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도보여행의 주제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강화도 일대 유적지를 답사하는 일입니다.
강화도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단군시대의 유적인 참성단과 삼랑성,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될 당시의 초기 사찰인 전등사, 그리고 몽고침입 시 39년간 고려의 수도로서 항쟁의 중심이었인 강화성과 불교문화의 결정체인 팔만대장경, 조선시대 정묘 · 병자호란 이후 국가환란을 대비하기 위하여 쌓은 5진 7보 9포대 53돈대, 개화기시대 열강들과의 갈등의 현장인 초지진, 광성보 등 한국사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사건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발로 읽을 수 있는 역사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화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넓이는 약 300만평방킬미터에 이릅니다. 경주시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면적입니다. 그러나 경주 시내 동 면적보다는 약간 큽니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합니다. 강화군은 강화도 외에도 교동도, 석모도, 불음도 등의 주위 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구는 6만 5천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경주의 26만명에 비하면 많은 편은 아닙니다.
↑강화도는 원래부터 지금과 같은 섬 모양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고려 때 수도를 강화로 옮기고 난 후부터 끊임없는 간척사업을 통하여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의 하구가 만나는 곳으로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진 흙들이 해변에 쌓여 있어 간척을 하면 좋은 농토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섬이지만 농사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많았습니다.
첫날 우리는 경주에서 오전 7시에 풍류마당을 출발하여 오후 1시쯤에 숙소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하고 바로 강화읍내에 있는 철종의 잠저 용흥궁부터 둘러봅니다.
용흥궁,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문학관, 고려궁지와 외규장각 등을 답사하고 강화산성 북문인 진송루에 올라서 강화읍내를 내려다 보고 성 밖으로 나가 오읍약수터를 거쳐 연미정에 이르면 하루 일정이 끝이 납니다.
(지도를 클릭하여 강화도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개성과 개풍군, 김포시와 인천 영종도, 그리고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위치를 확인하여 보세요.)
↑우선 우리가 5박 6일 동안 묵을 보금자리입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본 펜션의 모습입니다.
↑저기 앉아 있는 분이 주인 할머니입니다.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설득하여 겨우 얻은 숙소입니다.
↑집 앞의 잔디. 잘 다음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뛰고 뒹굴고 마음놓고 놀아도 됩니다.
↑펜션의 뒷모습니다. 2층의 베란다에서는 바베큐를 즐길 수 있도록 설비되어 있습니다. 앞쪽 베란다도 넓어서 국화저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야외 쉼터. 방안에 갑갑한 사람은 여기에 모기장만 하나 치면 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낼 수가 있습니다.
↑지킴이 진돗개. 역시 족보(?)가 있어서 그런지 의젓합니다.
↑후원입니다. 주인이 직접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고 합니다.
↑그 옆의 텃밭. 잘만 이야기하면 싱싱한 푸성귀를 그냥(?)먹을 수도 있습니다.
↑할머니 성격이 보통 깔끔한 것이 아닙니다. 밭에 잡초 한 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펜션 마당에서 내려다본 국화저수지.바라보고만 있어도 시원합니다. 여기에 짐을 내려놓고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오후부터 답사 일정을 시작합니다.
↑국화저수지의 야경. 이곳은 시민들의 산책 장소로 저수지 주위에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불이 켜져 있어서 밤에 걷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기가 첫 답사지입니다. 선원 김상용선생의 순절비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선생은 당시 판돈녕부사(동녕부는 종친부에 속하지 않는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판돈녕부사는 종 1품의 관직입니다.)로 왕실의 종묘, 세자빈와 원손 등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으나 강화성이 청군에 의하여 뚫리자 강화산성 남문 위에 화약을 쌓고 불을 붙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동생은 당시 예조판서인 김상헌으로 주전파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김상헌은 나중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도와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로 압송되어 4년 동안 억류되었다가 돌아옵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이 1639년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가면서 부른 시조입니다.
김상헌의 자손은 후에 13명의 재상과 수십명의 판서, 그리고 3명의 왕비를 배출합니다. 순조비 순원왕후, 헌종비 효헌왕후, 철종비 철인왕후가 모두 안동 김씨입니다. 이중 순원왕후는 강화도에 유배되어 온 이원범을 데려다가 왕위에 올립니다. 이이가 강화도령 철종입니다.
↑안을 보면 비가 두 기가 서 있습니다. 왼쪽 비가 원래의 비로 1700년(숙종 2년) 후손 김창흡과 김창집이 세웠습니다. 후에 비가 마모되어 1817년(순조17년) 다시 세운 것이 오른편 비입니다. 다시 세우면서 원래의 비는 그 자리에 묻었는데 1976년 강화국방유적정화사업 때 신비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구비를 발견하여 같이 세웠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자리는 병자호란 때 성이 함락되자 피난하지 못한 많은 사대부와 관리들이 죽음을 당한 곳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 강화 지도를 보면 이 자리에 종각이 있었습니다. 그후 고려 궁궐지가 복원이 되어 종각은 지금의 강화부종각으로 이전하고 이자리에 순의비가 세워졌습니다.
↑순의비 뒤로 돌아가면 커다란 붉은 굴뚝이 하나 서 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강화에서 유명한 심도직물의 굴뚝 윗부분입니다.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 까지 강화도 섬유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습니다. 2005년 폐업 후에 공장이 철거되고 용흥궁공원이 조성되면서 이 자리에 그 당시를 기억할 수 있도록 굴뚝을 세워놓았습니다. 당시 심도직물은 종업원이 1,200명 이상으로 규모가 꽤 큰 회사였습니다. 지금도 심도직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심도직물이 강화 사람 먹여살렸다'고 합니다.
↑그 맞은편에 '카톨릭 노동사목의 시작'이라는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 비 역시 심도직물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심도직물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철야 작업으로 인하여 절반 이상이 위장병을 앓고 있었고, 발에는 무좀이 사라질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톨릭노동청년회(JOC)가 조직되어 1965년 이곳에 노동조합을 설립하여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회사측에서는 합법적으로 설립된 이 조합을 와해시키려고 1967년 이들 조합원들을 해고시킵니다. 그러자 천주교 인천교구와 카톨릭노동청년회 등에서 진상 조사를 하고 부당해고를 철회하도록 여론을 조성합니다. 이때 카톨릭노동청년회 총재가 김수환추기경이었습니다. 결국 회사는 해고노동자들을 복직시킵니다. 이때부터 카톨릭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심도직물의 유래'에 심도 직물에 대한 내역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지금 용흥궁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이 바로 심도직물이 있던 자리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이 구정(毬庭)이지 않았겠나하고 추정을 합니다. 구정은 고려궁 안에 있는 격구경기장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말을 타고 하는 공놀이의 일종인 격구가 아주 유행이었습니다. 고려사에 강화도 천도 후 최우가 이곳에서 대규모 경기를 열어서 군신들이 함께 즐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용흥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용흥궁은 철종의 잠저입니다. 잠저란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합니다. 적통이 아닌 왕자가 살다가 후에 왕이 되는 경우 그 살던 집을 일컫는 말입니다. 철종의 휘(이름)는 원범입니다. 할아버지는 은언군으로 정조의 이복동생입니다. 즉 사도세자의 아들(서자)입니다. 은언군은 정조 때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로 유배 오게 됩니다.
↑솟을 대문 윗부분에 '龍興宮(용흥궁)이라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용은 왕을 상징하는 말이니 용흥궁이란 '용이 일어난 곳'정도로 해석이 됩니다. 즉 용이 이곳에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잠룡) 때가 되어 세상을 향하여 몸을 일으킨(용흥)곳이란 뜻입니다.
사도세자는 네 아들을 두었습니다. 정조와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입니다. 은신군은 제주도 유배시 16세의 나이로 죽고 은전군은 홍계희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18세에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두 동생들은 20세 전에 죽고 은언군만 살아 남은 셈입니다.
효심이 강했던 정조는 자신의 이복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왕의 반대편에서는 정순황후와 노론들이 사도세자의 혈육을 죽이기 위하여 필사적이었습니다. 정조는 궁궐의 문을 잠그고 단식을 하면서까지 은언군을 보호하였습니다. 결국 정순왕후를 비롯한 노론들은 정조 생전에 은언군을 강화도에 유배보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습니다.
↑솟을대문 옆에는 행랑채가 늘어서 있습니다. 그러나 소박하지만 이것도 궁이어서 외전이라고 부릅니다. 용흥궁은 사대부들의 집을 본떠서 지었습니다.
정조가 마흔 아홉의 나이로 죽자 숨을 죽이고 있었던 정순왕후는 순조의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면서 제일성으로 교지를 내려 천주교를 금합니다. 그리고 천주교를 빌미삼아 정조의 개혁정치를 뒤엎고 정조가 등용한 신하들은 모조리 제거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형제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으며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합니다.
은언군도 이 천주교 금지령을 피하여 갈 수 없었습니다. 은언군의 부인과 첫째며느리가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처형이 되고 은언군은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용흥궁 안채. 내전이라고 부릅니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섬돌을 놓아 대청마루로 올라가기 쉽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차모임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철종의 아버지는 은언군의 셋째 아들입니다.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은 노론의 압박으로 의문의 죽음을 택하였고(음독자살), 둘째 아들 풍계군은 후사가 없이 죽은 은언군의 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됩니다. 그리고 세째아들 전계대원군(철종의 아버지)은 역시 천주교 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어 빈농으로 살아갑니다. 전계대원군은 1841년(순조1년) 강화에서 57세의 나이로 타계합니다.
↑남쪽 행랑채. 기단이 없이 바로 땅에다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안채와 마주보고 있습니다.
철종은 1831년 7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전계대원군은 순조의 배려로 1830년에 강화도에서 방면되어 서울에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순조 역시 아버지 정조의 뜻을 이어 받아 할아버지(사도세자)의 자손들을 보호하는데 정성을 쏟습니다. 서울에 온 다음해에 철종이 탄생하고 평온한 삶이 지속되는가 했는데 남응중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철종이 여섯 살이 되던 해 1836년(헌종 2년) 강화도로 다시 유배되어 갑니다. 그리고 철종이 열한 살이 되던 해 그곳에서 타계합니다.
전계군이 사망하자 연좌에서 해제되어 가족들은 다시 서울로 와서 살게 되는데 3년 뒤인 1844년 철종의 큰형인 회평군 이원경이 역모에 연루되면서 또 교동을 유배되었다가 다시 곧바로 강화도로 이배됩니다. 철종이 열네 살 때의 일입니다. 이로부터 5년 뒤 1849년 철종은 열아홉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여기는 사랑채입니다. 별전이라고 합니다. ㄱ자 모양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누마루를 두었습니다. 전형적인 서울지방 양반 가택의 구조입니다.
헌종이 후사가 없이 23세의 나이로 죽자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는 친정인 안동 김씨와 결탁을 하여 이원범(철종)을 덕원군으로 봉하여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고 이어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람들이 강화도령이라고 부르며 비웃어서 나중에는 태형에 처하기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종 역시 안동 김씨의 세력에 눌러서 자신의 정치를 하지 못하고 재위 15년 후인 1964년(음력1963) 타계합니다. 물론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가 나서서 흥선대원군의 아들 이재황을 양자로 들여 임금에 세웁니다. 바로 고종입니다.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이 나서서 즉시 정권을 장악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단번에 끝냅니다.
↑사랑채(별전) 한 켠에 비각이 서 있습니다. 이 비각에 여기가 철종이 살았던 집이라는 것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라고 적혀 있습니다. 번역하면 '철종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옛터'정도가 됩니다. 용흥궁은 철종이 살던 집이 아니고 그 후에 지은 집이어서 실제 철종의 어린 시절 생활을 더듬어 보기는 어렵습니다.
↑용흥궁은 원래 초가집이고 규모가 초라한 집이었으나 철종 4년(1853년) 강호유수 정기세가 다시 지었습니다. 양반 가옥의 구조를 취하였다고는 하나 행랑채와 안채가 마주 보고 있으며, 사랑채는 오히려 안채를 지나서 있는 좀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기세의 아버지가 정원용이었으니 정씨 부자와 철종은 인연이 각별합니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원용은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에 철종을 모시러 갑니다. 그 과정이 경산일록에 아주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정원용은 약관에 등과하여 70여 년을 관직에 있었는데 매일 그날의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경산일록입니다.
철종을 호종하는 일이 인연이 되어서인지 정원용은 철종 재위 기간에만 네 번 영의정에 오릅니다.
↑성공회 강화성당. 1900년에 건립한 성당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성당이자 강화의 첫 교회입니다. 정문이 솟을대문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문 앞의 십자가 문양도 십자가와 전통적인 태극 문양이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주자창에서 본 강화성당. 옆으로 길게 늘어선 건물이 큰 배를 연상시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자'라는 의미에서 배처럼 기다랗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추녀마루에는 잡상이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과 기독교의 상징 양식을 절묘하게 조화시켰습니다. 이는 성공회가 신앙의 토착화와 민족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선교 원칙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당의 솟을대문 옆 행랑채의 홍살. 우리의 홍살과는 약간 형식이 다릅니다. 홍살은 붉은 화살이란 뜻으로 창살을 화살 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하는데 잡귀나 액을 쫓는 기능을 가집니다. 여기는 그냥 창살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화살의 촉처럼 뽀족한 살을 없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태극문양의 장식을 한 것입니다.
↑오른쪽 행랑에는 쟁기와 멍석이 있습니다. 둘 다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물건들입니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내삼문이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문이 있습니다. 출입하는 곳은 중앙 문이지만 형식은 삼문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당의 동종. 서양식 종과 달리 우리 동종과 닮았습니다. 강화성당 동종은 1914년에 제작하였지만 1945년 일제가 전쟁 물자로 공출해 가서 다시 찾지 못하였습니다. 후에 신도들이 힘을 합하여 다시 만들었습니다.
↑성당의 본당(예배당) 건물입니다. 보통 한옥은 가로가 긴데 이 건물은 세로가 깁니다. 기둥에 걸린 주련도 사찰이나 궁궐의 주련과 비슷합니다. 이 건물에 사용된 목재는 백두산에서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또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가 와서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성당의 내부. 내부도 목조로 되어 있습니다. 바실리카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바실리카라는 말은 원래 공공건물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나중에 이 말은 초기의 교회 양식이란 말로 사용이 됩니다. 안에 들어서면 큰 직사각형의 강당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건물 내부에 기둥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었습니다.
성공회가 강화에 포교을 시작한 것은 1893년입니다. 1890년 영국성공회의 존 코프(한국식 이름은 고요한) 주교가 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선교사업과 의료사업을 함께 하면서 그 다음해인 1891년 초최의 성공회 성당인 인천 내동교회를 건립합니다. 그러다가 1893년 당시 조선수군해방학교가 있던 강화의 갑곶나루터 근처에 집을 하나 얻어서 본격적으로 강화도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합니다. 교세가 커지자 땅을 매입하여 이 자리에 성당을 건립합니다. 1900년 11월 15일이었습니다. 이날 낙성식에 30여 명이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성당 뒤에는 사제관이 있습니다. 사제관 역시 전통적인 한옥입니다.
↑성당의 돌담. 아래는 인천에서 온 중국인 석공이 쌓았고 위의 돌담은 강화주민들이 쌓았다고 합니다.
↑성당을 돌아 주차장으로 나오면 고려궁지로 올라가는 오르막 초입에 강화문학관이 있습니다. 아래층은 강화문학관, 2층은 조경희수필문학관이 있습니다.
↑1층 강화문학관에는 강화의 문인들과 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강화문학파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2층에는 강화출신의 수필가이자 기자인 조경희선생의 유품을 전시한 조경희수필문학관입니다.
얼굴은 가지각색이다. 둥근 얼굴. 긴 얼굴. 하얀 얼굴. 누런 얼굴 다 각각 다르다. 얼굴은 바탕과 색깔이 다를뿐만이 아니라 얼굴을 구성하고 있는 눈. 코. 입, 어느 한 부분이나 똑같지가 않다. 이렇게 똑같지 않은 얼굴 중에서 종합적으로 잘 생긴 얼굴, 못 생긴 얼굴을 발견 할 수 있는 것과 생김새는 잘 생겼든 못 생겼든 인상이 좋고 나쁜 것이 표정의 초점을 이루는 것이다.
첫인상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이지만 자주 만날수록 그 우락부락한 모습은 깨끗이 사라지고 차차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핏 보아서 첫눈에 들었는데 두 번 세 번 볼수록 싫어지는 얼굴이 있다.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조경희 수필 '얼굴'
↑승평문. 고려 궁궐지이자 조선의 강화유수부로 올라가는 문입니다. 고려 고종 때에 몽고의 침략을 피하여 이곳에 궁궐을 축조할 때개성의 궁궐을 본따서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고려사에도 강도 궁궐의 정문(남문)이 승평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만 승평문이 이곳에 있었는지는 분명하기 않습니다. 고려궁은 지금의 강화유수부보다 훨씬 컸고 또 전각도 많았습니다. 또 고려궁지 위에도 조선행궁과 강화유수부를 지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위치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강화유수부의 동헌 명위헌(明威軒). 강화는 도성인 한양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어서 유수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유수부는 조선시대에 네 곳에 설치되었습니다. 강화, 광주(남한산성), 송도(개성), 수원 등에 유수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유수는 정2품 관직입니다.
↑1890년대의 강화유수부 전경. 지금처럼 명위당이 아니고 제승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제승(制勝)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지략으로 승리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제승당은 주로 군영의 최고 지휘관실이나 작전회의실에 붙이는 이름인데 동헌에 붙은 것으로 보아 강화유수의 책무 중에는 군사에 관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던지, 아니면 이 당시에 특별히 군사적인 사무를 통괄할 사건이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곳이 강화유수부가 아니고 진무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진무영은 조선 숙종 때 설치된 군영입니다. 진무영은 강화외성 개축이나 강화 해안선 방어 체제인 5진 7보 53돈대 구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영조 때 도성 사수론이 대두되면서 강화 진무영은 일시적으로 축소되지만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다시금 강화 해협 방어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확대 개편되고, 뒤이어 천주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과 처형이 시작됩니다. 병인양요를 천주교 신자와 외국 군대의 내통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병인양요가 발발한 지 2년이 지난 1668년 진무영에서도 네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됩니다.
↑명위당 내부. 강화유수가 가운데 앉아 있고 좌우로 별장과 이속이 서 있습니다.
↑이곳이 외규장각입니다. 정조 때 설치하여 왕실의 귀중한 문서를 보관하게 하였습니다. 병인양요때 갑곶돈대를 점령하고 이어 강화읍성을 점령한 프랑스군들이 정족산성에서 패전하자 이곳에 있는 왕실 도서 수천점을 도둑질하고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불태웠습니다.
↑규장각 내부 전시물. 규장각은 왕의 글씨나 문서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그 중에 왕실의 행사를 기록한 의궤는 그 보존 가치가 아주 높습니다.
↑위쪽 궁궐터에서 내려다 본 모습입니다. 오른쪽으로 동헌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규장각이 보입니다. 강화읍이 건너편 산이 남산입니다. 남산 능선으로 강화산성이 둘러져 있고 꼭대기에는 남장대가 있습니다.
↑원래는 여기는 고려 궁궐터입니다. 고종이 몽고의 침입을 피하여 이곳으로 천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종 때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궁궐 성곽을 무너뜨립니다. 점령지의 성을 피점령지 백성이 스스로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 몽골의 전략이었습니다. 심리적으로 항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강화행궁도. 조선시대에 들어 인조는 이곳에 행궁을 짓지만 병자호란 때 모두 불타고 맙니다. 그후 인조는 여기에 행궁을 다시 짓고 숙종은 장녕전과 만녕전을 건립하고 정조는 외규장각을 건립하는 등 많은 건물이 들어섭니다만 병인양요 때 또 모두 불타고 맙니다.
행궁이란 임금이 임시로 잠시 머물 수 있도록 지은 궁입니다. 별궁이라고도 합니다. 전시에 피란을 갈수 도 있고 혹은 능을 참배하면서 들를 수도 있고 또한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들른 곳이기도 합니다.
↑영·정조 시대 만들어진 강화부도. 이 지도를 보면 지금 강화부 동헌이 있는 명위헌 자리는 실제로는 강화객사 자리가 됩니다. 종각이 상아 자리로 갔고 종각 자리에 김상용선생순의비가 들어 서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아 자리에 강화부종각이 있습니다..
↑강화부동종. 보물 제 11-8호로 지정된 조선 후기의 종입니다. 과거에 강화읍성의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기 위하여 종각에 있던 것으로 조선 숙종 때에 정족산성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프랑스군이 강화읍성을 점령한 병인양요 때 철수하면서 이 종을 가져 가려 하였으나 너무 무거워 갑곶 못 미쳐 토끼천 부근에 버리고 갔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3.1절과 광복절, 그리고 제야 타종 등 1년에 세 번 정도 종을 울렸으나 균열이 심해지면서 1995년 이후로 영구 보존을 위해 강화역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걸린 종은 1999년에 같은 모양으로 다시 제조한 것입니다.
↑진송루. 강화읍성의 북문입니다. 성문은 평거식으로 축조되었습니다. 송악을 지키는 성루라는 뜻입니다. 고려 때 고종이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서 뒷산을 송악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송악산은 개경의 뒤쪽에 있는 진산입니다.
↑진송루를 나서면 시원하고 넓은 내리막길이 시작됩니다. 내리막길이 한 번 숨을 돌릴 지점에 오읍약수터가 있습니다.
몽골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궁궐과 관아를 지을 적에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 적에 고종이 북문 앞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바로 그때 날이 어두워지면서 벼락이 큰 바위에 떨어져 물이 솟아 올랐는데 바로 그곳이 지금의 오읍약수터라고 합니다.
오읍이라는 말은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신령도 울고, 황제도 울고, 백성도 울었다고 하여 생긴 말이라고 합니다.
↑오읍약수터에서 바라다본 북문 쪽 산책로. 이외로 숲이 깊어서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오읍약수터를 지나면 비교적 완만한 내리막 산길이 이어집니다.
↑송학골 빨래터
↑빨래터를 지나면 마을이 나오고 또 도로공사를 하는 곳을 만나서 길을 찾기가 난해합니다. 그리고 코스가 바뀌기 전의 도로 표지가 있어서 헷갈리기가 쉽습니다. 어쨌든 마을과 도로 공사하는 곳을 지나면 이런 산길로 들어섭니다.
↑산길로 들어서면 푸른 숲 사이를 기분 좋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쯤 오면 조금 전에 보고 들었던 복잡한 이야기들은 모두 잊어 버립니다.
↑첫 답사 때 타고 다니던 자건거입니다. 이 자건거를 타고 산길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절개지가 올라가 보니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길을 내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 이곳으로 6차선 도로가 난다고 합니다.
↑저 아래로 강화산업단지가 들어선다고 합니다.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이 산을 가로질러 6차선 도로가 난다고 합니다. 2014년 2월 완공 예정이라고 했는데 아직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이곳의 규모는 24만평 규모, 상주인구 2만명 증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반대 여론도 있습니다. 여기서 배출될 오염된 공기와 산업폐수 등 공해물질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길 건너편으로 염하라고도 불리는 강화해협이 보이고 그 건너편으로 경기도 김포 문수산이 보입니다. 저 들판을 보면 여기가 간척지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강화는 고려와 조선을 통하여 두 번 임금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왕족과 관리들 그리고 군사들이 이곳으로 이동하여 왔습니다. 이곳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식량을 많이 비축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낮은 해안을 간척하여 농토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강화섬을 보면 해안의 굴곡이 그리 심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가 월곶입니다. 월곶돈대가 보입니다. 옛날에는 한양 도성으로 가는 배들이 이곳에 기다렸다가 만조가 되면 한강을 따라 올라갔다고 합니다.
↑조해루. 홍예문 위로 문루 여장을 두르고 누각을 올렸습니다. 2012년에 복원이 되면서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원래 이곳은 민통선 지역으로 과거에는 민간인들이 출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조해루 너머로 해안 경비 철책이 보입니다.
↑조해루는 원래 강화외성의 문루 6곳 중의 하나입니다. 강화외성은 1232년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강화도로 입도하면서 동쪽 해안에 쌓은 성입니다. 그러나 몽고와 강화를 하면서 1259년 이 성을 허물게 됩니다. 그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광해군 때 이 외성을 고쳐 쌓았고 병자호란 이후 효종과 숙종이 이곳에 5진 7보 9포대 53돈대를 구축하였습니다.
↑중앙에 보이는 것이 장무공 황형 장군 집터입니다. 황형 장군은 삼포왜란 때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이 땅을 하사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연미정까지 포함해서였습니다.
황형 장군의 신도비에 의하면 장군은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겸사복에 근무하였다고 합니다. 겸사복은 왕의 신변을 경호하고 왕궁을 지키는 친위부대입니다. 황형 장군은 왕궁에서 벌이는 첩종 때 연속 8회나 우승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무림지존'이라 불리던 조선 제일검이었습니다. 황형 장군은 자신의 검을 의천검이라고 불렀습니다. 의천검은 하늘에 기대어 놓은 검이라는 뜻입니다.
삼포왜란은 1510년 5월 4 (중종 4년)에 제포, 부산포, 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대마도주의 후원아래 일으킨 난입니다. 제포, 염포, 부산포 등에서 일어났다고 삼포왜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난으로 부산포 첨사 이우증이 죽고 민가가 수 백호 불에 타고 많은 백성들이 살상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황형등을 파견하여 섬멸하였습니다.
↑월곶의 꼭대기에 돈대가 있습니다. 이 월곶돈대는 53돈대 중의 하나이며 월곶진에 배속되어 있는 돈대입니다.
↑돈대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높은 곳에 정자가 있습니다. 연미정입니다. 연미정은 제비꼬리 정자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보면 한강과 임진강이 파주에서 합수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데 이 월곳을 중심으로 한 줄기는 남쪽 강화해협으로 흘러들고, 다른 물길은 북쪽으로 흘러드는데 이 갈라지는 모습이 제비꼬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연미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1627년 정묘년 조선과 후금(나중에 청)의 강화조약이 체결됩니다.
↑1627년 정묘년 후금은 명나라를 공략하기 전에 조선의 항복을 받을 양으로 조선을 침공합니다. 그 당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를 옹립한 집권 서인들은 노골적으로 배금친명 정책을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게다가 이괄의 난에 참여한 반란군들이 대거 청나라로 망명하면서 광해군의 억울한 사정을 금국에 호소하자 홍타이지는 3만여 군사를 주어 조선을 침략하게 합니다.
청의 입장에서 장차 중국을 치려면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후방인데 그 후방에 조선이 있어서 드러내놓고 배금친명을 소리높여 외치니 명나라를 치기 전에 조선의 항복을 받아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당연지사입니다.
↑인조는 준비된 왕은 아니었습니다. 배금친명을 표면화하면 청이 쳐들어 올게 불을 보듯이 뻔한데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아 반정을 일으키고, 반정 결과 자신이 광해군을 내쫒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으로 북방의 방어체계는 거의 무너진 상태였는데도 명분만 쫓았습니다.
1627년 청의 홍타이지는 왕위에 오르자 바로 조선을 침공합니다. 그해 정월이었습니다. 조선은 제대로 방어선도 구축하지 못하여 계속 밀리게 되고 인조는 할 수 없이 강화도로 피난을 갑니다. 전쟁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 해 2월 9일 강화도 연미정에서 강화를 맺고 청은 철수합니다.
↑이곳 연미정에서 강화를 맺고 9년 뒤 병자년에 이 강화도는 또 한 번 전쟁으로 아비규환의 현장이 됩니다. 앞에 보이는 물길이 강화해협입니다. 염하라고도 합니다. 멀리 보이는 산이 문수산이고 그 능선으로 산성이 보입니다.
↑연미정에서 본 북한 땅. 북한 땅은 빛깔부터 다르게 보입니다. 말 그대로 붉은 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