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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15일 일요일, 경상남도 창녕군에 위치한 화왕산을 찾았다. 해발 756M의 화왕산(花王山)은 봄의 진달래와 가을의 억새밭으로 이름 난 산이다. 본래의 이름은 화왕산(花王山)이었으나 일제가 날 日자를 덧붙여 화왕산(花旺山)으로 고쳤다.
11시경, 산악회 버스는 창녕읍 화왕산 입구에 이르렀다. 차창 밖으로 동산만한 크기의 고분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띈다. 가야시대에 축조된 왕릉급 고분들이다. 교동리 고분과 송현리 고분은 창녕읍의 중심지인 화왕산 서쪽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가야시대의 고분이 남아있는 창녕은 가야 6국의 하나였던 비사벌(比斯伐)의 터전이었다. 이곳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弁辰) 조목에 나오는 불사국(不斯國)으로 추정된다. 불사국이 발전하여 비화가야(非火伽倻)가 되었다는 것이다.
AD 555년 신라 진흥왕 16년, 가야 6국의 하나인 비사벌은 신라에 병합되었다. AD 561년, 진흥왕 22년에는 진흥왕 척경비가 세워지고 AD 565년 진흥왕 26년에는 대야주(大耶州)가 설치되었다. 창녕 진흥왕순수비에는 신라 관직의 이름인 비자벌(比子伐) 군주(軍主), 비자벌(比子伐) 정조인(停助人) 등이 나타난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비사벌에는 신라의 군사 조직인 비사벌정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후 창녕은 줄곧 신라의 비자벌군으로 있다가 경덕왕 때에 이르러 화왕군(火王郡)으로 바뀌었다. 화왕군은 고려시대에 와서 다시 창녕군으로 개칭되었다.
비사벌(比斯伐), 오랫동안 나는 비사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경상북도 상주를 사벌(沙伐)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한자로 짐작하여 알 수 있었다. 사벌은 곧 낙동강 주변의 모랫벌이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벌(沙伐)과 음가는 비슷하지만 한자의 의미가 다른 비사벌(比斯伐)의 지명은 무엇일까? 그 의문의 체증이 오늘에야 비로서 풀렸던 것이다.
빛, 그랬다. 비사벌의 비사는 다름 아닌 빛의 의미였다. 비사벌은 곧 비ㅅ벌이요. 빗벌은 곧 빛벌이었던 것이다. 빛고을 광주(光州)와 유사한 표현의 아름다운 두 글자의 이름이었다.
우리네의 이름 짓는 습성은 두 글자이다. 사람의 이름도 두 글자, 나라의 두 글자, 산 이름도 두 글자, 강 이름도 두 글자이다. 영희와 철수가 그렇고 고려와 조선이 그렇고 백두와 한라가 그렇고 압록과 낙동이 그렇다. 이로 보아 비사벌로 표기한 가야 소국의 이름은 분명 빛벌이다.
최초 불사국으로도 불렸던 비사벌에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그것은 수기(水氣)가 많은 비사벌의 기운을 화기(火氣)로 누르는 행사였다. 비사벌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늪지, 우포늪이 있어 수기가 드세었다. 부지런히 농사 지어 배불리 먹고 북 두드리며 살기 좋은 땅이었지만 때때로 수기가 넘쳐 장마의 피해가 컸다. 수기와 화기는 서로 상극이기에 마땅히 조화를 이루어야만 했다. 여기에 화왕산이 그 몫을 감당하여 주었다.
가야국 비사벌에서는 화왕산에 금빛 억새풀을 심어 가꾸었다. 그리고 음력 윤달이 드는 해의 정월 대보름날에 화왕산 억새밭에 꽃불을 놓았다. 그 불빛은 수기가 넘치는 비사벌의 너른 들을 화기로 가득 채웠다. 음양의 자연스런 조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선조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삼국사기에는 가야 6국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가라(고령), 다라(합천), 안라(함안), 비사벌(창녕), 녹국(경산), 남가라(김해)에 비정된다. 이외 일본서기에는 가야 7국으로 탁순(거제?)이 포함되기도 한다.
11시 10분경, 산악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송현동 고분군을 먼저 살펴보았다. 외형으로는 신라의 고분과 유사하나 규모가 작다. 그러나 규모가 작다고 하여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라의 고분도 후기에 들어서면 왕릉의 규모가 초가집 한 채 크기로 작아진다. 대체로 큰 규모의 왕릉이 초기의 것이고 작은 규모의 왕릉이 후기의 것이다. 경주 낭산에 위치한 선덕여왕의 묘소도 초가집처럼 작은 규모이다. 왕릉 축조에 동원되어 고생하는 백성들의 부역을 줄이기 위한 통치자의 따뜻한 배려였던 것이다.
가야 고분이 신라 고분과 크게 다른 것은 내부의 현실이었다. 신라의 고분이 목곽위에 알천의 냇돌을 주워다가 쌓고 흙을 덮어 축조한 것인데 반하여 비사벌의 고분은 장방형의 석실위에 흙을 쌓아 축조한 것이다. 현실의 벽면을 크고 작은 돌덩이로 담을 쌓고 천장은 커다란 판석(板石)을 덮은 형태이다. 목곽 위에 냇돌을 켜켜이 쌓아 도굴을 막고 그 위에 흙을 산처럼 쌓아 권위를 세운 신라 고분은 권력적이다. 이에 반하여 석실 위에 흙을 쌓아 따뜻한 느낌의 동산을 만든 비사벌 고분은 평화적이다.
1918년, 화왕산 서남쪽 교동리에 위치한 대형 고분군은 일본인에 의해 그 일부가 발굴 조사되었다. 일본인에 의해 발굴된 유물은 대부분 일본으로 옮겨가고 일부만 국내에 남아있다. 당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봉황 무늬가 장식된 금관을 비롯하여 철제의 무구, 토기 등의 유물이 대량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이 남긴 발굴 조사 보고서가 형편 없어서 고분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치밀한 계획에 의한 발굴이 아니라 엉성한 계획에 의한 도굴이었기 때문이다.
송현리 왕릉급 고분 두 기는 지금 막 발굴을 끝내고 복원하는 중이었다. 현장을 지키는 소장의 말을 들으니 봉토의 흙을 며칠 사이에 복원하여 쌓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한 켜의 흙을 넣고 비를 맞추어 다지고 또 한 켜의 흙을 덮고 비를 맞추며 다져야 봉분이 꺼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서야 묘역의 봉토를 다질 때에 ‘어허 달고’ 하던 달고질이 퍼뜩 생각났다. 모름지기 한 분야의 전문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며 고분 또한 한두 달로 복원되는 것이 아니다.
송현리 산언덕에는 목마산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목마산성은 병마로 쓸 말을 가두어 두던 곳일 것이다. 냇가 건너에 자리잡은 마을의 이름은 말흘리였다. 말흘리는 병마로 쓸 말을 기르는 목장이었을 것이다.
말을 기르던 목장이었을 말흘리의 이름이 언뜻 독특하다. 그러나 이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다. 말흘리는 말골이라는 지명인 것이다. 입으로 가만히 발음해보면 말고을의 음가는 정확히 말고흘이다. 이는 고구려식 발음이다. 고구려는 순수한 우리말 지명의 이름을 홀(忽)로 표기하였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수도 홀본(忽本,졸본), 황해도 해주의 내미홀(內彌忽,물안골), 강원도 안변의 비열홀(比列忽,별고을), 경기도 인천의 미추홀(彌鄒忽,물새골), 충청도 음성의 잉홀(仍忽,냇골) 등이 그것이다. 이 외에 창녕 지방의 고분에서는 가야의 유물이 아닌 고구려식 갑옷과 고구려식 토기도 더러 발굴된다.
이런 자료와 유물로 추정하여 보면 5세기 초기 가야 제국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AD 396년 고구려 광개토왕은 가야와 신라 토경에 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보병과 기병 5만군을 파병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가야는 수십 년간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였다고 보여진다. 집안현에 세워진 광개토왕 훈적비문에 등장하는 임나(任那)의 명칭이 바로 그것이다.
비사벌 가야의 유물을 살펴보려면 창녕박물관에 들려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행보는 화왕산 등산이기에 서둘러 일행을 따라 발길을 돌렀다.
12시 20분경, 화왕산 정상에 이르렀다. 산의 지형을 보니 화왕산은 화산으로 생성된 산이었다. 그러므로 화왕산 정상은 커다란 대접 형태의 분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화산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분화구의 모습이다. 이 분화구는 지금 드넓은 초원을 이루고 있다. 약 5만 6천여 평의 황금빛 억새밭이 있어 사시사철 많은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분화구가 있었을 자리에는 3개의 연못 자리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창녕군에서 말끔히 복원하였는데 연못의 가장 자리는 돌로 축대를 쌓은 장방형의 모습이다. 이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화왕산성 내에 비축한 물탱크로 보인다.
연못과 관련하여 오래된 창녕 조(曺)씨의 득성비가 있다. 이곳에서 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曺繼龍)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창녕 조씨의 탄생 설화와 득성 유래는 다음과 같다.
AD 529년 경,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의 일이다. 경주 이씨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집에 예향(禮香)이라는 예쁜 딸이 있었다. 미모가 뛰어 나고 예의범절이 반듯하여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를 자주하였다. 나라의 명의를 찾아 병을 고치려 하였지만 백약이 무효하여 온 집안 식구들이 근심 걱정이 컸다. 하루는 어떤 선인이 와서 이르기를 비사벌에는 화왕산이 있고 그 산 정상에는 신성스런 연못이 있어 예로부터 영험하다고 하였다. 그 연못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성심으로 기도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광옥은 선인의 말을 믿고 길일을 잡아 화왕산 연못으로 예향을 데려가 목욕하고 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하루는 예향이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도를 하는데 별안간 앞을 가릴 수 없는 안개가 자욱하여 오고갈 길을 잃었다. 얼마 후 안개가 걷히고 정신을 차려보니 예향이 연못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비사벌 화왕산에서 돌아온 예향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는데 그때부터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용모가 수려하고 총명하였는데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뚜렷이 쓰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향의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화왕산 연못에 사는 용의 아들로 옥결(玉訣)이라 한다. 그 대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다. 아이를 잘 기르면 장차 공후나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로 번창할 것이다.
예향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고하니 한림학사 이광옥 또한 진평왕에게 아뢰었다. 진평왕이 이야기를 듣고 아이의 겨드랑이에 쓰인 조(曺)자로 성을 하사하고, 용의 씨를 받았다 하여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지어 내리니 이 분이 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曺繼龍)이다.
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은 장성하여 진평왕의 부마가 되었다. 또한 태사의 벼슬에 올라 왕실의 스승이 되었으며 창성부원군에 봉해졌다. 한번은 왜구가 동래에 쳐들어와 태사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들어가니 왜인들은 ‘조공(曺公)은 천인(天人)이시다’고 하면서 스스로 물러갔다 한다.
이 이야기는 설화이기에 앞서 역사적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은 진흥왕 순수비로 불리는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 근거한다. AD 561년 진흥왕 22년, 가야의 소국 비사벌은 신라 제 24대 진흥왕에 의해 신라에 복속되었다. 창녕읍 교상리에 있는 창녕 진흥왕 척경비는 국보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비석의 높이는 162㎝, 너비 174㎝, 두께 30~51㎝의 크기이다. 화강암을 다듬어 해서체의 글자를 새긴 것으로 글자의 크기는 고르지 않으나 대체로 4㎝를 넘지 않는다. 총 27행으로 각 행에 18~27자씩 모두 643자로 밝혀진다. 창녕 진흥왕 순수비에는 왕이 창녕 행차 시에 모인 신하들을 열거한 수가인명(隨駕人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갈문왕 대등(大等) 등 중앙 귀족들을 비롯하여 영역 확보를 위한 전진기지의 군사령관인 사방군주(四方軍主), 당주(幢主), 촌주(村主) 등이 관직명이 나타나고 있다.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 따르면 창녕 조씨의 탄생 설화는 신라가 비사벌(非火加耶)을 신라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하였음을 시사한다. 신라의 귀족 이광옥의 딸을 비사벌왕의 아들 옥결에게 시집보내어 비사벌 왕가의 세손을 이을 장자를 얻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성을 하사하여 창녕 조씨의 시조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를 높이 등용하여 신라의 관직을 주고 왕실의 스승으로 삼아 신라인으로 살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석성으로 구축된 화왕산성은 분화구로 일컬어지는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 졌다. 화왕산성을 따라 억새밭을 한 바퀴 돌면 좋다. 화왕산성 서문으로 오르는 환장고개 능선의 바깥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흐드러지게 핀 절벽의 진달래꽃이 압권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기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기에 더욱 아름답다.
사적 64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왕산성은 봄에는 분홍빛 진달래, 여름에는 푸른 초원, 가을에는 황금빛 억새물결, 겨울에는 억새에 내린 설경으로 유명하다. 특히 봄에 피는 진달래 군락은 수십만 평에 이르는 금빛 억새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1시 10분경, 화왕산 억새밭의 명물이라는 배바위에 올랐다. 아마도 이곳은 천신이나 산신께 제사를 지내던 성소였을 듯 싶다. 본래 가야 제국이 낙동강을 근거로 한 해양 국가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배바위 정상에는 알처럼 둥근 두 개의 굼(홈)이 형성되어 있다. 주위를 살펴보니 하얀 실타래로 묶은 북어포가 눈에 띈다. 어떤 목적으로 고사를 지낸 흔적이다.
1시 20분 경, 화왕산성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음력 윤달이 드는 해의 정월 대보름에 억새를 태우는 행사를 하는 때문인지 성벽의 돌이 붉은 빛을 띤다. 마치 불 맞은 돌빛이다.
1시 30분경, 드라마 허준 세트장에 이르렀다. 허준 드라마 세트장 맞은편의 진달래 군락이 장관이다. 마치 붉은 카펫을 펼쳐 놓은 듯하다. 진달래 군락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 등산객으로 드라마 세트장 부근은 야단법석이다.
2시 30분경, 관룡산 정상에 이르렀다. 이어 용선대 석불에 이르니 한 무리의 불자들이 찬불가를 부르고 있다. 나침반을 꺼내어 방위를 살펴보니 용선대 석불은 정확히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인 모양이다.
3시경, 관룡사에 이르렀다. 관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의 사찰로 사적에 의하면 AD 349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도를 드릴 때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 9마리의 용이 화왕산에서 승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은 관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관룡사를 감사 안은 두 산의 이름은 관룡산과 구룡산이다. AD 1401년, 태종 1년, 관룡사에 대웅전을 창건했으며 AD 1617년 광해군 9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영운스님이 재건했다. 사찰에는 보물 제212호인 대웅전, 보물 제146호인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295호인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龍船臺石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제519호인 석불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3층 석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있다.
사찰을 돌아 나오는데 노점을 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회향과 감초를 넣어 다린 회향차를 종이컵에 따라 주며 맛보기를 권한다. 회향초를 한 되를 1만원에 팔고 있다. 회향은 따뜻한 성질의 약재로 위를 따뜻하고 튼튼히 하며 기를 잘 통하게 하여 각종 통증을 없애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만성위염이나 위산과다, 소화기 질환, 복부 수술 후 배에 가스가 차는 경우에 활용한다고 한다. 또한 회향은 신체 하초 부위를 따뜻하게 해 주어 배꼽 주위와 하복부가 당기고 아픈 병증, 냉복통, 요통, 하지의 통증, 신허 요통 등에도 흔히 활용된다고 한다. 감초와 회향을 섞어 달인 회향차의 맛을 보니 단맛에 박하향이 감돈다.
3시 30분 경, 수제비와 머릿고기를 새참으로 먹었다. 도야지 머릿고기가 먼저 나왔다. 캐러반님이 구해온 취나물에 머릿고기를 한 점 싸서 입에 넣어 보니 참취의 향기가 입에 가득하다. 이어 여타 회원이 구해온 씀바귀 머릿고기를 싸서 일행과 나누어 먹었다.
오후 4시 30분, 군립공원 화왕산을 떠나 귀경길에 올랐다. 대구 부근에서 갑자기 차량이 늘어 길이 막힌다. 귀경길이 막히자 회원들의 지루함을 달래고자 김대장이 마이크를 잡고 나섰다. 명창 강희봉 산우를 회원들에게 소개한다. 강명창은 17세에 입문하여 안비취선생의 문하생으로 다년 간 피나는 수련을 거쳐 득음하였다. 마땅히 무대를 세우고 장구 장단에 추임새를 넣으며 들어야 제격이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다. 강명창과 절친한 사이인 김대장은 막무가내로 명창의 창을 듣자고 고집한다.
강명창의 창이 이어졌다. 경기민요 태평가, 강원도 정선 아리랑, 충청도 천안 삼거리에 이어 오돌똑이, 신고산 타령, 창부타령이 청아한 고음으로 쏟아져 나온다. 박수에 박수를 더하여 삼십분이 넘도록 이어진다. 수만 평의 억새밭과 흐드러진 진달래 밭에서 술 한 잔 권하면서 들어야 할 창을 버스 안에서 듣는다. 산행에서 접하기 어려운 모처럼의 흥겨운 시간이다. 다음 산행에 올 때에는 명창에게 감사드릴 향기로운 술과 맛난 안주를 가져와야 하겠다.
첫댓글 임 선생님의 산행 후기 감칠맛나고 정겹읍니다.또한 역사에 대해 많은 도움이 돼는군요...아울러 부족한 저에 대한 과찬 너무 송구스럽읍니다.산행 후기 항상 잘 읽고 있읍니다.많이 올려주세요.감사합니다.
해박한 지식 언제나 공짜로 넣어갑니다.^^*
빛벌과 우포늪과 화왕산..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