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부’ 둔 선진국…나랏님이 노인 외로움 해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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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21.10.19
한익종
[더,오래] 한익종의 함께, 더 오래(79)
고독부? 영국이 2018년 새로 신설한 부처 이름이다. 고독부(Ministry for Loneliness), 뭐 세상에 이런 부처도 다 있나 싶었다. 일본도 2021년 2월에 고독담당 장관을 임명하고 고독의 문제를 국가적 과제로 삼고 있다. 세상에나, 고독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 그 폐해가 국가적으로 얼마나 심대하면 장관급 부처를 새로 만들었단 말인가? 실제로 고독부를 신설하면서 영국 정부는 ‘고독은 이제 개인의 문제를 떠나 국가가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라고 밝힌 바 있다.
고독은 연령과 성별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이 겪고 있는 심리적 상태지만 특히 노년층이나 경제적이건 육체적이건 상대적으로 취약한 계층이 많이 겪고 있는 문제다. 경제적, 육체적 환경이 취약해지면 사회적 유대가 느슨해 지고 이런 경우가 심해지면 아무리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는 하고 있지만 고독과 외로움에 따른 수많은 부작용에 노출된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오래전 지적한 소위,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현상이다.
소일거리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노인. [사진 한익종]
은퇴 후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느끼는 자존감의 결핍과 외로움은 인생 후반부를 괴롭히는 여러 요인 중에서도 가장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의식주의 걱정이 어느 정도 사라진 우리 사회의 은퇴자가 모두 공감하는 사실이다. 단지 인정하기 싫어할 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은퇴 후 늙어 가면서는 주위와의 인간관계가 점점 소원해 지면(심지어는 가족까지) 그에 따라 대부분의 고령자가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초고령사회로 이미 진입했다는 얘기는 이미 오래전 얘기다. 세계 최고의 고령화율을 보이는 일본이 2020년 기준 28.7%다. 우리나라는 현재 16.5%로, 일본에 비해선 그나마 낮은 수치를 보이지만 진행 속도를 보면 세계 최고수준이다. 우리나라도 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고립과 그에 따른 고독을 예방하기 위해 ‘고독부’를 만들 때가 올 것 같다. 오래전 여가부(여성가족부)를 만들었을 때 농 삼아 “아니, 무슨 여가 선용을 위해 부처까지 만드나?”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제 조만간 우리도 “아니 무슨 고독을 즐기기 위해 부처까지 만들어?” 할 날이 머지않았다. 슬픈 농담이다.
그런데 인생 후반부 고독의 문제를 정부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고독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다. 아무리 정부가, 사회가 나서도 개인 자신이 그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면 ‘가난은 나랏 님도 어쩔 수 없다’는 자조적 표현처럼 ‘고독은 정부가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귀를 강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까지 강제로 먹일 수는 없다는 논리다.
내로라하는 기업의 대표까지 오래 했던 어느 인사의 사례를 보자. 과거의 황홀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를 원망하며 자기 스스로 칩거 아닌 칩거에 든 사람이다. 심지어는 자녀와 부인까지도 소원해지니 거기서 오는 박탈감과 고독감은 이루 설명할 수 없다. 인생2막, 직장생활 시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 경제적 부를 이룬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공통된 특징이다. 드러내 놓고 고민을 털어놓지 못하고 내적으로 분을 쌓아가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힘들다는 공통점도 안고 있다. 나이 들어가며 찾아오는 이는 없지, 갈 곳도 마땅치 않지, 할 일은 마뜩잖지,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는 노후 요양의 성격이 의식주의 해결 차원을 벗어나 외로움과 고독과의 싸움, 자존감의 박탈에서 오는 괴로움의 해소일 것이다. 과거의 지위나 경제적 여건, 명예에 매달려 새로운 인생 3막을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느끼는 자존감의 박탈과 사회적 소원함의 해소는 앞으로 우리 세대가 안고 가야 할 숙명이다. 한때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주춧돌이 됐고, 눈부신 현대를 이룩한 일등공신이라는 존경을 받았던 베이비부머 세대가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서는 시간이 왔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모집단이 된 이들이 노후 ‘고독’(정신적, 경제적 의미도 포함)의 문제를 스스로 풀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앞날이 어떨 것인가는 명약관화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고독의 구렁텅이에 빠져 삶의 후반부를 허송할 것인가, 과거의 사고와 행태에서 벗어나 함께 사는 길을 택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이다. 자기 스스로 고독에서 탈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취미교실. 봉사와 경제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발룬티코노미스트적 삶이다.
서서히 다가오는 존재감의 박탈과 고독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바로 자기 스스로 사회적 필요성을 유지하면서 찾아갈 곳, 찾아오는 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룬티코노미스트 적(봉사+경제활동) 삶이 해답이다. 과거의 욕심을 내려놓고, 자기만 살겠다고 허우적거리던 시간에서 빨리 벗어나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면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유지하면서 일의 보람도 찾는 것이다.
은퇴 후, 지난 10여년의 날들을 회상해 본다.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는 내가 도대체 어떤 자신감에 이런 글을 쓰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이런 삶을 강조할까? 역시 봉사와 경제적 활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발룬티코노미스트적 삶을 지향한 것이 답이었다. 아직도 은퇴 후의 삶을 과거와 비교해 경제적 부를 쫓으며 자신만 잘살면 된다고 할 태세인가? 명심할 점이 하나 있다. 그런 자세에는 반드시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친구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내 인생 후반부의 삶을 고독부에 의지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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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2막에 가짜 부자 아닌 진짜 부자로 살아가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115604
중앙일보 2021.07.28 09:00
한익종
[더,오래] 한익종의 함께, 더 오래(76)
해녀 출신 할머니 몇 분이 지나가다가 체험공방에 들렀다. 이제 공방이 동네 어른의 휴게소가 되어서인지 가끔 지나가다 들려 세상사를 펼쳐 놓는다. 이젠 물질도 힘들어 못 하고 이렇게 더운 날에는 밭일도 못 한다는 얘기가 거반이다.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는 얘기다. 해녀 할망이 돌아간 후 넓은 공방에 앉아 책을 읽는다. 문득 ‘세상에 나같이 창의력 넘치는 사무실 갖고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해’라는 생각을 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인생 후반부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휴식을 취하며 읽은 마이클 센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한 페이지를 인용해 본다. “고통은 단지 봉급 수준의 정체(노후소득의 감소내지는 전무함)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두려움, 즉 내가 고물이 되어 버린다는 두려움의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자신들의 기술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196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을 기다리던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은 “실직은(은퇴로 봐도 될 듯)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뜻이지요. 일이 없는 사람은 동료 시민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랠프 엘리슨이 쓴 『투명인간』이 현실화하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노인교실의 독거노인 사회활동지원프로그램에서 실습지도하는 필자. 이 프로그램은 봉사가 수입을 창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진 한익종]
세상에나, 60년 전에 벌써 은퇴 후 인생 후반부를 사는 사람의 고통을 꿰뚫어 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니…. 김형석 교수께서는 100세를 살아보니 60세에서 70대까지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에 패러디해 보자. 직장에서 퇴직한 후 10년을 보낸, 60세를 넘어서고 보니 이제부터의 내 삶이 가장 행복할 것 같다. 함께 산책에 나선 아내가 내게 말을 건넨다. “여보, 과거에도 행복했지만 제주에 온 이후의 날들이 더 행복한 것 같아.” 그럼, 남편이 누군데.
그렇다면 은퇴 후 인생 후반부가 어떤 모습이면 정말 행복한 삶이 될까? 흔히들 표현하길 젊어서 열심히 돈을 벌어 인생 후반부 경제적 부를 누리며 하고 싶은 것 맘대로 하면서 과거를 추억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노후의 모습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아쉽게도 틀렸다. 그러기에는 남은 생이 너무 길고, 과거에 그리던 것 하기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에 부치고, 나아가서는 행복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각주구검하기에도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그렇다면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추구권은 도로아미타불이 됐다는 말인가. 아니다. 길은 아직 열려 있다. 바로 함께하는 자세로 스스로의 자존감과 성취감을 얻는 방법이 있다.
아내가 60세 때 환갑기념으로 보건복지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찬성한 일이 기억난다. “그래 인생 후반부는 돈이 아니라 보람과 성취를 통해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중요해.” 아내는 제주 어촌마을의 조그만 요양보호시설에 요양보호사로 출근한다. 그 만족감과 자긍심이란….
타인에게 기여하고 봉사한다는 것은 자기만을 위한 욕심을 내려놓았다는 것이고, 그런 삶의 태도에는 불만과 모자람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아내의 직업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직업이 아니라 이런 직업을 망라한 직업군과 직업관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바로 내가 제창한 ‘발룬티코노미스트’이다. 봉사와 경제활동을 아우르는 복합어, 발룬티코노미스트적 삶. 나는 2년 전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에 내려와 발룬티코노미스트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선견지명이 있어서인지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직전 해에, 앞으로 단체여행업은 도태될 것 같다는 예감에 여행업을 조금씩 줄여가면서 환경과 봉사, 창작을 아우르는 일을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제주 정착을 결행했다. 내 생각은 바로 발룬티코노미스트적 활동으로 나타났고, 그 이후 요양기관 어르신들 취미교실, 독거노인 사회활동지원, 어린이 환경·봉사·창작교실 운영 등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게 되더니 이젠 제법 많은 곳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온다. 틈틈이 그리고 만든 작품도 팔리게 됐고.
‘그까짓 돈 벌려고?’라고 얕잡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생 후반부는 자기만을 위한 욕심을 내려놓고, 사회적 필요성과 자존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가짜 부자로 남지 말고 진짜 부자가 돼 보자. 그 방법은 ‘함께 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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