 중국의 역사서가 기본이었다. ... 중국에서 편집된 성리학 계열의 책이나 성학집요와 같이 조선에서 편집된 성리학 계열의 책, <고려사>, <동국통감>같은 조선의 역사와 역대 국왕들의 정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책들이다(P.130).
이황의 <성학십도>는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의 교육을 위해 편찬한 교재이다. 이이의 <성학집요> 역시 선조의 교육을 위해 지은 책으로, 국왕의 학문적 수양과 정치적 치세에 중점을 두고 만든 국왕교재였다.
4서 5경의 경우에는 주석집을 정독하는 방법으로 강의가 이루어졌고, 역사서는 통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3) 국왕의 하루(P.131)
<조선 왕조 실록>이나 <시강원 일기>, <승정원 일기> 등 각종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조선시대 왕들은 대개 오전 5시경에 일어나 아침식사 전에 경연에 참석했다. 경연은 점심, 저녁식사 전에 각각 한 차례씩 더 있었다.
왕의 하루 일과는 아침, 낮, 저녁, 밤의 네 단계로 구분된다. 이것은 왕의 4시라 하여 아침에는 신하들로부터 학문과 정치를 듣고, 낮에는 왕을 찾아오는 신료들을 만나며, 저녁에는 나라의 현안문제를 검토하고, 밤에는 밀린 업무나 자신의 몸을 갈고 닦는다.
- 왕의 1시: 아침(P.132)
* 오전 5시(묘시)에 일어나 웃어른께 문안인사를 올린다.
* 해뜰 무렵 조강에 참석하여 토론한다.
* 경연을 마치면 아침식사를 한다.
* 공식엄무의 시작인 조회에 참석한다.
* 조회를 마치면 업무보고를 받는다.
- 왕의 2시: 낮
* 주강에 참석하여 학문을 익힌다.
* 점심식사를 한 다음, 찾아온 신하들을 접견한다.
* 오후 3시(신시) 숙직관료들을 점검하거나 체력단련을 한다(P.133).
- 왕의 3시 : 저녁
* 오후 7경(술시) 석강에 참석한다.
* 저녁을 먹고 휴식시간을 갖는다.
- 왕의 4시 : 밤
* 야간잡무까지 끝나면 웃어른께 저녁 문안인사를 올린다.
* 오후 11시경(상경)에 잠자리에 든다(P.134).
조선왕조는 국왕을 절대 권력의 힘과 특별함을 보여준다. 경연은 신하들과 학문적인 토론과 정책토론을 벌이고 민감한 정치현안을 결정하는 일종의 연석회의로서 임금은 신하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신하들은 임금이 절대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3.왕가자제 교육 : 종학
왕실 교육은 왕세자 교육과 왕가자제 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왕가자제 교육을 종학이라고 했다 즉, 대군 이하 종친자제의 교육을 맡은 기관이다. 대군은 왕의 정부인인 왕비가 낳은 아들을 모두 일컫는 호칭이고, 군이란 후궁이 낳은 아들을 일컫는다(P.135). 대군과 군, 그 자손들의 교육은 모두 종학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왕국은 실권 없는 명예직과 높은 녹봉을 제공받는 대신, 정치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왕족의 거주지역도 한양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었다(P.136).
정치적으로 금고를 당한 대신에 이들에게는 왕족이라는 신분에 걸맞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칫 방탕한 생활로 빠져들기 십상이었다. ... 세종대에 왕종교육을 담당하는 왕립교육기관이 성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종학이다(P.137).
1) 종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쳤나?
종학은 세종 10년(1428)에 처음으로 설립하여 대군 이하 종실의 자제교육을 담당하였고, 이듬해인 1429년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건춘문밖에 따로 학사를 지었다. 종학에는 도선 전훈 각 1명, 사회 2명 등 종학 관원 4명을 두었다가, 세종 15년(1433)에 6명으로 증원되었으며, 점차 성균관의 사성 이하 전직까지의 관원이 겸직하게 되었다.
종학의 입학자격은 15세 이상의 종친자제로 한정하였고 입학정원은 40명에서 50명이었다. 교육내용은 성균관과 같이 경술과 문예를 주로 하고 <소학>을 다루었다. 조선사회는 유교 경서 중에서 특히 <소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양반자제들 사이에서도 <소학>은 아주 중요한 교제로 다루었다.
매일 앞서 읽은 책 중에서 선택해서 강의를 받고 시험을 보는데, 통과여부는 왕에게 보고되었다(P.138). 매월 전에 읽은 책 중에서 선택하여 5번의 시험을 치러, 3번을 통과하지 못한 자는 벌을 받았다. 이유 없이 종학에 안가거나 예절을 어기면 종부시에 이름이 올려졌다. ... 나이가 40세에 이르고 <소학>과 사서 중에서 1경을 깨우친 사람이나, 비록 40세가 되지 않았더라도 <소학>과 4서 중에서 2경 이상을 깨우친 사람, 나이 50세가 찬 사람은 모두 취학을 면제하였다. 한편 종친을 대상으로 회합을 소집했을 때에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으면, 사헌부와 종부시에서 조사하여 왕에게 아뢰고 벌을 내렸다.
왕족들은 과거를 볼 기회가 주어짖ㅣ 않았다(P.139).
2) 종학 생도의 규율
종학 생도에 대한 규율은 어느 교육기관 못지 않게 엄격하였다(P.140).
종학 생도의 학습 태도와 성적은 교관과 종부시의 감독하에서 정기적으로 평가되어 왕에게 보고되었다. 종부시란 종실의 잘못을 지적하고 탄원하던 임무를 관장하던 관청을 말한다. ... 종학은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시행되었으나, 조선말 1907년 완전히 폐지되었다(P.141).
4. 오늘날의 관점에선
칸트는 인간은 본래 야수와 다름이 없으나 교육을 통해서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유교 사상에 근거를 둔 우리 교육의 정수는 엄격한 삼강오륜에 있다.
친구나 선생님의 역할은 또한 중요하다.
옛날 교육은 과거를 위한 교육이었다.
자녀의 효율적인 학습을 위한 부모의 역할은 공부할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이다.
3장 왕세자는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P.142)
병을 고치는 데 있어 음식을 통한 식이요법은 치료의 열쇠가 된다. 태교 음식은 태아는 물론 임신부의 신체발육과 두뇌계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임신부는 뼈의 곡격을 만들어 주는 칼슘, 태아의 두뇌형성에 필수적인 단백질, DHA가 함유되어 있는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 임신부의 흡연을 비롯하여 카페인 성분이 들어가는 음식, 청량음료나 인스턴트 음식은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음식이므로 무조건 삼가야 한다.
식사는 규칙적이고 곡류와 어육류, 채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P.148).
인스턴트 음식은 자녀의 성격을 거칠게 만든다. 좋은 음식은 자녀를 영재로 만든다.
<태교신기>에 따르면 뱃속에서의 10달 동안이 자녀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더 중요한 영향을 준다고 하였다.
1. 전통 태교 음식(P.149)
1) 전통 태교에서 금하는 음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P.150)
* 외형이 바르지 않거나 벌레 먹은 과일은 먹지 말라
* 썩어 떨어진 과일은 먹지 말라(P.151)
* 상추와 배추, 쌈 등의 푸성귀는 먹지 말라
신분차이가 분명했던 전통사회는 양반의 체통이나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먹는 것에서부터 걸음걸이, 옷차림 등 모든 생활습관에서 늘 양반 위주의 품위를 우선하였다.
* 너무 찬 것이나 쉰 것을 먹지 말라(P.152)
수박이나 참외, 오이와 같은 과일이나 채소를 임신부가 먹는 것을 금하였다.
* 상한 생선이나 썩은 고기는 먹지 말라
임신부가 설사를 심하게 하게 되면 자궁의 조기수축을 불러와 유산될 위험이 높다.
* 설익은 음식이나 덜 익은 과일, 곡식은 먹지 말라(P.153)
맥아나 마늘, 복숭아씨는 먹는 것을 금하였다
마늘이나 생강처럼 자극성이 있는 음식이나 오리고기, 닭고기, 계란과 같이 콜레스테롤이 많은 음식, 보기에 혐오감을 주는 낚지, 오징어, 토끼고기, 개고기, 방게 등의 음식을 금했다.
<태교신기>에 따르면 마늘이나 생강과 같이 향과 맛이 강하고 자극성이 있는 음식은 태아에게 좋지 않다고 하였다. 전통태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금하였다.
- 엿기름과 마늘은 태를 삭인다.
- 비름나물과 메밀, 율무는 태를 떨어뜨린다.
- 계피나 말린 생강을 가루 내어 양념하지 마라.
- 생강 싹은 먹으면 아기의 손가락이 육손이 된다: 콜레스테롤이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P.154).
- 닭고기를 먹으면 아이에게 닭살이 생긴다.
- 닭고기와 달걀을 찹살과 같이 먹으면 아이에게 촌충이 생긴다.
- 오리고기와 알을 먹으면 아기를 거꾸로 낳는다.
- 오리고기를 먹으면 아기가 팔자걸음을 걷는다.
- 개고기를 먹으면 아기가 소리를 못 한다.
- 토끼고기를 먹으면 자식이 언청이가 된다.
- 참새고기를 먹으면 아기가 자라서 음탕하다.
- 오징어를 먹으면 뼈가 물러진다.
- 방게를 먹으면 아기를 거꾸로 낳는다.
- 노루고기와 말조개로 국을 끓여 먹지 마라.
- 말고기, 비늘 없는 생선, 뱀장어를 먹으면 아기 낳기 어렵다(P.155).
버섯을 먹으면 자식이 쉬 죽는다고 하였다(P.156).
2) 그렇다면 전통 태교에서 권하는 좋은 음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얼굴이 단정한 자식을 원하거든 잉어를 먹고, 슬기롭고 힘이 센 자식을 바라거든 소의 콩팥과 보리를 먹으라고 했다. 또 총명하고 똑똑한 자식을 원하거든 해상을 먹고 해산달에 이르러서는 새우와 미역을 먹으라고 했다. 전통 태교음식이 과학적으로 영양소가 풍부하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입증되는 데, 대표적으로 가물치와 잉어, 해산물, 도라지, 참께, 흑염소 등을 들 수 있다(P.157).
* 가물치와 잉어는 태아의 두뇌발육에 좋다: 가물치는 보혈식품이고 태아의 두뇌발육에 효과가 있다. 잉어는 불포화지방산의 공급원으로 임산부와 태아에게 유익하다.
* 김은 임신부의 악성빈혈을 예방한다: 미역, 김, 홍합, 대구 등 해산물은 많이 먹을수록 임신부나 태아에게 좋은 음식이다(P.158). 미역은 칼슘의 함유량이 많고 혈액순환에 좋고, 김은 임신부의 악성빈혈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다.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임신부가 설사를 자주 하거나 냉대하증이 생겼을 때는 홍합을 삶아서 3개월 이상 먹으면 효과가 있고, 대구는 산모의 젖을 잘 나오게 한다.
* 시금치는 종합비타민제다: 시금치는 비타민과 철분을 공급해 준다.
* 도라지는 심장병에 효과가 있다: 도라지는 임신부가 심장, 위장, 신장 계통의 질병을 가지고 있을 경우 부작용 없는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도라지는 당분과 섬유질이 많고 칼슘과 철분니 우수한 알카리성 식품으로 호흡기 계통의 질환에 좋으며 해열이나 천식, 폐결핵 등에도 효과적이다. 설사나 복통이 났을 때 도라지를 볶아 먹으면 좋다(P.159).
* 쑥은 감기 예방과 치료에 좋다: 쑥은 몸을 덥게 하고 혈액순환에 좋다.
* 참깨는 동맥경화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 들깨는 임신으로 생긴 기미나 거칠어진 피부를 회복하는데 효과가 있다.
* 호두는 태아의 두뇌발육에 좋다: 호두나 대추 등은 장기간 먹으면 임신부와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호두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 대추는 임신부의 변비를 없앤다: 대추는 임신부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P.160).
* 흑염소는 임신부의 몸을 덥게 해 준다: 흑염소는 칼슘과 철분 등 무기질이 풍부하다. 소꼬리는 단백질과 무기질이 많아 생리작용을 원할하게 해 준다(P.161).
2. 오늘날 태교 음식
1) 임신 중 좋은 음식
인간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성장하는 시기는 바로 어머니 뱃속의 10달이다. 임신부의 올바른 영향 섭취는 태아의 발육과 임신부의 합병증 예방에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임산부의 시기별 태교 음식에 맞추어 단백질, 비타민, 철, 칼슘, 인이 풍부한 균형잡힌 음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 임신 초기에는 칼슘과 단백질을 섭취하라: 태아의 뼈와 이는 임신 초기에 기초가 만들어진다(P.162). ... 임신 2-3개월의 태아기에 임신부가 비타민이나 양질의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하면 태아의 머리가 좋아지고, 태어난 후에도 병치례를 안한다. ... 식물성 단백질인 콩 음식은 임신 말까지 부담없이 먹을 수 있다.
- 임신 중기에는 철분과 섬유질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라: 임신 중기에 접어들면 태아의 혈액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므로 철분을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간, 톳, 대두, 모시조개, 시금치에는 철분이 많이 들어있다. ... 샐러리, 양상추, 연근, 우엉, 고구마, 감자, 해조류, 표고버섯 등을 많이 먹고 장운동을 촉진하는 찬 우유를 매일 아침 먹어 변비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 임신 후기에는 단백질과 비타민을 충분히 섭취하라
단백질과 비타민은 태아의 두뇌발달에 좋다.
뇌의 발육은 태아기 때부터 출생 후 3살까지 금격하게 자라 5살 이후부터는 성장이 완만해진다. 그러므로 임신 중의 단백질공급은 뇌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P.164). ... 태아기와 유아기 때 결핍된 영양소를 다 큰 후에 공급해 준다해도 뇌의 성장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2) 임신 중 피해야 할 음식
기호식품 중에서 술이나 담배, 커피 등은 태아에게 직접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철저하게 금해야 한다. ... 이 밖에 임신 중에 무분별한 약물 복용은 태아의 유산, 조산, 기형아 발생 등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P.165).
- 청량음료를 먹지 말라: 임신 중의 수분섭취는 생수나 보리차, 우유를 먹는 것이 좋으나, 너무 차가운 물이나 얼음을 먹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P.166).
- 인스턴트 음식을 먹지 말라: 염분의 과다 섭취는 안좋으므로 가급적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음식을 먹어야 임신부와 태아에게 좋다.
- 임신부의 흡연은 기형아를 만든다: 임신 중에 담배를 계속 피우면 태아는 충분한 산소와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다. 이런 임산부는 체중이 낮은 아기나 미숙아, 허약아를 낳기 쉬우며, 태어나서도 발육이 부진하고 정신장애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P.167).
- 임신부의 카페인 섭취는 허약아를 만든다: 임신부가 카페인을 많이 섭취하게 되면 근력이 약하고 동작이 둔한 아기를 낳는다는 연구가 나왔다. 커피는 체내의 칼슘과 철분 등 무기질의 흡수율을 떨어뜨리므로 임신부의 영양섭취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며, 고혈압을 유발하기도 한다. 임신 중의 고혈압은 임신중독증을 초래하는 등 나쁜 영향을 준다. 커피나 콜라, 홍차, 코코아는 먹지 않는 것이 좋다.
태아기에는 신체의 건강과 두뇌의 계발, 성격의 형성이 따로 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이루워진다(P.168).
3. 왕실의 먹거리 교육
왕세자의 먹거리 교육은 예비 왕으로서의 학습 교육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왕세자 교육의 연령별 프로그램은 세 단계로 구분된다. 임신 기간 중 태동이 시작될 무렵인 5-10개월, 탄생 후 3세까지, 3-6세까지는 나누어 6세까지 기초 학문의욕과 식생활습관을 정립시켰다.
아기씨의 유모로 선발되면 미역국은 물론이고 콩죽이나 콩떡, 두부 등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한 콩으로 된 음식을 매일 먹여 젖이 잘 아오도록 했다.
왕가에서는 '편식과 비만이 바보를 만든다'라고 하여 세자의 식생활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했다(P.169).
아침을 거르면 머리회전이 둔화된다는 것은 이미 현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아침은 왕족과 같이 먹고, 점심은 머슴처럼 먹고, 저녁은 거지처럼 먹어라'. 라고 하는 옛말이 있다.
1) 왕세자의 두뇌음식
적당한 양을 잘만 먹으면 단 음식도 뇌의 순발력을 높여 줄 뿐 아니라 산을 오를 때 흘린 땀과 허기를 채워주며 피로를 풀게 하는 묘약이 되기도 한다(P.170).
세자의 나이 6세가 되면 예비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학문단련의 시기로 접어 들게된다. 소주방(주방) 상궁들은 밤낮으로 가슴을 졸이면서 세자의 건전한 식사습관과 두뇌계발에 좋은 음식을 만드는 일에 온 정신을 쏟았다.
- 학습 전에 조청을 먹어라
조청은 두뇌계발에 좋은 세자의 대표적인 간식 중의 하나였다. 학습분량이 많아지고 진도가 올라가면 무를 잘게 썰어 삶은 후, 조청에 저린 무정과를 간식으로 들게 했다(P.171).
조청에다 콩을 버물려 만든 강정을 비롯하여 죽순을 조청에 재어 만든 달콤한 죽순죽은 왕세자의 두뇌음식으로 많이 먹게 하였다. 죽순죽에는 머리를 영리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인 티로신이라는 성분이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뇌는 순전히 포도당으로 활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 몸 중에서 산소나 포도당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이 뇌라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 과당(맥아당)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식혜와 조청은 순식간에 포도당으로 변하는 성질이 있어, 뇌의 순발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 정신을 맑게 하는 솔잎과 송홧가루
영유아기의 어린 원자는 솔잎과 송홧가루, 콩을 먹었다. 솔잎과 콩은 정신을 말게하고(P.172), 뇌를 건강하게 하는 것으로 이때 행해졌던 독특한 음식 요법의 하나로 솔잎을 생으로 먹었다. 솔잎에 들어 있는 성분이 정신을 맑게 하고 기를 고르게 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에도 송홧가루의 효능이 매우 높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왕실의 영재교육 역사를 보면 세자의 두뇌를 좋게 만들기 위해 특별한 간식으로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을 먹었다.
- 졸음을 쫓아주는 콩강정
쥐눈이콩은 겨울에 물에 불려 얼렸다가 녹여서 볶은 다음, 조청을 넣고 콩강정을 만들어 먹으면 잠을 쫓는 데 그만이었다. 자주 먹으면 턱뼈의 움직임이 머리응 진동시켜, 뇌를 자극하므로써 두뇌회전을 빠르게 하는 역할을 했다. 과거를 준비하는(P.173) 선비들도 두뇌에 좋은 총명 먹거리로 검정깨(흑임자)를 넣어 만든 강정을 많이 먹었다. 땅콩이나 호두같은 딱딱한 음식을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
연뿌리를 살짝 익힌 것에 술로 빚은 식초를 약간 뿌려, 미역이나 파래를 넣어 간장으로 양념한 것을 밥과 먹으면 입맛이 돌아올 뿐 아니라 정신도 번쩍들어 웬만한 정서불안은 금세 없어진다. 꿀에 잰 인삼을 익힌 정과와 인삼차도 세자의 두뇌식품으로 많이 권장되었다.
- 단백질이 풍부한 두뇌식품, 콩
콩은 두뇌 발달과 신체 성장에 좋은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한 건강 식품이다. 콩으로 만든 음식은 구리와 아연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놋그릇에 담아먹는 것이 좋다고 한다(P.174). 콩과 잘 어울리는 죽순, 들깨, 솔잎 등과 함께 섭취하기를 권장하였다.
2) 학습효과를 올려주는 음식(P.175)
- 왕세자의 식단
검정깨와 조청을 버물려 만든 딱딱한 강정 종류는 머리회전에 좋은 음식이므로, 간식도 해결하고 머리도 좋아지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머리를 영리하게 하는 성분이 들어있는 죽순을 살짝 데쳐 쌀죽에 섞어 끓인 후 호박을 넣고 조청이나 꿀을 첨가하여 죽순죽을 만들어 먹이면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식단이 될 것이다(P.176).
- 수험생에게 좋은 생굴, 게, 샐러리(P.177)
생굴, 게, 샐러리, 생무, 미나리를 섭취하여 아연성분을 보충해 주어야 수험생들이 지치지 않고 궁부에 전력할 수 있다. 영덕꽃게 찐 것을 겨자나 식초에 찍어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체내에 아연 성분이 부족하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입맛이 떨어져 급기야 체력에도 문제가 생긴다. 이런 수험생에게는 싱싱한 굴을 새콤한 초장에 찍어 먹도록 하거나 게, 샐러리 등을 섭취하여 부족한 아연을 보충하도록 한다.
체내에 칼슘이 부족하면 수험생의 정서가 불안해지고 신경이 예민해진다. 수험생에게는 간장과 설탕을 넣고 달달 볶는 잔멸치나 우유, 삶은 달걀을 먹도록 하며 모자란 칼슘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 잉어와 닭을 함께 넣어 끓인 용봉탕이나 콩기름에 부친 감자부침, 전복으로 쑨 죽을 먹으면 아주 좋은 영양식이 된다. 더덕으로 만든 차나 굴과 무를 넣어 지은 밥, 콩나물을 듬뿍 넣어 시원하게 끓인 대구탕은 수험생의 영양식이다.
- 소화기능이 약해진 수험생에게 좋은 선식(P.178)
수험생들은 기름기가 많거나 너무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는 것이 좋다. 밥이나 빵, 감자와 같은 곡류와 함께 적당량의 기름으로 조리한 고기, 생선, 콩, 달걀 등의 어육류와 채소가 골고루 포함된 식단을 짠다. 무기질이나 비타민, 섬유소가 함유된 채소는 매일 섭취하ㅡ는 것이 좋다.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으로 소화기능이 약해진 수험생에게는 선식이 안성맞춤이다.
3) 학습효과를 떨어뜨리는 음식(P.179)
식사를 거르거나 불규칙하게 하면 충분한 영향섭취도 안되고, 위장에도 부담을 주어 변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장기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부죽하기 쉬운 아연, 인, 미네랄, 칼슘, 비타민 등의 영양분이 고루 섞인 식단으로 자녀의 건강을 이끌어야 한다(P.180)
- 인스턴트 음식이나 청량음료
당분은 치아를 상하게 하는 것은 물론, 체내에 있는 칼슘을 소모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심각한 칼슘부족을 초래한다. 체내에 칼슘이 결핍되면 체력이 부실해지는 것은 물론 정서불안과 난폭한 성질을 쉽게 드러내게 된다.
라면이나 통조림 등 인스턴트 식품은 대체로 짜기 때문에, 염분을 필요 이상으로 섭치할 우려가 높다. 염분의 과다 섭치는 비만을 불러오며 건강에도 아주 해롭다. 그리고 다른 영양소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 핫도그나 소시지, 초콜릿, 술, 카페인 성분이 들어있는 음식은 편두통을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영양분이 고루 들어갈 하루 세 끼의 식사를 규칙적으로 먹는 것처럼 자녀의 체력관리나 정신건강에 좋은 약도 없다(P.181).
- 방부제가 첨가된 가공식품
방부제가 첨가된 즉석 가공식품이나 청량음료, 인스턴트음식 등을 계속해서 먹게 되면, 몸 안의 필수 미네랄인 아연성분을 파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연성분이 부족하면 머리가 무겁고 둔해지며,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된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을 몸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기능뿐 아니라 성격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색소를 넣어 만든 빙과류나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을 마구 먹도록 내버려둔다면 자칫 비행청소년으로 빠지기 쉽다.
- 늦은 밤에 먹는 간식
밤늦게 먹는 간식은 비만을 불러올뿐 아니라 소화기능까지 약화시킨다(P.182).
간식으로는 과자 종류보다는 샌드위치나 야채샐러드와같이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간 음식이 적당하다.
미네랄이 풍부한 야채나 귤, 당근, 시금치, 무를 먹는다.(P.183)
4장 조선시대의 지도자는 어떻게 교육을 받았을까?(P.185)
조선사회는 성리학을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교육목적은 순수하게 학문을 추구하는 성인군자를 양성하는 것과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한양에 있던 성균관은 고등교육기관으로 당시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한양에 있던 4학(사부학당)과 지방에 있던 향교와 서원은 중등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각 지방의 부락, 마을 마다 있었던 서당은 초등교육기관으로 아동들을 위주로 한 기초교육을 담당하였다. 성균관, 4학, 향교, 서원 등의 중등(P.186) 이상 교육기관에는 양반자제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평민자제나 학문이 얕은 사람은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성균관에는 생원, 진사의 자격을 갖춘 사람을 입학시켰고 4학의 학생과 공신의 자제로서 입학시험에 합격한 사람만 입학이 가능하였다. 조선시대의 학교교육은 관리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괴거시험의 준비과정이다.
조선시대의 교육행정인 예조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4학을 직할로 운영하였다. 지방의 도 관찰사 밑에 육방의 하나로 예방을 두어 교육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교육기관을 감독하기 위하여 <경국대전>을 비롯한 여러 법규를 제정한다.
성균관과 4학은 국가의 직할학교였던 만큼 국왕이 직접 하사하는 토지와 양곡을 비롯하여 금전 및 서적 등의 원조로 운영되었다. 향교 역시 지방관청의 관할 아래 중앙정부가 보조한 기금을 받아 운영되었다. 서원과 서당은 사립학교에 속하였으나, 서원에 대해서만 토지의 면세와 같은 특전을 내렸고 서당은 개인이나 마을에서 자생적으로 꾸려갔다.
성균관, 4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은 대개 유교적 경서와 중국의 역사, 문학 등이 주를 이루었다. 학습내용의 대부분이 중국의 영향을 따르고 있고 모든 서적이 한문으로 되었다는 점을 대동소이하다. 교육내용이 유교에 치우쳐 있다(P.187).
서당, 서원, 향교, 4학(사부학당), 성균관 등의 교육기관은 오늘의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대학교같이 단계적인 교육체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각각 독립된 교육기관이었다(P.188).
1. 서당: 사립 초등교육기관
초등학교는 시기에 따라 초등학교, 보통학교, 기초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등으로 불리어지다가, 1996년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우리 나라의 현재 초등학교 수업연한은 6년이며, 취학연령은 만 6세 이상이며, 전면 의무교육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당은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사립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다른 교육기관보다 숫자가 많았으며 생명력도 길었다. 서당은 완전히 사설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규제도 받지 않았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관립교육기관에서는 양반의 자제들만 가르쳤기 때문에 평민의 자제들은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서당은 평민들의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아 갔다(P.189).
1) 평민에겐 배움의 끝, 양반에겐 배움의 시작
서당은 향교나 서원, 4학에 입학하기 전에 교육을 받던 초급교육기관으로 전국에 걸쳐 고을마다 거의 다 있었다. 평민자제 중에서 아주 뛰어난 실력을 가진 학생은 서원까지는 어렵게 진학할 수 있었으나, 아주 드문 경우였다.
양반들에게 서당은 향교나 4학에 진학할 준비교육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교육의 기회가 불평등했다.
서당에서 글의 문리를 깨치고 나면 차례대로 중등교육 단계인 향교, 서원에 들어가 학문을 익힌다. 중등교육 과정을 제대로 수행한 사람은 드디어 최고학부인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문과에 합격하면 비로소 관료 진출의 꿈을 달성하게 된다(P.190).
2) 서당의 종류도 가지가지
서당은 마을이나 문중 또는 개인에 의하여 운명되었으며, 양반이나 서민의 차별없이 모든 자제들을 수용하여 가르쳤다.
서당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중종 때 사림파에 의해 향악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제사기능을 하던 향교나 서원이 국가의 여러 제약을 받는다. 서당은 네가지로 운영주체에 따라 생계형 서당, 독선생 서당, 문중 서당, 마을주도형 서당으로 나눈다.
생계형 서당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훈장 자신이 서당을 열고 마을 아동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가장 일반적이다(P.191). 독선생 서당은 마을의 유지가 집으로 훈장을 초빙하여 자신의 자제를 개인과외시키는 것이다. 문중 서당은 양반이나 재산이 많은 집안에서 서당을 짓고 훈장을 초빙하여 문중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훈장에 대한 대우는 따로 수업료를 주는 대신 양식이나 땔감, 의복을 지원해 주는 정도였다. 마을주도형 서당은 마을 전체가 뜻을 모아 서당을 세우고 훈장을 초빙하여, 마을 아동들을 가르치던 서당을 말한다. 훈장가족의 생활비는 학부형들이 부담하되, 땔감이나 양식 등 현물로 제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3) 학생들의 입학자격과 훈장의 자격
보통 동짓날을 택하여 입학식을 하였다. 7-8세에 입학한 학생들이 15-16세에 이르게 되면 거의 교육과정을 마치게 된다. 서당을 마치면 오늘날 중학교의 단계까지 이수하게 되는 것이다.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수는 적게는 3-4명에서많게는 몇십 명까지 다양하였다(P.192). 서당에는 20-25세가 넘은 만학도가 더러 있었다.
훈장은 그 자격이 천차만별이어서 학식의 정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경서와 역사, 백가에 통달한 실력있는 훈장은 드물었고, 대개가 주석과 언해를 참고하여 겨우 경서의 글뜻을 해독할 정도의 수준인 사람이 많았다. 가난한 마을의 훈장은 작문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서당은 훈장, 접장, 학동으로 이루어진다. 접장은 훈장에게 배우는 한편, 다른 학생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P.193).
4) 무엇을 가르쳤나?
서당의 수업은 경서의 강독, 제술, 습자 세 가지 학과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강독은 글을 읽고 그 뜻을 밝히는 학과이고, 제술은 시나 글을 짓는 것으로 문장력을 시험하는 학과다. 습자는 글씨 쓰기를 주로 하는 학과를 말한다.
강독하는 교제로는 <천자문>을 시작으로 <동몽선습>, <소학>, <통감>, <4서 3경>, <사기>, <당송문>, <당율>까지 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동몽선습>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교과서로 내용은 도덕과 역사를 주로 다룬다. <소학>은 올바른 행동과 마음가짐을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만든 책으로 예의 범절과 충, 효에 관한 내용이다.
제술로는 5언 절구나 7언 절구, 사율, 작문 연습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제술은 글짓기나 논술 평가에 해당한다. 습자는 주로 해서와 초서를 연습하였다. 서당의 학동들은 여러 경서를 읽고 외웠다. 작은 서당은 대부분 감독이나 습자에 치우치는 교육이다.
그 당시 잡과라 하여 과학이나 기술을 천시하였다.
5) 어떤 방법으로 가르쳤나?
공부하는 순서는 <천자문>같은 것으로 낱글자를 가르치고, 다음 낱글자를 붙여서 음독하는 것을 가르치고, 다음에 한 문장의 뜻을 가르치고, 다음에는 스승없이 스스로 해석하고 읽게 한다. 그날 익힌 내용은 이틑날 수업시간에 암송하여, 훈장의 통과를 받아야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된다. 학습진도의 빠르고 늦은 차이에 따라 실력대로 수업이 진행되었으나, 모든 학동들이 글의 문리를 깨우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입학에 학동의 연령에 맞추어 놀이를 통한 학습방법을 병행하기도 하였다(P.195). 책 한 권을 다 배우면 학생의 부모들이 떡과 음식을 장만해 훈장께 감사드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책걸이'라 한다(P.196).
서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다 배우고 나면, 지방 학생일 경우 가까운 향교나 서원에 들어간다. 한양에서 서당을 마친 학생은 4학에 들어간다. 그 다음 까다롭고 어려운 시험을 거치고 나면, 관림대학인 성균관에 입학한다.
서당은 지방의 청년들에게 한문의 독해력을 길러주고 유교에 대한 초보적 지식을 보급시키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 4학: 관립 중등교육기관
교육은 양반계층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교육의 목적이 관료의 양성과 유교이념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P.197).
교육 체제는 관학과 사학이 있다. 관학은 국가에 주도하에 설립된 학교로 중앙(한양)의 성균관과 4학(사부학당), 지방의 향교를 들 수 있다. 사학으로 서원, 서당, 서제가 있다.
조선시대의 중등교육기관으로는 4학을 비롯하여 지방에 있던 향교와 서원이 있다. 1949년 교육법이 공표되면서 중등교육은 수업연한 각 3년씩인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도록 규정되었다. 중학교 의무교육은 현재 도시벽지와 군 지역에서는 이미 실시하고 있었으며, 도시지역의 의무교육도 22년부터 점차적으로 시행되기로 한 바있다.
1) 4학은 성균관의 부속학교
4학은 서울(한양)에 설치된 4개의 학당을 말하는 관립 중등학교의 하나다. 조선시대 양반자제들은 7~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초보적인 학문과 유학을 익히고 15-16세가 되면 4학이나 향교에서 수학하였다. 4학은 동부, 서부, 남부, 종부로 사부학당이라고도 한다(P.198).
4학(사부학당)은 성균관에 예속된 부속학교같은 성격을 띠었다. 성균관에 비해 학교규모가 작고 교육과정은 낮았지만, 교육방침이나 교과내용, 교수방법 등 교육전반에 걸쳐 성균관의 체제와 유사하였다.
2) 4학의 교수는 어떤 사람인가?
4학의 교수는 문관으로서 학식과 덕행이 모범이 될만한 자와 경학에 정통한 자를 각별히 선택하였다. 각 학교에 전임 장학관을 두어 직접 감독하기도 하였다.
학관(교관)의 수를 각 1명씩 줄인 대신에 겸직을 없앴다. 교원은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자로 한 곳에서 오래 근속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했다(P.199).
학생정원은 학당마다 각 100명씩이며, 기숙사 제도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기재에서 지내며 공부를 하였다. 학비를 비롯한 학당의 운영비용은 국가에서 지급하는 전답과 어장의 수입으로 모두 충당하였다.
3) 무엇을 가르쳤나?
교과 내용은 4서 5경을 비롯한 정서와 문예를 주로 다루었다. 예조의 무관으로 매달 실시된 학생 평가는 강론과 제술 시험으로 하였다. 시험성적은 1년 동안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강론과 제술 시험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 10명을 뽑아 생원, 진사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이 시험을 승보라 하는데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이 가능하였다(P.200). 4학의 학생들은 신진사림들과 함께 훈구 관료들의 부정과 비리를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향교가 지방의 중등교육, 4학은 중앙의 관학으로 중등교육을 당당한 교육제도이다. 향교가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학교이고 4학은 성균관에 진학을 목표로 한다.
사부학당은 성균관에 비해 빈약한 시설과 서적의 부족, 직원수의 부족, 사학기본재산의 중간 탈취 등의 폐단과 악습으로 인한 결과였다.
3. 향교: 지방 관립 중등교육기관(P.201)
향교는 지방의 부, 목, 군, 현에 각 1교씩 설치하였다. 부, 목에 90명 또는 70명, 군에 50명, 현에는 30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향교의 교원 자격은 생원, 진사 가운데 연령과 덕망이 높으며, 교원의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채용하였다.
1) 무엇을 가르쳤나?
향교에는 주로 17세 이상의 지방양반 자제와 향리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과거시험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향교의 교육과목은 유학경전과 제사가 중심이다. 교재를 보면 <소학>, <4서 5경>이 주요 과목이었고, <성리대전>, <삼강행실>, <이륜행실>, <효경>, <심경>, <근사록>, 등과 <통감>, <소원절요>, <향악>, <가례> 등을 보충교제로 삼았다. 향교에서 쓰는 돈은 국가에서 지급하는 토지와 노비로써 충당하였다.
향교에서는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공자를 비롯하여 유명한 선현들의 제사를 모시는 문묘(대성전)를 중심으로 강의를 하던 장소인 명륜당, 학생기숙사인 동서양재를 갖추고 있었다(P.202). 초시에 합격하면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향교가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잃어가면서 향교의 역할은 문묘제사에 국한되었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이름만 남아있는 문묘제사 등 겨우 명맥을 이어간다.
4. 서원: 지방 사립중등교육기관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교제도는 관립학교인 성균관과 4학, 지방에 있는 향교를 비롯하여, 사립학교인 서원과 서당으로 나뉘어져 있다. 서원은 향교와 더불어 지방에 있었던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한다.
서원의 시초는 백운동서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설립목적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학문의 연구, 후진 양성에 있었다.
1) 무엇을 가르쳤나?
초기에는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운영되다가, 퇴계 이황에 의해 유생들의 인격을 수양하는 도장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소수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완성자인 이황 선생이 제자들을 길러냈던 곳이다.
서원에서도 성균관이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공이 있는 위인이나 학력이 높은 선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추모하는 행사를 거행하였다. 아울러 지방의 양반자제를 모아 학문과 덕행을 연마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P.204).
사색당파의 피해가 극에 달하자, 대원군은 679개나 되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다 헐어버렸다.
5. 성균관: 관립 고등교육기관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고등교육제도를 도입하여 실시해 왔다. 오늘날의 대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데, 고구려의 태학이나 신라의 국학, 고려시대의 국자감, 조선시대의 성균관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 말 국자감의 명칭을 성균관으로 개칭한다.
성균관에서는 귀족이나 양반자제들에 한하여 입학이 가능하였으나, 장차 국가의 고급 관리로서 갖추어야 할 교육을 받았다. 성균관은 한마디로 국가에 필요한 지도자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서당, 4학, 향교, 서원은 모두 성균관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다(P.205).
1) 성균관을 이루는 시설
태조는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명륜당, 동재, 서재, 양현고, 존경각을 세우면서 성균관은 점차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인재를 키우는 역할 이외에 유학에 공헌이 큰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명륜당은 지금의 대학강의실이다. 명륜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동재와 서재는 학생기숙사이고, 양현고는 성균관의 교육자료와 장비를 관리하던 곳이다. 존경각은 도서관이다(P.206).
2) 교수 자격과 학생의 입학 자격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인 대사성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제주, 악정, 직강, 박사, 학정, 학록, 학유 등의 관직을 두었다. 학생 10명당 한 사람의 교수가 담당하였다.
성균관의 교관 자격은 문관으로 학식과 덕행이 모범이 될 만한 자, 경서와 문장에 통달한 자, 유교적 윤리관을 갖춘 자 등이다.
학생 정원은 200명 선이었고, 나이는 15세 이상이 대부분이었으나 간혹 50세가 넘은 사람도 있었다(P.207).
성균관의 정원이 미달할 경우에는 승보라는 편입시험을 통해 모자라는 인원을 보충하였다.
3) 성균관의 교과과정은?
성균관의 교과과정은 경전과 역사를 강독하고, 논술고사인 제술에 대비한 훈련을 쌓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학습내용이 과거시험의 과목과 일치한다.
성균관의 생원이나 진사, 재에 기숙하는 유생, 4학 학생의 독서는 미리 학과에 따라 읽는 기간을 다르게 정해놓은 다음 들어갔다. <대략> 1개월, <중용> 2개월, <논어>, <맹자> 4개월, <시경>, <서경>, <춘추> 각 6개월, <주역>, <예기> 각 7개월의 독파기간을 명시하였다(P.208).
먼저 배운 것을 철저하게 익힌 다음 새 것을 가르쳤으니, 주입식이나 획일적인 교육이 아닌 개인교수에 입각한 문답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성균관의 강독과목은 크게 4서 5경과 제사로 구성된다. 주로 4서 5경을 9단계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이것을 9재라고 한다. 학과를 순서대로 보면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예기>, <춘추>, <시경>, <서경>, <주역>이다. 성적이 좋은 학생은 3년마다 열리는 식년시에 응시할 자격을 갖게 된다. 개인의 실력에 따라 학습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평가시험은 매년 봄과 가을에 실시되었다. 월반도 가능하였다.
제술은 간단명료하고 정교하게 글의 뜻이 통하게 쓰도록 가르쳤다. 3월과9월에 있는 제술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3명에게는 문과 복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진다(P.210). 조선사회는 상과 벌이라는 당근과 채찍질을 적절하게 활용한 교육법으로 학생들의 실력을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험
조선시대 유생들의 소원 중에 하나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것이었다. 성균관에 들어가려면 초시나 복시에 합격해야만 자격이 주어진다.
매월 초순에 강론을 시험하는데, 경서를 강론하는 성적은 대통, 중통, 약통, 조통, 불통 5급으로 나누어 해당하는 평점을 매겼다, 평점점수가 높은 학생에게는 회사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으나, 조통 이하의 성격을 받은 학생은 벌을 받았다(P.210).
5) 성균관의 생활규범
성균관의 교육에서도 특히 덕성을 쌓는 것을 무엇부다도 중시하였다. 성균관에서는 학생들이 지켜야 할 생활규범이 엄격하였다. 스승에 대한 예절을 지키는 것은 성균관 학생의 가장 기본적인 실천 항목에 속한다. 오륜을 배우고 익혀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도 포함한다.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학생들은 국가로부터 학전과 외거노비 등을 제공받았다(P.211).
6) 이럴 땐 벌칙을 내린다
학생이 학교의 규칙을 어기고 잘못을 하면 벌칙을 내린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사회에서 장자나 노자, 불경과 같은 책을 잡서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이런 책을 읽는 것을 이단행위라 여겨 금지하였다.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거나, 재물과 뇌물에 욕심내는 일은 유학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로 이런 행동을 철저하게 규제하였다(P.212). 글씨는 사람의 성질이 그대로 표현되므로 항상 반듯하게 정자를 쓰도록 장려하였다(P.213).
성균관의 교관은 이러한 규정에 따라 학생들의 생활기록을 평가한 내용을 선악부라는 장부에 일일이 기재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명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을 계승되었다.
6.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밖으로 보내지는 현재 아이들(P.214)
유치원의 공부는 지싯주입뿐만 아니라 난생 처음 갖게 되는 공동생활 규범과 기초 학습 이해에 더 뜻이 있다(P.215).
초등학교는 다음 학습을 위한 기본적인 학습능력을 키우는 데 목표가 있다. 물론 공동체 규범생활 안에서의 일이다. 아이들은 다분히 또래의 접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P.216). 초등학교 시절의 교육은 억지로 주입시키기의 영재교육이 아니라 재능을 찾아주는 쪽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어린이에게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학습의욕과 탐구심을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7. 오늘날 보편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조선시대의 유교교육은 모두가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국가사회를 운영해 갈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과 학습과목, 교육단계 등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이에 반해 현대의 보편교육은 개개인에 대한 교육의 기회가 대폭 확대되었지만, 막상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성이나 목표, 구체적인 능력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의 교육내용이나 교수방법은 오늘날에도 적용이 가능할 정도로 합리적인 부분이 많다(P.217).
오늘날의 형식적인 교육은 현대사회의 병패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조선시대의 지도자 교육을 지금의 교육 현실에 적극 수용한다면, 합리적이고 실속있는 교육정책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P.218).
5장 이름난 왕들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P.219)
어릴 때부터 일찌감치 배고프고 추운 고통의 경험을 시켜 모진 세파 속에서도 헤쳐 나아갈 수 있는 강인한 인내력과 지구력을 키워주고, 나아가 학습훈련에 게으르지 않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몸과 마음의 단련은 왕의 제목을 키우는 데 반드시 핑요한 절차다. 한 나라의 왕도 어릴 때부터 혹독한 극기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영유아기를 겨우 지난 어린 원자도 두뇌의 계발과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호흡을 참는 혹독한 극기훈련을 받았다. 최대한 숨을 많이 들이마신 다음, 120초 정도까지 숨을 참는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P.220).
극기시련 교육은 왕가뿐만 아니라 당시 내노라하는 재상들의 가풍에도 적용되었다. 뼈대있는 가문일수록 자녀교육에 더욱 엄격했다(P.221).
붕괴된 교실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 가정의 교육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며, 나아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큰 인물로 자라기 위해서는 모진 시련과 부딪히면서 좌절하지 않고 이겨내며 단련될 때만이 큰 그릇이 된다는 사실을 요즘의 부모들은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다.
1. 이런 세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세자라는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의뢰심, 의타심, 의지 박약이 고쳐질 가능성이 없을 때는 부득이 왕위 계승에서 탈락되는 것이 왕가의 냉엄한 법도였다(P.222).
1)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세자(P.223)
자녀가 진정으로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진지한 대화를 통해 관찰하고, 자녀 스스로 목표를 세우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P.224).
2) 억척과 끈기가 결여된 세자
억척스럽고 끈기있게 학문을 파고 들어 그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지적 욕구와 부단한 노력은 왕의 자질을 갖추는 핑수요소다(P.225).
3) 엉뚱하고 당돌함이 없는 세자
엉뚱하고 당돌한 것은 나만의 독창적인 창의력의 척도가 된다. 나아가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위급한 상황이 닥쳐도 대처능력이 뛰어나다(P.226).
에디슨은 어려서 무엇이든지 예사롭게 보지 않았으며 탐구심도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전등을 비롯하여 축음기, 활동사진, 전차 등을 발명하여 인류역사에 큰 빛을 남겼다.
자녀의 엉뚱한 행동을 할 때 자녀의 기를 죽이고 나무라기 앞서, 유심히 살펴보고 수긍이 간다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좋은 교육방법이 될 것이다(P.227).
4) 우유부단하고 감동이 부죽한 세자
부모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만이 자녀의 자신감을 심어주는 묘약이 될 것이다(P.228).
조선시대의 왕세자를 비롯한 사대부의 자제들의 학문탐구는 절대적 진리에 가까웠다. 조선시대의 여러 왕들 중에서 후세에 성군으로 평가받는 대부분의 왕들은, 어린 시절 유난히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P.229).
2. 왕들의 어린 시절
1) 책을 들면 무섭게 파고들었던 세종
태종은 충영대군이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하여 그를 세자로 책봉하도록 결정을 내렸다(P.230).
- 효심과 우애가 지극했던 맏아들 양녕의 선택(P.231)
자녀교육은 오랜 시간을 지켜보며 정성과 관심을 기울여야 가능한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거든 닦달하기 전에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바로 부모의 도리다. 특히 다른 형제들과 비교하는 교육방법은 자녀의 자신감을 키우는 데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 지독한 독서광이었던 어린 세종
세종은 유학의 경전뿐만 아니라 역사, 법학, 천문, 음악, 의학 여러 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실력을 가졌다. 정독하는 것이 세종의 독서스타일이었다(P.232).
"세종은 처음부터 항상 학문에 종사하여 선정을 펼 수 있는 근본을 연구하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며, 정치하는 강목을 넓게 펼쳤다."
- 충직하고 순박하며 인정이 두터웠던 세종
충녕은 선현들의 교육과 이론을 존중했고 또 상당한 가치를 부여했다. 그는 예절과 행동, 말과 표정, 심지어 자식의 교육과정까지도 정통 유학의 원리에 따라 행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몸가짐은 충직하고 순박하며 인정이 두터웠으며, 단정하고 젊잖을 수 밖에 없었다. 세종은 단단한 집중력과 주의력 그리고 사고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P.234).
-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세종
읽은 서적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서도 비교하고 정리 분석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며 힘들다. 그는 경전마다 다방면의 학설과 주석을 참조하여, 각각의 이치와 논리체계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욱 깊은 생각을 하길 원했다.
- 옳다고 판단되는 일은 실행하고 마는 세종
국사를 보는 틈틈이 독서와 사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였다. 신하를 대함에 있어 예를 잃지 않았으며 백성을 긍휼이 아끼는 마음도 특별하였다. 세종은 의지가 강한 사람이어서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는 일이면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실행하고 마는 성미였다(P.235).
2) 짧은 재위기간 동안에도 많은 일을 했던 문종
조선의 제5대(재위1450-1452) 왕이며 세종의 맏아들이다(P.236). 왕의 향은 1421년 (세종3년) 8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특히 집현전 학사들을 아끼고 총애하였다. 세종이 1442년 첨사원 제도를 임시로 도입한것은 세자가 섭정을 할 경우, 승정원과 편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세자 향은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실무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문종은 즉위하기 전에 실제 정치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따라서 문종시대의 정치의 방법과 분위기는 세종후반기와 크게 변함이 없었다.
- 천문과 산술, 서예가 능했던 어린 문종(P.237)
측우기 제작에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과 산술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했다. 측우기는 세종 24년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 고심하여 발명한 것이다. 이 측우기의 발명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현재의 것에 비한다 하더라도 독창성이나 성능면에서 그의 큰 손색이 없다고 한다.
- 단정한 용모에 자상하고 신중함을 겸비한 문종
- 여론정치를 활성화시킨 문종
문종대에 이르러 언관들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세종 말기에 세종과 왕실에 의해 각종 불교행사가 행해지면서, 불교가 활발하게 일어났지만 문종이 즉위하자 유학 중심의 언관들은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이는 대부분 문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P.238).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돌아가면서 왕을 만날 수 있는 윤대를 허락하여,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하는 여론 수렴에 적극적이었다. 문종은 군주사회에서 보기 드문 민주적인 여론 정치를 앞서 실시했다고 할 수 있다.
- 진법의 편찬과 군정의 안정을 꾀한 문종
문종은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등을 편찬하게 했다. 그는 즉위 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리되어 있던 군제를 5사로 집약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하고 보완하기도 했다(P.239).
3) 대범하고 호탕했던 성종
조선 제9대(제위 1469-1494) 왕이며 세조의 적장자였던 덕종의 둘째 아들로서, 삼촌인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461년(세조 7년) 자산군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으로 개봉되었다(P.240).
13살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성종을 대신하여 정치 대비가 7년간 수렴청정을 하다가 1476년에 성종의 나이 20살이 되자 비로소 직접 나라의 일을 맡게 되었다.
- 인자한 성품과 호탕한 면을 겸비한 어린 성종(P.241)
- 둥근 해를 품에 안은 태몽을 꾸고 태어난 성종
- 농사를 사랑한 평민적이고 소박했던 성종
성종대에 특히 잠업과 길쌈을 장려하기도 하였다(P.242).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스스로 군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었기에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었다.
폐비 윤씨의 참사는 연산군의 재위 시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어 역사적 대파란을 부르게 된다.
4) 공부하기를 싫어했던 연산군
조선 제 10대(재위1476-1506) 왕으로 이름은 융이며, 성종의 맏아들이다. 계비는 정현왕후 융씨이며, 생모는 폐비 윤씨였다(P.244).
문무를 겸비한 호방한 인물이었던 성종은 괴팍하고 변덕스런 연산군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1483년(성종 14년) 연산군은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고, 1494년 19세의 나이로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 부왕이 아끼던 사슴과 스승을 잔혹하게 죽였던 연산군(P.245)
당시 가르쳤던 대부분의 스승들은 포악한 기질의 연산군이 보위에 오른 뒤에 보복을 할까 두려워하며, 세자교육에 소극적이었다. 세자를 가르치던 스승은 비록 세자의 권력이 우월하다 하여도, 스승의 예우를 다해 존중하는 것이 조선왕조의 일반적인 풍조였다.
- 연산군의 출생, 성장 배경
- 그러나 즉위 초, 퇴폐풍조 일소를 피했던 연산군(P.246)
성종의 승하와 함께 10대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P.247). 즉위 초에는 성종대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생치안에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연산군의 재위 초기인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풍조와 부폐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 문과를 실시하고, 변방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다. 한편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였다.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해 <국조보감>을 편찬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 무오 갑자사화로 치달은 연산군의 폭정
연산군 재위 초기인 1498년(연산군 4년) 사림파와 훈구파 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사림세력들이 제기되자 연산군은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급속도로 조정을 독점하게 된다(P.248).
연산군은 신하들이 직접 간청하는 것을 귀찮게 여긴 끝에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들의 언관도 혁파하거나 감원하기에 이른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주연과 놀이에 빠지고, 기생을 궁궐로 끌어들이는 등 온갖 사치행각을 벌인다. 민심은 피폐해지고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졌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모조리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는데 이것을 갑자사화라고 한다. 무오사화의 참사가 일어난지 6년만인 1504년(연산군 10년)의 일이다. 연산군은 왕위에 있는 동안 폭정과 실정으로 일관하였다(P.249). 민심은 피폐해지고 전국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세력들이 늘어났다.
재위 12년 동안 연산군은 무오, 갑자 2차례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살상하였으며, 자신을 비판하는 신하는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하였다. 폭군 연산군은 결국 1506년(연산군 12년) 배다른 동생에게 왕위를 내놓게 된다. 성종의 둘째아들인 진성대군이 바로 11대 왕인 중종이다(P.250).
- 생모에 대한 집착이 빗어낸 연산군의 광포함
<연산군 일기>에 의하면 연산군은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였다.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지 못하여 문리에 어둡고, 국정을 운영할 자질이 부족했던 폭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 큰 키에 가녀린 체구를 가졌던 연산군(P.251)
- 감수성 예민한 당대의 시인이었던 연산군
연산군은 스스로 시집을 낼 정도로 시를 많이 썼으며 재능도 뛰어났다. 중종반정으로 연산의 시집은 불태워졌지만, 다행히도 <연산군 일기>에 120여 편의 시가 기록되어 있다(P.252).
연산군이 정치를 엉망으로 하였다해도, 시적인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국사에 임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연산군을 다른 시작에서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나라를 통치할 지도자로서의 자질은 부족하였지만, 예술가로서의 삶은 연산에게 더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간지 2달만에 31세의 일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한다(P.253).
5) 어질고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
조선 12대(재위 1544-1545) 왕이며 중종의 맏아들이다. 1544년 29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 미련할 정도로 어진 심성을 지녔던 인종
인종은 타고난 천성이 어질고 순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계모의 냉대와 수모에도 참고 견디며, 늘 문정왕후의 뜻을 잘 받들었다고 한다(P.254).
- 온화한 성품에 우애와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P.255)
학문을 사랑하여 3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P.256).
1522년 7살 때 관례를 행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인종의 재위기간은 1년이 채 안 되는 8개월 남짓이었다. 즉위한 이듬해 기묘사화도 축출되었던 사람들은 선원해 주었다. 또한 그간 자신이 익히고 배운 도학사상을 현실 정치에 응용하려는 의도에서 사람들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8개월 남짓 왕위에 머물렀던 인종은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후사도 남기지 않고 31세의 나이로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1545년(인종 1년) 경원대군이 바로 13대왕으로 즉위하는 명종이다.
6) 엉뚱한 질문을 많이 했던 선조(P.257)
조선 제14대(재위 1567-1608) 왕으로 제11대왕인 중종의 손자이며 13대왕인 명종의 조카다. 아버지인 덕흥대원군과 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 엉뚱한 질문을 많이하고, 책읽기를 좋아했던 어린 선조
선조는 삼촌인 명종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다,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바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년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경연에 나가 정사를 토론하였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 백사서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말년에는 특히 <주역> 읽기를 좋아하였다. 특히 서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 검소한 성품에 효성까지 지극했던 선조(P.258)
항상 근검 절약하며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하여, 한 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P.259).
- 고른 인재를 등용과 민심 수습에 전력했던 선조
훈구파 세력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유학자인 이황과 이이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다하였다.
<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등의 치도와 관계되는 서적과 윤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삼강행실을 짓도록 하고, 이것을 모두 간행하여 널리 읽히도록 하였다. 또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에게 관직을 돌려주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시원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훈구파들의 관직을 박탈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결국 선조는 기나긴 전란의 뒷수습을 마무리짓지도 못한채, 1608년 59세를 일기로 41년 동안의 치세를 마감하였다. 그를 이미 세자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그의 유언은 오히려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되고 만다(P.260).
7) 역사책을 즐겨 읽었던 광해군
조선 제15(1608-1623) 와으로 이름은 혼이다. 14대 왕인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한 달 후인 1592년(선조 25년) 4월 평양에서, 부왕인 선조는 18세의 광해군을 서둘러 세자에 책봉한다(P.261).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조선 왕조 사상 최대의 국난으로 꼽히는 임진왜란을 적극적으로 수습하여 사회 안정을 꾀하는 데 주력하였다.
- 어두운 소년시절을 보냈던 광해군
- 영특하고 민첩했던 어린 광해군(P.262)
- 역사책을 즐겨 읽었던 광해군(P.263)
<고려사>, <십팔사략>, <용비어천가>같은 책들이 그가 열심히 읽었던 역사책들이었다.
- 명, 청 교채기에 탁월한 실리외교를 펼쳤던 광해군
16년의 재위기간 동안 광해군은 안으로는 오랜 전란으로 피폐한 경제를 되살리고 민생의 회복에 온 힘을 쏟았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동의보감>을 반포하는 등 피폐한 민생을 어루만지고 국가를 재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밖으로는 변화하는 국제 정세, 즉 중국 대륙에서의 명, 청 교체기를 냉정한 안목으로 읽어 국정운영에 반영하는 정책을 폈다.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펼쳤다. 광해군의 반대세력과 후대의 역사는 광해군이 명과의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 후금과 손잡았다고 하여 비판하였다. 광해군을 축출한 명분도 바로 이것이었다(P.264).
- 당쟁의 결과로 인하여 패륜아로 몰린 광해군
생모인 공빈 김씨는 광해군울 낳고 2년 후인 1577년(선조 10) 5월, 27세의 젊은 나이로 두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1608년(선조 41년) 2월 부왕인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은 왕으로 즉위한다.
순식간에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내쫒은 패륜아로 몰린 광해군은 점점 왕위를 지키기가 어려워진다. 실록에 의하면 말년에 광해군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패륜과 폭력을 마구 휘둘렀다고 적고 있다(P.265).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지 16년째 되던 해인 1623년, 서인들의 주도로 인조반정이 일어나 자신의 조카인 능양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만다. 광해군은 20년을 시국에 따라 떠돌아다니며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1641(인조 18년) 7월 마지막 유배지였던 제주도에서 67세의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쓸쓸히 마감한다.
- 신권에 희생된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P.266)
광해군의 경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로 재평가되고 있다(P.267).
8) 학자의 면모를 가진 정조
조선 제22대(재위 1777-1800) 왕으로 이름은 산이다. 1759년(영조 35년) 7살 때 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즉위하자 곧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하였던 정후겸을 제거하고 나아가(P.268) 그의 총애를 빙자하여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함으로써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 백일도 안되어 글자를 보고 웃었다는 어린 정조(P.269)
- 책읽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정조
정조는 역대 조선시대 군왕 중에서 글을 제일 잘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학문을 즐겼던 왕이다.
- 지적 수준이 뛰어나고 검소했던 정조
역대와 중에서 문집<홍재전서>를 남긴 유일한 왕이다. 정조는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문(文), 사(史), 철(哲)을 누구보다도 깊이 실행하였던 군주였다(P.270).
-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을 학문으로 이겨낸 정조(P.271)
정조가 재위한 기간은 밖으로는 명나라의 쇠망과 청나라의 발흥을 비롯하여 많은 변화가 있던 시기였고 안으로는 실학의 대두라는 커다란 변화가 불꼬를 트고 있었다.
- 실력으로 등용하는 정치풍토 조성
영조의 탕텽책은 말 그대로 사색당파의 인물을 고루 기용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능력과 학식보다는 명분에 의해 얼마든지 등용이 가능한 풍조를 만들게 된다. 정조는 능력이 없으면 등용하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하는 "원리 탕평책"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정조는 학문적 해박함으로 신하들을 이끌되, 늘 인간적 풍모를 잃지 않아, 신하들 스스로 왕을 따르게 하는 정조 특유의 통치 기술을 쓸 줄 아는 군주였다(P.272).
3. 왕들의 일화를 통해 본 성군의 특징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로 재평가되고 있다.
대부분의 성군들은 학문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대체적으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함을 알 수 있다. 8명의 왕을 기준으로 공통되는 점을 정리한다.
1) 책읽기를 좋아하고 뚜렸한 목표를 가졌다.
세종은 훌륭한 왕이 되어야 한다는 뚜렸한 목표를 세우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할 줄 아는 자제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문종은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여 책을 가까이 하였으며, 학자를 좋아했다. 측우기 제작에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과 산술에도 뛰어났으며, 서예에도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왕이다(P.273).
광해군이 실리외교를 폈는데 역사책을 많이 읽었다.
정조는 역대의 왕 중에서 글을 가장 잘한 왕이었다.
2) 자상하고 여린 품성을 지녔다.
세종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너그러운 데다가 어진 성품을 가지고 있어 백성과 신하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문종은 단정한 용모에 자상하고 유순한 성품으로 늘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이 없었다(P.274). 문무를 겸비했던 성종은 슬기롭고 호탕한 성격이라 도량이 넓고 특히 활쏘기와 서화에도 재능이 뛰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조용하기로는 인종을 따라갈 사람도 없을 것이다(P.275).
3) 효성이 지극하여 우애가 돈독하였다
4)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다
실록에는 세종, 성종, 영조, 정조 등이 경연에 충실한 모범생으로 기록되었고 반면 태조, 태종, 세조 들은 경연을 게을리 했던 왕들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재위기간 중에 경연을 폐지하기도 했다(P.276).
가정환경이 한 사람의 인격에 끼치는 영향은 엄청나겠지만, 어려움을 이겨내고 훌륭한 인물이 된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수없이 많다.
조선시대의 국왕을 비롯한 관료들은 자신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평가를 받기를 원했고, 평생을 학문에 종사할 학자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우대받았다(P.277).
나의 소견
나의 유학경험에 의하면 오스트리아와 대한민국을 비교할 수 있는데 보통 필기시험은 강의의 요점을 정리해서 외워서 시험을 보면 독일계의 교수님들은 A학점을 주었었고 프로세미나의 경우 요점정리만 하면 돌려주었고 나만의 연구를 요구했었다.
장 작 루소(Jean Jacques Rousseau)에 의하면 "교육생각은 그의 내적인 자연, 그의 개별적인 체험 능력, 그의 경험, 지각 그리고 열성, 특히 그의 생애의 단계, 자기의 체험의 양상과 생존의 양상으로써 아동기와 청년기에서 사람 스스로 적용한다." 즉 사람은 자연적으로 꼭 교육을 통하지 않고도 배운다는 것이다.
반면에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사람은 원래 야수와 같으나 교육에 의해 인간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이 두 주장은 상반된 논리이다. 나의 의견은 이 두 농리의 결합이라고 확신한다. 루소의 경우는 자기주도학습으로 각 개인의 소질을 발전시켜 특별전문가가 될 수 있다. 반면에 칸트는 학교가 정한 교육과정에 의해 왕들의 교육처럼 길러지는 것이다.
우리 아라의 왕의 교육은 뱃속부터 죽을 때까지 교육의 연속이었다. 즉 평생교육이었다. 수능시험준비과정처럼 일생 공부하는 것이다.
루소의 의견처럼 인간이 스스로 터득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칸트의 의견처럼 배우는 학습체험 또는 요령을 배워서 스스로 실력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고졸의 노인이 문자를 보낼 수 없는 것을 알았다.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못한다고 한다. 이 경우 루소의 논리에 안맞는다. 교육의 발전 단계를 학교를 통해 배우는 것도 자기의 확신과 능력을 학신시키는 데 디딤돌이 된다. 학생들은 학년 단위로 시험을 통해 느끼고 자기확신과 자기신뢰를 쌓아 I cann do it 자신감을 가지고 다음 단계로 모험을 계속한다. 어려운 역경을 넘어 계속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인간의 양육은 태교를 통해서 이루워진다고 생각했다. 삼국시대부터 역대 왕들은 통치권자로서 성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덕치를 중시하였다. 자기 수련과 제도적 교육이 개별적이면서도 평생이루워졌다.
원자는 인의예지 덕이 몸에 베어 장차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리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왕세자는 개별교육으로 평생교육개념의 특수교육을 받았다. <효경>, < 논어>, <맹자>, <대학>, 주역>, <예기), <춘추좌전> 등 유교의 경전을 익혔다. 수업은 읽고 뜻풀이로 이루워졌다.
교육은 유전적 요소보다 태어난 후 사회환경과 교육이 아이성장에 있어 정서, 지능, 성품 등을 형성하는 데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동양에서는 아기의 인격형성이 태아때부터라고 여겼다.
태교란 뱃속에 있는 태아를 교육한다는 뜻이다. 임신부는 정서적, 심리적, 신체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한다. <성학집요>, <동의보감>, <규합총서>, <태교신기> 등이 태교에 대해 썼다.
맹자의 어머니는 교육환경을 위해 세번 이사를 했다.
유태인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종교와 독서를 중시했다. 종교적인 성실한 삶과 독서를 통한 많은 간접 경험을 스스로 하는 교육이다. 즉 자기주도적 교육이다. 유태인은 평생교육을 지향했다. 이 점은 우리 왕세자의 교육과 일치한다.
창조적 아이디어는 자연을 응용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된다.
유태인은 남보다 특별나게 가르치려는 생각조차 않는다. 그러나 유명한 사람들은 대부분 유태인이다.
유태인은 보통 2개 국어를 가르쳤고 역사적으로 전세계를 흩어져 떠돌아다니며 살아 특수한 환경 덕분에 가능했다.
다른 아이보다 뛰어난 점이 아니라 다른 개성을 개발시킨다. 그리고 다양한 가치관을 지니고 긴 안목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유럽 교육과 같이 모든 인간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경하며 함께 살아가는 평등과 평화가 가득한 낙원에 사는 것이다.
이미 우리 나라는 500년 전부터 조기교육과 적성교육을 중요시했다. 왕세자의 교육은 옛날부터 태교부터 체계적으로 교육되었다. 우리 나라는 옛 교육부터 채벌이 존재해 왔다. 지금은 채벌이 금지되어서 선생님이 해고 당한다.
<동의보감>에 음식의 효능을 써 놓았다. 왕실의 먹거리도 교육시켰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교육목적은 순수하게 학문을 추구하는 성인 군자를 양성하는 것과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었다.
교육기관으로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성균관, 사부학당(한양), 중등교육기관으로 향교와 서원(지방)에서 양반자제만 교육 받을 수 있었다. 서당은 사립초등교육기관으로 고을마다 거의 다 있었다. 양반이나 서민의 차별없이 고을 자체들을 수용하여 가르쳤다. 서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다 배우면 지방학생일 경우 가까운 향교나 서원에 들어간다. 한양에서 서당을 마친 학생은 4학에 들어간다. 시험을 거쳐 관립대학인 성균관에 입학한다.
교육체제는 관학과 사학이 있다. 관학은 국가의 주도하에 설립된 학교로 중앙(한양)의 성균관과 4학(사부학당), 지방의 향교를 들 수 있다. 사학으로 서원, 서당, 서제가 있다.
왕이 된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였다. 공부는 은근과 끈기를 요하고 충직하고 순박하며 목표를 세워 끝없이 노력하고 자기확신을 관철시킨다. 선조는 엉뚱한 질문을 많이 했다고 한다. 빈 대학의 교수는 질문을 하라고 하셨다.
우리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대학교육까지 암기와 주입식교육을 한다. 대학원에서 세미나를 쓰는 것은 물론 다를 것이다.
참고문헌
* 조선왕실 천재교육/ 이기문, 김진희 공저/ 2003/오성출판사
* Klassiker der Paedagogik I/ Jans Scheuerl/1991/Verlas C. H. Beck Muenchen/P.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