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몰살직전에서 살아 남아 산전수전 다 겪고 몽골족을 대통합하고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하고 자식들에게 4한국으로 땅을 분배해 준 징기즈 칸(한=간=안) 테무진(어머니 알랑고아가 코리족=고구려)은 자식들에게 말했다. "성을 쌓고 안주하면 망한다. 부디 유목민의 전통을 잊지마라."쿠빌라이는 중원을 지배하고 원나라 황제로 있으면서도 잠은 궁궐안에 만들어진 유목민천막에서 잤다고 한다. 그러나, 쿠빌라이 이후에 원나라는 내부분열로 명나라에게 망했다. 원나라의 가혹한 정치, 무능한 황실, 세금을 올렸고 여진족,한족,색목인에게 사람다운 정치를 펼치지 못하여 한족,홍건적에게 멸망된다. 즉, 원의 멸망은 원나라 황실 자체의 약화와 지나친 민족차별에 반발한 한족의 봉기가 겹친 결과라 할 수 있다.
원 황실 약화의 원인은 원 황실이 사치와 라마교에 지나치게 탐닉하면서 대규모 사찰의 건축과 화려한 법회 등으로 국고를 탕진하면서 심각한 제정적 타격으로 국가의 혼란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는 곧 황실의 영향력 약화와 군비의 약화로 이어졌고 비어 가는 국고를 채우기 위한 지나친 착취는 피지배 민족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이것은 테무진 가치관은 전혀 맞지 않는 내용으로 멸망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려 공민왕의 장인이 되는 바얀이라는 자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가 국정을 소월히 하는 틈을 타 전권을 쥐고 상식이하의 타민족 차별주의와 몽골제일주의로 나가면서 결국 한족봉기를 부추겨 원나라가 망하고 초원으로 쫓겨나게 된 것이다.
당시 원나라는 유럽에서 흑사병이 도져 몽골군대가 엄청난 타격을 입고 퇴각하는 상황이여서 원나라는 한족봉기를 막아낼 군사력도 부재한 상황이기도 했다. 현재 빚더미에 오른 미국이 대북포용노선보다는 쓸데없는 패권주의를 내세워 북한을 코너와 위기로 몰 경우 결국 북한은 중국에 붙게 되는 것은 물론이요, 미국은 북한에게 얻어 터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는 이치와 동일하다 하겠다.
또한 몽골인들이 중원지역에 들어와서 통치를 하다가 이문화 저문화를 접하다 보니 본래의 문화를 잃어버렸다. 그러다보니 거대한 원나라 제국은 내부분열을 일으켰고 원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되어 원나라는 다시 산산조각 수백개 나라로 다시 흩어져 버리고 만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게 바로 문화의 힘이다.
중요한 건 개인이든 나라이든 가치관을 부와 재물을 쌓아 두는데 보다는 부와 재물을 나누고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의 복지가 실현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나눔과 섬김에 두고 찰떡처럼 뭉쳐 살도록 통치자와 지도층부터 일신 우일신하는 전통을 대대로 자식들이나 후손들에게 남겨줘야 오래가는 법이다. 징기즈칸이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의 참뜻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들은 책이나 성인들에게나 그런 소리를 듣지 정작 자신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처럼 생각하며 탐욕을 따라 살다 죽는 자들이 허다하다. 자료:원나라의 멸망원인
원의 멸망은 원 황실 자체의 약화와 지나친 민족차별에 반발한 한족의 봉기가 겹친 결과라 할 수 있다.
원 황실 약화의 원인은
첫째로, 원 황실이 사치와 라마교에 지나치게 탐닉하면서 대규모 사찰의 건축과 화려한 법회 등으로 국고를 탕진하면서 심각한 제정적 타격으로 국가의 혼란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는 곧 황실의 영향력 약화와 군비의 약화로 이어졌고 비어가는 국고를 채우기 위한 지나친 착취는 피지배 민족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둘째로, 최근의 일부 연구에 따르자면 몽고의 유럽정벌 당시에 유럽에 창궐하고 있던 흑사병이 쿠빌라이의 사망으로 정벌군이 회군하면서 정벌군과 함께 병원균이 몽고지역으로 들어왔고 이후 이 지역의 토착질병화 되어 서서히 몽고인들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지속적으로 원의 군사적 중심지였던 이 지역의 인구를 줄임으로서 원의 군사력을 격감시켰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의 영향력과 군사적 저력이 점차 약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극도의 민족차별 정책과 경제적 수탈은 피지배 민족의 반발을 야기하여 각지에서 한족의 반란군이 봉기하였는데 이것이 원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한족 봉기의 도화선을 당긴 사람이 원말의 권신인 바얀이라는 사람이다.
바얀은 원말에 위왕의 직위에 있으면서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가 정사에 소홀한 틈을 타 원의 전권을 장악한 사람으로 극도의 몽고인 제일주의자였으며 상식을 넘어선 민족차별주의자 였다.
그는 우리 역사와도 관련이 많은 사람인데 유명한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아버지가 바로 이 사람이다. 한 때 인기를 끌었던 사극인 신돈을 보면 미약과 여색으로 황제를 조종하는 기황후에 대항하여 몽고의 정신을 지키고자하는 충신으로 그려지는데 실제상황은 그와는 전혀 상이했다.
사극안에서의 그는 몽고의 초원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의 바얀은 초원으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중원을 초원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렇잖아도 몽고인제일주의로 민족차별이 심했던 원에서 바얀이 집권하면서 이민족 특히 한족에 대한 차별은 거의 광기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달아 간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몽골족만이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물론이요. 한족이 몽골 문자나 아랍 문자를 읽고 배우는 것, 특정한 색깔의 옷을 입는 것, 장수(長壽)나 복(福)과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것 등을 금지하는 많은 법령들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장(張)·왕(王)·유(柳)·이(李)·조(趙) 등의 성을 가진 모든 한족을 처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성들은 가장 보편적인 중국인의 성씨이므로 이 법령이 시행되었다면 90% 이상의 중국인들이 처형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 마지막 법령은 채택되지 않았으나 곳곳에서 반란이 계속 일어났다.
사정이 이에 이르렀다면 한족들로서는 이미 단순히 민족의 해방이나 오랑캐로 부터 나라를 되찾자는 수준이 아니라 생존이 달린 문제가 되었으니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지경이었고 반란군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결사항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당시 그와 대립하고 있던 기황후 일파에 의해 바얀이 축출 당하면서 그의 광기도 막을 내렸지만 그때에는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바얀을 축출하고 원의 전권을 장악한 기황후는 자정원을 장악하여 황실의 자금을 통제하고 측근들을 동원하여 권신들을 견제하며 무능한 황제를 대신하여 무너져가는 제국을 제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 때 세계제국이라 불리웠던 원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다음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10년만 일찍 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면 원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몽고의 몰락은 역사의 대세였고, 고려인에다 별다른 외척세력도 없었던 그녀가 몽고인제일주의로 가득찬 원에서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며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여성이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황후가 집권했을 때 즈음에는 이미 중국 남부는 주원장이나 장사성 진우량 등의 반란군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다시피 한 상황이었고 결국 반란군을 통일한 주원장에 의해서 수도인 대도가 점령당함으로서 원은 중원에서 ?겨나 몽고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
출처: 한국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무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