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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Goa)에서의 첫째날
뭄바이에서 어제 저녁 5시 20분에 출발하여 오늘 아침 7시 30분에 고아 빤짐에 도착하였다.
버스 정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여관 Comfort G.H에 짐을 풀었다. 밤새도록 차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오늘은 하루 푹 쉬었다가 내일부터 관광에 나서기로 하였다.
우리가 묵은 방의 바로 위쪽 2층에 우리보다 하루 미리 온 세 사람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아내는 한국인들이 있다는 말에 안도하는 것 같았다. 나를 믿고 따라왔으면 내말을 들어야지 다른 사람 말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려는 아내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그런 나의 태도를 눈치 차린 것인지 머리를 식히겠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내일부터 다닐 곳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관방에 앉아 있었다. 내일은 남부 고아, 모래는 북부고아, 그리고 그 이튿날은 올드 고아......... 밖에서 들어온 아내가
“구경하러 왔지 밥도 안 먹고 여관방안에 들어앉아 책 보려 왔느냐?”
고 한다. 그렇잖아도 심기가 틀려 있는데 기름을 끼얹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아내도 서운한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침식사도 굶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보았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내도 잠이 오지 않는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10시가 훨씬 지나서 나는 깊은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1시가 조금 덜 되어서 깨었다. 아내도 언제 들어와 잤는지 나와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잠 자고 나니 몸이 가볍다. 배가 고팠다. 밤새도록 고생하고 온 아내의 마음을 잘 다스려 주지 못한 게 미안하여 내가 한풀 꺾고 들었다.
여관을 나와서 식당을 찾아 아침 겸 점심식사를 veg fried rice로 거하게 먹었다. (2인 분을 주문하였더니 너무 양이 많아서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이 후 우리 부부는 1인분만 시켜서 둘이서 나누어 먹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만도비 강(Mandovi River)으로 갔다. 만도비 강은 바다에 인접해 있어서 그런지 강이 크고 수량이 많으며 많은 선박들이 떠있고 물살도 비교적 세찬 것 같다. 강에는 많은 부유물들이 물위에 가득 흘러간다. 부유물들이 가까이 왔다가는 시야 밖으로 밀려나곤 한다. 밀려가고 밀려오는 각양각색의 부유물을 바라보면서 우리 인생도 저 부유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우리부부는 길가 소공원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나라 여대생들 5명이 우리 쪽으로 우루루 몰려왔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올드 고아를 다녀왔다면서, 세 명은 남부고아로 가기 위하여 짐을 가지고 나오는 길이라 하였다. 그들은 여행 중에 만난 사이인데 또 해어지게 된 모양이다.
우리는 그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강 아래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갔다. 좌측에 흰 교회건물이 보였다. 동정녀 마리아 성당이었다. 성당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흰 색으로 칠하여 눈에 확들어왔다. 계단을 오르는데 어떤 사람이 초를 사라고 하여 두 개를 샀다. 외관상 웅장해 보이는 성당은 1500년대 중반에 세운 것이라 하는데 안은 온통 금색으로 화려하게 꾸며놓았고 정면과 중앙 그리고 뒤쪽에 동정녀 마리아상을 배치하여 아름답게 장식하였고 고요하였다. 우리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관리인이 와서 불을 켜주고 성당 안을 고루고루 구경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다.
성당을 나와서 여관으로 돌아오다가 포도 1kg을 20루피에 샀다.
저녁식사 때가 되어서 식당을 찾아나섰다. Comfort G.H에서 큰길 쪽으로 50여m 나오다가 보면 오른쪽 2층에 조그마한 레스토랑이 있는데 밖에서 보니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아내의 마음도 달래줄 겸해서 그곳으로 올라가서 veg fried rice와 chowmeun을 시켰다. 모두 서양인이고 동양인은 우리 부부밖에 없었다. 음식의 양도 적고 맛도 별로고 값은 비싸고 서비스도 좋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우리가 늙은 동양인이라고 앝보고 하는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고아에서의 둘째 날
아침 일찍 빤짐 까담바 버스 스탠드로 가서 Madgaon행 버스를 탔다.
고아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달려갔다. 출근시간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한다. 왠 사람들이 저렇게 많을까? 인도에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 같다. 참으로 사람이 많다. 교통량은 많은데 도로가 다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언덕길에서는 노후차량들이 뿜어대는 매연 때문에 숨쉬기조차 거북하다.
그러나 달리는 차창너머 나지막한 산과 야자수와 가옥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아름답고 운치가 있다. 모든 게 아름답게 보여 새롭게 전개되는 모든 풍치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산등이나 산자락에 깎아내리고 건물들을 신축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도로에서 흉물스런 고물차들이 매연을 뿜어대며 꿈틀대고 있으니, 자연의 아름다움이 훼손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보존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개발에 대한 나의 몰이해인가?
마드가온에서 베나울림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아직 출근시간이라 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숲 사이로 난 길을 달리는 기분이 괜찮다. 집들이 전부 숲 속에 숨어있다. 꽤 멋진 집들이 숲 속에서 숨바꼭질을 한다. 여기는 상하(常夏)의 나라, 강열한 햇볕을 막아줄 숲이 필요한 곳이리라. 그래서 집을 아예 숲에 의지하여 지었거나 집을 지어놓고 숲을 조성한 것 같다.
베나울림 해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내렸다. 뭄바이에서 만났던 여행객의 베나울림에 대한 탄성이 귀에 울려온다.
“아저씨, 베나울림에서 꼴바까지의 해안이 너무 좋아요 아주머니와 함께 다정하게 손잡고 거닐어 보세요!” ‘그래, 그렇게 하지!’하는 마음으로 베나울림에서 내렸다.
10시가 막 지나가고 있다. 배 속에서 소리를 낸다. 나의 오랜 식습관 때문에 아침을 먹지 않으면 하루 시작이 어긋나는 것 같은 착각을 잘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내 눈은 식당만 찾는다. 그런데, 아내는 야자수 나무숲 사이의 길이 아름답다면서 이국의 풍취에 몰입되어 있다. “우리 이쪽으로 가보자.”, “아니 이 샛길로 들어 가보자.”는 등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숲 사이로 난 길 저쪽에 썩 마음을 끄는 레스토랑이 보였다.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이 너무 아름답다. 레스토랑 들어서니 마당의 테이블에는 수영복차림의 서양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우리도 그들 틈에 끼어서 종업원이 가져다 준 메뉴를 보았다. 아침식사로 적당한 것이 무엇인지 알수 없어서 맛살라도사와 Bread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을 하나만 시켰다. 맛살라도사와 빵조각 하나만 달랑 나왔다. 그것으로 비싼 아침식사를 마치고, 식당의 작은 공원과 같은 뜰을 기웃거렸다.
아내는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정원에 정신이 팔려 어린애처럼 좋아하였다.
식당에서 큰 길로 나와 해변까지 가는 길이 10분 거리라고 하였는데, 한 20분 이상 걸은 것 같다. 나무 그늘이 없는 길에서는 햇살이 무척 따갑다. 해변에 도착하기도 전에 작열하는 햇볕에 걸음이 무디다. 파도소리가 시원하게 귓전을 때린다. 마침 길목에 야자수을 파는 사람이 있어서 두 개를 사서 목을 축였다.
모래 언덕을 올라서니 시야가 시원하게 트이면서 아라비아 해(海)가 내 마음까지 출렁이게 하였다. 내 나이도 잊고 신발을 벗어 가방에 매어달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바지가랑이가 젖는 것도 모르고 파도가 모래톱을 핥고 있는 그 너머로 뛰어들었다. 아내도 좋아한다. 그러나 아내는 바다 저쪽으로부터 밀려오는 파도를 보더니 지난 12월에 있었던 인도양의 쓰나미를 떠올리면서 두려운 마음을 내 비친다. 거칠 것 없이 넘실대면서 밀려오는 파도 파도 파도! 내 발등과 종아리를 간질이면서 모래톱을 핥는 바닷물은 맑고 부드럽고 상큼하다.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아내도 해변의 아름다움과 일광욕을 하고 있는 서양 사람들의 모습에 정신이 빼앗겼는지 쓰나미에 대한 기우도 누그러지고 모래사장과 물가를 오가면서 즐거워하였다. 나는 파도를 타고 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눈이 다하지 못하는 아라비아 해의 수평선을 바라다보았다.
아라비아 해는 1500년대 중엽 향신료를 얻기 위하여 포르투갈 인들이 인도로 들어왔던 바다이다.
그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의 세력이 침약의 깃발을 달고 해적질을 했었던 바다였으나 지금은 평화롭고 한가하며 낭만이 넘친다.
지금 모래위에서 일광욕을 하거나 물가에서 자맥질하면서 즐기는 서양 사람들은 자기들 조상들이 인도에서 행했던 과거사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았을까? 바다의 주인인 인도사람들은 저만치 밀려나 있고 몫이 좋은 해변에는 외국관광객들만이 북적댄다.
잡상인들이 물건을 들고 우리에게로 온다. 사지 않겠다고 해도 끈질기게 수십 미터를 따라 붙는다.
광주에서 왔다는 여학생을 만났다. 그는 혼자인데 해변을 거닐고 있는 모습이 아주 예뻤다. 그녀와 동행이 되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젊은이와 동행이 되었다는 것이 무척 기뻤다. 아내는 그녀가 딸처럼 사랑스러운지 여행하는 동안의 고생담을 아주 진지하게 들어주면서 자상한 어머니가 된 것 같았다.
그녀는 30여 일간 인도북부여행을 마치고 남부로 내려왔는데 북부여행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우리는 다리도 아프고 햇볕도 따갑고 더워서 그늘에 가서 쉬다가 다시 걷기로 하였다. 멋진 야자수가 드리운 좋은 그늘에는 벌써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였고, 크고 멋진 야자수 그늘은 대부분 해변 레스토랑에서 차지하여 서양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겨우 해를 가려주는 나무 밑을 찾아 쉬기로 하였는데 바닥에는 온통 작은 가시나무들이 깔려있었다. 작은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서 쉬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베나울림에서 꼴바까지는 꾀 먼 거리였지만 해변의 풍경에 취해서 멀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걸었다. 꼴바에 도착하여 해변공원으로 가서 쉬었다. 해변 안쪽으로 야자수 그늘 길이 길게 나 있다. 야자수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멋진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로 가자고 했더니, 광주에서 온 여학생이 “이 길 안쪽에서 며칠 전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는 말을 들었다면서 그 길로 들어서기를 꺼려했다. 우리는 해변 공원 야자수 그늘에서 주위의 풍경에 몰입되기도 하고 출렁이는 아라비아 바다를 바라보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느 조그만 해변식당에 들려 늦은 점심을 먹고 광주 여학생과 해어졌다. 아내는 딸을 낮선 곳에 떨어뜨려 놓고 가는 것처럼 헤어지는 것을 마음 아려하였다.
고아에서 3일째되는 날 -Vagator와 Anjuna-
오늘은 고아의 북부 지역 맙사 주변의 해안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아침에는 잔뜩 찌푸린 날씨였는데 10시경이 되니 구름이 걷히고 맑아지기 시작하였다. 만도비 강을 건너 맙싸로 가서 Vagator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어저께 마드가온을 갔다가 올 때는 버스를 갈아타는데 고생을 좀 했었는데, 오늘은 쉽게 차를 갈아타고 다녔다. 이젠 버스를 타는 요령도 생긴 것 같다(?)
맙사에서 바가또르로 가는 길 양편은 야자수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어울려 이국의 풍치를 만끽할 수 있다. 아자수와 커다란 교목(喬木) 숲 속에는 별장처럼 아름다운 주택들이 들어 있다. 돌보는 이가 없는지 가끔 퇴락했거나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집들도 있었다.
비포장 길은 붉은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다. 그 주변의 땅은 모두 붉은 색깔을 드러내보였다. 실제로 Chapora Fort가 있는 산은 모두 규석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바가토르의 해변으로 가는 곳에서 내려야 했는데, 버스종점까지 갔다.
마침 인도인 젊은 남녀가 같이 내렸다. 그는 우리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면서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느냐, 남쪽이냐 북쪽이냐, 이름이 무어냐, 직업이 무어냐, 자녀들이 몇이냐, 내 나이가 몇이냐, 자기들은 뭄바이에 사는데 휴가를 왔다, 바가또르와 차뽀라는 아름다운 곳이다, 한국에도 이런 아름다운 해변이 있느냐.... 등등 질문공세가 대단하다. 우리가 차에서 내린 곳은 Chapora라는 곳이고 해변 쪽으로 난 길을 계속 따라가면 바가또르비치가 나온다 하였다. 전면에 바라보이는 산의 성채가 Chapora Fort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우리는 우선 차뽀라 포트에 오르기로 했다. 그들은 숲 속에 있는 어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면서 아주 친절하게 성에 오르는 길을 일러 주었다.
산이 낮아서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올랐다. 서양인 노부부가 성(城)에서 내려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보낸다. 나는 서양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마주치면 밝은 눈빛으로 인사하는 좋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 산 정상의 성안은 공터였다. 성은 포르투갈 식민지로 있을 때 만들어진 것이라 하는데 아마 군사용이었던 것 같다.
성안은 잔디와 돌밭과 중앙에 근자에 만들어놓은 듯한 석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성을 한바퀴 돌면서 사방의 경관을 바라다보았다.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차포라 마을, 서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바가토르 해변, 북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차뽀르 해변의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사만 연발할 뿐이었다...
우리가 성에 올라오자 어떤 젊은 사람이 다가오더니 친절하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오렌지 주스를 내놓으면서 팔아주기를 강요한다. 얼마냐고 했더니 40루피를 달라고 하였다. 사지 않겠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통사정을 한다. 30루피에 하나 팔아주었다.
성에서 바가또르 해변으로 내려왔다. 고운 모래사장에서 일광욕 즐기는 사람, 자맥질을 하면서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 모래사장에서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로 해변은 왁자지껄하다.
바가또르 해변은 남부고아의 꼴바와 베나울림의 해변처럼 해안선이 모래로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모래사장이 끝난 곳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모래사장을 대신하다가 그너머로 다시 모래사장이 이어지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파도를 타고 바닷물이 들락이는 모래사장 그리고 파도소리를 크게 만들어주는 크고 둥근 바위들, 그리고 그 뒤로 한발 비켜서서 주위를 싸고도는 늘씬한 야자수들이 어우러진 별세계에 들어온 기분이다.
모래언덕 야자수 그늘에 앉아 우리도 별세계의 일부가 되어 바가또르가 베풀어 놓은 향연에 참여한 영광과 즐거움도 가질 수 있었다. 아, 잊지 못할 바까또르 해변..................
바가또르 해변에서 안주나로 가는 버스 정거장까지 20분 이상을 걸어갔다. 안주나 해변 입구에 내려서 점심을 먹고 안주나 비치로 갔다. 햇볕이 따갑고 더워서 해변으로 내려가지 않고 야자수 그늘이 드리워진 길을 따라 수요일에만 열린다는 벼룩시장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길을 따라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먼지 때문에 우리는 길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서 모래사장을 걸어 내려갔다.
2km정도는 걸어서 내려온 것 같았다. 벼룩시장은 야자수를 비롯한 울창한 수림(樹林) 속에 있었다. 벼룩시장에는 물건을 진열하는 구조물만 보일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오늘은 시장이 서지 않는 날이라도 문을 열어놓은 가게가 몇 개는 있을 줄 알았는데 시장 안은 완전히 페허처럼 허허한 빈 공간이었다. 상품진열을 위한 대부분의 구조물들이 엉성하다. 그러나 그 공간이 엄청나게 넓다. 무질서하게 구조물들을 설치해놓은 그 일대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인하여 땅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벼룩시장이 서는 날은 무척 혼잡하다고 한다. (아침에 여관을 나올 때 여관주인이 안주나에서 벼룩시장이 서는 날은 날치기와 소매치기가 많다면서 시장에 갈 때는 항상 소지품에 신경을 쓰라고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벼룩시장 중간 지점에 있는 우물가에서 물을 깃는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우리가 신기하게 보이는지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쪼콜랫도 주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멀리 내려왔기 때문에 되돌아가는 길이 걱정이 되었다. 버스정류장을 찾아서 2Km이상을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우리가 걸어 나가는 길은 산책로로서 야자수가 늘어선 낭만이 넘치는 참으로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늙고 피로에 지친 우리부부는 괴롭고 힘든 길이었다. 게다가 오토바이가 끊임없이 질주하며 매연을 안겨주어 짜증이 나기도 하였다.
마침 큰 길을 들어서자마자 맙사행 버스가 와서 쉽게 빤짐까지 올 수가 있었다.
고아에서 넷째 날 - Old Goa에 갔던 날-
아침부터 고아( Goa)의 태양이 작열한다.
올드 고아로 가기 전에 아침 일찍 까담바 버스 스탠드로 가서 내일 함삐로 가는 버스표를 예약했다.
예약을 해 놓고 보니 Semi luxury였다. 9:30분에 출발하여 9시간 후에 호스펫에 도착한다고 한다.
함삐행 버스가 출발하는 곳으로 가서 우리가 타고 갈 버스가 어떤 것인지 9시 30분에 출발하는 것을 직접 구경을 하고 올드고아로 가기로 하였다.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인도인들 가운데서도 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버스를 타는 사람들의 행색은 너무 초라해 보였고 버스 위에 싣는 짐들은 피난 보따리를 연상시켰다.
아내가 함삐행 버스을 보더니 걱정이 태산이다. 나는 인도 서민들이 타는 버스도 경험해 보자면서 위로해 보았지만 내심 걱정도 되었다. 함삐행 버스가 스탠드에 도착하자마자 승객들이 다투어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올드고아행 버스 스탠드로 향하였다.
옹ㄷ 고아행 버스는 빤짐에서 만도비 남쪽 강변으로 난 길을 따라 30여분을 달려서 올드 고아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오른 쪽에 고딕 양식의 고풍스런 교회의 넓은 뜰로 들어섰다.
이 교회는 봄 지저스 대성당(Basilica of Bom Jesus)으로 고아주의 수호 성인인 성 프란시스 제비어(St Francis Xavier)의 영구 유해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교회 안 제대 가까운 우측에 별도로 안치되었는데 은색으로 장식한 관으로 유해가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
성당 우측에 있는 별실로 들어가니 거기에도 별도의 미사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십자가 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그 안에 있는 장식물(주로 신부님들의 법의-法衣-)을 구경하였다. 그런데 어떤 관리인이 이곳은 일반인이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면서 나가라고 하는데 신부님이 구경해도 괜찮다고 하여 조금 더 구경하다가 나왔다. 신부님들의 옷뿐만이 아니라 미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온갖 도구들이 진열되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기구들을 벽면에 걸어 두었고, 낡은 성서와 각종 인쇄물들도 보였다.
우리는 성당 옆으로 이어진 건물의 2층과 3층으로 올라가서 아트 갤러리도 관람하였다.
따가운 햇볕을 받으면서, 길 맞은편에 있는, 봄 지저스 대성당과는 달리 외부를 흰 색으로 칠한 굉장히 큰 쎄 성당(Se Cathedral)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이 무척 넓고 중앙 정면에 중심이 되는 제대가 있고 사방으로 십자가와 마리아상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 장식도 화려하고 웅장해 보였다.
다음에는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성당을 들러보고 바로 그 옆에 있는 고고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인도인에게는 좀 굴욕적이라고 생각되는 폴란드 식민지 시절의 총독들의 대형 초상화가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였고 그 당시 인도 고아지방의 풍속도와 파괴된 흰두 문화의 파편인 석조물을 전시해 놓았다. 그리고 많은 석조물들은 노천에 방치해 놓았다. 조각품이나 각종 게시물에 대한 설명을 영어와 힌두어로 표기하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냥 스쳐가는 그림일 뿐이었다.
성당과 박물관을 나와서 버스 스탠드 부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빤지로 돌아왔다.
고단한 몸을 침대에 맡겼더니 오후 4시가 지나도록 골아 떨어져 잠들었었다. 앞으로의 일정은 무리하지 않게 잘 조정을 하여야 할 것 같다.
저녁식사는 동정녀 마리아 성당 앞 론니에 소개된 집을 찾아갔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어둠이 내린 시각이라 Punjab Restaurant & Bar라는 곳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였다.
우리가 앉은 자리 옆에 젊은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시켜먹고 있는 음식의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딸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딸리“라는 음식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니까 이 젊은 부부도 호의로 우리를 대하여 주었다. 자기들이 먹던 로띠와 달을 더 주문하여 우리 식탁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말은 통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보면서 웃고 온 몸으로 의사를 소통해 보려고 애를 쓰다가 또 서로 웃고 아주 즐겁고 유쾌한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식당을 나와서 일요일 저녁미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성당을 들어가려고 하는데 성당 입구에서 또 한국 여자 두 사람을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여관에 투숙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관에서 또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그녀들과 헤어져서 동정녀 마리아 성당을 향하여 올라갔다.
성당에서는 축포가 터지고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결혼미사가 집행되고 있었다. 축하객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모두 정장을 하였거나 단정한 옷차림을 하였고, 여자 어린이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깨끗한 옷차림을 하고 예쁜 모습으로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축하객들 중에는 흰두교 복장을 한 사람도 있었고, 이슬람 복장을 한 사람들도 보였는데, 그들도 신부님께서 결혼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경건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도 뒷자리에 앉아서 결혼을 축하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라고 기도해 주었다.
첫댓글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만 살아온 저희들에겐 아주 생소하고 또 이국적인 모습들이네요. 참 그러고 보니 그러한 세상를 경험하고자 다니는 많은 분들도 계시구요.. 젊은이들도 감히 꿈조차 꾸기 힘든 여행을 하시는 대 선배님의 모습이 존경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 입니다. 부디 이번 여행을 통하여 더욱 큰 세상을 느끼시고 그를 통하여 대선배님 내외분의 삶이 더욱 은혜롭고 충만해 지시며 건강으로 넘치시기를 빕니다. 이어지는 여행기를 부탁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