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스코 정신과 이태석 신부 (4) / 백광현 신부
2.3 섭리에 의탁하는 마음
이태석 신부가 바라보는 수단은 한국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다른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해서 불편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미리 보살피는 하느님 사랑의 섭리를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이태석 신부는 선교지인 톤즈의 현실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섭리에 모두 맡길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가 톤즈에 들어가기 직전에 보낸 편지 첫머리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 “근심 걱정 없네”가 제목처럼 적혀 있다. 그것을 보면 그는 하느님의 섭리와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중재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돈보스코의 영적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들임이 분명하다.
“서너 개의 방을 갖춘 콘크리트의 병원 건물, 나무의자가 있는 대기실, 두 대의 현미경과 원심분리기 그리고 말라리아나 에이즈 또는 성병의 검사를 할 수 있는 화학약품들이 갖추어진 작은 임상병리실, 찾아오는데 사오일씩 걸리는 아주 먼 곳의 환자들을 위한 이동 진료소라고 부를 수 있는 작은 지프차 하나, 나병으로 불구가 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장애자들을 위한 재활원 ... 등등 많은 생각들과 새로운 계획들을 머릿속으로 만들어보지만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불러주셨고, 저 또한 그 부르심에 응답을 했으며, 주님이 불러주신 그곳으로 드디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고 많은 위안을 얻습니다. ‘이곳으로 불러주신 만큼, 그분께서 어떻게 알아서 해주시겠지! 알아서 하이소’라는 식의 경상도 특유의 깡다구가 제 마음 안에서 발동하고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하면 ‘섭리에 대한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마음을 비우니 걱정도 사라집니다. ‘섭리에 대한 저의 믿음’이 강한 나의 믿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상황의 절박함에서 왔다는 것이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쨌든...성령의 활동과 그분의 섭리를 믿고,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그곳 주민들에게 전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으면서,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나하나씩 차근차근히 해 나갈 생각입니다.”
살레시오 회원은 시련에 직면했을 때에도 창립자인 돈보스코의 모범을 따라 실망하지 않고 내적 평화를 잃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태석 신부도 돈보스코처럼 하느님의 사업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며, 시련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섭리의 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수단으로 들어갔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돈보스코가 꾸었던 예언적 꿈인 ‘장미로 뒤덮인 꽃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시가 찌르는 아픔을 참고 인내하며 담담하게 걸어간다. 이태석 신부도 주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의지한 채 그 고통의 길을 미소를 잃지 않고 그렇게 걸어갈 수 있었다.
2.4 오라토리오의 마음(Cuore Oratoriano)
돈보스코의 정신을 알기 위해선 그가 처음으로 시작했던 발도코의 오라토리오를 알아야 한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는 “젊은이들을 맞아들이는 집이었고, 복음을 전파하는 본당이었으며, 삶을 준비하는 학교였고, 친구로서 만나고 기쁘게 생활하기 위한 운동장”(회헌 40조)이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는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하며,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빵과 잠자리, 일터와 학교가 되었고 그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희망의 터전이었다. 돈보스코는 청소년들을 정직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교육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는 오늘날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이 닮고 본받아야 할 교육사목활동의 모델이며, 우리의 “모든 활동과 사업에 대한 식별과 쇄신의 영원한 기준”(회헌 제40조)이 되고 있다.
이태석 신부는 돈보스코의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발도코의 오라토리오를 여러 번 순례할 기회를 가졌었는데, 2000년 4월 27일 발도코의 오라토리오, 돈보스코 성인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방에서 종신서원을 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평생토록 ‘돈보스코의 아들’로 살겠다는 결심, 더 나아가 ‘제2의 돈보스코’가 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 후 그는 수단의 톤즈 마을을 발도코의 오라토리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곳으로 만들어갔다. 톤즈는 마음 둘 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맞이하는 ‘집’, 영혼과 육신의 병을 치유하는 ‘병원’, 천진한 아이들이 뛰어노는 ‘운동장’, 삶을 준비하는 ‘학교’였으며, 주님께 모든 부족함을 맡기고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을 체험하는 ‘본당’, 즉 오라토리오가 되었다.
1854년 콜레라가 토리노 전역에 퍼졌을 때 돈보스코는 자발적으로 지원한 오리토리오의 청소년들 30여 명과 함께 병원과 가정에서 죽어가고 있는 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많은 병자들을 구했었다. 이태석 신부도 지천에 깔린 환자들을 위해 병원을 먼저 지어 그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의 의사로서의 활동에는 지역의 긴박한 필요성에 우선적으로 응답하는 살레시오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또한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할 교실을 지어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스승이었다.
“음악이 없는 오라토리오는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 할 만큼 음악을 중요하게 여겼고, 음악이 아이들의 정서적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던 돈보스코처럼 이태석 신부도 톤즈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생긴 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였다. 그는 음악에 대한 선천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들을 모아 기악반을 만들어 지도했다. 그가 가르친 기악반은 4년 뒤에 서른다섯 명으로 구성된 수단 최고의 브라스밴드로 성장한다.
이태석 신부는 살레시안이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친구였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멱까지 감으면서 그들의 마음으로 들어간 선교사가 되었다. 돈보스코가 오라토리오의 아이들에게 여러분은 내 마음을 송두리째 훔쳐간 도둑이라 표현했던 것처럼 톤즈의 아이들도 이태석 신부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는 어느덧 자나깨나 아이들의 교육과 톤즈를 생각하는 톤즈 마니아가 되어 있었다.
오라토리오의 마음을 가진 살레시오 회원은 청소년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된다. 이태석 신부 역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로부터 사랑받는 사제가 되었다. 아이들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은 돈보스코가 제시한 살레시오 회원의 최고 이미지다. 그래서 살레시오 회원들은 청소년들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았기에 이태석 신부는 “사랑 사랑, 오직 사랑,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사랑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받쳐”라는 자신이 작곡한 『묵상』의 노랫말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불꽃처럼 살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서둘러 떠나갔다. 우리에게 그 사랑을 더 깊이 살라하고!
2.5 이태석 신부, 톤즈의 돈보스코
이제 마지막으로 함께 생각하고 규명해 보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 앞에 수식어처럼 부르는 ‘수단의 슈바이처’라는 명칭에 대한 것이다. 여러 매체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에게 가장 영예로운 호칭이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요 의사로 활동했고 또 음악적 재능도 뛰어났던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의 이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점에서 이태석 신부를 ‘수단의 슈바이처’로 부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최근 가톨릭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영국에서 발간되는 잡지 Catholicherald는 홈페이지 1면에서 이태석 신부에 관한 기사를 다루면서 그를 ‘수단의 슈바이처’로 부르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의사이고 신학자였던 슈바이처 박사는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무뚝뚝하고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상관과 같은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는 톤즈 사람들에게 사제이면서 의사였고 교육자이면서 친구로 다가간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슈바이처 박사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6월 2일 부산의 인제대학교에서 열린 ‘이태석 기념 심포지엄’에서도 같은 논지의 발표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태석 신부에게 가장 걸맞은 명칭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살레시오 회원은 ‘제2의 돈보스코’가 되기를 희망하고 또 그렇게 되어가면서 성화의 길로 들어선다. 이태석 신부가 살레시오회의 사제요 선교사가 되면서 가장 닮고 싶었던 유일한 모델은 슈바이처가 아니라 돈보스코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1996년 12월에 이태석 신부가 장상에게 제출한 ‘서원갱신 청원서’에서 “돈보스코를 닮은 살레시안으로서의 길을 자신 있게 그리고 꾸준히 선택”하겠다는 그의 엄숙한 다짐을 다시 만난다. 우리는 그의 결심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닮고자 했던 사람이 바로 돈보스코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태석 신부에게 가장 영예로운 명칭은 ‘수단의 슈바이처’가 아니라 ‘톤즈의 돈보스코’라고 말할 수 있다.
나가는 말
이태석 신부는 지난 9년 동안 톤즈의 선교사이며 의사 그리고 청소년 교육자로 살면서 꽃보다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남겨 주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과 톤즈의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의 떠남을 매우 슬퍼했다. 그러기에 오늘 그의 삶과 영성을 조명하는 이 자리에서 젊은 나이에 하느님의 사랑을 불꽃처럼 살다가 그분의 품으로 떠난 이태석 신부를 돈보스코의 정신으로 되새김하며 그를 ‘톤즈의 돈보스코’라 불러본다.
그는 머나먼 아프리카의 척박한 땅 톤즈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치유하는 의사였고, 그들의 교육자요 사목자였지만 그가 남긴 희생과 봉사의 삶은 감동을 넘어 우리 사회를 치유하고 있다. 그가 남기고 간 거룩한 사랑의 행위는 이제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고 있다. 톤즈의 청소년들과 모든 이를 위해서 자신의 전존재를 온전히 하느님께 드릴 제물로 살라버린 이태석 신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제2의 이태석이 되라는 뜨거운 부르심과 초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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