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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어제 sbs스페셜 주제는 '간송 전형필'이었긔!
보다가 소드님들하고 같이 보고 싶어서 캡쳐 해봤긔!
다큐 전체 캡쳐가 아니긔! 문화재 자체에 대한 해설은 최대한 줄이고, 간송에 대한 부분만 주로 캡쳐했긔
참고해주시긔!
조선 시대 최고의 미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녀의 눈빛과 입술, 그녀의 자태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한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혜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입니다.
18세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수백 년 동안 모진 비바람과 역사의 소용돌이를 이겨내고 오늘날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았습니다.
여러분은 간송 전형필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비롯해서 약 5천여 점이 넘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켜왔던 사람입니다.
그가 설립한 이 간송미술관에는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국보 청자상감운학매병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도 소장돼있고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우원 장승업, 추사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천재 예술가들의 걸작들이 다수 소장되어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토록 귀한 문화재들을 모두 수집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그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재연이긔▼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에는 일본의 전문 도굴꾼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고분이나 유적지를 파헤쳐 수많은 유물을 약탈해갔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서울 장안에 기막힌 보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집니다.
이 소식은 당시 미술품 수집가였던 전형필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가 보기에도 천하제일의 명품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소유하고 있던 일본인이 제시한 가격은 무려 2만 원, 현재 시가 60억 원에 육박하는 거금이었습니다.
하지만 간송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친이 물려주신 땅 수백 마지기를 처분하여 이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결국 일본으로 넘어갈뻔했던 이 고려자기는 우리나라에 남을 수 있게 됐는데요.
이것이 바로 간송미술관에 있는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입니다.
짧고 좁은 목과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 그리고 굽까지 내려오는 유려한 S자 곡선,
게다가 비취색 하늘에 떠 있는 이 구름과 학을 보면 놀랄 만큼 정교합니다.
빙글빙글 돌려보면 마치 천 마리의 학이 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천학매병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고려 청자 중에서도 군계일학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 비색과 화려한 상감문양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국보 68호로 지정되어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오늘날 우리가 이 귀한 문화재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된 데에는 간송 전형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돈을 들여 이 청자를 구입했고요.
이후 한 일본인이 산 값의 두 배를 주겠다는 제안을 해왔지만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간송 전형필은 진귀한 문화재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아무리 큰 돈이 들어도 주저하지 않고 구입했는데요.
그중에는 바다 건너 일본까지 가서 구입한 것도 있었습니다.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입니다.
조선 시대 천재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린 전신첩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건너가 있던 것을 간송 전형필이 여러 해 동안 공을 들여 구입한 것입니다.
30장의 풍속화에는 300여 년 전 조선에서 벌어지던 다양한 생활상들이 진솔하게 표현되어있는데요.
특히 남녀 간의 애정 풍속을 다룬 그림이 많습니다.
(모두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긔, 마지막 여햏은 간송 미술관은 들어봤지만 전형필 선생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초ㅑ)
우리는 미인도, 단오풍정, 월하정인 등을 그린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지켜준 대수장가 간송 전형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큰 돈을 들이면서까지 문화재를 수집하려 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서울 종로에서 미곡상을 운영하는 대부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던 그는 학창시절 예체능 분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음악과 미술감상을 즐기고 야구부 주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서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자 그는 옛 그림과 글씨, 도자기 등을 사 모으는 일에만 주력합니다.
간송은 고려청자 20점을 구입하기 위해 집 400채를 살 수 있는 돈을 지불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귀한 재산으로 사기 그릇을 사는 미치광이라며 그를 손가락질 했는데요.
주변의 걱정이나 비웃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간송은 오로지 문화재 수집에만 몰두합니다.
그는 아예 한남서림이라는 고서점까지 인수해 옛 미술품들을 사들이는 기지로 삼습니다.
지금 인사동 길 한가운데 표구사와 필방이 들어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한남서림이 있던 자리입니다.
간송 전형필의 소장품 중에 상당수가 이곳을 거쳐 수집됐는데요.
그중에는 아궁이의 불쏘시개로 사라질뻔했던 그림도 있습니다.
때는 1930년대 중반, 한 골동 상인이 한남서림의 소문을 듣고 간송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두툼한 화첩 하나를 꺼내 보이는데요.
이를 펼쳐본 간송은 한눈에 겸재 정선이 그린 진품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골동 상인은 대체 이 귀한 화첩을 어디에서 어떻게 구한 것일까요
간송을 찾아온 골동 상인이 경기도 용인을 지나다가 큰 기와집에 들러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그 곳은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던 어느 친일파의 집이었는데요.
늦은 저녁, 화장실에 가려던 그는 우연히 아궁이 앞에서 군불을 때고 있는 머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작더미 사이에 불 쑤시게로 쓰인 책이 왠지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한눈에 봐도 평범한 화첩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집주인을 찾아서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책이니 자신에게 팔라고 했고 결국 장작 값 20원을 주고 손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간송은 그 자리에서 큰 돈을 주고 이 귀한 화첩을 구매합니다.
해악전신첩.
겸재 정선이 72살 때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뒤 그린작품입니다.
그림 21폭과 글씨 21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금강산 일대의 황홀한 경치와 감흥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바다와 산악, 산악의 정신까지 그려내는 화첩이라는 뜻이라고 하긔.
표면적인 모습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정신성까지 표출을 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대긔.
해악전신첩의 백미. 금강내산입니다.
우뚝 솟은 비로봉을 정점으로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데요.
그 모습이 마치 막 피어난 한송이 연꽃같습니다.
망원경도 비행기도 없던 때인데 어떻게 금강산 전체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이토록 세세히 화폭에 담아냈는지.
겸재 정선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화풍에서 벗어나 조선의 산천을 그린다는 것, 이는 가히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는데요.
간송 전형필은 이런 겸재의 그림을 많이 수집했습니다.
불쏘시개가 될 뻔 했던 해악전신첩을 비롯해서 무려 200점이 넘습니다.
그는 왜 겸재의 그림에 이토록 주목했던 것일까요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단순히 물리적인 값어치를 가지고 모은 수집가가 아니라고 하긔.
조선문화의 우수성, 조선문화가 가지고 있는 깊이와 두께, 이런 것들을 많이 고민했을 것이고
거기에 대한 해답이 정선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볼수 있다고 하긔.
간송 전형필이 문화재 수집에 열중하던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처참했습니다.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아래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철저히 파괴됐고, 수백 개의 고분과 유적지는
도난과 도굴로 몸살을 앓아야 했습니다.
선조들이 남긴 훌륭한 예술품들이 일본인의 수중으로 무한정 흘러가는 참담한 상황,
그 속에서 간송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가며 문화재 수호를 위한 일제와의 대결을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의 민족혼을 지키려는 정신적 독립투쟁이었습니다.
그렇게 오천여 문화재가 간송미술관에 모였습니다.
여기엔 국보가 12점 보물도 10점이나 포함되어있습니다.
간송은 자신이 모은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밝히려는 연구계획까지 세웁니다.
간송은 문화재는 과거에 우리가 찬란한 독자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광복 후에도 미술사 연구를 통해서 일제가 배척하고 있는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된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긔.
나라를 빼앗긴 암울했던 시절 간송 전형필은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며 부자로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일제가 빼앗으려는 민족의 문화유산을 지켜내고 이를 통해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는데요.
그가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재산은 이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로 숨 쉬고 있습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우리 민족의 근간이 되는 귀중한 보물, 훈민정음해례본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있는 훈민정음해례본.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만든 훈민정음 해설서입니다.
새로운 문자를 창제한 이유와 글자를 만든 원리 그 사용법 등이 설명되어있는데요.
이러한 책은 세계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겁니다.
해례본은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백성들에게 함께 배포되었지만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던 1940년 경 간송 전형필은 경북 안동에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하지만 때는 일본이 한글 사용을 철저히 금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한글 말살에 혈안이 돼 조선어학계 학자들까지 잡아들이던 상황.
이 책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총독부 귀에 들어가면 책을 압수당하는 것은 물론 갖고 있던 사람까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송은 해례본이 일제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건 거래를 감행합니다.
그리고 해례본을 입수한 사실은 가족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그제서야 간송은 기다렸다는 듯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상에 공개합니다.
(가족들도 그 전까지는 해례본의 존재를 몰랐다가, 광복 후에 알게 되었다고 하긔)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또다시 위기를 맞이합니다. 밀고 밀리는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우리의 문화재들은 또다시 파괴되고 간송의 소장품들도 예외가 될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간송이 단 한순간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던 것이 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은
오늘날 우리의 문자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지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돈으로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대한민국의, 그리고 세계에 단 하나뿐인 문화유산입니다.
그런데 지난 2008년 또 다른 해례본 한 부가 경상북도 상주에 나타났습니다.
간송 미술관에 있는 해례본과는 같은 판본인데요.
이 책에는 당시 연구자의 주석까지 곁들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하지만 상주본은 세상에 공개되자마자 곧바로 치열한 소유권 소송에 휘말립니다.
골동품 판매업자 조용훈씨가 자신 소유의 해례본을 배씨가 훔쳐 간 것이라며 호소한 것입니다.
한 권의 해례본을 두고 두 남자가 서로 자기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가운데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법원이 조씨의 소유권을 인정하자 배씨가 상주본을 숨기고 그 소재에 대해 입을 다물어버린 것입니다.
문화재청과 검찰이 배씨의 집을 압수수색했지만 끝내 상주본은 찾을 수 없었는데요.
수 년이 흐른 지금 훈민정음 상주본은 어떻게 되었는지 배씨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쟁통이 따로 없긔.
여기저기에 골동품이 쌓여 있고, 간간히 고서적들도 보이긔.
▼ 배씨와의 인터뷰긔!
세계적으로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훈민정음 해례본. 하지만 그 중 한 권의 행방은 배씨만이 알고 있습니다.
현재 소유권을 둘러싼 상고심이 진행중인데요. 그 결과에 상주본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쓸쓸할 따름입니다.
(*훈민정음 상주본도 문제지만 최근 10년간 문화재 불법유통사례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고 하긔.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문화유산을 훼손하거나, 불법으로 해외로 팔아넘기는 사례도 적지 않은가보긔ㅠㅠ)
간송 전형필은 일제의 혹독한 탐압과 포탄이 빗발치는 한국전쟁 속에서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잃지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켜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수많은 문화재를 정리하고 연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근 간송이 모든 문화재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9월까지 진행되는 특별 전시회 때문이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많은 주목을 받고 있긔.
그동안 간송미술관은 일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만 전시를 개최했습니다.
개방하는 기간도 각각 보름정도일뿐 나머지 기간은 문을 닫아두었고 외부에서 전시를 하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달라집니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열리는 전시를 시작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계획입니다.
1962년 간송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방대한 양의 수집품과 간송미술관을 지키는 일에 매달려야만 했습니다.
간송 선생이 남기고 떠난 것은 엄청난 액수의 부채와 문화재였다고 하긔.
두 아들들은 남아 있던 재산으로 부채를 모두 해결하고,
미술관 안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한 뒤에 수천점의 문화재를 정리하는 일에만 매진했다고 하긔.
그러다가 1971년 가을부터 해마다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시회를 개최했는데요!
특이한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장료를 받은 적이 없다는거긔!
입장료 받는 것을 고려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살아 있었던 때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 했을 때
아마 입장료를 받지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대긔.
굉장히 행복했고, 또 굉장히 불행했다고 하긔.
(자세하게 이야기 해주진 않으셨초ㅑㅠㅠ)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젊음과 재산 그 모든 것을 다 바친 간송 전형필.
그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힘든 문화수호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행복보다는 민족의 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고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훼손된 문화적 자존심을 되살려내어 독립한 조국, 대한민국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지켜준 위대한 문화유산은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
저도 간송미술관이나 전형필 선생에 대해서 어설프게만 알기 때문에
사족 배제하고 다큐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만 게시물 작성했긔!!
문제시 알려주시고 스크랩 하실 땐 흔적을 남겨주시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