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말기부터 관리들의 축재와 부정부패함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청나라는 1780년대부터 영국 동인도 회사와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광둥 무역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 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 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당시의 영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상류계급 간에 퍼져, 차, 도자기, 비단을 대량으로 청나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에서 청나라로 수출되는 것은 시계, 망원경과 같은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물품은 있었으나, 대량으로 수출가능한 제품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영국의 대폭적인 수입초과였다.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의 전비 조달과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축적으로 인해, 은(銀)의 국외유출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런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공행(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양행 상인들의 조직)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였고 외국상인의 무역을 제한했다. 무역 확대를 위해 광둥 무역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교섭에 실패한 영국 상인들이 이때 생각해낸 무역 적자 해소 방법이 아편 무역이었다.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나라에 밀수출하여 무역 적자를 상쇄하고, 삼각무역을 정립하게 되었다. 영국 상인들은 육체 노동으로 지친 중국의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아편장사를 했고, 아편은 19세기 중국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청나라에서는 이미 1796년 (가경제 원년)에 아편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금지령은 19세기에 들어서서도 여러번 발령되었으나, 아편 밀수입은 그치지 않고, 또한 국내산 아편 단속도 효과가 없었으며, 청나라에서 아편 흡입의 악폐가 널리 펴져, 건강을 해치는 자가 많아지고, 풍기도 퇴폐스러워졌다. 모든 계층에 퍼져 나간 아편 흡입 풍조로 청나라에서는 부패와 전투 능력 상실, 국가 기강 해이, 농촌 경제 파탄, 재정 타격 같은 폐단이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아편이 중국에 정식으로 수입되기 전에, 주로 밀수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분명한 통계를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략 1800년경에는 4,570상자, 1817년부터 12,375상자, 1826년 19,386상자, 1830년대는 매년 33,906상자, 1837년 44,637상자, 1839년 50,350상자로 늘어났다. 또한 아편의 수입대금을 은으로 결재하였으므로 이 동안 중국에 수입된 아편으로 유출된 은의 양은 대략 6억 냥 정도로 추정한다. 아편의 수입량 증가로 인하여 무역수지는 역전되고, 청나라의 은 보유고가 격감하여 은과 동전의 교환 비율이 1:800에서 1:1,500~2,100에 이를 정도로 은값의 급등을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은의 유출은 지정은제를 위협했다. 결국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1839년 3월 이에 청나라의 황제 도광제(재위: 1820년 ~ 1850년)는 '아편엄금론'을 주장한 임칙서를 광둥 성으로 보내게 된다. 흠차(欽差) 대신 임칙서는 외국인 상관(상점)을 봉쇄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1839년 6월 3일 임칙서는 23일에 걸쳐 영국 무역 감독관이 거두어 보낸 외국 상인들의 아편 20,000 상자를 모두 녹여버리는 등 철저히 아편 단속을 했고, 마약상들은 당시 자그마한 섬이었던 홍콩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자, 영국 산업 자본가들은 '청나라가 무역의 자유를 침해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했다.'고 비난하며 영국정부와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이에 영국정부는 1839년 10월 원정군 파견을 결정하였는데, 이로써 '제1차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주룽 사건
1839년 음력 4월 청군이 아편상자를 압수한 이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정부에서 원정군을 파견할 무렵인 6월 말 청나라의 주룽(九龍)에서 술에 취한 영국인 수부들과 청나라인이 충돌해 청나라인 1명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청나라인 1명이 사망했는데 영국 측이 범인 인도를 거부하자, 임칙서가 마카오를 봉쇄해버린 《주룽 사건》(Kowloon incident)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양국 간 무장충돌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개
1839년 11월 3일 파견한 원정군이 마카오에 도착하면서 무장충돌이 시작되었다. 임칙서의 무역 거부 응답을 구실로 영국은 전쟁을 시작하고, 청국 함대를 궤멸시켰다. 1840년 6월에 본격화되었다.
1840년 11월 청군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군에 대패하였고, 영국군은 다구 지역까지 북상하여 직예 지역 총독 기선과 협상하였고, 다시 남하해 촨비 지역에서 조약 체결을 강요하며 홍콩을 강점했다. 궁지에 몰린 청나라 조정에서는 임칙서를 면직시키고 협상을 기선에게 맡겼지만, 홍콩 할양을 받아 들일 수는 없었다. 조약 비준을 준수하지도 않고, 영국군이 홍콩을 '영국 영토'라고 선포하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기선을 파직시키고 험형에 처하였고 다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1841년 1월 7일 후먼 전투에서 관천배가 분전을 하였지만,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그해 5월, 광저우에 상륙한 영국군은 약탈과 폭행 사건을 일으켜 민중들의 분노를 샀다. 민중들이 봉기하여 영국군을 막아섰고 영국군은 전멸 위기에 처하지만, 청나라 정부에 포위 해제를 요구해 탈출에 성공하게 되는 삼원리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근현대사에서 최초의 '더러운 전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제1차 아편 전쟁 에서 패한 청나라는 당사자인 영국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사 기영(耆英), 이리포(伊里布)가 당시 난징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에서 영국의 전권대사 포틴저와 맺은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양국은 평화, 친목을 유지하며 상호간 재산·생명의 보호를 받는다.
-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는 대등한 자격으로 교섭을 한다.
- 홍콩 섬을 영국에 할양한다.
-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다섯 개 항구를 개항한다.
- 개항장에 영국인 가족의 거주를 허가하고, 영사(領事)를 설치한다. (조계를 허용한다.)
- 전비배상금(戰費賠償金)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 행상(行商) 즉,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또한 공행이 영국상인들에게 진 빚에 대한 보상금으로 300만 달러를 지불한다.
-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율은 양국이 협의하여 결정한다.
난징조약으로 인해 홍콩 섬을 할양하고, 중국은 문호(門戶)를 강제로 개방할 수밖에 없었고, 톈진, 상하이에 조계를 허용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열강의 반(半)식민지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서양 열강은 중국에 대한 조계제도를 성립시켜 1844년에 미국도 왕샤조약(望厦條約)을, 프랑스도 황푸조약을 각각 체결했다.
영국의 이러한 오만한 정책과 난징조약을 개정 요구를 하면서까지 더 거센 개방정책은 필수적으로 1857년 제2차 아편 전쟁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국은 1856년 10월 8일 애로호 사건을 유발하여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킨다. 이렇게하여 맺은 톈진 조약은 중국의 조계지를 반식민지화시켜, 빈사 상태에 빠진 중국을 완전히 침묵시킨다.
이러한 서양 열강들의 작태는 일본에게도 모범이 되어 일본도 1876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제1차 아편 전쟁이 끝난 1843년 상하이

1856년 발발한 제2차 아편 전쟁, 일명 애로호 전쟁은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청나라의 개방이 기대에 못 미치자 영국이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광대한 영토를 가진 청나라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영국의 무역은 생각만큼 확대되지 못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면포는 영국의 주력 수출품인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에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 게다가 제1차 아편 전쟁으로 광둥을 중심으로 대영(對英) 항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영국은 중국인 소유의 영국 해적선 애로호를 빌미로 한 애로호 사건을 일으켰다.
영국은 프랑스와 구성한 연합군으로 광저우를 침략하여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고, 이와 동시에 러시아군도 청나라 영토로 진격했다. 연합군은 톈진을 점령하여 불평등 조약인 톈진 조약을 맺었다. 톈진조약은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개항 항구를 확대하며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청나라는 이때 기독교 공인도 약속해야 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텐진조약 체결 후에도 청나라의 후속 조치가 미진하자 진격을 계속해 1859년에 수도 베이징 근처까지 이르렀고, 1860년에는 대천황의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였다. 결국 베이징 함락 후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1860년 홍콩


1860년 구룡 반도의 영국군 주둔지

광주 총독부










당시 강제 동원된 청군



북경에 진주한 프랑스 군








당시 북경 시가지


파괴돤 원명원


공친왕
베이징 조약(북경조약, 중국어: 北京條約 B?ij?ng Ti?oy?e[*])은 아편 전쟁의 결과로, 1860년 10월 18일에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6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영국에 주룽(현재의 홍콩 중심부)을 내주었고, 러시아는 중재자라는 이름으로 숟가락을 들고 참석하여 조선땅인 연해주를 지들 멋대로 넘겨주었다.
1860년 10월 18일, 청나라와 제2차 아편 전쟁을 치른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천단, 이화원, 원명원 등 베이징 주요 문화재와 주변을 약탈하고, 베이징의 자금성에 입성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공친왕을 대표로 내세워 영국 대표인 엘진 경과 프랑스 대표인 그로스 남작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또, 교전 당사자가 아니었던 러시아까지 조약을 중재했다는 핑계로 조약 당사자로 끼어들었다.
영불연합군은 유럽인 죄수들에게 청나라 관원들이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구실로 자금성을 방화할 계획이었는데(애로호 사건 참조), 조약체결 후 그 대신 이화원과 원명원을 불살랐다.
이 조약은 1860년 10월 24일에 자금성의 남쪽 건물에서 마무리되었다. 조약은 중국-영국, 중국-프랑스, 중국-러시아 간 조약의 형식으로 각각 맺어졌다.

조약내용
영국과 러시아는 위의 조건 외에 개별적으로 청나라와 조약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