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귀환
1. 2024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앞으로 4년(2025-2028)동안 전 세계는 트럼프의 충동적이고 독선적인 국제 정책에 의해 흔들리게 되었다. 트럼프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은 지구적 질서에 붕괴를 예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거침없는 행보가 때론 지나치게 이념적, 형식적 절차에 집중하는 정치적 결정에 좀 더 실용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기대도 존재한다. 어쨌든 우리는 특정 지도자의 성향에 의해 세계가 흔들리는 혼돈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역사를 움직이는 주체에 대한 논쟁에서 ‘영웅’을 중시하는 것과 ‘민중’을 중시하는 관점이 대립을 이룬다. ‘영웅적 사관’은 퇴행적 관점과 시민의 성장을 통해 사라져가는 유물이 되는 듯 했지만, 지금의 현상은 특정 지도자들의 야심과 독단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목격한다. 분명 지도자들을 선택하는 것은 시민들이지만, 시민들의 상식과 의식이 주체적 관점을 잃고 오염되었을 때, 결국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권위적인 정치가들이 등장하고 그들에 의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쇠퇴하고 있는 것이다.)
2. 최근 언론은 트럼프의 승리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쏟아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트럼프의 승리에 주요 요인에 대한 관점이 언론의 색깔이 따라 선명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이번 선거에서 지난 번 승리 때와는 다르게 선거인단 뿐 아니라 전체 투표에서도 승리했다. 완벽한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이러한 승리는 민주당을 지지했던 전통적인 투표자들 중에 많은 흑인, 히스패닉, 여성들이 트럼프로 돌아선 것에서 기인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결과를 초래한 원인에 대해서는 분명히 다른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3. 미국의 진보 정치인 샌더스의 보좌관이 분석한 패배 요인은 민주당의 어정쩡한 정치적 입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부유한 기업인과 가난한 시민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친기업적인 정책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대신 정치적 올바름에 기초한 성소수자 문제, 불법이주민 문제, 낙태, 여성 권리 등과 같은 가치에 대한 논쟁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하층 계급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적 빈곤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부유층에 눈치를 본 민주당은 혁신적 사회복지 정책 수립에 실패했으며 하층계급의 지지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불법이주민들의 계속적인 난입도 기존의 사람들에게는 위협이 되고 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불법이주를 통해 미국에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경쟁자이자 불편한 동행인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혐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지닌 트럼프의 약점을 공격하면 이들이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낙관한 것이다. 즉 민주당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주요 패인이라는 분석이다.
4. 보수 언론에 실린 분석 기사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관점의 차이를 보여준다. 보통 시민들의 정서를 트럼프가 수용하고 대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진보적 가치를 대변한다는 PC(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이 트럼프를 지지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PC는 성소수자의 가치를 보호하고 낙태를 옹호하며 이주민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내세운다.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성전환한 운동선수의 불공정한 승리나 이주민들의 범죄가 가져온 치안의 불안은 보통 시민들의 불안을 자극했고 그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한 심리를 단순한 언어로 표현한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가치의 문제들를 보통의 시민들은 수용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5. 경제적 상황을 무시한 PC와 같은 정치적,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지나친 편향은 분명 문제가 된다. PC의 지지자들이 대부분 중산층의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라는 점은 PC가 가진 분명한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자신들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으로 인식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호응되지 않는 발언은 언제나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PC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나 실천에서 보이는 이중적인 태도나 경제적 득실에 대한 민감한 반응 그리고 자신의 신념의 정당성에만 매몰된 도덕적 우월감은 평범한 사람들의 말 못하는 불만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결국 트럼프 승리의 근본 요인은 보통 사람들의 반진보적 가치에 대한 정서를 정확하게 짚어내었고 그것을 대변했다는 점이다.
6, 하지만 두 가지 관점은 모두가 일정한 진실을 담고 있지만 결국 특정한 관점만을 중시하는 편향된 시각이다. 사회복지 정책에 대한 미비에 불만을 갖고 있는 세력도 있을 것이고, PC에 대한 불만을 가진 잠재된 시민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때론 중복될 수도, 때론 대립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 우리의 세계가 즉각적이고 즉물적인 자극과 성찰하지 않은 판단이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치적 열정을 불태우는 특정 정당의 지지자들도, 발언하지 않고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은 평범한 시민들도, 우리를 지배하는 거대한 담론을 성찰하는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성찰을 잃어버린 판단은 정치가들에게는 오직 권력의 획득에, 일반 시민들은 외부에서 만들어진 발언과 논리에 따라 감정적으로 추종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사유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지만, 때론 문제를 왜곡시킨다.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 다양한 루트로 흡수해야 할 정보와 그것을 통합하는 성찰의 과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사라져가고 있다. ‘진지함’은 매도되고, 중립적 태도는 공격의 대상이 될 뿐이다.
7. 사람들은 점점 독단적이고 자극적인 발언에서 만족을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의 방식으로 적응의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 거짓된 선동에 휩쓸리지 않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열정과 퇴행’, ‘무관심과 붕괴’ 이러한 조합이 현실이 되고 있는 지금, ‘열정을 갖되 비판적 시각을 갖는’, ‘무관심하되 최소한의 판단 기준을 정립하는’ 시민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신뢰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닐까? 그런 태도가 세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탐욕적인 인물의 등장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최선의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인물을 어떻게 배제할 수 있을까’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너무도 어려워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
첫댓글 - 강한 자기 확신의 양면성, 너무 없어도 너무 많아도... 이익과 탐욕 사이... 궤변의 합리화... "탄핵 통과되지 않도록 노력…위헌적 계엄 옹호 아냐"??? 인간 세계의 복잡성이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