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관한 시 6편]
아버지
장길
지난겨울 온 세상이 하얀 눈 속에 묻힌 날,
아버지는 호올로 세상을 떠났다
대학병원, 요양병원 수차례 전전하다
끝끝내 고향집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요양병원 집중치료실에서
거인처럼, 차력사처럼, 온몸에 바늘을 꼽고
고무호스 주렁주렁 늘어뜨린 채
이승의 마지막 끈을 놓아버렸다
생전에 아버지는 개미 한 마리 밟지 않으려고
고갤 숙이고 땅만 보고 다녔다
짐 자전거를 많이 끌어서
왼쪽 어깨는 주저앉고 오른쪽은 솟아올랐다
영하 18도 살뚱맞은 추위 속에
하늘은 연사흘째 사카린 같은 눈을 뿌렸다
적막하디적막한 새벽 한 시-
비보를 받고 달려간 요양병원 집중치료실,
칸막이가 쳐진 하얀 시트 위에 반듯이 누워
아버지는 단 한마디 말이 없고
고향에서 올라온 홍시 하나, 머리맡에
빨간 조등을 켜고
아버지의 마지막 밤을 꺼질 듯 비추고 있었다
아름다운 작별
김영주
기다리면 다시 올 사람인가
시를 만드시던
巴人, 내 아버지
하늘 밑을 파고
그를 묻었다
그가 다니던 길도
함께 넣었다
눈물도 못 내고
기어가 나도 묻힌다
아아. 내 아버지 彼人
아버지의 지게
정군수
지게를 지면
아버지는 말없이 걸으셨다
소가 먼 길을 가듯
봄 들녘
민들레풀 한 짐이면
아지랑이가 반 짐이었다
한가위 대보름
햇곡이 반 짐이면
보름달이 한 짐이었다
봄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아버지의 지게를 본다
보름달 한 짐을 짊어지고 오는
아버지의 젊은 지게를 본다
지게를 지면
말없이 걸으시던 아버지를
아버지의 지등(紙燈)
정군수
측간도 쓸고 뒤안도 쓸고
외양간도 쳐내고
휘영청 달 밝은 정월 대보름
아버지는 지등을 달았다
달빛이야 저 먼저 밝았어도
달빛이야 저 혼자 밝았어도
불빛마다 고여오는 당신의 사랑
밤마다 혼자 안고 뒹굴다
밤마다 사립 열고 먼길을 가다
아버지는 지등을 달았다
그것이 눈물인 줄을 모르고
그것이 사랑인 줄을 모르고
한밤내 지등에다 기름을 부었다
두릅나무
정군수
한겨울에도 아버지는 머리 꼭대기에다
새 순을 심었다
뾰조록이 돋는 새 순이 호롱불만큼 비치면
얼세라 다칠세라 어린 순을 보듬고
찬 겨울을 밝혔다
봄이 오고 봄비 내려
아버지의 손금 닮은 새 순이
손가락 마디만큼씩 하늘을 바라보면
큰 아들이 먼저 꼭대기 순을 뚝 잘라갔다
작은 아들이 옆 가지 순을 똑 따갔다
정수리에서 새 순이 부러지는 소리가
우레처럼 고막을 울리고 얼얼하게 발끝까지 내려와
흙 알갱이를 적시고 눈물이 되었다
행여 남이 볼세라
아버지는 밤마다 다시 정수리까지 눈물을 날라
상처에 발랐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끈적끈적하게 이마를 타고 내릴 때까지
허망하게 부스러진 삭신에서 가시가 돋을 때까지
아버지는 하늘이 비치는 상처에다 또 새 순을 키웠다
그해 봄이 가기 전
아들이 다시 돋아난 순을 따러 왔을 때
아버지는 먼저 정수리를 내밀었다
아들은 새 순에서 흐르는 눈물이 옷에 묻을세라
비닐봉지에 넣고
아버지가 평생 서서 하늘을 보던 후미진 언덕길을
느린 걸음으로 빠르게 돌아나갔다
비닐봉지에서는 호롱불 같은 빛이 흘러나와
아들의 길을 비추어 주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 언덕에는
고목이 된 등걸에서 다시 싹이 난 두릅나무가
지금도 살고 있다.
깨꽃냄새
정군수
내 몸에서 깻묵 썩은 냄새가 나지야
깨꽃 같은 등창이 몸에 번져
병석에 오래 계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깨꽃냄새 같지만 썩은 냄새는 아니예요
썩는다는 말이 불경스러워 말했지만
아버지는 눈감고 고개를 저으셨다
썩은 깻묵에서 깨꽃냄새가 날 리 없지야
썩은 깻묵에서 깨꽃냄새가 날 리 없지야
고소한 기름 다 빠져나가고
거름이 되기 위하여 썩어가는 깻묵처럼
아버지는 힘없이 세상에 몸을 부렸다
아버지 누우신 한여름 깨밭 한 뙈기
깻묵처럼 푹푹 썩는 아버지의 무덤가에
깨꽃 초롱초롱 여름바람 향그럽다
병상의 문 열리어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깨꽃냄새 같은 아버지 목소리
썩은 깻묵에서 깨꽃냄새가 날 리 없지야
썩은 깻묵에서 깨꽃냄새가 날 리 없지야
새들이 다 물어가지 못한 깨꽃노래가
깻묵냄새 묻은 무덤가에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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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풀꽃
정군수
백두산 풀꽃에 맺힌 이슬방울들이 모여서
백두산 천지의 물이 되었다는 것을
그 풀꽃들의 눈물이 고여서
천지의 깊이가 되었다는 것을
백두산 뿌리에
뿌리를 얽고 살아온 풀꽃들은 알지
백두산 풀꽃들의 이야기가 모여서
천지의 물소리가 되었다는 것을
그 풀꽃들의 눈빛이 고여서
천지의 물빛이 되었다는 것을
백두산 천지 넓고 깊어
하늘의 구름은 담을 수 있어도
풀꽃들의 한숨까지는 담을 수 없어
천지의 안개가 되었다는 것을
바람 거세면 두 눈 부릅뜨고
돌틈에 목숨걸고 살아온 풀꽃들은 알지
* 시작 노트
백두산 천지는 우리 민족의 기상과 염원이 서린 곳이다. 삶의 뿌리도 이곳에 이어졌고 민족혼도 이곳에서 구현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백두산 풀꽃은 우리민족을 함유하는 시어라 할 수 있다. 백두산에 피어있는 꽃은 천지의 물과 물빛과 안개를 보며 꽃을 피운다. 수천 년 동안 거센 바람을 거스르며 백두산 뿌리에 뿌리를 얽고 살아온 풀꽃은 민족의 한을 극복한 강건한 삶의 의지이다
파김치
정군수
어느 삶이 지쳐 쓰러졌을 때
숨죽어 올라온 파김치를 생각한다
소금에 절이고 맵게 버무려져
시금시금 맛이 우러날 때까지
파김치는 얼마나 자기를 죽여야 했던가
파가 파김치가 되어야
삶은 다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문 들길의 꽃들도 아름다웠다
꽃핀 파김치는 맛이 없다
꼿꼿하게 버티고 사는 것보다
힘을 빼야 세상은 그를 껴안는다
꽃피기 전 층계를 내려와
신국물을 우려내야 인생도 맛이 난다
팍팍한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파김치 한 가닥을 얹어주는 일은
느리게 동행하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노을 같은 파김치 한 보시기 앞에서
나는 보리밥 한 그릇이 된다
* 시작 노트
파김치가 되기 위해서 파는 고춧가루와 소금에 맵게 버무려져 시금시금 국물을 우려내야 한다. 우리 인생도 아름다운 삶을 살려면 자기를 죽이고 계단을 내려와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보리밥이 되어야 한다. 보리밥은 파김치와 궁합이 잘 맞는다. 파김치가 되는 연습을 하며, 보리밥에 파김치를 얹어주며, 노을 같이 늙음을 우려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