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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밭간다
믿음은 내가 뿌리는 씨 지혜(智慧)는 내가 밭을가는 보습(쟁기)
나는 몸에서[신(身)] 입에서[구(口) 마음에서[의(意)]
나날이 나쁜업(業)을 제어(制御)하나니[나쁜일을 하지않고 착한일을 쌓아 나가는 것)
이것은 내가 밭에서 김을 매는 것(잡초를 뽑는 것)
내가 몰고 가는 소{우(牛)는 정진(精進)이니
가고 돌아섬이 없고 행(行)함이 없이
이리 밭갈고 저리 밭갈고
감로(甘露)의 씨를 뿌린다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는 내가 가고자 히는 삶을 되 돌릴수 있다면 멋진 인생을 설계할 수 있겠는데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잠 못이루는 나날이 많아졌다 젊은날에는 모두가 무지개 꿈을 꾸고 희망에 부풀었을 것이다 차츰 그것이 헛된 꿈어 되어 버렸다는 것이 현실화 되면서 어려운 삶의 현실에 눈을 뜨면서 끊임없이 삶의 궤도를 수정 하다보니 지금의 5,60대는 모두가 삶에 굴곡도 많았고 애환의 변화속에 어느새 나도 모르게 황혼녁에 다달았나 보다
나는현재 좌반신이 마비 되어 장애 3급을 받고 경주장애인 복지관에서 재활운동을 하고 있스나 건강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글을 쓰고 있다
나는 1952(임진생 호적:1953)년에 충남 아산시 배방읍 구령리 1구 357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님은 내가 기억이 흐릿한 5세때에 위장병으로 타계하시고 농사일을 하시는 어머님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6남매(4남 2녀의3남임)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 4세때로 기억된다 나보다 3세 위의 작은형님이 계셨는데 흐릿한 기억으로는 작은형은 소아마비를 앓고 난후로 다리를 저는 장애인 이었다 형님은 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내가 4살 때 인지 5살때인지 기억이 흐릿 하지만 태풍으로 비가 많이 와서 지방하천 (곡교천)의 제방이 터져서 낮은 지대에 있는 우리 마을 거의가 침수되어 집안으로 뻘건 황토물에 침수되어 마을에서 침수가 안된 높은 지역으로 피난을 가야했다 장마가 물러간 후 마을에는 침수 되었던 가옥이 무너진 곳이 많이 있었다 그 장마의 여파로 작은형은 놀라서 장마가 물러간 후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 겨울에 아버님께서도 위장병(위궤양)으로 타계하셨다 그 당시 큰 형님은(나와 12세 차이가 났음)고교를 졸업후 누님은 중학교를 졸업후 가사 일을 돌보고 있었스며 아버님의 유언에 따라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에 진학을 하였다 대학을 졸업후 형님은 인근의 둔포중학교에 체육 교사로 교직생활을 하고 있었스며 지금은 퇴임후 학교이사로 재직중이시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흘러 갔스나 나도 어머님의 가사일을 돌보며 중,고교를 졸업후 대학을 진학하려 하였스나 가사 사정이 매우 어려운 시기라 고교 졸업후 조그마한 화학공장의 보일러 업무를 3년여를 다녀 보았스나 특별한 기술과 자격도 없어서 공장을 사직하고 자형의 도움을 받아 고향 근교의 천안시에 있는 전문대학이 새로 개교하여 야간학부 전기과에 입학하여 군복무 3년여를 마치고 학교를 졸업 하였다 재학시 전기기사 2급(지금의 산업기사)을 취득 하였스며 또 재학중에 체신 공무원 5급(지금의 9급 공무원) 통신기술직 공무원을 시험을 치루어 합격을 하여 대전에 있는 체신부 연수원에서 통신 교환기 기술을 4주 교육후 충북 진천의 전신 전화국에 임용되어 3개월을 근무하다 전공이 아니어서 사직을 하고 경북 경주에 있는 특급 호텔인 KOLON 호텔의 전기기사로 취업 했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 영원한 반려자인 현재의 아내인 이상은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후 여건이 어려워 아내는 고향인 시골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농사일을 거들며 한동안 떨어져 지내고 나는 회사인 호텔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여건이 맞지를 않아 1년 6월을 근무 하다가 동국대학교 경주 분교로기능직인 전기 기사로 취업하면서 아내와 경주 인왕동 교육청(현재는 인교 동사무소)옆에서 단칸 샥월세를 얻어 신혼살이를 하였는데 결혼전에 태어난 3살짜리 딸아이(아름)와 한참 재롱을 떨면서 출근 시간이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빠를 울며 부르며 쫓아 나왔는데 그 아이가 다음해 무더위가 시작되는 초여름 6월 어느날 셋집 바깥 마당 공터에서 퇴근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셋집 바깥마당에서 이웃집 아이들끼리 재미있게 놀다가 후진하는 타이탄 트럭에 받혀서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날은 일찍 퇴근을 했지만 날씨가 무더워져서 선풍기를 사가지고 오다 한참 배우기 시작한 당구에 빠져 초저녁인 8시경에 들어 갔는데 딸아이는 엄마가 목욕을 시켜주자 마자 곧바로 퇴근하는 아빠가 보고싶다며 바깥 마당에서 아이들끼리 재미있게 놀다 참변을 당했다 그리고 딸 아이를 화장하여 산에 뿌려주고 인왕동에서 더 이상 살수가 없어서 대학교 근처인 형산강 건너 성건동으로 이사를 와서 현재의 큰애 아들과 작은애 딸 남매를 연령생으로 낳았다 그리고 교직원들과 조합을 구성하여 현재 살고있는 20세대용 20평짜리 동국아파트를 동천동에 1986년도에 건립하여 현재까지살아 오고있다 대학교에서 10여년 근무를 하다가 동국대학교 의료원이 개원하면서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경주병원에 개원팀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를 하였다 개원시 대학교의 기능직에서 의료원의 사무원으로 직종을 전환하여 근무를 했는데 개원시에 병원 건물 시공업체인 우성건설이 부도가 나서 건물공사 마무리가 덜 된 상태였스며 감독을 맡았던 직원들도 사직을 하거나 학교로 복귀한 상태여서 건물이 한동안 텅 빈 상태로 비어 있어서 신축 건물이 폐허가 되다 시피 되었다 그로 인해 개원이 안되어 공사 감독을 담당하였던 직원도 개원이 지연 되니까 신분에 불안을 느껴서 사직을 하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하는 바람에 신축한 건물이었지만 병원건물이 준공도 못하고 1년이 지난후에 개원을 하려니 엉망 진창이 되어 그런 와중에 여름이 닥쳐 보수공사 업체를 찾아 보수를 하는중에 여름에 태풍까지 불어 닥치고 많은 장마비로 강건너 성건동 일대가 침수되어 개원도 못한 병원 건물로 피난까지 오고 개원을 준비하던 포항,안강의 직원들이 퇴근을 해야 하는데 엄청난 장마비로 도로가 침수되고 끊겨서 개원을 해야하는 건물에 피난민들의 임시 대피소가 되었스며 폐허가 되어 있었다 부도가 난 우성건설의 분야별 시공 담당자를 찾아내어 미비 된 곳을 완료하여 겨우 건물 준공검사를 끝낸후 병원 개설 허가를 받아 부분적으로 개원 하였다 개원후에 엄청난 가뭄으로 식수가 끊겨서 시 수도과와 상수원을 찾아다니며 소방서에 비상급수 협조요청을 하여 소방차로 비상급수를 하여 겨우 입원환자와 의료진들의 식사를 공급하느라 비상 급수용 지하수를 찾아 암반 관정을 뚫고 준비 하느라 퇴근후는 뒤늦게 밀린 문서 처리와 결재서류 작성 정리를 하느라 퇴근 생각도 못하고 병원에서 날밤을 새우다 새벽녁에 잠깐 집에 들어가 세면과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달려와 업무를 하다 보니 10여년 후에 22개과의 진료부서와 500병상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신설 대학의 종합병원 였지만 초창기에는 병원 업무를 제대로 아는 이가 없어서 다른 병원에 의뢰하여 업무 협조를 구하고 의료진과 교직원을 신규 채용하면서 개원 하였스며 또한 지역 실정에 맞게 진료공간과 규모를 확대 하면서 개원후 10여년까지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하지 못하고 휴일도 쉬지 않고 일하다가 과로하여 심장 마비로 1997년 9월 교직원 산악 회원과 산햏후 귀가 시에 차량 내에서 심장마비로 쓸어 졌으나 함께 산행했던 동료인 이윤경 간호사의 헌신적인 응급 구조로 살아나 연세 의료원 심혈관 병원에서 RCD(심장 전기 충격소생기)를 왼편 심장 부위에 삽입 수술후 계속 인사과 계장으로 근무를 하였스나 그 당시 인사과 상사인 김 성철 국장(과장)과의 아무런 이유도 잘못 없이 미움으로 인사계장이면서 업무를 받지 못하고 바닷가 하계 수련장에 3개월이나 파견을 나가야 했스며 결국에는 대학교에서 파견 나오신 안중옥 국장에게 얘기를 하여 총무과 총무계장으로내려와서 근무를 하는데 그자리에도 잠시 안정되나 했는데 안국장님이 대학교로 복귀하자 심장 부정맥 환자라는 이유를 붙여 보직 박탈과 의료원의 기능직 근무지인 전기실로 쫓겨 났다가 당시 조재호 의료원장님의 퇴임시 보직 변경을 기획관리실장이었던 배성한(일반외과)실장(훗날 포항병원)에게 명을 의뢰 했스나 김성철 국장에게 미움을 받아 끝내 이뤄지지 못하였다 그분은 국장이라기엔 그릇이 너무 작았다 그러기에 정식으로 국장이 되었다기 보다 의료원장의 후배라는 연줄을 이용해 국장으로 발탁이 되었기에 따라 주는이가 적어서 나를 자기편으로 하려다 안되니까 심장 부정맥 환자라는 이유를 붙여 총무계장 보직을 떼어 놓고 전기실로 좌천 시켜 버렸다 그리고 또 노조에 가입 할까봐 사전에 노조 위원장과도 없는 게략을 만들어 놨었다 훗날 알았지만 인사과에서 좌천(左遷) 시킬 때 안식구 한테 인사계장 재직시에 노조문제로 고심하여 노조를 와해 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안식구를 불러다가 내용의 탄원서를 만들어 서명까지 받아놓은 글월을 받아놔 훗날 노조에 가입하려 위원장을 갔는데 그 서명된 탄원서를 노조 위원장이 보여줘 내가 인사계장 재직시에 노조를 없애야 한다는 안식구의 자필 글월을 내보이며 노조에도 가입을 못하게 하는 분이였다 총장,이사장의 공로패와 표창도 모두 필요 없었스며 파벌과 세력싸움만이 존재하여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김성철 국장의 정년퇴임 무렵인 2005년 2월에 진료공간 확대 공사라는 퇴근후의 병원 업무중에 좌반신이 마비되어 쓰러졌스나 1년간 휴직을 하였다가 복직을 신청 하였스나 장애인이라 복직이 불가하다는 통보와 함께 면직(복직을 안시키고 퇴직처리의 일종)처리 되어 결국엔 사직을 하고 말았스며 또한 업무중에 일어난 사고 였스나 법정에서 승소 하여만 보상을 받기 때문에 사립학교 교직원 연금공단과 소송을 제기하였스나 증인으로 세웠던 전기실의 기능직원인 최희영이 재직시에 진급을 시켜 주지를 않았다고 지방 법원에서 위증(거짓증언)을 하여 패소하여 고법 대법원까지 갔지만 정치욕과 젯밥에만 눈이 벌개진 경주의 정중범 변호사로 인해 고법,대법원까지 갔스나 승소할 수있는 송사였지만 동료직원의 거짓증언에 패소로 상대했던 연금 공단의 변호사 수임료와 송사 비용을 배상해 주어야 했다 혹 떼려다 혹을 더 하나 붙이고 말았다 업무중에 발생한 좌반신 마비 장애 3급을 보상 받으려다 2,000여만원의 송사 비용(변호사수임료, 법정 송사비 패소로 인한 연금공단 비용포함])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결국엔 병원에서 그간 각종 치료비와 진료비로 채무 변제로 인하여 선대로 상속받은 부동산까지 내놨지만 경기 불황까지 겹쳐 처리가 되지를 않아 채무만 늘어가고 있는 실정에 처해 있다. 그 당시에 똑같은 뇌경색으로 좌반신이 마비되어 같은 한방병원 병실에 입원했던 포항에 삼성 S.D.I 직원 이상준씨는 일찍 지방 법원에서 승소하여 보상을 연금으로 받고 있어서 가능성이 있스리라 해서 나도 대법원까지 갔스나 정치욕에만 욕심많은 경주의 정 중범 변호사를 잘못 만나 안식구는 그의 국회의원 선거 운동에 뛰어 들었스나 선거에만 신경 쓰느라 4~5배의 비싼 수임료만 챙기는 그로 인하여 송사에 패소하고 재산만 날려 버렸다 모두가 내탓이고 게으르고 욕심많은 전기실의 최희영 직원을 현재 문을 닫고 폐업한 동국대학교 포항병원으로 보내려 하는것을 못가게 당시에 인사과장이었던 김성윤과장을 찾아가 최희영을 포항병원으로 절대 보내면 안된다고 강력하게 되돌려 놓는 바람에 김성철 국장의 미움을 받아서 나는 보직(총무과 총무계장)을 박탈 당하고 기능직원 근무지인 전기실로 쫓겨났다 그리고 나는 퇴근후의 병원 일을 하다가 나는 좌반신이 마비되어 업무중 사고로 인한 송사를 대법원까지 하였스나 증인으로세운 전기실의 최모직원의 직원의 허위 증언으로 대법원까지 상고하였스나 패소하여 정년도 못 채우고 채무(송사비와 기타 심장진료 수술비 약값)에 허덕이며 백수인 아들을 대학도 졸업도 못 시킨채 미약한 심장약을 삼키며 좌반신이 마비 된채로 오늘도 희망없는 2010년 경인년의을보내고 있스며 죄없는 아내만 고생 시키며 경주 장애인 종합복지관 운동실에서 재활 운동을 하며 죄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행이 딸은 서울의 모병원의 간호사로 근무중이며 아들은 지인의 도움으로 경주시 한수원(한국수력 원자력공사 )에서 교육중이며 정직원으로 임용 되었스면 바램이다 아울러 못난 장애인인 저의 글을 읽어주신 모든 님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세요..고은내 조규옥 손모음
글쓴이 : 조규옥(고은내)
주소:경북경주시동천동826-3동국@303호 이동전화 : 018-505-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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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지난 2010.10.12(화) 경북 장애인 종합 예술제에서 문학부문에서 특선으로 수상한것을 수정 하였스며 글속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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