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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물의 도시 베네치아여행을 마치고 베로나시로 이동하였다.
이제까지는 이탈리아 반도를 종단 하면서 동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알프스 산맥을 오른쪽에 두고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기후도 해양성 기후 보다는 대륙성기후에 가까워져서 차가운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하였으며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듯 온몸이 나른하고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베로나시는 베네치아에서 2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시를 빠져나온 버스는 A4번 도로로 진입하여 시원하게 서진하고 있었다.
끝없이 들이 펼쳐진 가운데 평화스러운 농촌 풍경은 어느 농촌 지역 풍경과도 흡사 하였으나 터키 코냐시에서 안탈야로 이동하고 있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나 가슴이 흥분되기 시작하였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터키를 횡단 하며 남하 하였던 대상(隊商)이 생각났다.
대상(隊商)이란 사막이나 초원같은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 낙타나 말의 등에 짐을 싣고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며 지역주민과 특산물을 교역 하였던 상인을 말한다.
베로나시 아디제강
이러한 대상(隊商)을 프랑스어로 카라반(caravane)이라 한다
이들은 밤이면 사막이나 초원에서 야숙을 하거나 카라반사라이에서 며칠동안 묵곤하였다.
카라반사라이는 중세때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지방의 실크로드나 오아시스 주변에 산재한 카라반의 숙소다.
카라반사라이는 단순히 카라반이 휴식을 취하고 떠나는 장소가 아니라, 인근의 카라반이 서로 만나 문물을 교환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곳기기도 하였다.
당시 실크로드나 오아시스를 소유한 국가는 카라반에게 세금을 징수하기 위하여 교역 장소를 활성화시키고 숙소를 화려하게 꾸며놓기도 하였다.
카란반을 유혹하기 위해서였다.
카라반사라이는 지나가는 카라반에게 식량과 물을 공급하는 휴식 공간이어서 대부분 간소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규모가 큰 구조물도 있었다.
카라반이 끝없이 펼쳐진 길을 걷다보면 피로가 누적되어 사막이나 초원에서 야숙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럴때면 가끔 소지한 재물을 도둑에게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
도적을 만나면 약소한 물건을 주어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더 안전한 곳은 카라반사라이였다.
자신이 소지한 재물을 도난 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불안한 신변을 보호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터키 코냐시에서 안탈야로 가는 길은 무덥고 지루하여 카라반에게 마의 실크로드라할 수 있었다.
카프리 섬 이태리일주 9일 여행이 점점 종반으로 치닫고 있어서 터키 코냐시에서 안탈야로 이동할할 때처럼 여행이 지루하고 피곤하였다.
어느덧 파도바 시 안내판이 보였다.
그러나 파도바 시를 관통하지 않고 우회한 탓에 파도바 시를 관망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농촌 풍경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전개되고 있었는데 나의 마음을 설래게 하였다.
농촌이 평화스럽고 마음을 포근하게 했기때문이다.
베네치아 물의 도시에서 출발한지 채 시간 반이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도 속이 허전하였다.
아레나
이탈리아 음식이라 하면 흔히 피자나 파스타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보니 피자나 파스타가 이탈리아의 주식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오였다.
이탈리아의 음식은 안티파스토, 프리모 피아토, 세콘도 피아토, 돌체, 카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파스타는 식사 전에 먹는 첫째 접시, 즉 프리모 피아토에 속하였다.
아무리 대식가로 알려진 이탈리아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모든 사람이 안티파스토로 시작하여 카페까지 한 끼에 모두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안티파스토나 프리모 피아토 또는 세콘도 피아토 중에서 한 가지 정도는 건너뛰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다보면 파스타는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파스타 외에 리소토나 미네스트라 같은 것들도 모두 프리모 피아토에 속했기 때문에 프리모 피아토를 먹는다고 해서 늘 파스타만 먹는다고 할 수 없었다.
카프리 섬 이탈리아 일주여행 9일동안 한차례도 빼놓지 않은 음식이 파스타였다.
보기만 해도 지겨웠다.
베로나시 마치니 거리 야경
태양이 머리 위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사시간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식당을 찾아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식당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스페인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의 고향 풍차마을과 비슷하였다.
마을의 중앙에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아름다운 정원수가 빼곡 하게 들어서 있는 곳에 식당이 위치하고 있어서 목가 적이고 평화롭게 보였다.
이러한 시골에 식당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으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로 식당안은 가득하였다.
와인 한잔에 취해가며 파스타를 먹었던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음이 넉넉해진 기분으로 식당을 나선 후 다시 A4번 도로를 타고 베네토주 베로나시로 이동하였다.
이탈리아 동∙북부 내륙에 위치하고 있는 베로나시는 소박하면서도 중세풍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베로나시가 가르다 호와 가까운 아디제 강의 환상 선에 있는 지리학적 위치 때문에, 때로는 범람하여 경제적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리-토르볼레 터널이 건설되면서 홍수의 위험이 감소되어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즐리엣 생가
베로나시는 이탈리아 북부 레시니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아디제 강이 ’S’ 자 모양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버스가 주차장에 정차하자 아디제 강을 감상하며 시내로 걸어갔다.
구 도시를 감싸고 있는 높은 성이 절벽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서 독일의 성곽이 연상되었다.
성벽 옆으로 개통된 도로를 따라 걸어 갔는데 중간에 성이 끊기고 구도심으로 진입하는 도로가 신설되어 있었다.
지금은 모든 차량이 구 도시로 진입하고 있었으나 예전에는 성문이 있어 잠겨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오른쪽을 바라보니 베로나시의 랜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 아레나가 있었다.
로마시에서 보았던 원형경기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로마 시의 원형경기장에 비해 규모는 작았으나 아담하고 깔끔한 아름다움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예술이었다.
이 원형 경기장은 서기 1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베로나시는 도시 구조와 건축 면에서 이전 시대 최고의 예술적 요소들을 통합하여 2,000년에 걸쳐 꾸준히 진화해 온 도시였다.
유럽 역사에서 여러 시기를 거치면서 발달한 요새 도시의 예술적 가치를 독특하게 발현하고 있었다.
도심은 로마시대의 도시가 들어서 있었으며, 강이 고리 모양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이곳 베로나시는 스칼리제르 가문과 연관되어 있다.
스칼리제르 가문이 성곽을 쌓고,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광활한 지역을 아우르게 되었다.
베로나시의 도심은 그림 같은 채소 시장이 있는 에르베 광장과 시뇨리 광장, 코무네 궁전, 고베르노 궁전, 로지아 델 콘실리오, 스칼라 가문의 영묘, 그리고 도무스 노바(Domus Nova) 등 역사적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탈리아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베로나시는 로마 시대의 유적이 가장 풍부한 도시 중 하나다.
유적들 중에서 보르사리 문은 데쿠마누스 막시무스(직선대로)의 시작점에 있고, 레오니 문은 반만 남아서 뒤편 건물과 붙어 있다.
가비 아치는 나폴레옹 시대에 해체되었다가 1930년대에 카스텔베키오 옆에 복원되었으며, 돌다리인 폰테 피에트라도 있다.
로마의 극장은 19세기 중반에 발굴되어 공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복원 되었으나, 아레나는 로마의 콜로세움 다음으로 큰 원형 경기장이다.
로마네스크 시대(8~12세기)에는 발레에 있는 성조바니 교회가 옛 건물의 폐허 위에 지어졌다.
내부에는 3개의 통로가 있으며, 로마네스크 시대 이전의 지하실이 있다.
성 로렌조 교회의 벽면들은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1층은 응회암으로, 2층은 응회암과 벽돌이 혼합되어 있다.
입구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현관이 있다.
산 페르모 교회는 8세기의 이전 성당의 유적지 위에 응회암과 벽돌로 지어졌다.
무덤은 외부에 있고, 교회에는 작은 아치와 높은 창문, 많은 계단,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현관이 있다.
두오모 성당은 16세기에 처음 건립 되었으나 지진이 일어난 뒤 12세기에 복원되었다.
14세기에 완공된 건물 정면은 베로나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여러 종류의 신성한 이야기와 세속적인 이야기들을 얕은 돋을 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이중 콜로네이드의 회랑이 멋진 12세기의 수녀원도 있다.
스칼리제르 가문이 통치하던 시기(13~14세기)에, 도미니카 인들이 산아나스타시아 교회를 건립 하였는데, 그 건물의 정면은 완성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아름다운 가르다호 수에서
아르체 스칼리제르는 스칼리제르 가문의 영묘로서 시뇨리 광장 가까이 있다.
카스텔 베키오는 스칼리제르 가문의 요새화된 저택이며, 캉그란데 2세 시대에 이전의 방어 시설 위에 세워졌다.
‘줄리엣의 집’은 작은 중세의 궁이며,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영감을 받아 1930년대에 발코니를 더했다.
‘로미오의 집’은 중세의 복합건물로서 후대에 상당히 많이 변형되어 원래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베로나의 중심에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오는 건물이 매우 많았다.
산티 나자로에 첼소 교회, 산타 마리아 교회, 산 조르조 교회, 산 토마소 교회, 산 베르나르디노 교회, 산 에우페미아 교회가 있다.
카노사, 폼페이, 베빌락쿠아, 포르타 팔리오의 문, 포르타 누오바, 포르타 산 제노, 그 외에도 주교의 저택, 주스티 정원과 저택이 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시대의 유명한 건물들로는 카스텔 산 피에트로와 카세르마 산타 마르타가 있다.
초기 주민들은 베로나 지역 산비탈의 요새화된 마을 카스텔리에리(Castellieri)에 살았다.
베로나라는 명칭은 ‘루트 베르(방어벽)’와 관련이 있으므로, 강가의 요새 지역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일찍이 기원전 6세기나 5세기에 이곳에는 고대의 교통로가 교차하였다.
이 교통로의 한쪽은 에트루리아 인의 주거지가 있는 아드리아 해 쪽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한쪽은 강을 따라 발포리첼라 포도밭과 아래쪽의 트렌티노 방향으로 나 있었으며, 세 번째 방향은 가르다와 브레시아의 번창한 시살피네 영토와 연결된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 도로이다.
B∙C 148부터 ~ B∙C 147년 무렵에 비아 포스투미아가 건설되어 서쪽으로는 제노바와 롬바르드, 그리고 동쪽으로는 오데르조와 아퀼레이아로 가는 길이 열렸다.
로마의 정착촌 건설은 공화정 시대 말,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포스투미아 거리의 자취를 따라 데쿠마누스 막시무스와 동쪽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카르도 막시무스가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그리드 플랜(격자 모양)으로 건설되었으며, 포르타 레오니와 포르타 로바라는 2개의 문이 달린 방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도시는 곧 중요성이 커지고 부유해져 원형 경기장과 로마의 극장, 돌로 만든 다리 폰테 피에트라를 포함한 여러 공공 건물들이 건설되었다.
최근의 발굴 작업에 의해 장식된 대리석 포장 도로와 수준 높은 건축물, 기념품 등 상당수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서기 256년에 북쪽 이방인들과 충돌이 거세지면서 갈리에누스 황제가 원형 경기장을 포함하여 공화국의 방어벽을 더 멀리까지 짓기로 결정하였다.
이 도시는 여러 번에 걸쳐 침략에 저항 하였으나 다른 도시들은 거의 파괴되었다.
로마시대 말 베로나가 동고트의 두 번째 이탈리아 왕국 도시가 되면서 테오도리코 1세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다.
이어 567년까지 고트족, 774년까지 롬바르드, 1000년 무렵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몇 세기 동안, 베로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유명한 건축물을 많이 건설하였다.
권위자들 가운데, 라테리오 주교(벨기에 출신)를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데, 그는 이 도시의 도해를 마련 하였으나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도해에도 도시 배치는 로마의 그리드 플랜(격자 모양)을 따랐다.
북부 이탈리아의 독립 자치체였던 당시 베로나는 연속되는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 요새를 다시 지어야만 했다.
스칼리제르 가문(1259~1387)이 시뇨리아로 들어와 도시의 발전이 유리 해졌는데, 도시는 이미 확대되어 북서부의 베네치아 영토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스칼리제르 가문의 캉그란데 1세는 도시의 성벽을 더 확장하고, 장기간의 포위 에도 저항할 수 있도록 도시 방어를 재편성 하기로 결정하였다.
방어력이 튼튼해진 베로나는 뒤이어 베네치아 시대와 오스트리아 시대에도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 결정은 도시계획에도 영향을 미쳐 건설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규모 성당과 행정 건물들이 들어섰다. 1387년에는 밀라노의 잔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잠시 베로나를 정복하여, 도시의 남부에 요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성벽을 건설하였다.
시르미오네 스칼리제르 성의 화려함
1405년부터 1797년까지 베로나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유하고 활기찬 지역이었다.
16세기 초에 있었던 충돌을 제외하면 평화로운 시기였다.
베네치아인들은 베로나의 군대를 건축가 미켈레 산미첼리에게 맡겨 중세의 요새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그는 다각형의 요새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한 것 외에도 건축사에서 의미가 깊은 3개의 문을 만들었다.
이 문들은 공동체의 성벽과 더 남쪽으로 스칼리제르 가문의 성벽 사이에 있는 지역의 도시 발전을 원활하게 하였다.
베네치아인들은 군사적인 이유로 이 한계 너머까지 도시를 확대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 금지령은 오스트리아 제국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그 때문에 모든 개발이 성벽 안에서만 이루어져 통일성이 있었던 것이다.
베네치아 시대에 이 도시는 특히 경제적 자율성이 높았으며, 이는 행정과 문화에도 반영되었다.
부유한 가문의 명성 높은 대 저택이 많은 것은 물론 종교 건물과 공공건물이 아주 많은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시기에 베로나시는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였다.
라데츠키 장군과 그의 장교 건축가인 프란츠 본 숄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카스텔베키오의 중세 시대 다리 옆의 무기고를 비롯하여 대규모 군사시설을 도시 안에 건설하였다.
1866년에 오스트리아 인들이 이 도시를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겨주었을 때, 인구가 65,000명이었으나 산업은 거의 없었다.
이로써 도시는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으며, 1882년 엄청난 홍수로 더욱 악화되었다.
강이 약 8m까지 차올라 수많은 건물과 제분소, 제재소가 홍수에 휩쓸려 내려갔다.
2개의 주요 다리가 파괴 되었으나, 오래된 다리는 강물의 힘을 견뎌 냈다.
이때부터 도시 개발에 변화가 생겼다.
도시의 군사적 역할은 끝이 나고, 개발은 성벽 밖으로까지 확대되어 새로운 지역이 건설되었다.
또한 산업 발전이 시작되어 1927년에는 인구가 15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도시 계획을 위한 최초의 설계 경기가 1931년~1932년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전쟁에 휩쓸린 이 도시는 모든 다리를 포함하여, 건물의 약 40%가 파괴되었다.
이후 오랜 기간 재건과 복구가 이어졌는데, 베로나의 건축 총감독인 피에로 가졸라와 국제기념물유적협회의 창립 회장, 베네치아 헌장의 발기인과 주요 저자 중의 한 사람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그제와 어제 이틀간은 긴 여정 이어서 피로가 누적되어 저녁을 먹은 후 곧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은 이탈리아 체류 마지막 일정이어서 힘이 솟았다.
마지막 일정을 소화시키기 위하여 시르미오네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안개가 자욱하였다.
따뜻한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만나 안개로 변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으나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11월과 12월이 이탈리아에서 우기인 데도 비가 지금까지 내리지 않고 화창한 날씨가 지속된 것은 근래에 볼 수 없었던 이상 현상이라고 하였다.
버스는 가르다 호수를 뒤에 두고 시르미오네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었다.
가르다 호수는 호수 라기보다는 바다처럼 넓어보였다.
이탈리아 북부와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으로 부터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이탈리아 북부 내륙에 고이기 시작하여 커다란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가르다 호수였다.
그 가르다 호수 중심에 경치가 아름답고 수려한 섬이 있었는데 시르미오네였다.
버스가 주차장에 정차하자 일행은 곧바로 시르미오네의 스칼리제르 성으로 이동하였다.
스칼리제르 성은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서 구축한 작은 규모의 성이었다.
육지에서 섬에 위치한 스칼리제르 성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하였다.
그 다리는 외적의 침입이 있거나 위험에 직면 했을 때 줄을 들어올려 적의 침입을 차단시킬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성곽 둘레는 대략 10m 이상 넓이의 해자가 있어서 2중으로 스칼리제르 성을 육지의 침략자로 부터 격리시켜주고 있었다.
이 스칼리제르 성은 영주가 거쳐하는 중세시대 건물 이었다.
성곽의 규모가 작기는 하였으나 옥상에 적진을 향하여 겨눌 수 있는 총구가 있었고 성곽이 높아 사방을 감시할 수 있었다.
시르미오네에 있는 스칼리제르 성
베르나는 여러 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한때 그리스 알렉산더대왕의 침략을 받아 지배를 받다가 게르만족인 고트족과 롬바르족의 침략을 받았다.이후 나폴레옹의 공격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적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전쟁을 겪었던 베르나는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였다.
그래서 자연이 방어망이 될 수 있는 가르다 호수 중앙에 천연의 요새인 스칼리제르 성을 구축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시르미오네는 본래 가르다호수 위에 솟아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칼리제르 성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하얀 지붕을 가진 집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섬 둘레에 산책로가 개통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둘레 길을 산책해 보려하였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단념하고 말았다.
가르다 호수는 마죠레 호수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 3대 호수 중의 하나였다.
그 호수 위에 그림처럼 떠있는 마을은 광장과 마을 공동체 공간도 있었다.
마을에서 버려지는 오물이나 쓰레기가 호수에 떠다닐 법도 하였으나 휴지 한조각 발견할 수 없었다.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호수 속은 투명하고 깨끗하였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화려하고 수려한 가르다 호수 위에 달이 반사되어 마치 물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돌아서서 산책로를 걷고 있었는데 백조 한 마리가 우아하게 발갈퀴를 움직이며 우리 일행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모든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민들의 청결에 대한 헌신과 노력이 일상사였기 때문이다.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매년 여름철이면 많은 인파들이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모여든다는 말을 듣고 과연 빈말이 아닐듯 싶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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