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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침륜에 빠지는 것의 위험
본문: 히10:38
설교자: 김남준 목사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
들어가는 말
오늘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뒤로 물러가는 것과 신앙체험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때 하나님의 은혜를 한없이 많이 받았던 사람이 냉담하게 식어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떠나고 급기야는 삶이 떠나고 더 심한 경우에는 깊이 타락해서 불신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천로역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 불신 세상에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고 나면 그 은혜가 우리의 등을 떠밀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때까지 저절로 우리의 인생 길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광야에서 죽었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는 들어선 지 상당히 오래 된 사람, 심지어는 모세와 같이 광야길에 들어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불순종으로 죽어갔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고 계신 사실을 매일 확인하고 이른 아침마다 거둬들이는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두 눈으로 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갈라진 홍해 바다에 수장되고 있는 수많은 애굽의 병사들의 시체를 목격하며 홍해 건너편 언덕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장엄한 성가를 불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체험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이 불신앙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광야에서 죽어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거울로 삼으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그 대적의 숲을 지나서 매일 싸우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힘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기도 하지만 힘과 함께 뱀과 같이 예민한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어떤 식으로 신앙의 올무를 놓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서 온전히 나아가는 신앙생활에 방해를 주고 있는지 악한 궤계들을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며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능력들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
구약만 아니라 성경의 마지막 계시의 뚜껑을 덮는 계시록까지도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분명히 우리에게 인치고 있습니다. 왜 그토록 경건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율법을 사랑하는 것을 인해서 그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전에 실패했던 신앙의 모든 선조들의 실패를 우리로 하여금 되풀이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을 위해서 놓여 있는 수많은 악한 사단의 궤계들과 함정들과 올무들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신앙의 참된 지식이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된 지식의 말씀을 좇아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입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 번 은혜가 그들에게 주어지고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는 강력한 은혜의 역사가 있어도 그들은 잠시 후 곧 잠들어 버리고 더욱 더 심히 물러나서 깊은 잠에 빠져 하나님을 떠난 패역의 삶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실 때 그들은 전심으로 내가 무엇을 믿는가 그리고 내가 왜 그것을 믿는가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배우려고 힘써야 합니다. 10년을 교회 다녀도 당신이 믿는 것이 뭐냐고 말하면 대답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가지고 놀기에 아주 적합한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도 별볼일 없습니다. 잠깐 냄비 끓듯 한 번 끓고 울고불고 며칠 기도하지만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한 달도 안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식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던 그 자리에 앉아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신앙의 성숙을 이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든지 그 사람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재형성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커다란 의문
사람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종종 커다란 의문에 휩싸이게 됩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했을 때에는 타락하거나 혹은 침체에 빠지거나 혹은 신앙생활을 집어 치우거나 하더라도 자기가 맘먹은 대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새롭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다시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점점 커가고 성숙해 가면서 그 다음엔 이것이 맘대로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왜 처음에 신앙생활 할 때는 이것보다 더 끔찍한 죄를 짓고도 회개하니까 금방 하나님이 다시 은혜 주시고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 수 있는 마음도 주셔서 다시 은혜를 받았는데 왜 지금에 와서는 내가 이렇게 영적으로 회복되어 보려고 애를 써도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혹은 여러분의 침체가 한 달이나 두 달 되었을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6개월 10년 혹은 총각 때 은혜 받아보고 이제 나이가 40을 넘어서 50 고개를 넘어가는데도 아직도 그 은혜만을 그리워하며 어떻게 하면 그 은혜로 돌아갈까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처음에 회복될 때보다 열심을 더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기도했습니다. 어떤 때는 금식기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쉽게 마음먹은 대로 회복되지 않고 마침내는 내 영혼을 회복시킬 프로그램이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 회복해 보려는 노력을 여러 번 하다가 깊은 낙담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시간이 흘러갔는데 도저히 그런 상태로는 계속해서 살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소위 얘기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절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 다음에 배우는 것은 하나님 없이 영적인 문제로부터 탈피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좁은 것이 아니고 넓은 것이야' 그러면서 주위에서 신앙으로부터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굳이 이렇게 유별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체념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소원한다고 하는 것과 전심으로 찾는다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회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범죄의 현장에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그런 것 가지고는 우리의 타락과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는 신앙의 실패를 막아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은혜의 세계가 점점 깊어질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풍성한 신앙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또 무엇을 믿으면서 살아가야할지 또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 주십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지식이 점점 자라갑니다. 편견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던 나를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깨뜨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은혜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물러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물러가는 잘못은, 모르기 때문에 물러가는 사람들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범죄라고 할지라도 누가 그 범죄를 했느냐에 따라서 죄에 대한 형벌이 다릅니다. 청교도들이 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그렇게 심각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죄라고 생각했는데 그 죄 하나 때문에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영혼의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 없는 삶을 이어가야 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내가 무엇을 믿는지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 알 수 있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고 진리의 빛이 어두운 인생을 밝혀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제는 무슨 말씀을 좇아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구나 하는 사실들을 깊이 비췸을 받고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이제 그 믿음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할 수 없는 죄
오늘 이 성경을 쓰고 있는 똑같은 사람이 6장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6장4절에서6절입니다."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여러분, 우리들이 알고 있는 교리와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회개하게 만들 수 없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사람의 구원을 의심하겠습니까? 캄캄하고 무지한 사람에게 진리의 참된 빛이 그 영혼 속에 비쳤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 안에서 한없이 즐거워하다가 신령한 하늘의 영적인 은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성령에 참예한 바 되어 성령과 동역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체험도 감정적이고 마귀가 가져다 준 체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아직도 그러한 비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받았습니다. 위대한 능력이 그와 함께 하였고 성령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람이 다시 타락하면 새롭게 회개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이 성경구절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가지고 오랜 역사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대체적인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 속죄의 완전성을 파괴하는 대답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는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교리입니다.
성경이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히브리서가 쓰여진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질 때 사람들은 핍박의 구름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조직적인 박해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곳곳에서 끔찍한 핍박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고 기독교를 믿는 형제 자매들을 엄청난 핍박으로 박해하기 위한 정치적인 박해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배교가 속출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은 모이기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이 편지가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 뜻대로 살아야 되겠습니다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육신이 연약해서 짓는 그런 범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배교의 범죄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서 우리가 이런 죄에 해당하는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냐 없느냐 하는 것을 들려 드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진리의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동역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의 깊이를 깨닫고 내세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한 사람도 배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요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용서 받느냐 못 받느냐 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사람도 배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이러한 예증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사울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이러한 비췸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의 은사에 있어서는 어떠하였습니까? 이러한 신이 그 위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에 있어서는 어떠하였습니까? 그는 예언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말씀에 있어서는 어떠하였습니까? 그는 준수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의 사역의 초기에 하나님 앞에 심히 겸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떠났습니다. 그는 배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악신을 자기의 몸 속에 지닌 채 죽어가야 했습니다.
삼손에게서 우리들은 이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구별되어 하나님 앞에 바쳐진 바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왕도 주관자도 없던 때에 사사로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비취심과 하늘의 놀라운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사사는 왕인 동시에 재판장이었고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성령의 감동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놀라운 능력을 맛보았던 사람이었으나 그 역시 배교의 길을 갔습니다.
신약에서 데마는 어떠하였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여 자신의 소명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룟유다는 더더욱 이러한 말씀에 해당되는 인물이었습니다. 한 번 비췸을 받은 것이 아니라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 옆에서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맛보기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놀라운 능력을 마태복음 10장1절에서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로 세움을 입었고 그는 나아가서 70인의 전도대와 함께 무엇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가를 전하면서 귀신들을 내어 쫓고 승리의 소식을 보고한 사람이었습니다. 내세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했고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책임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런 놀라운 신앙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회개할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석가들의 말은 이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는 회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나 크게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꼭 잊지말고 기억해야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왜 배교의 죄는 이렇게 다스리시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깊이 때문이라고 나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비록 회개할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해서 배교의 죄를 짊어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불평하거나 원망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받았던 은혜가 워낙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진리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깨달음을 받은 사람들은 그 깨달음을 받은 만큼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죄와 더불어 땀을 흘리며 싸울 때 그 사람은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신앙생활 할 때 그는 지사의 각오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할 의무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든지 우리의 신앙이 뒤로 물러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신앙과 은혜체험 속에서 우리들이 알아야 될 사실은 이것입니다. 한 번 진리의 말씀에 대해 남다른 깨달음을 얻게 될 때 그 때 여러분들은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을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의 도전을 받고 그 말씀을 통해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다시 물러가서 무지무각한 삶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만한 은혜 가지고 그 사람은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면역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면역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타락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소망이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언젠가 하나님의 말씀이 비취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쪽 편에 달렸던 강도처럼 그렇게 매달려서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며 매달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많이 깨달았고 신앙의 세계에서 너무나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웬만한 설교는 설교같지도 않습니다. 웬만한 책은 책같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의 직접적인 스승이 되실 분은 성령 하나님밖에 안 계신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대하게 금이 갔습니다. 그 성령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을 찬송하던 악기의 줄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불어 올리던 아름다운 나팔에는 거미줄이 끼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 사람을 지도하고 그 사람을 새사람 만들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큰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는 것은 폭탄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절대 속히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두려워해야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번 은혜를 받고 한 번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며 새롭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주님을 믿는 신앙이 무엇이고 이 어두움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진실한 삶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한 번 깨닫게 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보다 높은 수준의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의무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갓난 아이가 자다가 오줌을 쌉니다. 그런데 엄마가 난 지 한달이나 되었는데 오줌을 못 가린다고 때려 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학교 들어간 아이가 오줌을 싸면 맞는 것입니다. 대학교 들어갔는데 오줌을 싸면... 그것은 인간 취급도 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한 번 용서해 주세요" 하며 눈물 뚝뚝 흘리면 불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고 나서 범죄한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왜 오늘은 나에게 은혜를 안 주시는가?" 원망만 합니다. 자신은 은혜를 못 받지만 옆의 사람은 받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로 향한 은혜는 간 곳 없어도 뒤의 사람은 거듭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떠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에서 물러가서 침륜에 빠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충분히 고통 가운데 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제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충분히 고통 가운데 두셔서 주님과의 관계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깊이 인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포기하고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뒤로 물러가면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너희가 하늘의 기이한 능력을 맛보고도 은혜의 자리에서 물러갈 때에 나는 분노하리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은혜들을 이 시점에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오늘까지 인도하셨으며 나의 신앙을 자라게 하셨으며 남이 알지 못하는 무엇을 나에게 깨닫게 하셔서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셨는가 그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들을 깨닫게 하고 깨달을 때 감동과 감화가 있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의 인생이 그 말씀대로 살기로 소원했던 진리의 지식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십시오. 이런 일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확인하십시오. 이것이 모든 영적 회복의 첫걸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의 세계에 대해 풍부한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은 더 많은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물러서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