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집 제3권 / 묘갈(墓碣)
나공(羅公)의 묘갈명
나생 만갑(羅生萬甲)이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듣건대, 어르신께서 고문(古文)을 배워 어진 공경(公卿)들의 명(銘)을 많이 지었다 하니, 지금 삼가 명을 청하고자 합니다. 선묘(先墓)에 양시(羊豕)를 잡아맬 자리에 아직껏 글을 새기지 못했으므로, 이제 글을 지어 새겨서 영원히 전하기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나는 늦게야 태어나서 조고(祖考)를 미처 섬기지 못했으므로, 그 아름다운 행실의 전해온 것들을 삼가 한두 가지를 채척(採摭)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 조모(祖母) 이씨(李氏)를 20여 년 동안 섬기면서 날마다 그 제행(制行)의 나머지를 보건대, 그것을 인해서 우리 조고의 집안에 모범을 보인 교화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조고의 휘는 윤침(允忱)이고 자는 언보(彦甫)인데, 10세 때에 부모를 연해서 여의고 지나친 슬픔으로 몸이 쇠약해져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고, 형과 아우가 이어서 을사(乙巳)의 화(禍)가 있었으므로, 스스로 젊어서 가난(家難)을 만났다 하여 자신의 자취를 깊이 숨기었습니다.
무오년에는 상상(上庠)에 오르고, 계유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혼탁한 세상에 빛을 더욱 감추고 담박하게 스스로 지조를 지켜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벼슬은 6품에 불과하였습니다. 무인년 모월 모일에 작고하니, 향년이 52세였고, 광주(廣州) 북방리(北方里)에 장사지냈습니다.
우리 조비(祖妣) 이씨(李氏)는 공정대왕(恭定大王)의 후예인 휘 원기(元記)의 딸입니다. 원기공은 소년 시절에 청송 선생(聽松先生)과 친구로 사귀었고, 자라서는 와서 별제(瓦署別提)가 되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가정(嘉靖) 갑진년 4월 3일에 우리 조비를 낳았습니다.
우리 조비는 총명함이 뛰어나서, 7세 때에 《효경(孝經)》,《소학(小學)》,《삼강행실(三綱行實)》,《정의(正儀)》등의 글을 가르쳐 주자, 한번 보고는 다 외워 버리므로, 별제가 이르기를,‘이 아이의 천품이 이러하니, 이것으로 만족하다.’하고, 마침내 다시 다른 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어버이가 병환이 있을 적에 곁에 시약(侍藥)할 사람이 없자, 이씨가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고 약방문(藥方文)을 점검하여 약을 지어 쓰되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았습니다. 그 거실(居室)은 반드시 창벽(窓壁)을 청결하게 하고, 베개를 개고 서책을 정돈하는 것을 가지런하게 하였습니다.
19세에 우리 조고에게 시집왔는데,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어 내외종(內外從)들이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전(古典)과 전훈(前訓) 및 어려서 가정(家庭)에서 배운 부덕(婦德)에 관한 것들을 모두 책자(冊子)에 기록하여 새벽과 밤으로 외워 읽었고, 평소에 밤늦게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면서 삼가고 더욱 공경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책(書冊)이 해졌더라도 벽을 바르지 못하게 하면서 이르기를,‘글자마다 부모(父母)와 성현(聖賢)의 휘이니, 감히 더럽힐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사는 반드시 친히 집행하되 힘써 십분 정결하게 하였고, 사당에 올리기 전에는 감히 새로운 음식을 먼저 맛보지 않았습니다.
병이 위독함에 미쳐서는 벽어(碧魚)를 맛보고 싶어하므로, 가인(家人)이 벽어를 올리자, 물리치고 들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사당에 올리기 전에는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내외(內外)의 상(喪)을 당해서는 궤연(几筵)을 떠나지 않고 손수 전(奠)을 드렸고, 모든 채소나 과일의 좋은 것들은 입에 넣지 않았으며, 소상(小祥) 안에는 머리를 빗지 않았고, 이가 보이도록 웃지도 않았으며, 잠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습니다.
복상(服喪)을 마치고 나서는 형제들과 재산을 분배할 적에 스스로 나쁜 것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항상 자제들에게 이르기를,‘나는 평생에 털끝만큼도 심사(心事)를 속여본 적이 없으니, 너희들은 힘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계축년 월일에 병이 위독해지자,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바르게 누워 작고하니, 향년이 90세였습니다.
그 다음해 정월에 조고의 묘에 부장(祔葬)하였습니다. 대략이 이러하니, 그 세쇄한 일을 대강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어르신께서 참작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므로, 나는 가장을 받아 가지고 몸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공의 행실도 명법(銘法)에 맞거니와 더구나 어진 배필의 행실은 초과한 것은 있으나 미치지 못한 것은 없으니, 감히 승낙하여 명하지 않겠는가.”하고, 마침내 손을 씻고 다음과 같이 쓰노라.
나씨(羅氏)는 안정(安定)에서 나와 망족(望族)이 되었다. 그 처음에 휘 천서(天瑞)는 고려에 벼슬하여 안천군(安川君)에 봉해졌고, 뒤에 휘 계종(繼宗)에 이르러서는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에 추증되었다.
인의가 휘 세걸(世傑)을 낳았는데, 세걸은 창릉 참봉(昌陵參奉)이 되었고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식(湜), 익(瀷), 숙(淑)인데 모두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의 의표가 되었다. 그 중씨(仲氏)가 성균관 전적으로 졸관하였는데, 종실 고흥수(高興守)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정해년에 공을 낳았다.
명덕(冥德)이 합한 곳에 실로 하늘이 도와 주기에 타당한지라, 능히 덕문(德門)을 짝하여 상서를 낳고 복을 내리었다. 모두 남녀 8인을 낳은 가운데 아들은 둘뿐인데, 큰아들 적(績)은 일찍 작고하였고, 그 다음 급(級)은 보덕(輔德)으로 졸관하였는데, 효우(孝友)하고 충신(忠信)하여 나와 서로 좋게 지냈다.
큰딸은 사인(士人) 박길염(朴吉恬)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인 변희순(卞希諄)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곽규(郭珪)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인 김성(金惺)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관찰사 이용순(李用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장령(掌令) 채형(蔡衡)에게 시집갔다.
길염의 두 아들은 아무, 아무이고, 희순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아무, 아무이고, 딸은 아무, 아무, 아무에게 시집갔다. 성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아무이고, 딸은 사인(士人) 아무에게 시집갔다. 용순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아무는 진사이고, 딸은 진사 아무에게 시집갔다.
형은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아무, 아무, 아무이고, 딸은 사인 아무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급의 1남은 바로 나에게 명을 청한 사람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태평 성대에 쌍벽을 이루어 / 瑞世雙璧
내외의 덕이 아름다움 함께했으니 / 媲德竝美
물리를 자세히 미루어 보건대 / 細推物理
하늘의 뜻이 우연한 게 아니련만 / 天不偶爾
이미 그 덕은 가지런하게 해 놓고 / 旣齊其德
어찌 그 수는 어긋나게 하였는고 / 胡爽其年
북방의 마을에는 / 北方之里
수목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 維樹綿綿
내가 좋은 말로 명을 써서 / 我銘好辭
원한을 하늘에게로 돌리노라 / 歸怨于天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8
-------------------------------------------------------------------------------------------------------------------------------------------------------
[原文]
羅公墓碣銘
羅生萬甲。踵門而謂余曰。竊聞丈人學古文多銘賢公卿。今願竊有請也。先墓羊豕之繫。迄未有文。今欲論撰。以圖不朽。吾之生也後。不逮事祖考。其懿行之家傳者。謹摭其一二。唯是事祖母李二十餘年。日見其制行之餘。則因知吾祖刑家之化矣。吾祖諱允忱。字彦甫。十歲。連喪父母。毁幾㓕性。兄及弟矣。繼有乙巳之禍。自以少遭家難。屛迹畏影。戊午。登上庠。癸酉。及第。益剷彩混世。淡泊自守。不求人知。故官不過六品。以戊寅某月日卒。壽五十二。葬在廣州北方里。吾祖妣曰李。恭定大王之後諱元記之女也。元記。公少與聽松先生友。長爲瓦署別提。終卧不起。以嘉靖甲辰四月初三日。生吾祖妣。明睿過人。七歲 。授孝經,小學,三綱行實,正儀等書。過目成誦。別提曰。此兒天資如此。只此足矣。遂不復敎以他書。甞親癠。傍無侍藥。李不離於側。檢方治藥。藥必先嘗。其居室必潔其窓壁。斂枕整書。齋如也。十九。歸吾祖。治家有法。中表式之。凡古典前訓及婦德之少得於家庭者。皆箚記冊子。晨夜誦讀。平居夜寢晨興。竟夕報業。斂斂益虔。書冊弊壞。不許粧壁曰。字字皆父母聖賢之諱。不敢慁也。祭必親執。務盡精潔。未薦不敢甞新。及病篤。思甞碧魚。家人以進。則却不食曰。未薦也。內外之喪。不離几筵。親自奠獻。凡蔬果之美。皆不入口。朞祥之內。不理髮不見齒不解帶。服闋。與兄弟分財。輒自取薄。常語子弟曰。吾平生無毫髮欺心事。汝等勉之。癸丑月日。疾革。沐浴更衣。正席而逝。得年九十。明年正月。祔于祖墓。大略如是。其細可槩也。唯丈人圖之。余授狀而興曰。公行應銘法。况賢配之行。有所過也。無不及焉。敢不諾而銘諸。遂與手而書曰。羅出安定爲望族。其始有諱天瑞。仕高麗。封安川君。後至諱繼宗。贈通禮院引儀。生諱世傑。昌陵參奉。有子三良。曰湜曰瀷曰淑。以學行羽儀士林。其仲氏。卒官成均典籍。娶宗室高興守女。以嘉靖丁亥。生公。寘德之合。寔宜天昌。克配德門。産祥降嘏。熊蛇八夢。弄璋維一。長積早卒。次級。卒官輔德。孝友忠信。與余善。女士人朴吉恬。次士人卞希諄。次軍器僉正郭珪。次士人金惺。次觀察使李用諄。次掌令蔡衡。吉恬二男。曰某曰某。希諄二男三女。曰某曰某。女某次某次某。惺一男女。男曰某。女士人某。用諄一男女。男曰某進士。女進士某。衡三男二女。男曰某曰某曰某。女士人某。餘幼。級一男。卽乞銘者。銘曰。
瑞世雙璧。媲德並美。細推物理。天不偶爾。旣齋其德。胡爽其年。北方之里。維樹綿綿。我銘好辭。歸怨于天。<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