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받은 교회 회복의 과제
지금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변하고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한 교회라는 명목으로 세상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래전에도 그런 교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
세속의 문화를 바탕으로 교회가 전도 축제를 벌이고 있다.
몇 년 전, 서울의 돈암동 성결교회에서는 창립 60주년을 맞아 10월 14일에
송대관, 주현미, 정세훈, 대니정, 거미, 김선경 등을 초청해서 열린 음악회를 연다는 소식이다.
어머니 기도회로 유명한 서울의 어느 교회는 어머니 기도회 앞서, 대중가요를 30분 동안 부른다고 한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기자가 물었더니,
안 믿는 어머니들이 오기 때문에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친교하기 위해서란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발상인가?
요즘 그런 식으로 부흥회를 한다는 광고를 본적이 있다.
과거에 솔로몬이 타종교를 받아들이고, 세속의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결과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북한의 핵실험을 미국 탓으로 돌리는 좌파단체들을 볼 때 나라의 미래가 어둡기만 하다.
자기들의 탓은 하나도 없다.
어떤 싯글에 ‘모두 포로가 되어 가을 앞에 섰다’는 표현처럼
교회는 세속문화 앞에 포로가 되어가는 모습을 볼 때 교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지금까지 잘해 온 나라와 교회가 왜 이런 지경에까지 빠지게 되었는가?
안보에 대한 불감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이 사회주의사상에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안보에 대한 불감증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 불감증이다.
영적 불감증에 걸리게 되면 세속 문화에 급속하게 빠져들고 만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 선택의 자유가 있는 나라,
노동의 자유가 있는 나라를 얼마나 꿈꾸며 살아왔는가?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루면서 지금까지 이루어 온 대한민국이다.
이제 와서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를 다시 꿈꾸는 것일까?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미국과 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라는 인식이 부족한 것이다.
개혁의 대상은 다른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라는 것이다.
다른 교회가 아니라 바로 우리교회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잘 사는 민족은 유태인이다.
말세가 가까워올수록 이 민족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
들은 세계의 금융뿐만 아니라 매스컴, 언론, 영화 등도 거의 지배하고 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돈줄을 거머쥘 수 있었을까?
인색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머리가 좋기 때문이라고 말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십일조 생활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분들이 많다.
그들은 축복은 하나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행동으로 고백한다.
청교도 신앙에서도 제일 중요한 원리로 생각하는 것이 사명적인 물질생활이다.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벌고,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쓰라는 것이 청교도 신앙의 핵심원리다.
그렇게 열심히 써서 그들이 가난하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청교도 신앙이 융성한 곳에는 신기하게 물질적인 축복도 따랐던 것을 본다.
지난 50년간 우리나라는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 성장은 교회의 성장과 대체로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교회가 침체에 빠져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헌신의 위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옛날처럼 잘 헌신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긴 한국 교회의 위기는 요즘의 경제 위기와도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시간만 나면 믿음, 약속, 사랑을 강조한다.
그런데 지나치리만큼 강조해도 뜨거운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까?
성경적인 회복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 보혈과 성령의 임재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회복은 구원의 기쁨으로 나타난다.
회복의 열매는 자기 헌신으로부터 나타난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대신 지는 자기 헌신이 없이는 회복의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은 외침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헌신하는데서 시작한다.
씨 뿌리는 헌신을 통해 기쁨의 단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회복은 심고 거두는 법칙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약속받은 우리교회 회복은 자발적인 헌신과 책임지는 헌신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자발적인 헌신을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뉴부산교회 고재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