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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비밀
2022년 5월 1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2:4-7
(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2: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2:6)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2: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이 세상은 비밀을 싫어합니다. 난제는 있어도 비밀이 돌아다니는 것을 못봐주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불법과 의로움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법을 제거하고 사회를 정리정도하면서 나름대로 할 도리는 다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불법의 사람이 필히 역사 끝에 나타나서 설쳐야 된다는 겁니다. 사도가 전하는 이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소위 교인이라는 자들은 부담스러워합니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의 조건은 마감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불법의 사람’이 설쳐댄다고 하니 그 ‘불법의 사람’을 알아보고 물들지 않아야 구원이 되는 난 코스를 하나를 추가적으로 만난 것으로 간주합니다.
불법의 사람이 역사 끝에 등장하는 이유는 가짜 신자들을 털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지식을 요령껏 활용해서 구원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노림수같은 것은 천국 천사들이 다 쏚아냅니다. 즉 과연 인간들이 ‘불법의 사람’을 가려낼 수 있는가를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이 땅에서 ‘비밀’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은, 비밀을 제거하는 이 세상에서 용납하지 않는 비밀이라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거의 만장일치로 사형당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이 죽어 마땅한 불법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결론은 그 시대 사람들의 무지로 한정되는 경우가 아닙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불법의 사람’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게 한 것은 이미 사람들이 보기에 ‘불법이 아닌 메시아’를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게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신을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창작해내면서 믿습니다. 즉 “내가 창조한 신이 아니라 내가 믿지 않겠다”는 식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그린 그림에 대해서 우호적인 평을 내리고 합리화를 부여하는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인간을 공격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밀’이라는 단어를 고려해 볼 때, 그 누구도 예수님을 못 알아보도록 하는 식으로 예수님께서는 활동하신 겁니다.
즉 성령님께서는 인간들이 알아먹는 식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비밀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비밀이란 무엇입니까? 안 망해도 되는 메시야가 망해버린 일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0:24-25)
이미 인간들은 악마에게 유인되어 조력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은 비밀없는 세상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비밀이 없어야 ‘자기 의’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복음 아는 자들이 다음과 같이 자기 주장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아무도 안 믿어!”
하지만 이 말은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지킬거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자기 속에 ‘자기 의’를 담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행한 일 중, 저런 일은 죄야!”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 외는 무엇일이 되지요? 필연적으로 의로운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은 존재 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용서’가 성립될게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죄 뿐인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기 의를 붙잡고 살려는 것은 전혀 메시아 비밀을 알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메시아 비밀을 모르면 ‘불법의 비밀’도 모르는 게 됩니다.
메시아 비밀이란, 안 망해도 되는 분이 망해버린 일입니다. 한 일의 밀이 죽으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원대로 되지 않도록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마 26:39) 여기에 비해 그 어느 인간도 자진해서 죽고, 자진해서 미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생 키워온 자기 의로움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인간 역사는 인간의 의로움의 대결장입니다. 이 역사의 끝에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불법의 인물을 풀어 헤쳐 활동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담긴 메시아 비밀성을 끝까지 구원의 기준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 치고 아무도 메시아의 비밀을 아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
이런 안목을 가진 자만 ‘불법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압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각자 자신의 하나님의 하나님을 만들기 때문에 영웅적인 자질을 그 신에 담습니다. 맥없이 죽어버리는 속성을 담지 않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만들 신이 본인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버릴 겁니다.
인간이 신의 창조주입니다. 그들은 성전까지 점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에는 하나님이 저주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성전의 댐이 터져버리는 식으로 인류는 모두 저주로 함몰됩니다. 성전의 참 뜻은 시므온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보여집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7-29)
아기 예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비밀을 아는 사람’들을 탄생시킵니다. 말씀의 플랫폼 작용입니다. 말씀을 듣게 되면, 그 들려오는 말씀 자체로 인하여 말씀 완성이 그 안에서 자생적으로 키워지는 겁니다. “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여호수아 2:18에서는 여리고성에 살고 있던 기생 라합은 정탐꾼이 떠나고 난 뒤에 ‘붉은 줄’만 쳐다보며 삽니다. 결코 자기 자신의 잘남과 의로움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불법의 인물은 ‘인간의 의를 유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지금 당장 죽거나 미워할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꽂아놓은 절차를 위해 우리의 뜻을 날마다 묵살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2-05-01 19:27 8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4-7절(메시아비밀)22050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4-7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4-7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불법의 비밀, ‘불법’ 뒤에 ‘비밀’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인간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고 무엇이 불법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불법’ 뒤에 ‘비밀’이라는 말을 언급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불법’과 ‘불법 아닌 것’이 잘못된, 거꾸로 된 기준에 의해서 정해졌다, 그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사도가 이 말을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인간세계에서 돌아가실 때 불법의 사람으로 간주 되어서 돌아가신 것 여러분 다 아시지요?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죽어 마땅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죽어 마땅한 사람을 우리는 구원자로 이렇게 섬긴다는 것, 분명히 그 당시 사람도 아담의 후손이고 오늘날 우리도 아담의 후손이니까 인간치고 별난 인간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다 동일하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법의 사람으로 규정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그 당시 시대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역시 우리도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불법적인 사람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상식적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이 억울하다, 예수님은 죽지 않아야 될 분이 죽었다, 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밖에 없어요.
예수님을 안 믿든지, 예수님을 안 믿어서 가짜 예수를 따로 만들어내서 전혀 불법적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내가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든지, 둘 다 같은 이야기인데, 그 사도는 바로 그 점을 언급하는 거예요.
데살로니가교회가 환난을 받으니까, 그것도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하여 환난이 재촉되고 있으니까 그제야 사도바울이 너희의 신앙을 신앙답게 제대로 된 신앙이라고 인정해 주겠다는 거예요. 만약에 환난이 없어서 없는 가운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대부분 전부 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조작된, 진짜 예수님이 아니고 믿기 편해서 믿는 예수, 이미 기성품화 된 예수, 바로 그런 경우가 대다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점은 사도바울이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하나님도 동일한 생각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성도 아닌 자가 천국 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떨어내는 것, 떨어내는 것이 필요해요. “두두둑, 떨어져라, 가짜야. 좀 떨어져라. 달라붙고 왜 그래!”
불법의 사람이 등장하고, 이렇게 자칭 하나님이라 하고 성전에 앉아서 어쩌고, 이런 경우가 있지만 이런 것에 대해서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 한해서, 진짜 성도에 한해서 여기에 관심을 갖지요. 일반 사람들은 여기에 별로 관심 갖지 않습니다. 이 불법의 사람, 적그리스도, 이런 사람의 특징이 사도가 소개했는데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국에서 이 사람을 안 받아줘요.
대단히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에요. 성전에서 종교인으로 행세하고, 성전에 앉았으니 종교인으로 행세하고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추앙하고 신앙적으로 굉장히 존경하는데,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인데 문제는 하나님이 안 받아준다는 거예요. 이야기 끝난 거예요. 하나님이 안 받아줘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할 말이 많고 노력들을 많이 해요. 교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그런데 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굳이 비밀이라는 게 없어요. 비밀이. 불법의 비밀이라고 사도가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설교를 다시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떨어내는 거예요. 내가 이쯤 하면 예수님이고, 이쯤 하면 잘 믿는다, 하는 것을 떨어내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도가 이야기하기를 마지막 때 불법의 사람들이 등장해서 모든 사람을 현혹케 한다, 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 봐도 “목사님, 예수 믿으면 구원되는 것 맞잖아요. 그런데 왜 또 이렇게 공포심을 유발시킵니까?”
예수도 믿어야 되고 마지막 때 불법의 사람 나타났을 때 그 유혹도 극복해야 되고 이거 뭐 몇 가지를 해야 돼요? 예수도 믿어야 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때 주의해야 되고 ‘아, 저 사람이 바로 적그리스도구나. 피해가자.’ 이것도 해야 되고, 왜 갑자기 장애요소를 우리 앞에 두느냐 그 말이지요.
편하게 예수 믿고 그냥 깔끔하게 천국 가면 되는데 왜 그렇게 우리가 불편하게 불법의 사람이 등장했다, 라고 이렇게 제시하니까 우리에게 어떤 숙제가 주어지느냐 하면, ‘불법의 사람인 것을 누가, 네가 구분하지 못하면 너는 걸려들었어. 너는 탈락이야.’ 이런 불안감을 사도 네가 뭔데 우리에게 이렇게 조장하고 있느냐?
예수 믿어서, 십자가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룰루랄라 좋다고 가는데 고린도후서 2장 3절부터 몇 절 까지냐 하면, 바로 12절까지 거기 나오는 것 보면, 불법의 사람들이 그것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는, 그래 그 이야기를 왜 굳이 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신앙생활 이제 느긋하게 고속도로 달릴 일만 있는데 왜 이렇게 해서 신경 거슬리게 하느냐는 말이지요. 파리 한 마리가 지금 예배당에 들어와 가지고 예배 조용하게 하고 있는데 돌아다니고 설치는 것처럼 불법의 사람이 설친다. 그래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데 몰라도 될 일을 왜 굳이 그 이야기를 해서 심사 뒤틀리게 합니까, 라는 생각을 하실 거예요. 이게 바로 주께서 뜯어내는 작업입니다.
그 불법의 사람이, 평소에 이 사람이 종교적인 사람이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했으니까 이 사람이 종교적인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비밀요소 없이, 비밀이라는 개념 없이 우리가 가능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자.’ 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어느 편이냐 하면, 불법의 사람과 같은 패거리다, 그 말입니다.
비밀이라는 것, 그 ‘불법의 비밀’이거든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불법의 사람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이 불법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 당시 사람들은 이걸 뭐 대단스러운 비밀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상식선에서 ‘저 사람은 죽는 게, 끽, 하고 죽는 게 너도 오케이 나도 오케이’ 이건 별로 어려운 게 없어요.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데 있어서 고민고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 말이지요. 이것은 검수완박과 마찬가지예요. 이게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검찰의 수사권을 모조리 박탈한다. 이게 사자성어처럼 되어 있지만 이게 어렵지 않아요. 예수같이 저렇게 설치는 사람은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서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 죽인다, 에 대해서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 나와 봐, 나와 봐, 해도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왜?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 입각한 상식적으로 예수님이라는 분은 불법의 사람 맞습니다. 맞아요. 이 말은, 어느 인간도 예수님이 갖고 있던 비밀을 통과해서 예수님의 진의를, 참된 뜻을 아는 사람은 인간치고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무슨 예수를 당신이 어떻게 알고 믿는다는 말입니까? 불법의 사람을 믿어? 그게 말이 돼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믿을 대상도 아니고 믿을 위인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거의 백프로 거짓말이에요. 가짜 예수겠지요. 가짜 예수, 가짜 예수겠지요.
예수님, 최초의 불법의 비밀은 예수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그 비밀을 아는 것을 부류로 따지자면 세 부류로 따질 수 있어요. 하나님하고 예수님, 성령님. 예수님은 이 비밀을 압니다. 또 예수님이 간직했던 그 비밀을 아는 자, 사람들로부터 불법이라고 평을 받게 된 비밀스러운 예수님이 간직한 내용을 아는 자는 누구냐? 악마입니다. 악마가 그걸 알아요.
마태복음 8장 29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귀신, 악마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았어요. 마가복음 3장 11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악마, 귀신이 예수님을 제대로 압니다. 하나님 아시고, 예수님 아시고, 성령님이 아시고, 악마도 알고 있고. 그러면 그 외에 인간들 가운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는가?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들은 귀신이 뭔지, 악마도 뭔지 몰라요. 당연히 예수님 모르니까 예수님 아버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에게는 성전이 있었어요. 인간들이 왜 성전을 만드는가? 하나님 섬기려고 성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당 짓는 것처럼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고, 성령님이 누군지 모르고, 예수님 아버지 하나님 모르면서 하나님 믿기 위해서 성전을 세웠고 그 성전을 관리하고 성전중심으로 모든 정신, 이데올로기, 그 당시 이념들, 정치적 이념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자고 외쳤던 그들, 그들의 모든 신념을 바쳐서 합세했던 그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법의 사람이에요.
그들은 비밀이라는 것을 몰라요. 비밀 빼고 믿습니다. 인간은 비밀을 좋아하지 않아요. 인간의 자존심 때문에 비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마의 하는 일, 아까 마태복음 9장에 있는 말씀처럼 악마는 예수님이 자기를 멸하는 존재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악마가 자기 일에 악마는 자기가 숨고 있으니까, 비밀이니까 나타난 것은 악마가 아니고 인간들이에요.
그러니까 악마는 나타난 인간들을 자기의 조력자로 삼는 겁니다. 조수들이에요. 조력자로 삼아서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비밀이 없는 세상으로 만든 거예요. 악마에 의해서 이 세상은 철저하게 탈색되고, 세척되고, 소독되고, 멸균되고, 살균돼요. 어느 구석에도 인간이 모르는 면이 없게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세상, 깔끔한 세상, 점점 더 나아지는 세상을 인간들은 그렇게 악마의 조력자로 악마가 시키는대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비밀이 없어요. 이 땅에서는 비밀은, 미제의 문제는 있지만 애초부터 비밀은 용납이 안 되고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그 지식, 이미 악마의 조력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인간하고 악마하고 통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선악체계입니다. “선은 선하고 악은 악하다.” 제 말 맞지요. 제 말 맞잖아요. 오랜만에 바른 소리 했어요. 선은 선하고 악은 악하다.
그러면 예수님은 뭐냐? 불법이지요, 뭐! 왜? 인간들, 악마의 조력자로 있던 모든 보편적 인간의 생각과는 터무니없이 충돌하는 이야기만 예수님에게서 쏟아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지고 불법의 사람으로 간주해서 십자가에 죽였던 겁니다.
인간들이 이 세상을 더 선하고 청소하고 소독하는 그 원칙 중의 하나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법을 만들어서 “저 짓은 나쁜 짓이고 저건 죄입니다.”라고 인간들은 지적을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자기 아비가 악마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규정을 했어요. 그 악마의 자식에 해당 되는 자들이 율법을 가지고 자기 유대나라를 깨끗한 의로운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저것은 죄가 됩니다, 라고 지적했어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죄가 된다면 그 외의 것은 뭐가 되지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이 죄가 된다면 그 외의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의가 되는 거예요. 의가! 바른 게 돼요.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 자체가 죄에요. 인간의 죄의 자식들이에요. 이거 이야기해서 예수님이 잘린 거예요. 살해당한 거예요.
인간이 새삼스럽게 이게 죄다, 해버리면 죄 아닌 것이 생겨나 버려요. 그래서 로마서 10장 3절에서, 사도가 예수님 지시에 의해서 전파하기를, 너희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어요. 그것은 뭐냐? 자기 의를 못 버리기 때문이에요 자기 의를 버릴 수가 없어요. 자기는 깨끗한 사람이고 싶어요. 누가 나보고 불법의 사람이라는 이야기 듣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악마가 세상을 그렇게 소독해 왔기 때문에. 멸균하고 살균한 거예요.
“악마는 이 세상에서 다 꺼져버려라. 없어져 버려라. 이게 하늘나라다.” 주님의 방법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죄로 멸망해 버려라. 그게 하나님의 의다. 왜? 너희들이 선악과 따먹었잖아.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인간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심지어 3년 동안 따라다녔던 그 제자들도 예수님의 그 가시는 길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예수님께서 귀신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 다물고 유포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인간들이 없다고 여기는 그 악마, 인간들이 없다고 여기는 그 귀신은 예수님과 서로 지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하는 그 일은 악마의 일을 멸하고요, 요한일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마귀를 멸하고 이 세상을 심판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마태복음 9장 29절의 말씀처럼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왜 벌써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오셨습니까?”라고 악마가, 귀신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나타날 때는 언제냐 하면, 악마가 마지막에 완전히 다 심판받을 그때 등장해야 되는데 왜 미리 오십니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보고 “그 입 다물라!” 예수님에게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내가 아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야기 했어요. 왜? 이것이 비밀이 비밀로서 유지가 되어 줘야 인간들이 현재 알고 있는 예수, 알고 있는 성령, 하나님 자체가 자기가 안 망하기 위해서 자기 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조작해 낸 예수고 개념들이라는 사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에 하나의 본질로서 이어져 나가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좀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불법의 비밀이 설쳐대는 이유는, 왜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저주로 끝장내야 되는가? 그 근거와 이유를 역사 끝에 최종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불법의 비밀을 언급하게 하신 거예요. 사도를 통해서. 그 인류의 역사의 본질 속에서 어느 인간도 마귀의 족쇄에서 벗어나서 ‘나 역사 바깥으로 튀어나간다.’ 하는 인간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성도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메시아도 없고요, 성령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요, 그냥 귀신도 없고, 악마도 없어요. 왜 없느냐? 인간들은 자기가 세상을 만들어내요. 자기 의를 지키는 요량으로, 자기의, 나의 의로움, ‘나는 선악체계에 의해서 나쁜 것도 했지만 선한 것이 더 많다. 그러니까 빼기하고 더하고 나머지 하게 되면 나는 여전히 의롭다. 나는 죽어도 천국 갈 만하다.’ 라는 그 취지를 입증해 주기 위해서 인간들은 꾸준히 자기 세계를 만들어왔던 거예요. 협력하여.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뭐냐? 인간들이 만들어낸 그 자기 세계와 더불어서 인간은 파멸되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만든 세계, 오늘도 쉬지 않고 꾸역꾸역 만들어내는 내 가정, 내 직장, 내 사업체, 내 국가, 내 노력, 내 교회, 내가 만든 이 나의 환경과 더불어서 인간은 필히 같이 함몰되고 같이 망해버려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만들어진 내 성과들이 내 의를 증명해 주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잘났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에 그래요. 심지어 그도 저도 없으면 자살하지요. “내가 왜 사나, 싶습니다.” 이런 거요. 이 세상은 주님 보시기에 불법의 사람이 활동하는데 최적화된 세상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악마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 자체가.
그래서 악마에게는 이런 호칭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절대자, 절대 강자예요. 이 세상의 절대 강자. 인간은 이 세상의 절대 강자가 우리 인간에게 있지 악마가, 귀신이 이 세상의 절대 강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비밀을 몰라요. 예수님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성령도 알고, 악마도 아는 그 비밀을 인간은 전혀 모릅니다. 깔끔하게 인간의 철학과 과학으로 정리정돈을, 너무 소독을 잘해놨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딴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가 모른다는 것, 그것은 아직까지 좀 더 노력하면 알게 될 것이지 어떤 비밀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존심이 상해서 그것은 용납이 안 돼요. 왜 인간이 비밀을 싫어하느냐 하면, 지금 내가 바르고 착한 사람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 모든 것이, 모든 것의 의미가 앞으로도 미래에도 살아 있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헛짓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어떤 근거라는 게 마련되어 있어야 돼요. 지금 내가 하는 짓이 헛짓이 아니라면 미래에 나도 보장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불법의 악마의 하는 짓은, 적그리도 하는 짓은 뭐냐 하면, 의를 유포하는 사람이에요. 바르게 살자, 를 유포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아셨어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살자.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거리에요. 너무……, 정말……, 이건 calm down, 해야 돼요. 제가 침착해야 돼요, 정말!
마태복음 12장 31, 3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용서함)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용서함)을 얻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연결고리는 오직 성령뿐입니다. 성령뿐인데 인간이 오는 세상에 용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보고 있는 것은 인자라는 눈에 보이는 인간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님만 눈에 보이거든요. 예수님만 눈에 보이니까 예수님을 따르면 구원받는 줄로 알고 있어요.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그 당시 사람들,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자기가 착각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거예요, 착각해서. 예수님에게는, 내가 예수님을 필히 배반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따르는 제자들이 본인이 몰랐어요. 바보 등신 같은 제자들이 그걸 몰랐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 배신할 줄을 자기가 몰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배신할 요소를 지니고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지금 모르고 있어요. 눈물 날 이야기입니다. 이 무지몽매함이. 검수완박은 너나 나나 애들도 다 알아요. 그러나 메시아비밀은 모릅니다. 인간에서 오는 세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모든 세대가, 모든 인간들이 이 세대 밖으로 못 나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을 하시고, 그다음에 성령을 통해서만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유일한 연결고리가 성령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거역하는 자는 이 땅에서는 용서받는다는 말은, 인간의 자기 본색을 드러냈기 때문에 인간이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는 말조차도 이것은 네가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모든 인간은 죄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세대 안에서는 누구나 마찬가지고, 이제는 오는 세대와 관련되는 것은 성령밖에 없기 때문에 성령이 오기 되면 바로 예수님에게 주었던 그 영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용서 받아야 될 대상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요.
왜냐하면 죄가 없는 곳에는 용서가 무의미하니까. 용서라는 말은, 성령께서 용서한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날고 기고 어떤 몸부림을 쳐도 우리는 죄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시는 예수님의 성령의 작업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왜 예수님을 못 알아봤는가? 그것은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하셨어요. 그게 뭐냐? 요한복음 12장 25절, 예수님은 자기를 미워했거든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 스스로 죽었던 거예요.
누구든지 스스로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선악을 따먹은 인간이 아무리 시도해도 할 수 없는 게 있음을 알았어요. 악마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도 악마가 절대로 해내지 못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악마는 자기 부정을 못 합니다. 나는 나쁘다는 이야기를 자기보고 못하고, 그 나쁘다는 이야기를 못 하는 그 악마의 성깔, 악마의 성질을 고스란히 인간이 그대로 다 물려받아 가지고 인간이 아무리 범죄해도 나는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마련이에요.
터벅터벅 지옥 가도, 지옥 가도 우리를 위로하는 자는 여러분? 아닙니다. 나입니다. 내가 ‘힘내. 어디 가도 다 사람 살 만하니까 만들어준 거예요.’ 하고 지옥 가는 나를 내가 위로한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너를 지적하거든 어릴 때, 너 일곱 살 때 한 일을 네가 한번 생각해 봐라. 또 아홉 살 때 강낭콩 키웠던 그런 일들 끄집어내 가지고, 네가 뭐라도 의미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서 약간의 선처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노려 봐라. 그러니까 힘내라. 힘!’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를 격려하는 데 급급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지옥 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왜 그리 변명이 많고 왜 그리 말들이 많은지.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요, 하나님이 애초부터 우리 인간을 안 받아준다는 게 문제에요.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여호수아 2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기생라합이 정탐꾼을 떠나보내고 기생라합이 살아가는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붉은 줄만 바라보는 모습이에요. 매일같이 붉은 줄만 쳐다보고 있어요.
붉은 줄만 있다면, 붉은 줄이 멀쩡하게 있다면 지금 내 인생이 이 순간 스톱 되어도 상관없어요.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십자가 지신 그 본성이에요.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런 본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진실로’를 두 번이나 했어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은 아무도 못 하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아무도,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어요. ‘이렇게 의롭고, 그동안 내가 의롭기 위해서 얼마나 지대한 노력을 했는데 왜 이 멀쩡하고 착하디착한 것밖에 없는 나, 내가 왜 이 땅에 죽어야 되느냐?’
흔히 복음을 아는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어요. “목사님, 저는 아무도 안 믿습니다. 인간들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오직 예수님만 믿고 아무도 안 믿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들리기는 이렇게 들려요.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 방식으로 나 자신을 지킨다.’ 이렇게요.
이 말은, 어떤 종교적으로, 이상적으로 폼을 내도 그냥 안 망하려는 그 집념과 의지가 대단합니다. 본문에 ‘불법의 비밀’인데 이 비밀, 최초의 비밀은 메시아의 비밀입니다. 십자가의 비밀, 예수님의 비밀이 있었고 그 예수님의 비밀에 대해서 인간들은 거기에 대해서 자기 속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를 몰랐고, 그 인간이 알고 있던 그 비밀을 성령께서는 마지막 때에, 인류역사가 끝나는 마당에 그 비밀을 구체적인 인물로 노출 시켰어요.
“내가 하나님이다. 성전은 내가 접수했다.” 그런 식으로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귀신이 예수님에게 반항하기를 “왜 마지막 때 우리를 멸하러 오지 미리 오십니까?”라는 그 귀신의 질문,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이 있어야 되겠지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아까 본 말씀에서 인자와 성령, 이렇게 해서 그 기능을 둘로 구분을 했어요. 인자의 기능은, 이 육의 기능은 그냥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야 될 기능이에요. 예수님이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고 불법했다는 이유 때문에 죽음으로서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불법이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불법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들춰내는 죽음을 죽는 거예요.
그다음에 일이 뭐냐 하면, 성령을 언급했거든요. 성령만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유일하게 연결합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오는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음이 확실해 졌지요. 예수님의 영이 예수님을 오는 세상에서 메시아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 영이 이제 주어지게 되면 그때 없었던 성도가 성령으로 인하여 새롭게 생겨납니다.
사람이 있는데 복음을 들으니까 내가 성도가 되는 게 아니고요, 성도라는 것은 없어요. 주의 백성은 없습니다. 베드로도 아니에요. 요한도 아니고요. 성령이 오니까 비로소 이 세상에 왜 불법의 비밀이 설치는가를 알게 되고 비밀이 무엇인가, 그 비밀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알게 되지요.
그 비밀은 메시아의 메시아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은 파생된 사건들로 출렁이고 있어야 된다는 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 어느 세상 하나 십자가의 피와 무관한, 피와 무관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기생 라합 이야기를 한 거예요.
기생 라합은 자기가 밥도 먹고 점심도 하고 하지만 바라보는 것은 오직 붉은 줄밖에 없어요.창가에 늘어진 붉은 줄, 내가 지금 죽는다 할지라도 전혀 그것은 내가 죽을 인간이 죽는 것인데 그게 뭐가 대단한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수시로 기쁜 이유는 뭐냐? 내 생각과 나의 결정이 주님에 의해서 늘 묵살당한다는 것, 묵살당할 때 이게 기뻐요.
이게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날 묵살시키는 주님이 엄연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새롭게, 새롭게 그걸 깨닫는 순간순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고. 그래서 성도는 자기에게 연락을 안 합니다. 주님과 연락하기 때문에. 나는 맨날 실수하고 실패만 하는 게 즐거워요.
그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맨날 술이야.” 맨날 술이야, 하는 그 노래처럼 맨날 실수고 맨날 실패에요.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냐. 공자 왈. 내가 나답다는 것, 그것은 잊어버렸어요. 죄가 죄답지요. ‘죄가, 의 없는 인간이 의 있는 체하는 꼴이 우습구나.’ 나 자신을 보면서 개코도 뭘, 이것은 내가 나쁜 짓 했다는 자체가 이게 얼마나 자기가 평소에 잘난 체를 했느냐 그 말이지요. “목사님, 제 사업 부도났어요.” “원래 너라는 인간이 부도났어. 인간아! 뭘 새삼스럽게 부도나.”
이 세상, 이 비밀을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그러니까 떨어버리는 거예요. 이 비밀을 모르는 자는 가짜라고, 하나님이 안 받아준다고 미리 불법의 사람에 들춰져서 떨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이 사도의 말에 사람들은 관심 없어요. 불법의 사람이 설치는 것은 누구만 관심있느냐 하면, 바로 성령 받은 성도만 ‘아, 그래. 그 메시아 비밀이 아직도 유효하구먼.’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 다 따라가요. 왜냐하면 이 불법의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에 불가능이 없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니까. 전지전능한 그걸로 하나로 힘을 뭉치자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마블 영화에요. <어벤저스> 시리즈, 그 영화. 그 영화 요새 인기 있잖아요.
스파이더맨, 거미줄로 뉴욕의 빌딩에 붙어서 올라가는 사람. 배트맨, 박쥐 모양 마스크 쓰고 망토 펄럭이면서 이 건물 저 건물 돌아다니는 사람. 아이언맨, 얼굴에 철가면 쓰고 있는 사람. 캡틴, 방패 하나 들고 캡틴 어메리카, 그 영웅. 토르, 망치, 오함마 들고 다니는 것. 헐크, 이것은 런닝구 다 째져서 돌아다니는 사람, 그 영웅.
이런 것들이 모여서 어벤저스(Avengers) 복수자, 세상에 복수하는 자, 원수 갚는 자, 엑스-맨, 심지어 개미 같은 것도 있어요. 앤트맨. 철근 씹어먹고 마을버스 10-2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그런 영웅담. 그것뿐만 아니에요. 요즘은 더 센 게 나왔어요. 천 4백만 6백 5개의 세계를 미래를 고려해서 결정적 한 수를 모든 끝내기로 내릴 수 있는 닥터스트레인저. 망토 걸치고 하늘 날고, 시간까지 조정하고 미래를 볼 때 ‘멀티 버스(Multiverse)’라 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우주를 한꺼번에 다 아는 것, 나는 어디에도 편재되어 있다, 어느 우주에도 나와 동일한 존재가 있어서 그걸 관리할 수 있는 인간의 그 상상력.
그거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네가 의롭다고 규정해준, 사실은 세상에서 규정한 악마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겁니다. 악마의 아이디어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그런 자기를 미워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 아무도 예수님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 오고 난 뒤에 천하의 미워미워미워, 천하의 미운 자가 누구냐? 본인이에요, 본인! 세상에 자기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어요.
그동안 내가 믿던 하나님은 내가 만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친근해요. 내가 그린 그림에 내가 거부감을 나타낼 필요 없잖아요. 내가 그린 그림이니까요. 신은 인간이 창조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버릴 수도 있어요. 내가 창조했으니까.
신은 버리되 인간이 못 버리는 게 있습니다. 그게 개입니다. 개! 복음은 버리고, 교회는 버리고 하나님은 버려도 자기 집구석에 앉아 있는 개는 못 버려요. 왜냐하면 개가 정신적으로 인간을, 식구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개는 의도적으로 일부러 막 행동을 해요. 하면 그 식구들이, 그 개가 스스로 자기 몸을 막 물어 뜯을 때 안타까워서 온 식구들이 놀라고 할 때 그 놀라는 모습을 보고 개가 즐거워합니다.
정신적으로 인간들은 개의 종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키우기 때문에, 내가 개를 키우기 때문에, 제 2의 자아로서 개를 키웠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개대통령이 그 개를 자기가 스스로 학대해서 피를 뜯어먹든지 말든지 더 조져버립니다. 그러니까 누가 말리는가? 그 개 가족들이 기겁을 하고 개대통령한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우리의 가족입니다.” 이러는 거예요.
이거 미친거 아니에요? 예? 개는 멀쩡한데 인간들이 미쳤습니다. 완전히 뒤집어진 세상이에요. 주님은 개만도 못해요. 왜? 인간이 자기가 키우는 개를 못 버립니다. 그 개안에 자기의 정성과, 자기의 의로움과, 자기의 돌봄과, 개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거기에 집대성되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집대성, 거기에 다 있어요. 심지어 개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것 같아요. 죽도록 충성할 것 같아요. 개한테.
불법의 사람이 설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는,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소문을 들어보니까 데살로니가에 성도가 생겼다는 거예요. 성도가 생겼으니까 이게 성도인지, 대부분 사람들처럼 가짜인지 알기 위해서는 불법의 사람을 제시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제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네가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을 네가 무슨 수로 그걸 돌파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 돌파하는 방법이 얼마나 어려운지 성경에서 어렵다고 소문난 그 구절을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1절이요 “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여기 비밀 나오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다 비밀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요 대목, 어려운 대목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2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뭐 개코도 없는데, 더 빼앗길 게 뭐가 있겠어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비밀, 천국의 비밀, 메시아의 비밀, 악마는 알고 있지만 인간들은 전혀 모르는 이 비밀, 인간은 이 비밀의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 악마가 안 가르쳐 줬거든요. 이 뜻은 무엇이냐? 주님의 비유 자체가 모든 말씀을 이해하는데 플랫폼이 된다는 거예요. 기차 출발점 있지요, 모든 논조의 시작이 플랫폼이에요. 인공지능에서 나오고 컴퓨터 용어이기도 합니다. 플랫폼, 시작점, 출발점.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앱을 까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앱이 없어요. 주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바탕 자체가 없습니다. 주께서 성령을 주셔 가지고 플랫폼을 만들어서 그때서 논리가 개시점이 되어야 돼요. 없는데 이 비유가 플랫폼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비유가 오게 되면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듣던 말든 주셨다는 것,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이 징처럼 우리에게 박히니까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채 그 말씀이 말씀대로 실현하다 보니까 거기서 완성의 성령이 와서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성도가 되었고 천국의 백성 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주께서 하셨고 주께서 하시는군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을 알게 된 사람이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데 내가 성경 구절 가운데서 무척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여러분도 같이 좀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성전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는 거예요. 오늘 데살로니가후서에 보면 마지막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성전을 차지하고 내가 하나님이라고 우기거든요. 성전의 의미를 인간들은 몰라요. 자기의에 미쳐 가지고 성전의 의미를 몰라요. 성전을 차지하면 천당갈 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성전의 의미는 이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이 압니다. 누가복음 2장 27절에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벌써 성령이지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9절이 제가 사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28절은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그리고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 내가 얻어낸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낸 것이 아니고 알아진 거예요. 내가 노력해서 알아낸 게 아니고, 공부해서 알아낸 게 아니고 알아진 거예요. 얻어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거예요. 종의 평안함. 그것은, 성전의 완성은 아기 예수가 하실 겁니다.
이미 시작했습니다. 왜? 플랫폼이 우리 속에 박혔으니까, 성령을 통해서 박혔으니까 박힌 그 속에서 주님의 일을 마무리 하실 거예요. “얘야, 저게 불법의 사람이야. 저게 가짜야.” 전부 다 이야기하고 알려주실 겁니다. 이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 그 놓아주시는 절차가 로마서 8장 30절에 나와 있습니다.
절차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반드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미 과거완료, 이미 그렇게 끝났어, 끝! 끝! 끝! 플랫폼 그 자체로 끝나버렸어요. 그렇게 해내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은 평안히 놓는 그것뿐입니다. 이 불법의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그 당시 성전, 인간의 손이 가미된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차지하려고 하는데, 그러니까 기독교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교회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그 교회에 폭탄이 있습니다. 터져 버려요.
광주광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성전 자체가 저주를 품고 있는데 저주를 건드니까 그 저주가 온 인류의 역사까지 다 파급되어서 그래서 온 인류는 싹쓸이, 전부 다 지옥으로 내침을 당하는 거예요. 성전에 저주가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님 자신이 저주받았음이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성전은 그렇게 완성되는 게 아니에요. 교회 열심 낸다고 성전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성전 완성이 이미 여기에 박혀버려야 돼요. 아이언맨인가, 심장이 황금심장으로 박혀버려야 돼요. 할 게 없어요. 내가 남은 인생에 할 것은,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죄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그래서 죄짓는 일이니까 주께서 도와줄 일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맨날 실패야. 맨날 실수야. 매일같이 우리의 일을 묵살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종은, 우리는 우리 자신한테 연락 취하지 말고 붉은 줄만 바라보는 기생라합의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