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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어제처럼 나는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두 시간의 상담 후 신경과 의사는 우리의 18개월 된 아들 조이Joey에게 척수근육위축증(SMA)이 아닌지 유전자 검사를 하러 우리를 보냈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글을 쓰기 때문”에 우리가 인터넷으로 이 질병에 대해서 너무 많이 찾아 읽지 않기를 의사는 권고했다. 우리는 자동차로 돌아갔다. 조이는 간신히 잠이 들었다. 주행 중에 마실 물을 찾으러 나는 빨리 달려갔다. 내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고, 손에는 전화기가 들려 있었다. 아내는 겨우 짜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조이는 죽을 거야.”
이 일이 있고 거의 2년 반이 지났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아내에게 내가 처음으로 했던 이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말은 내 마음에서 흘러나왔다.)
삶을 함께하다
아내 이가와 나 콘라드는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에 있었던 순결운동모임에서 만났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 성당에서 각자 미사에 참례한 후 그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으며, 대학교에서 사귀기 시작했다. 친구로 시작했지만, 우리의 관계는 조금씩 더 깊어갔다. 우리는 순결한 관계를 원했던 것을 시작부터 알게 되었기에 결혼 전에는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쉬웠다고 결코 말할 수 없겠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할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성숙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굳건한 기초 위에 세워졌다. 우리는 아직 대학생이었지만 결혼하게 되었으며, 그때까지 우리는 3년 반 동안 사귀게 되었다. 우리 당사자뿐만 아니라 우리 친구들 모두에게, 심지어 우리의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결혼과 축하 연회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 삶의 놀라운 모험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우리 서로가 적응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침착하고 우울한 성격이었고, 아내는 화를 잘 내고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우리 가정의 어떤 문제에 관해 논쟁할 때도 각자 완전히 다른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배웠기에 어떻게 토론하고 논의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아야만 했다.
또한 우리는 매일 하루를 끝맺는 시간에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노력했었다. 결혼의 성공은 하느님께 의탁하는 데 달렸다고 우리는 알고 있었다. 결혼 생활한지 여러 달이 지난 후에, 우리는 아이를 가지기로 했으며, 마침내 우리 가족의 매우 중요한 일원인 조이가 태어났다. 조이는 처음부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주위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조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조이는 잘 웃고 매우 평화로운 성격이었다.
주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을 섬기려는 바람을 더 깊이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느낌의 일을 할 결심을 했었다. 친구들 몇 명의 도움 덕분에 우리는 “사랑의 지침서"라는 재단을 설립했으며, 하느님의 사랑에 증인이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우리는 여러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어린 조이와 함께 폴란드의 절반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는 참여자들과 부부들과 함께 많은 대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갔다. 전체 프로젝트는 아름답게 전개되어 갔으며, 그러는 동안 우리는 딸 데레사의 탄생을 기다리게 되어 우리 가족은 더 늘어날 예정이었다.
아들 조이의 발병
그런데 아들 조이는 18개월이 될 때까지 잘 걷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마다 성장 시기가 있다며 친구들은 우리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조이는 매우 조심성이 많았는데, 그 때문에 무언가를 받아들이는데 늦었다. 어쨌든, 그런 점이 우리를 안심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전문가의 상담을 받기로 하고는 6명의 의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우리 아들에 관한 분명한 원인이나 이유를 밝혀주지 못했다. 우리는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으며, 다른 신경과 전문의를 찾아냈다. 그 의사는 우리 아들이 가진 문제를 15분 만에 진단할 수 있었다. 우리가 듣고자 기다렸던, 그러나 우리를 세차게 쓰러뜨려 못 일어나게 했던 진단 결과는 척수근육위축증(SMA)이었다.
이어서 우리가 제안받은 한 가지는, 그 신경과 의사의 진단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하는 혈액 유전자 검사였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조이에게 의심되는 병은 부모로부터 유전되었으며,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데레사를 포함하여 우리 아이들 중 누구라도 걸릴 수 있었다. 그 의사가 알려준 그 병의 특징은 근육이 천천히 악화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팔과 다리에, 그다음에는 식도, 마지막으로는 폐의 근육이 악화한다고. 아직 치료법은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루한 매일의 재활을 통해서 천천히 진행되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지난 십여 년간 의약품을 통한 임상적 시도가 있었지만, 현재로선 막다른 골목에 막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조이를 보통 때처럼 목욕시키고 침대에 눕히고는, 나는 기진맥진하여 더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날 일어난 일을 조금씩 나는 깨닫게 되었다. 두 세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삶은 인정하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단순하고 평화롭게 함께하는 삶이라는 내 비전은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 다자녀의 아빠가 되는 것은 항상 나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그날 그 순간에 우리 가정을 치는 시작 단계였다. 나는 아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줄 수 없고, 우리는 경기장에서 공놀이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 아이들 모두가 같은 병에 걸릴 위험을 안고 있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왜? 왜 조이인가? 왜 이 병인가? 이 질문들은 우리 부부의 마음을 끈질기게 떠나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조이를 위한 도움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에 잠을 못 이룬 채 우리는 아들 조이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난 격동을 전혀 알지 못하고 평화롭고 순수한 표정으로 잠든 아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알았던 한 가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눈물, 우리의 혼란, 우리의 불확실성, 우리의 무력감 등 전부를..….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이 병을 일으키지는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강하게 믿었다. 그분께서는 단지 그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무례한 것인가? 우리 삶의 방향을 잘못 정한 것인가? 하느님,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십니까? 인간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최상의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점이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의 모든 계획이 의미가 없어 보일지라도, 포기하기보다는 우리의 구세주에게 더 많이 매달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주 하느님과 격식에 매이지 않는 합의에 이르렀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니,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고통 중에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주시라는 것이다. 완전히 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면서, 여기서부터 우리 삶의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다.
또 하나의 강한 충격
우리는 조이를 위한 재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병이 천천히 진행되도록 우리는 하루에 몇 시간씩 훈련했다. 그러는 중에도 우리의 재단은 어떤 활동도 연기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전보다 더 많은 프로젝트를 보내주셨다. 어려운 순간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었다.
진단을 받고 두 달이 지나가자 조이는 걷는 능력을 빠르게 잃어갔다. 그래서 재활 장비와 연습용 방이 더 많이 필요했기에 우리는 더 큰 아파트로 옮겨야 했다. 우리는 성 요셉께 도움을 청했는데, 거의 그 즉시 시장가격보다 낮게 매우 큰 아파트를 세 얻었다. 한 달 후에 조이의 병에 대한 새로운 의학 연구가 완성되었다는, 그리고 약이 곧 시판될 것이라는 놀라운 정보를 받았다. 이것은 의료계에 엄청난 돌파구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첫 1년간 복용할 약값은 300 만 폴란드 즐로티(약 800,000달러: 약 11억 720만 원)였고. 그 다음 해에는 150만 즐로티(약 5억 2,858만원)였다. 우리로선 감히 생각도 해볼 수 없는 액수였다. 우리 같은 평범한 가족이 감당하기 거의 불가능한 가격이었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을 신뢰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오래잖아, 우리 딸이 태어났다. 딸 데레사는 갑자기,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아니, 우리는 그것을 그런 방법으로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성공적으로 바꾸어주시려고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 아들 조이는 자기 방에서 만화를 보고 있었고, 나는 어린 데레사를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다. 아주 훌륭한 아내는 어떤 의사의 도움도 없이 모든 것을 아주 잘해냈다. 아내는 처음 시작부터 뛰어났으며, 그리고 에너지가 매우 넘쳤다.
불행하게도, 유전자 검사 결과 딸 데레사도 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도 보균자라는 확인을 받았다. 이것은 또 하나의 강한 충격이었다. 두 아이들이 같은 심각한 유전병을 앓고 있는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부모로서 우리가 견뎌야 하는 고통이 더 많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다시금 놀라게 하셨다. 인간 사회에서는 가능한 해결책이 없지만,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더 많은 문을 열어주셨다. 이번에는 로마에서!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치료
우리 딸 데레사는 로마의 예수 소아 전문병원에서 실행하는 의학 프로그램에 받아들여졌는데, 그 의학 프로그램은 새로운 약으로 해 보는 것이었다. 척수근육위축증에 걸린 폴란드 어린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재단 총장의 도움으로, 우리는 한 이탈리아인 교수와 접촉할 수 있었으며, 그는 우리 딸의 치료에 동의해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며칠 안에, 우리는 짐을 싸서 로마로 날아 갔다. 그 순간부터, 로마는 우리의 두 번째 집이 되었다. 특히 팔로틴 수녀원은 우리 를 받아주었고, 매번 방문 때마다 우리가 그곳에 묵게 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를 그들의 가족인 것처럼 대해 주었다. 로마로 가는 여정 중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는 쉽지 않았지만, 주 하느님께서 매번 지속적으로 우리를 축복해주셨다.
데레사는 치료를 시작한 지 3개월째부터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병원에 머무는 매번, 모든 과정이 어린 데레사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이 힘든 과정을 통해 우리 딸을 낫게 해주신다고 믿었다. 약물 치료는 약을 척수에 직접 넣어야 했기에 특히 힘든 일이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마취하지 않고서 척수에 약을 주입하는 동안 어린 딸은 그 고통 때문에 몸부림을 쳤으며, 간호사들은 아이의 발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때때로 의사는 투약에 실패하여 주사기를 여러 번 찔러야 했다. 부모로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끔찍했다. 극심한 고통이 우리의 심장을 찔렀다. 그때마다 우리는 아드님의 고통을 바라보신 슬픔의 성모님께 기도드리면서 특별한 위로를 받았다.
이제 우리 딸은 곧 두 살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 질병이 딸에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경우이며, 우리에겐 분명히 기적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우리를 끊임없이 지켜보아 주시는 주 하느님으로부터 온 약속이었다.
그리고 조이는? 이탈리아의 의사들은 우리가 모든 형식을 갖추는 즉시 조이를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데레사의 경우처럼 적법성이 단순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대답은? 그분은 당신의 다음번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에서는 매주 목요일 아침 미사가 폴란드어로 봉헌된다. 폴란드 출신의 성인 교황의 무덤에서 봉헌되는 그 미사에는 항상 폴란드인들이 많이 참례하였다. 우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께 아들 조이도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관청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라고 전구를 청하였다.
그날은 미사 후에 다른 폴란드인들에게 우리를 도와달라고 청했더니, “미스 야쟈 Miss Jadzia"에게 가보라고 했다. 이 신비에 싸인 인물은 몹시 유쾌하고 나이 든 폴란드 여자였다.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모든 관청의 절차 작업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는 게 아닌가! 이건 또 하나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두 달 넘게 걸려 우리가 모든 형식적인 절차를 해결하자, 이탈리아 의사들은 크게 놀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들의 치료 개시는 계속 질질 끌었다. 아들은 점점 더 약해졌으며, 치료를 시작하기까지 모두 합쳐 거의 1년이 걸렸다. 아들은 끊임없이 재활 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치료가 길어지면서 기어가는 능력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아들이 앞으로의 생애 동안 휠체어로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기에, 우리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크고 강한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주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하였다.
예수 소아 전문병원의 의사들에게서, 조이를 위한 치료 개시는 6개월 안에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다른 병원의 도움을 찾기로 결정했다. 제멜리 병원에 관해서 어떤 정보도 모른 채, 우리는 그곳에 SMA 치료 책임자로 있는 의사와 약속을 잡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의사와의 단독 약속을 잡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6주였다. 다시금 우리는 주 하느님께 기도하고 의탁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그분의 대답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러던 중 친지 중의 한 사람이 그 의사를 아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통해 이틀 만에 검진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의사는 매우 훌륭했으며 따뜻한 사람이었다. 특별한 검진을 한 후에, 자기 파트에서 치료하는 데 우리 아들 조이를 받아 주었다. 그것도 바로 2주 안에! 다시 주님께서 당신의 큰 자비를 보여주셨고 우리를 돌보아주셨다. 바로 1년 전에, 우리 아이 두 명에게 이 병을 주어서 주님께서 우리를 힘들게 했다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병에 대한 딸 데레사의 민감성이 없었다면, 아들 조이는 이 치료에 대한 어떤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예견할 수도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고 우리를 조금씩 그 길로 인도해주셨다.
하느님은 항상 선하시다
우리 아들 조이는 이제 여섯 번째 치료제를 복용했다. 물리치료사들의 도움 덕분에 아들의 근육 기능은 천천히 돌아오고 있다. 아들은 매일 더 강하게 성장하고 있다. 아무도 우리에게 확실한 보증을 해줄 수는 없지만, 아들이 어느날 걸을 수 있다는 기대감은 아직 남아있다. 바로 2년 전만 하더라도 아들 은 앞으로의 삶을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만 할 운명이었다. 정녕 하느님은 선하시다! 덧붙여, 기금은 1월 1일에 유용할 수 있게 되었고, SMA 치료에 필수적인 약을 구입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것은 치료를 위해 외국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처럼, 머지않아 우리 아이들도 집에서 폴란드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인간적으로 보면 우리의 사연은 무의미한 큰 고통 중의 하나인 듯 보일 수 있다. 부모로서 아내와 내가 지난 2년 반 동안 겪었던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숨길 수 없고, 우리에게 그 시간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절대 외롭지 않았다. 그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우리는 우리에게 큰 연민과 사랑을 가지셨던 예수님의 고통에 가장 가까이 있었다. 아이들의 병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런 종류의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비로소 그것을 인정하게 되더라도, 좋으신 아버지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은것인지를 알고 계신다. 하느님은 항상 선하시다.
<Love One Another!(서로 사랑해요!)no.50>에서
이정은 옮김
(마리아지 2024년 3•4월호 통권 244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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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처 : 아베마리아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