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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5권 / 묘지명(墓誌銘)
명나라 총병관 조선국 보국숭록대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충의 정공의 묘지명 서문을 아우르다.
(明總兵官朝鮮國輔國崇祿大夫三道水軍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忠毅鄭公墓誌銘 幷序) - 송치규(宋穉圭) 찬(撰)
천계(天啓) 2년(1622, 광해군 14) 2월 갑오일에 유명 어왜총병관(有明禦倭總兵官) 조선국 보국숭록대부(朝鮮國輔國崇祿大夫)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三道水軍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정공(鄭公)이 군(軍)에서 졸(卒)하여, 4월 무진일에 상주(尙州) 사벌(沙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휘는 기룡(起龍)이고 자는 경운(景雲)이며, 본관은 곤양(昆陽)이다. 증조할아버지 철석(哲碩)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의걸(義傑)은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호(浩)는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공의 처음 이름은 무수(茂壽)이며 신종황제(神宗皇帝) 14년(1586, 선조 19)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께서 신룡(神龍)이 종루(鐘樓)에서 일어나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꿈을 꾸고 이에 내신(內臣)을 보내어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때마침 공이 홀로 종루 아래에 이르러 기둥에 기대 서 있었다.
내신이 돌아가서 보고하자 곧 불러들여 그 용모를 보고 크게 기이하게 여겨 마침내 지금의 이름을 하사하고 전력부위 훈련원봉사(展力副尉訓鍊院奉事)에 보임하였다. 20년(1592, 선조 25)에 평수길[平秀吉,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반란을 일으키자 방어사(防禦使) 조공 경(趙公儆)을 따라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경(儆)이 고개를 넘는데 왜노의 병사가 이미 고개 아래에 육박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에 공을 선봉장으로 삼아 우지(牛旨)에 이르니, 왜노의 선봉 500명이 신창(新倉)에 주둔하고 있었다. 공이 단기(單騎)로 진중(陣中)으로 달려 들어가 왜노 100여 명을 쳐 죽이자 왜노들이 줄줄이 무너지며 모두 도망갔다.
왜추(倭酋) 4명이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수풀 속에 숨어 있다가 공이 지나가자 그의 등에 칼을 겨누었다. 공이 곧 화살을 뽑아 3명을 쏘아 죽이니 나머지 1명이 칼을 버리고 달아났고, 이로 말미암아 공의 이름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졌다. 왜노의 병사가 영수교(瀯水橋)에 주둔하자 경이 군사를 머물게 하고 감히 더불어 싸우지 않았다.
공이 홀로 8명의 장사(壯士)와 함께 다시 우지를 넘어 삼봉산(三峰山) 아래에서 왜노를 격파하였다. 밤에 왜노가 공의 군대를 습격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공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날이 밝자 말을 달려 높은 담을 뛰어넘었다. 왜노가 병사를 모아 포위하자 공이 다시 말을 달려 포위를 무너뜨리고 왜노들의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고서 산 위에 이르렀다.
얼마 있다가 왜노들이 공의 뒤를 좇아 겹겹이 포위하자 공이 이에 상수리나무를 꺾어 몽둥이를 만들어서 냅다 후려치니 왜노들의 두개골이 모두 부서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공이 포위망을 무너뜨리자 왜노가 병사를 전부 이끌고 또 뒤쫓았다. 공이 이에 몽둥이를 집어던지고 활등을 당겨 왜노들을 쏘아 죽이니 죽은 자를 이루 다 셀 수 없었으며, 왜노들이 마침내 도망갔다.
여름 5월에 경이 무리를 데리고 김산(金山) 추풍역(秋豐驛)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왜노가 군사를 몰래 움직여 자주 공격하자 공이 정예병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힘껏 싸우며 왜노 5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싸움이 한창일 때 왜노가 경을 붙잡아 죽이려고 하자 공이 곧 칼을 뽑아들고 중군(中軍)으로 들어가 왜노들에게 “우리 어진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를 죽이지 말라.”라고 크게 호통을 쳤다.
왜노들이 화가 나 마침내 경의 목을 움켜잡고 칼을 내려치려고 하는데 공이 벌써 말을 달려 왜노의 목을 베고 경을 빼앗아 돌아오니, 왜노들이 바라보기만 하고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공의 어머니 김 부인(金夫人)이 지리산에 있었다.
공이 경과 헤어져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니 김 부인이 공에게 말하기를,
“왕실이 위급하니 너는 빨리 달려가도록 하라. 지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
곤양(昆陽)에 이르자 곤양 태수 이광악(李光岳)이 장차 진주(晉州)로 갈 것이라, 곧 공을 차출하여 수성장(守城將)으로 삼고 곤양을 지키게 하였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진주로 불러들여 또 공을 차출하여 유병장(游兵將)으로 삼았는데, 상주 판관(尙州判官) 권공 길(權公吉)이 북천(北川)에서 전사하였다. 성일이 관찰사가 되자 그날로 공을 중앙에 상주(上奏)하여 판관을 대행해서 금오산(金烏山)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에 왜노들이 상주를 함락하여 혹은 산양(山陽)을 점거하고 혹은 중모(中牟)를 점거하였으며 혹은 화령(化寧)을 점거하여 인민(人民)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와 고을 사람 김광두(金光斗), 강응철(康應哲) 등이 향병(鄕兵)을 이끌고 서둘러 싸우다가 패배하였다.
목사(牧使) 김해(金澥)가 백성들을 이끌고 용화동(龍華洞)으로 들어가자 왜노들이 샛길로 가서 도륙하려고 하였다. 공이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왜노들이 이미 산을 뒤덮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지세가 험하여 말을 달려 공격할 수가 없었다.
이에 우인(優人)이 되어 말 위로 올라가서 ‘휘익’하고 길게 휘파람을 불고 서기도 하고 눕기도 했다가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니, 왜노들이 서로 돌아보며 재주를 칭찬하면서 공을 생포하려 공의 뒤를 매우 급하게 쫓았다.
공이 깃발을 눕히고 달아났다가 멈췄다가 하며 왜노를 유인하여 평원으로 나오게 한 후 깃발을 세우고 재빨리 공격하자 왜노들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는데, 상주 일대에 쓰러져 죽은 시체가 종횡으로 70리에 걸쳐 널렸다. 고을 사람들은 노소(老少) 간에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
얼마 있다가 왜노들이 중모에서 화령으로 달아나자 공이 석거(石車)를 설치하고 기다렸다. 왜노들이 이르자 이에 돌을 발사하니 죽거나 다친 자가 매우 많았으며, 공이 승세(勝勢)를 타고 300명의 목을 베었다.
왜노들이 여전히 고을의 성 안을 점거하고 한 달 동안 나오지 않자, 공이 고을 백성 400명을 징발하여 서정(西亭)에 진을 치고 횃불을 묶어서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왜노들이 삼문(三門)에 장수를 배치하였는데 동문(東門)에는 한 명의 병사도 세워놓지 않았으므로 장사(壯士)를 선발하여 성 동쪽에 있는 밤나무 숲 속에 숨겨 놓았다.
한밤중에 호각을 부는 것으로 신호를 삼아 400명이 동시에 불을 붙여 서정에서 왜노의 진영으로 쳐들어가 여사(廬舍)에 불을 붙이니, 왜노들이 놀라 불을 피하여 달아났다. 과연 동문으로 해서 산속으로 숨어드니 밤나무 숲에 숨어있던 병사들이 그를 맞아 공격하여서 400명의 목을 베고 마침내 상주를 수복하였다.
12월에 창의군(倡義軍)과 함께 당교(唐橋) 아래에서 왜노를 공격하여 200명의 목을 베었다. 왜노들이 후퇴하여 대승산(大乘山)에 주둔하자 공이 또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장사(壯士) 이희춘(李希春) 등 수십 명으로 하여금 험준한 곳을 나누어 지키고 있다가 왜노를 만나면 바로 저격하게 하여 1000명의 목을 베었다.
얼마 있다가 또 1000명의 목을 베었으니, 왜노들이 경계하며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다. 다음 해 5월에 중훈대부(中訓大夫)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에 제수되고 판관으로 승실(陞實) 되었으며, 가을에 황조(皇朝)의 유격장군(游擊將軍) 오유충(吳惟忠)이 상주에 군사를 주둔하였을 때 공이 목사(牧使)를 대행하였다. 11월에 목사 겸 감사군대장(牧使兼敢死軍大將)에 승실되었으며, 또 다음 해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겸 토포사(兼討捕使)에 가자되었다.
25년(1597, 선조30) 여름 6월에 수길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이 문충공 원익(李文忠公元翼)이 남쪽 지방을 체찰(體察)하다 상주에 이르러 도원수 권 충장공 율(權忠莊公慄), 방어사(防禦使) 곽 충익공 재우(郭忠翼公再祐)와 함께 적을 물리칠 계책을 의논하며 각자 대장(大將)을 추천하였는데, 무리들이 모두 “정(鄭) 아무개가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황조의 유격장군 모국기(茅國器)가 공의 용모를 보고 원익에게 이르기를 “정 아무개에게는 전승(戰勝)의 상(相)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원익이 기뻐하며 급히 불러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때에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수일(李守一)이 공과 함께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공이 부름을 받고 나아가려 하였으나 수일이 끝내 문을 열고 보내주지 않았다.
원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정 아무개가 오지 않는다면 사직(社稷)이 장차 위태로워질 것이다.”
하며 곧 말을 달려 몸소 맞이하러 나갔다. 공이 감격하여 죽음으로 맹세하고 마침내 서둘러 길을 떠났다.
태마원(泰馬原)에 이르러 원익과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공이 말에서 내리자 원익이 그것을 보고 또한 말에서 내려 풀밭에 앉아서 왜노를 막을 일을 더불어 논하였다. 공이 자신의 방략(方略)을 자세하게 진술하자 원익이 이에 대장(大將)직을 주고 28주(州)의 병마(兵馬)를 공에게 붙여주며 말하기를,
“내일 승전보를 볼 수 있기 바란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삼가 공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바로 그날 녹가전(綠檟田)으로 진군하여 척후장 이희춘(李希春) 등을 보내어서 한밤중에 대나무밭 속에 있던 왜노를 공격하게 하여 100명의 목을 베었다. 그때에 왜노들이 적림(赤林)에 주둔하여 용담수(龍潭水)에 임하고 있었는데, 공의 군대가 용담수 서쪽에 있어 왜노들과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므로 진퇴가 불편하였다.
이에 공이 삼군(三軍)으로 하여금 물을 건너게 한 연후에 공격하고자 하여 미리 안동 능정군(安東稜挺軍)을 보내어 수풀 속에 숨어있게 하였다. 공이 선봉에 서서 왜노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여 도망가는 척하고 이동령(理同嶺)까지 이르렀다. 왜노들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추격하자 공이 이에 깃발을 돌려 목숨을 걸고 싸웠다.
어떤 장군이 붉은 옷을 입고 백마(白馬)를 타고 깃발 앞에 서서 용맹스럽게 잘 싸우니 왜노들이 마침내 추대하여 원수(元帥)로 삼았었다. 평원에 이르자 곧바로 장검을 뽑아들고 빙빙 돌려 섬광을 번쩍이며 바로 앞에서 훨훨 휘둘렀으나 공과 교전한 지 채 2합(合)도 안 되어서 공이 말 위에서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자를 사로잡아 겨드랑이 아래에 끼고 말을 달리니, 붉은 옷은 거꾸로 늘어지고 백마는 아직 뒤에 있었다. 그 손에 비록 장검이 있었으나 쓸 수가 없어 왜노가 크게 패하였다.
공이 이에 마침내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자를 포박하여 깃발 위에 매달자 왜노들이 바라보고 모두 두려워 떨며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였다. 공이 군사를 풀어 떨치고 일어나 나아가니 잠시 후에 안동 능정군이 수풀 속에서 나와 좌우로 협공하여 1만 2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왜노 중에 화살에 맞아 죽거나 다친 자가 또 반이 넘었다.
전투가 끝나자 삼군(三軍)이 벤 왜노의 머리가 평원에 쌓여 집채 만한 것이 또 5~6더미여서 다 운반할 수가 없어 왼쪽 귀만을 잘라 실은 것이 또 3~4마리의 말에 실을 만큼이었다. 공이 원익에게 헌괵(獻馘)하고 또 붉은 옷 입고 백마 탄 자를 포로로 잡아 바쳤다.
원익이 무릎을 치며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정(鄭) 아무개는 백 번을 싸우면 백 번을 이기니 참으로 명장이다. 모 유격(茅游擊)이 관상을 잘 보는구나.”
하였다.
그때에 진주 절도사(晉州節度使) 김응서(金應瑞)의 군대가 패하여 그 일 때문에 쫓겨나자 원익이 조정에 상주하여 공이 절도사의 일을 대행해서 성주(星州)를 지키도록 하였다. 왜노 청정(淸正)이 공이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자를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공의 모습만 보면 달아나 고개 서쪽 500리를 문득 다시 평정하였으니, 공의 공(功)이었다.
처음에 원익이 몸소 공을 맞이하였을 때 여러 종사(從事)들이 마음속으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공이 태마원에 이른 후에 종사들을 만나고도 예를 갖추지 않자 종사들이 화가 나 원익을 보고 공을 헐뜯자 원익이 말하기를,
“공들은 노여워하지 말라. 적을 막아내고 군대를 지휘하는데, 어찌 작은 예를 가지고 책망할 수 있는가.”
하였다. 3일 후에 공이 승전보를 올리자 종사들이 부끄러워하며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9월에 특별히 좌도 병마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에 제수하고 군대를 감독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때에 황조(皇朝)의 대장군 마공 귀(麻公貴)가 도어사(都御史) 양공 호(楊公鎬)와 더불어 영남에서 청정을 공격하였다. 11월에 공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경주(慶州)로 갔는데, 정벌에 따라온 중국의 장수와 병사 14만 명이 공이 군대를 다스리는 것이 지극히 간편하고 소탈하여 부상당한 자는 어루만지고 병든 자는 쓰다듬어 위로하는 것을 보고 공의 휘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중국의 장수와 병사들이 만약 공을 대장군으로 삼게 된다면 누가 공을 위해 싸우다 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2월에 공이 경주에 이르러 대장군을 따라 우영(右營)을 담당하였다. 청정(淸正)이 대장군을 곧바로 침범하자 공이 휘하의 병사 3000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힘껏 싸워 크게 격파하고 800명의 목을 베었다. 청정이 두려워하며 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니 공이 추격하다 부평역(富平驛)에 이르러 또 격파하고 마침내 경주를 수복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대장군 귀(貴)가 울산(蔚山)에 이르렀는데 청정의 진영과 6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공이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유격장군(游擊將軍) 파새(擺賽)와 더불어 선봉이 되어 왜노를 만나 힘껏 싸워 격파하고 45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마침내 도산(島山)을 포위하였는데 청정이 밤낮으로 성을 굳건히 지키니 대장군 귀가 걱정이 되어 이에 모국기(茅國器)로 하여금 선봉이 되게 하니 공이 또 정벌에 따라 나서 66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다음 해 봄에 대장군 귀가 경주로 돌아가자 공이 홀로 힘껏 싸우며 여전히 돌아가지 않았다.
청정이 성을 나와 남은 병사를 모두 이끌고 공을 네 겹으로 포위하니 공이 칼을 뽑아들고,
“청정아! 누가 감히 기룡과 교전(交戰)하려는가.”
하고 크게 호통을 치며 곧 말을 달려 포위를 무너뜨리고 나갔다. 청정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무리들에게 경계하며 말하기를,
“이 어찌 죽음을 각오한 군대가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경솔하게 범하지 말라.”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왜노들이 모두 두려워 벌벌 떨며 감히 뒤쫓지 않았다.
이전에 황조(皇朝)의 총병(總兵) 이절(李梲)이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근역(沙斤驛)에서 왜노를 격파하였는데 공이 정벌에 따라 나서 200명의 목을 베었다. 얼마 후에 총병이 탄환에 맞아 죽자 휘하의 군사 700여 명이 대장군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절(梲)이 이미 죽었으니 정(鄭) 아무개에게 소속되어 왜노를 막기를 원합니다.”
하자 대장군이 이러한 내용을 갖추어 중국 조정에 아뢰었고, 공이 이에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중국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공을 총병관으로 삼고 제(制)하기를,
“어왜총병관(禦倭總兵官) 이절이 전사함에 휘하의 군사들이 정 아무개의 군대에 소속되기를 원하니 아무개에게 절의 군사를 거느릴 것을 명하노라.”
하였다.
중국인들이 서로 감탄하며 말하기를,
“정 아무개가 외국 사람으로서 발탁되어 황제의 명을 받아 총병관이 되었으니, 이는 전대(前代)에 없었던 일이다.”
하였다.
공이 조서를 받자 대장군 귀가 공에게 하례하며 말하기를,
“왜노가 속국(屬國 조선(朝鮮))을 잠식하는데 총병관이 삼군(三軍)을 이끌고 국난을 막음에 용감하고 계책이 있으니, 만약 속국의 문무 제신들이 모두 총병과 같다면 왜노는 족히 평정하고 말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고 예폐(禮幣) 및 활과 화살을 보내어 우례(優禮)를 보였다. 도어사 호(鎬) 또한 공에게 하례하며 말하기를,
“총병의 충성과 용맹을 칭찬할 만합니다.”
하고 화폐(花幣)를 보내어 장려하고 권면하는 뜻을 보였다.
9월에 공이 대장군 동일원(蕫一元)을 따라 성주(星州)에 이르러 진병(進兵)할 것을 굳게 청하자 대장군이 공의 성의에 감동하여 장수들에게 서둘러 진주(晉州)로 갈 것을 명하였다. 공이 선봉에 서서 새벽닭이 울 무렵 강을 건너 날이 밝기 전 곧바로 망진봉(望晉峰)으로 달려가 석만자(石曼子)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마침내 진주를 수복하였다.
왜노가 평정되자 절도사를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29년(1601, 선조34)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김해(金海)ㆍ밀양(密陽) 두 곳의 부사를 거쳐 청도 군수(淸道郡守)가 되어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였다가 좌도 절도사(左道節度使)로 옮겼고 전라도 절도사로 고쳐 제수되었다. 45년(1617, 광해군 9)에 추천으로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에 제수되었다.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향년 61세였다.
공은 사람됨이 걸출하고 용맹스런 위엄이 있었으며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잘 하였다. 신장이 7척이었으며 눈이 밝아 밤에도 가느다란 터럭까지 볼 수 있었고, 소리는 큰 종과 같아서 매번 길게 휘파람을 불면 10리 밖까지 들렸다. 어렸을 때부터 강개(慷慨)하였으며, 모두 7년 동안 종군(從軍)하였는데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100여 차례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청정과 도산(島山)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날아가는 탄환이 상투를 꿰뚫었으나 몸에는 다친 데가 한 군데도 없어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뻐하며 신(神)처럼 여겼다. 죽인 왜노가 1만 명을 헤아리니 왜노들이 지금까지도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어린아이가 울 때 문득 공의 이름을 불러 그치게 하곤 하였다.
공의 첫 번째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아무 벼슬을 한 세필(世弼)의 딸이다. 진주가 함락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적삼에 글씨를 써 공에게 남기고는 마침내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자식이 없었다.
공의 두 번째 부인인 정경부인 예천 권씨(醴泉權氏)는 홍계(弘啓)의 딸로 아들 넷, 딸 둘을 낳았다. 장남 익린(翼麟)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차남 득린(得麟) 또한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그 다음은 덕린(德麟)이고 그 다음은 시린(時麟)이다. 장녀는 생원 김시절(金是梲)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박언단(朴彥枬)에게 시집갔다.
공은 어머니 섬기기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하기로 이름이 났다. 형 인룡(仁龍)에게 아들 상린(祥麟)이 있었는데,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수길의 난 때 포로로 붙잡혀 가자 공이 1000금을 들여 마침내 속환(贖還)시켰다.
이전에 대장군이 죽도(竹島)에서 싸울 때 8명의 장군이 섬을 빙 둘러싸고 늘어섰는데 평행장(平行長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죽음을 무릅쓰고 곧장 공격해 들어왔다. 8명의 장군이 패하여 진주로 돌아왔는데 공의 장수와 병사들만 한 명도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었으니, 대장군이 감탄하며 “이절(李梲) 휘하의 700명 군사가 훌륭한 장수를 얻었구나.”라고 하였다. 금상(今上 영조(英祖)) 때에 이르러 시호를 충의(忠毅)라고 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혁혁한 공을 세운 충의공은 / 赫赫忠毅
천자의 방패와 성이니 / 天子干城
지혜롭고 용감하며 / 旣智且勇
또 위엄 있고 명철하였네 / 又威而明
섬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키자 / 島夷初叛
군대의 뒤를 따랐으며 / 公從軍旅
평원에서 말을 달려 / 平原躍馬
우리 방어사를 빼앗아 왔네 / 奪我防禦
사상이 친히 맞이하여 / 使相親逆
초야에서 공을 만나더니 / 公遇草萊
중구에서 깃발을 되돌려 / 中丘反旗
저 괴수(魁首)를 겨드랑이에 끼고 왔네 / 腋彼渠魁
그때 대국(大國 중국(中國)) / 維時大邦
또한 덕음에 감복하여 / 亦服德音
용맹스런 천자의 군대가 / 矯矯六師
그 마음을 귀의하지 않음이 없었네 / 莫不歸心
슬프게도 이공(李公 이절(李梲))이 / 哀玆李公
사역에서 전사하자 / 死于沙驛
휘하에 속하기를 애걸하니 / 乞屬麾下
그 군사가 칠백이었네 / 其軍七百
이에 새서를 내려 / 乃降璽書
공의 충성을 장려하기를 / 奬公之忠
“너 기룡이 / 曰汝起龍
출정함에 공이 있어 / 濯征有功
도독이 칭찬하고 / 都督揚之
경리가 천거하니 / 經理擧之
짐이 사사로이 하는 것이 아니라 / 匪朕私之
무리가 추대한 바이다.” 하면서 / 而衆所推
이에 총병에 제수하여 / 爰授總兵
하늘의 주벌을 마치도록 하니 / 俾訖天誅
공이 절하고 명을 받아 / 公拜受命
마침내 왜노를 평정하였네 / 遂平倭奴
제고가 함에 있으니 / 制誥在函
영예가 철권보다 더하고 / 榮踰鐵券
예폐가 광주리에 있으니 / 禮幣在篚
광영이 군진에 진동하였네 / 光動戎陣
진을 통제하게 하는 것으로 / 畀此統鎭
어찌 말달리던 수고를 다 갚겠는가 / 豈酬驅馳
유궁을 빛낼 것은 / 焯于幽宮
오직 이 명시가 있으리 / 惟有銘詩
<끝>
[註解]
[주01] 명나라 …… 정공 :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곤양(昆陽),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이다. 1586년(선조 19) 무과에 급제한 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申砬) 휘하로 들어가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경(趙儆)ㆍ김성일(金誠一) 등의 부름을 받고 금산ㆍ거창ㆍ상주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정유
재란 때는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부름을 받고 대장으로 임명되어 9읍(邑)의 장관과 함께 금오산성을 지키고 적장을 참수하였
다.
그 공으로 경상 우병사가 되었으며, 1598년에는 명나라 군대의 총병(摠兵)을 대행해 경상도 방면에 남아 있던 일본군을 소탕하여
용양위 부호군이 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ㆍ삼도 수군통제사 등을 지냈다. 시호는 충
의(忠毅)이다.
[주02] 천계(天啓) : 중국 명(明)나라의 제15대 황제 희종(熹宗)의 연호로, 1621~1627년에 해당한다.
[주03] 조공 경(趙公儆) : 조경(趙儆, 1541~1609)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사척(士惕)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의주 판관, 강계 부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방어사가 되어 황간ㆍ추풍 등지에서 싸웠으나 패배하
고 이어 김산(金山)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부상을 입었다.
이 해 겨울 수원 부사로서 독산성(禿山城)에서 적에게 포위된 권율(權慄)을 도왔으며, 이듬해에는 권율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대첩
을 거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었다. 행주산성에서의 승리로 한양을 탈환할 수 있었고, 이 공으로 도성서도 포도대장(都城
西都捕盜大將)에 임명되었다.
이후 훈련대장ㆍ함경북도 병마절도사ㆍ한성부 판윤ㆍ회령 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604년(선조 37) 선무 공신(宣武功臣) 3등으
로 풍양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장의(莊毅)이다.
[주04] 우지(牛旨) : 경상도 지례(知禮)와 거창(居昌)의 경계에 있는 고개의 이름으로, 우지치(牛旨峙) 혹은 우지령(牛旨嶺)이라고 한다.
[주05] 신창(新倉) : 경상도 거창의 동북쪽에 있던 창고의 이름이자 지역의 이름이다.
[주06] 삼봉산(三峰山) : 경상도 거창과 전라도 무주(茂朱) 사이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주07] 김산(金山) 추풍역(秋豐驛) : 김산은 경상도 김천(金泉)의 옛 이름이며, 추풍역은 김산의 서쪽에 있던 역의 이름이다.
[주08] 곤양(昆陽) : 경상남도 사천(泗川) 지역의 옛 이름이다.
[주09] 이광악(李光岳) : 1557~1608.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진지(鎭之)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
제한 후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진주성을 포위하여 목사 김시민(金
時敏)의 형세가 위급해지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성 안으로 들어가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싸우다가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를 대신하여 총지휘관이 되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100여 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에 나서 적을 격퇴하였으며, 전라도 병마절도사ㆍ훈련원 도정을 거쳐 경기 방어사
가 되어 선무 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주10] 김성일(金誠一) : 1538~1593.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다. 이황(李
滉)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1) 문과에 급제하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1577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
辨誣)를 하였으며, 이후 함경도 순무 어사ㆍ사간ㆍ나주 목사 등을 지냈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의 실정을 살핀 후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하였으나 임진
왜란이 일어났다. 처벌이 논의되었으나 같은 동인(東人)인 유성룡의 변호로 경상우도 초유사에 임명되었고, 그 후 경상우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죽었다.
학문적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역할을 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동인에 속하여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다. 저서에 《학봉집》ㆍ《해사록(海槎錄)》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11] 권공 길(權公吉) : 권길(權吉, 1550~1592)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응선(應善)이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음보로 기용되어 상주 판관(尙州判官)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북상하자 동래부(東萊府)를 왜군에게 잃고 후퇴한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의 군사
와 합동하여 상주에 쳐들어온 왜군과 싸웠으나 열세로 패하고 전사하였다. 상주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주12] 금오산(金烏山) : 경상북도 구미ㆍ칠곡ㆍ김천의 경계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주13] 정경세(鄭經世) : 1563~1633.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다. 유성룡(柳
成龍)의 문인으로, 1586년(선조19)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 검열 등을 거쳐 사가독서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尙州)의 인사들이 의병을 규합하고 정경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왜적과 맞닥뜨리게
되어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해 겨울에는 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호서(湖西) 지역으로 가다가 천연두에 걸려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
임진왜란 후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와 부제학ㆍ전라도 관찰사ㆍ대사헌ㆍ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우복집》ㆍ《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주14] 김광두(金光斗) : 1562~1608. 조선 중기의 학자ㆍ의병장으로,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여우(汝遇), 호는 일묵재(一默齋)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경세(鄭經世)ㆍ이준(李埈)ㆍ전식(全湜) 등과 같이 경상도 함창(咸昌)ㆍ황령
(黃嶺)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다.
전쟁이 끝난 1599년에 정경세 등 상주 선비들과 함께 사설 의료원인 존애원(存愛院)을 설립하였다. 1606년 45세의 나이로 사마
시에 합격하였으며, 상주의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 되었다.
[주15] 강응철(康應哲) : 1562~1635. 조선 중기의 학자ㆍ의병장으로,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보(明甫), 호는 남계(南溪)이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모집하여 경상도 상주를 지켰다. 그 후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의병과 뜻을 같이하여 여러 곳에서 왜적
들과 싸워 이를 무찔렀다. 벼슬은 찰방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하여 은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독서와 저술로 일생을 보
냈다. 상주의 연악서원(淵岳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남계문집》이 있다.
[주16] 김해(金澥) : 1534~159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사회(士晦), 호는 설송(雪松)이다. 1564년(명종19)
문과에 급제한 후 형조 좌랑ㆍ지평ㆍ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상주 목사로 있던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황한 나
머지 순변사 이일(李鎰)을 맞이한다는 핑계로 성을 떠나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판관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개령(開寧)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상주성을 일시 탈환하기도 하
였다. 이듬해 왜적에게 포위되어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인조 때 다시 참판에 가증(加贈)되고 향리에 정문
(旌門)을 세워 표창을 받았다.
[주17] 깃발을 눕히고 : 깃발을 눕히는 것은 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한 것으로, 군대에서 휴전하거나 철수할 때 하는 행동이다.
[주18] 석거(石車) : 돌을 발사하여 적을 공격하는 포차(砲車)이다.
[주19] 승실(陞實) : 실직(實職)으로 올린다는 의미이다.
[주20] 오유충(吳惟忠) :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2년(선조25) 12월에 흠차통령절병유격장군(欽差統領
浙兵遊擊將軍)으로 보병 1500명을 거느리고 나왔다가 1594년 1월에 되돌아갔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부총병으로 이여송(李如
松)을 따라 참전하여 충주 등지에서 싸웠다.
[주21] 25년 : 중국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인 만력(萬曆) 25년이라는 말이다.
[주22] 25년 …… 일으켰다 : 정유재란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주23] 이 문충공 원익(李文忠公元翼) :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
(公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李錙)의 4세손으로, 1569년(선조2) 문과에 급제한 후 형조 좌랑
ㆍ정언ㆍ지의금부사ㆍ이조 판서ㆍ우의정ㆍ영의정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조 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내려갔고, 평양이 함락된 후에는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고, 선조가 환도한 후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하였다.
1595년 우의정 겸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로 임명되었으며, 영남에 독부(督府)를 개설하고 왜적 토벌에 힘썼다. 인조의 묘정
(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오리집》ㆍ《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24] 권 충장공 율(權忠莊公慄) : 권율(權慄, 1537~1599)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장수로,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
당(晩翠堂)ㆍ모악(暮嶽)이다. 1582년(선조15) 문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 도사ㆍ예조 정랑ㆍ경성 판관ㆍ의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
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금산군 이치(梨峙) 싸움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전라도 순찰사로 승
진하였다. 또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서 왜적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고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3만 명의
왜적을 대파하였다.
그 공으로 도원수에 올랐고, 이후 한성부 판윤ㆍ비변사 당상ㆍ충청도 순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선무 공신
(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주25] 곽 충익공 재우(郭忠翼公再祐) : 곽재우(郭再祐, 1552~1617)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
다.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왕의 뜻을 거스른 글귀가 있어 파방(罷榜)되었다.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왜적을 맞아 싸울 때마다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때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 불렸다. 이후 형조 정랑ㆍ경상좌도 방어사ㆍ오
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5)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린 후에 다시는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망우당집》이 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주26] 모국기(茅國器) :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이다. 《국역 상촌집(象村集)》 〈임진년부터 경자년 사이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중국의 조
사(詔使) 및 장신(將臣)의 성명〉에 모국기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호는 행오(行吾)로 절강(浙江) 소흥위(紹興衞) 사람이며 무진사(武進士)로 벼슬길에 나섰다. 흠차통령절승영병유격장군(欽差統
領浙勝營兵游擊將軍) 도지휘동지로 보병 3100인을 이끌고 정유년 9월에 왔다가 기해년 10월에 돌아갔다.
성주(星州)에 주둔했을 때 유민(流民)을 불러 모으고 둔전(屯田)하며 군사를 훈련시켰다. 얼마 뒤에 사천(泗川)에서 패한 뒤 사세
용(史世用)으로 하여금 왜적의 진영을 왕래하게 하였는데, 급기야 적이 물러가자 그것을 스스로 자기의 공으로 삼았다.”
[주27] 이수일(李守一) : 1554~1632.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이다. 우의정 이완
(李浣)의 아버지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장기 현감 등을 지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
으켜 분전하였다.
이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정유재란 때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요청으로
성주 목사가 되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杖刑)을 받고 종군하였다. 1599년 북도 방어사가 되었고 이후 북도 병마절도사ㆍ남도 병마
절도사ㆍ경상우도 병마절도사ㆍ길주 목사ㆍ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6년(광해군8) 숭정대부에 올랐고,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 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계
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주28] 녹가전(綠檟田) : 경상도 고령(高靈)에 있는 땅의 이름이다.
[주29] 적림(赤林) : 경상도 고령(高靈)에 있는 숲의 이름이다.
[주30] 헌괵(獻馘) : 적을 죽여 왼쪽 귀를 잘라 바치는 것을 말한다.
[주31] 모 유격(茅游擊) : 중국 명(明)나라의 유격장군(游擊將軍) 모국기(茅國器)를 말한다. 《국역 상촌집(象村集)》 〈임진년부터 경자
년 사이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중국의 조사(詔使) 및 장신(將臣)의 성명〉에 모국기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호는 행오(行吾)로 절강(浙江) 소흥위(紹興衞) 사람이며 무진사(武進士)로 벼슬길에 나섰다. 흠차통령절승영병유격장군(欽差
統領浙勝營兵游擊將軍) 도지휘동지로 보병 3100인을 이끌고 정유년 9월에 왔다가 기해년 10월에 돌아갔다.
성주(星州)에 주둔했을 때 유민(流民)을 불러 모으고 둔전(屯田)하며 군사를 훈련시켰다. 얼마 뒤에 사천(泗川)에서 패한 뒤 사세
용(史世用)으로 하여금 왜적의 진영을 왕래하게 하였는데, 급기야 적이 물러가자 그것을 스스로 자기의 공으로 삼았다.”
[주32] 김응서(金應瑞) : 김경서(金景瑞, 1564~1624)를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응서는 그의 초명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성
보(聖甫)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왜적을 소탕하고 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평안도 방어사 및 전라도ㆍ경상우도ㆍ충청도ㆍ함경북도ㆍ평안도의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겸 도정, 북로방어사, 길주 목사 등
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9년(광해군11)에 후금(後金)이 세력을 확장하자 명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청해왔다.
광해군은 명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강홍립(姜弘立)을 오도 도원수(五道都元帥)로,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군과 합류하였으나 부차(富車)에서 크게 패하자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경서가 적진의 사정을 자세히 기록하여 본국으로 보내려 하였으나 강홍립이 이를 적에게 고발하여 살해당하였
다. 후에 우의정에 추증되고,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주33] 마공 귀(麻公貴) : 마귀(麻貴)를 가리킨다.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로, 호는 소천(小川)이다. 1597년(선조30)에 정유재란이 일어
나자 명나라가 파견한 조선 원병의 제독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왔다. 그해 12월 도원수 권율(權慄)과 합세하여 울산에 내려가
도산성(島山城)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적장 흑전장정(黑田長政)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패하여 경주로 후퇴하였다.
1598년에 또 만세덕(萬世德)이 거느린 14만 원군을 따라 들어와 동래로 내려가서 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성과를 올리지 못
하고 일본군의 철수로 귀국하였다.
[주34] 양공 호(楊公鎬) :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인 양호(楊鎬, ?~1629)를 가리킨다. 1580년(신종8) 진사가 되어 우첨도 어사(右僉都
御史) 등을 지냈다. 정유재란 때 경략조선군무사(經略朝鮮軍務使)가 되어 참전했다가 울산에서 벌어진 도산성(島山城) 전투에서
크게 패해 병사 2만을 잃었다.
이를 승전했다고 보고했다가 탄로나 겨우 목숨만 구하고 파직되었다. 1618년 중국 조정에서 병부좌시랑 겸 첨도어사로 임명하여
요동을 경략하게 하였는데 후금(後金)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에 투옥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1629년(의종2)에 처형되었
다.
[주35] 부평역(富平驛) : 경상도 울산(蔚山)에 있는 역의 이름이다.
[주36] 파새(擺賽) :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로, 자세한 내용은 미상이다.
[주37] 이절(李梲) :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로, 자세한 내용은 미상이다.
[주38] 사근역(沙斤驛) : 경상도 함양(咸陽)에 있는 역의 이름이다.
[주39] 제(制) : ‘명(命)’과 같은 뜻으로, 천자에게만 쓸 수 있다.
[주40] 동일원(董一元) :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로, 호는 소산(小山)이다. 1597년(선조30) 12월에 흠차제독중로어왜총병(欽差提督中
路禦倭總兵) 중군도독부좌도독(中軍都督府左都督)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제수되어 조선에 출정하였다. 《象村集 卷57 天朝詔
使將臣先後去來姓名 記自壬辰至庚子》
[주41] 석만자(石曼子) : 1535~1619. 임진왜란 때의 왜장으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혹은 심안도(沈安道)라고도 한다. 일본의
유명한 무사 가문인 시마즈 씨의 15대 당주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의 차남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만 5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다른 장군들과 함께 약 1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동래ㆍ울산 등지를 점령하고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ㆍ함양ㆍ남원ㆍ전주 등지를 함락한 후 그해
11월에 5백여 척의 해군을 이끌고 노량(露梁)을 습격했다가 이순신(李舜臣)의 함대와 해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겨우 50여 척을 건져 도망갔는데,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전라도 남원에서 박평의(朴平意), 심당길(沈當吉)
을 비롯한 80여 명의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여 데리고 가기도 하였다.
[주42] 29년 : 만력(萬曆) 29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만력은 중국 명(明)나라의 황제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주43] 우리 방어사 : 조경(趙儆)을 가리킨다.
[주44] 사상(使相) : 이원익(李元翼)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 우의정 겸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45] 새서(璽書) : 황제의 옥새를 찍은 친서를 말한다.
[주46] 철권(鐵券) : 훈공(勳功)을 적어 공신(功臣)에게 나누어 주는 서책을 말한다.
[주47] 진을 …… 것으로 : 정기룡은 1617년에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로 천수(薦授)되었다.
[주48] 유궁(幽宮) : 무덤을 가리킨다. <끝>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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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明總兵官朝鮮國輔國崇祿大夫三道水軍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忠毅鄭公墓誌銘 幷序 - 宋穉圭
天啓二年二月甲午。有明禦倭總兵官朝鮮國輔國崇祿大夫三道水軍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鄭公。卒于軍。四月戊辰。葬尙州沙伐之原。公諱起龍。字景雲。昆陽人也。曾祖哲碩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祖義傑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父浩。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公初諱茂壽。神宗皇帝十四年。中武科第。昭敬王夢神龍起自鐘樓。飛昇于天。乃遣內臣往視之。會公獨至鐘樓下。倚柱而立。內臣還報。卽召入。見其容貌。大異之。遂賜今名。補展力副尉訓鍊院奉事。二十年。平秀吉叛。從防禦使趙公儆。率師往討。儆踰嶺。聞倭奴兵已薄嶺下。乃以公爲前鋒將。至牛旨。倭奴前鋒五百人。屯于新倉。公單騎馳入陳中。擊殺倭奴百餘人。倭奴披靡。皆遁去。有酋四人。持利劒伏叢薄中。公旣行。劒及其背。卽抽矢射殺三人。其一人棄劒而走。公由是名聞國中。倭奴兵屯瀯水橋。儆留軍不敢與戰。公獨與壯士八人。復踰牛旨。破倭奴於三峰山下。夜倭奴謀襲公軍。公不動。天明躍馬超高墻。倭奴合兵以圍之。公復躍馬潰其圍。斬倭奴首。懸于馬鞍。至山上。已而。倭奴躡公後圍之數重。公乃折橡木爲椎。搏擊之。倭奴顱骨。皆破碎。死者甚衆。公旣潰圍。倭奴悉兵。又追之。公乃擲椎。引弓背。射殺倭奴。不可勝數。倭奴遂遁。夏五月。儆以其衆。退屯金山。秋。豐驛倭奴。潛師亟攻之。公率精兵。先登力戰。斬倭奴五十餘級。戰方酣。倭奴執儆。欲殺之。公卽拔劒入中堅。大呼。倭奴無殺我賢防禦使。倭奴怒。遂搤儆吭。將下刃。公已躍馬斬倭奴。奪儆而歸。倭奴望見莫敢犯。是時。公母金夫人在智異山。公辭儆。入智異山。金夫人爲公語曰。王室危急。汝趣行。不可濡滯。公涕泣受命以行。至昆陽。昆陽太守李光岳。將赴晉州。卽差公爲守城將。令保昆陽。招諭使金誠一。召至晉州。又差公爲游兵將。尙州判官權公吉戰死北川。及誠一爲觀察使。卽日啓公攝判官。保金烏山。是時。倭奴陷尙州。或據山陽。或據中牟。或據化寧。殺掠人民。文莊公鄭經世與州人金光斗,康應哲等。率鄕兵疾戰敗績。牧使金澥。提其民。入龍華洞。倭奴間行將屠之。公至谷口。見倭奴已被山矣。然地險不可馳擊。乃爲優人。卽馬上。劃然長嘯。或立或卧。或隱或見。倭奴相顧稱其能。欲生得之。追公甚急。公偃旗且奔且止。誘倭奴。出於平原。然後建旗疾擊之。倭奴大敗走。州下僵屍縱橫七十里。州人老弱。皆得全無一傷者。未幾。倭奴自中牟趍化寧。公設石車以待之。倭奴旣至。石乃發。死傷甚多。公乘勝斬三百級。倭奴猶據州城中。一月不出。公發州民四百人。屯于西亭。約以束火攻。倭奴三門置將。惟東門不陳一兵。選壯士。伏于城東栗林中。夜半吹角以爲號。四百人同時燃火。自西亭入倭奴營。焚其廬舍。倭奴驚。奔走避火。果從東門遁山中。栗林伏兵逆擊之。斬四百級。遂復尙州。十二月。與倡義軍。擊倭奴於唐橋下。斬二百級。倭奴退屯大乘山。公又追擊大破之。令壯士李希
春等數十人。分守險阻。遇倭奴輒狙擊之。斬一千級。已而。又斬一千級。倭奴相戒不敢近。明年五月。授中訓大夫軍資監副正。陞實判官。秋。皇朝游擊將軍吳惟忠駐師尙州。公攝牧使。十一月。陞實牧使兼敢死軍大將。又明年。加通政大夫兼討捕使。二十五年夏六月。秀吉復叛。李文忠公元翼。體察南方。至尙州。與都元帥權忠莊公慄,防禦使郭忠翼公再祐。議却賊之策。各擧大將。衆皆曰非鄭某。不可。會皇朝游擊將軍茅國器。見公容貌。謂元翼曰。鄭某有戰勝相。元翼喜。下令趣召。是時。星州牧使李守一與公。城守金烏山。公欲赴召。而守一終不開門以送之。元翼歎曰。鄭某不至。則社稷其將危矣。卽策馬躬自迎之。公感激。以死自誓。遂趣行。至泰馬原。與元翼遇於道中。公下馬。元翼望見亦下馬。班草而坐。與之論禦倭之事。公爲陳方略甚悉。元翼於是授大將。以二十八州兵馬。付公曰。明日願見捷書。公對曰。謹當如公之令。卽日進軍。綠檟田。遣斥候將李希春等。夜擊倭奴於竹田中。斬一百級。是時。倭奴屯赤林。臨龍潭水。而公軍在於水西。與倭奴隔水相對。進退不便。公欲使三軍渡水。然後乃擊之。預遣安東稜挺軍。伏於藪中。公先登。與倭奴戰。佯敗走。至理同嶺。倭奴悉衆而追之。公乃反旗殊死戰。有一將軍朱衣白馬。立旗前。鷙勇善戰。倭奴遂推爲元帥。至平原。立拔長劒。廻閃之。飄颻直前。與公交鋒不二合。公自馬上生擒朱衣白馬者。挾于掖下而馳騁之。朱衣倒垂。而白馬猶在後也。其手中雖有長劒。莫能用。倭奴大敗。公於是遂縛朱衣白馬者。懸於旗上。倭奴望見。皆震懾。莫敢逆戰。公縱兵奮躍而進。頃之。安東稜挺軍。出於藪中。左右夾擊。斬一萬二千餘級。倭奴中矢死傷者。又過半矣。及戰罷。三軍所斬倭奴首。積平原中。如夏屋者。且五六。不能盡輸。唯割左耳而載者。又數四馬。公旣獻馘于元翼。又俘朱衣白馬者以獻之。元翼拊髀曰。鄭某百戰百勝。眞名將也。茅游擊善相人矣。是時。晉州節度使金應瑞兵敗。坐黜。元翼啓公攝行節度使事鎭星州。倭奴淸正聞公生擒朱衣白馬者。望風而遁。自嶺以西五百里。奄然復定。公之功也。初元翼。躬自迎公也。諸從事。內懷不悅。及公旣至泰馬原。遇諸從事不爲禮。諸從事恚。見元翼而詆之。元翼曰。公等無嗔。禦賊行師。烏可責其小禮乎。後三日。公上捷書。諸從事無不慙服。九月。特授左道兵馬節度使。趣命視師。是時。皇朝大將軍麻公貴。與都御史楊公鎬。擊淸正於嶺南。十一月。公率精兵。赴慶州。中國將士從征者十四萬人。見公治軍極簡易。傷者撫之。病者摩之。謂公麾下曰。中國將士。若得公爲大將軍。孰不爲公死戰也。十二月。公至慶州。從大將軍當右營。淸正直犯大將軍。公引所部兵三千。先登力戰。大破之。斬八百級。淸正懼棄城夜遁。公追擊至富平驛。又破之。遂復慶州。居未幾。大將軍貴至蔚山。距淸正營六十里。公引輕騎。與游擊將軍擺賽爲先鋒。遇倭奴力戰破之。斬四百五十餘級。遂圍島山。淸正晝夜堅城守。大將軍貴心憂之。乃令茅國器爲先鋒。公又從征。斬六百六十餘級。明年春。大將軍貴。還慶州。獨公力戰。猶不反。淸正出城。悉引兵。圍公四匝。公拔劒大呼。淸正孰敢與起龍交鋒乎。卽躍馬潰圍而出。淸正望之戒其衆曰。此豈非敢死軍邪。爾無輕犯。由是。倭奴皆震慴。不敢追之。初皇朝總兵李梲。率麾下軍擊倭奴于沙斤驛。公從征。斬二百級。已而。總兵中丸死。麾下軍七百餘人。詣大將軍。叩頭言曰。梲已死。願屬鄭某。以禦倭。大將軍具奏以聞。公於是名動天下。詔以公爲總兵官。制曰。禦倭總兵官李梲。戰死。麾下軍願屬鄭某。其命某領梲之軍。中國人相與嗟歎曰。鄭某拔自外國。受帝命爲總兵官。此前世之所未有也。公旣受詔。大將軍貴爲公賀曰。倭奴蠶食屬國。總兵官奬率三軍。捍國難。勇敢有謀。使屬國文武諸臣。皆如總兵。則倭奴固不足平也。爲致禮幣及弓矢。以示優禮。都御史鎬。亦爲公賀曰。總兵忠勇可嘉。爲致花幣。以示鎬奬勸之意。九月。公從大將軍蕫一元至星州。固請進兵。大將軍感公之誠。令諸將趣之晉州。公先登。雞鳴渡江。未明直趣望晉峰。擊石曼子。大破之。遂復晉州。倭奴平。辭節度使。還田里。二十九年。陞嘉善。由金海,密陽二府。守淸道郡兼防禦使。遷拜左道節度使。改全羅道節度使。四十五年。薦授三道統制使。以疾卒。享年六十一。公爲人魁偉威猛。善騎射。身長七尺。目烱烱。夜見毫毛。聲若洪鐘。每長嘯。能聞十里。自少時慷慨。從軍凡七年。身冐矢石。百餘戰。未嘗敗北。嘗與淸正。戰于島山。有飛丸穿其頭䯻。而膚體一無所傷。人皆驚喜以爲神。所殺倭奴以萬數。倭奴至今畏其威。小兒啼。輒呼公名以止之。公初配贈貞敬夫人晉州姜氏。某官世弼之女。晉州陷。破指出血。書其衫以遺于公。遂投江而死。無子。公繼配貞敬夫人醴泉權氏。弘啓之女。生子四人。女二人。子長曰翼麟。出身。次曰得麟。亦出身。次曰德麟。次曰時麟。女長適生員金是梲。次適朴彥枬。公事母以至孝聞。兄仁龍有子祥麟。幼而孤。秀吉之亂。爲所俘。公入千金。竟贖之。初大將軍戰于竹島。八將軍環島而陳。平行長冐死直衝。八將軍敗還晉州。獨公將士無一人死傷者。大將軍歎曰。李梲麾下七百人。能得其帥矣。至今上時。謚曰忠毅。銘曰。
赫赫忠毅。天子干城。旣智且勇。又威而明。島夷初叛。公從軍旅。平原躍馬。奪我防禦。使相親逆。公遇草萊。中丘反旗。
腋彼渠魁。維時大邦。亦服德音。矯矯六師。莫不歸心。哀玆李公。死于沙驛。乞屬麾下。其軍七百。乃降璽書。奬公之忠。
曰汝起龍。濯征有功。都督揚之。經理擧之。匪朕私之。而衆所推。爰授總兵。俾訖天誅。公拜受命。遂平倭奴。制誥在函。
榮踰鐵券。禮幣在篚。光動戎陣。畀此統鎭。豈酬驅馳。焯于幽宮。惟有銘詩。<끝>
강한집 제15권 / 묘지명(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