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세때 백사선생이 6살 손주에게 직접 써준 <천자문> 등
유물 17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이항복 해서 천자문' 표지. 사진 문화재청.
▲백사 이항복선생이 친필로 쓴 '이항복 해서 천자문'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예고 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이항복 해서 천자문’의 문화재 가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전하는 《천자문》 중 가장 크게 쓴 육필이고,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란 점이다.
순조 때 문신 신위가 쓴 ‘신위 해서 천자문’보다 200년 앞선 작품이다.
육필이 아닌 인쇄본으로는 하버드-옌칭 도서관에 소장된 순창 무량사본 ‘신간천자주석(1566)’,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1575년
(선조8) 전라도 광주에서 간행된 ‘천자문’, 1583년(선조 16) 석봉 한호의 필체로 간행한 목판본 ‘석봉천자문’ 등이 전한다.
둘째, 제작 연대와 작가가 분명하고, 이항복이 후손 교육에 쏟은 관심과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가치가 있다.
셋째, 한글로 음音과 훈訓을 더해 17세기 초‧중기 한글 변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등에서 문화재 가치가 높다고 평했다.
백사선생이 <천자문>을 손자에게 써주면서 남긴 당부의 말. “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라고 썼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교서로 보물급 문화재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 신분으로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작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의 15대 종손인 이근형씨(47·사업가)는 2019년 11월 21일 400년 넘게 종가에서 간직해온 조선의 명재상인 오성부원군 이항복 관련 유품 17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유물 중에는 백사가 자손교육을 위해 쓴 <천자문>과 <백사선생 수서 제병 진적첩>, 그리고 임진왜란 직후에 받은 <호성공신 교서>와 <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 등이 있다.
14대 종부 조병희씨(74)는 “백사 할아버지 유물을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좋다”면서 “박물관에서 널리 알려주시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종손 이근형씨도 “백사 할아버지 유품이 국가 기관에 보존되어 다음 세대에도 잘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백사 이항복선생 수서제병진척첩(36 X 20.7cm, 82 부분). 사진 문화재청.
▲이항복선생이 쓴 <백사선생 수서 제병 진적첩>.
<예기> 중에서 제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 써서 병품으로 남겼다. 백사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절차가 아닌 제사의 근본을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병풍을 제작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기증품 가운데는 <천자문>, <백사선생 수서 제병 진적첩> 외에도 백사가 임진왜란 직후 호성공신으로 임명될 때 받은 문서인 <호성공신 교서>가 눈에 띈다. 선조(재위 1567~1608)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 86명, 선무공신 18명, 정난공신 5명에게 작위를 내렸다.
<호성공신교서>는 임진왜란 중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발부한 교서이다.
백사는 37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로서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다.
선조는 호성공신 86명 중에 이항복과 정곤수(1538~1602) 등 2명에게만 1등의 작위를 내렸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가 바로 그 유물이다. 이 교서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임금을 수행한 백사의 공적’이 자세히 언급돼있다.
“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선조)를 잘 호위하며 엎어지며 달아나느라 온갖 고생을 고루 맛보았다. 시종 어려움과 험난한 것을 겪은 것이 어느 누가 경의 어질고 수고한 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忠勤疇衛予於顚越備嘗終始艱險孰逾鄕之賢勞).”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는 현존하는 유일한 호성공신 1등 교서로, 당대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가 글씨를 썼습니다.
교서에 적혀 있는 선조 임금의 “사람들은 그대를 믿고서 조금 안정되었고, 조정에서는 그대를 의지하면서 소중하게 여겼다.”라는 평은 이항복이 임진왜란 극복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기증 후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 교서가 원본이 아니라 부본副本(원본과 똑같이 작성하여 보관한 문서)임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항복이 받은 교서의 원본이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자 이항복 증손 이세필李世弼(1642-1718)이 한호의 집안에서 부본을 구하여 충훈부忠勳府에서 올려 국새를 받아 보존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공신교서의 중요성과 후손들이 보존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산물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