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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韓何雲)
잠복기간은 9개월~20년으로 다양하다. 나병은 피부에 나타나는 병적인 변화의 종류에 따라 크게 나종나병(lepromatous leprpsy; 나종나)과 결핵나병(tuberculoid leprosy; 유결핵형, 유결핵나)의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고, 두 종류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다양한 양상이 관찰된다. 나종나병의 잠복기는 결핵나병의 잠복기의 두 배 정도로 길다. 나종나병의 경우 전신의 피부에 양쪽 대칭적으로 결절(지름 5mm 이상의 발진)이나 구진(좁쌀 크기에서 완두콩 크기까지의 지름 5mm 이하인 발진) 등의 병적인 변화가 넓게 나타난다. 나병균이 코 점막에 침범하면 딱지가 생기고, 코막힘, 출혈 등을 일으키며, 눈에 침범하면 홍채염이나 각막염을 일으킨다.
결핵 나병의 경우에는 한 개 이상의 경계가 뚜렷한 피부염이 신체에 비대칭적으로 퍼져 나타나고, 증상이 나타난 피부 부위는 무감각 또는 과다 감각 상태가 된다. 결핵나병은 특히 말초신경으로의 나병균 침범이 심하다.
경계형 나병(borderline leprosy)은 치료하면 결핵나병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나종나병로 변한다. 질병의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부정형나병(indeterminate leprosy, 부정나병)으로 인해 경계가 불분명한 저색소 반상(반점)이 나타나고, 이를 치료하지 않으면 나종나병, 결핵나병, 경계형나병으로 진행된다. 나병이 경과되면서 나병 반응(leprosy reaction)이라는 상태가 나타나는데 이는 질병의 악화를 의미한다. 나종나병에서는 나병성 결절성 홍반(ENL:,erythema nodosum leprosum) 반응이, 경계형나병에서는 역전반응(reversal reaction)이 나타난다.
<자료: 위키백과>
고향(故鄕)
원한이 하늘을 찢고 우는 노고지리도
험살이 돋친 쑥대밭이 제 고향인데
인목(人木)도 등 넘으면
알아보는 제 고향 인정이래도
나는 산 넘어 산 넘어 봐도
고향도 인정도 아니더라
이제부터 준령(峻嶺)을 넘어넘어
고향 없는 마을을 볼지
마을 없는 인정을 볼지
귀향(歸鄕)
고향으로 가는 길은
자꾸만 뜨거워지는 것은
달랠 길 없어
한때의 잘못된 죄는
꽃도 없는 깜깜한 감옥 속에
벌을 몸으로 치르고
이제 법조문보다
자유로운 고향길을 가는데
산천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고향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산에서 들에서
뻐꾸기가
누구를 부르는가
누구를 찾는가
내 마음같이 흔건히 울고 있는데
산천은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고향도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정말
법조문이 무엇인가
자유가 무엇인가
인생도 알 듯하는데
산천초목은 엽록소 싱싱하게 푸르러
하늘과 바닷빛
아스라한 하늘 끝간 데
영원에서
영원으로
생명이 넘쳐흐르고……
나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다만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億劫)을 두고 나눠도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罰)이올시다 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답화귀(踏花歸)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지네
함박눈인 양 날리네 깔리네.
꽃 속에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꽃이 달빛에 졸고
봄달이 꽃 속에 졸고
꿈결 같은데
별은 꽃과 더불어
아슬한 은하수 만리(萬里) 꽃 사이로 흐르네.
꽃잎이 날려서
문둥이에 부닥치네
시악시처럼 서럽지도 않게
가슴에 안기네.
꽃이 지네
꽃이 지네
뉘 사랑의 이별인가
이 밤에 남몰래 떠나가는가.
꽃지는 밤
꽃을 밟고
옛날을 다시 걸어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데모
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 소리와 함께
만세 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아우성 소리 바다 소리.
아 바다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
막다른 길
저 길도 아닌
이 길이다 하고 가는 길.
골목 골목
낯선 문패와
서투른 번지수를 우정 기웃거리며.
이 골목
저 골목
뒷골목으로 가는 길.
저 길이 이 길이 아닌
저 길이 되니
개가 사람을 업수여기고 덤벼든다.
목숨
쓰레기통과
쓰레기통과 나란히 앉아서
밤을 새운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죽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아직도 살아 있는 목숨이 꿈틀 만져진다.
배꼽 아래 손을 넣으면
37도의 체온이
한 마리의 썩어가는 생선처럼 뭉클 쥐어진다.
이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나의 목숨은
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렷한 것이냐.
벌(罰)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罰)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
봄
제일 먼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좁은 지역에도 한 포기의 꽃을 피웠더냐.
하늘이 부끄러워
민들레꽃 이른 봄이 부끄러워.
새로는 돋을 수 없는 빨간 모가지
땅속에서 움돋듯 치미는 모가지가 부끄러워.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계절 앞에서
겨웁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
부엉이
미움과 욕으로 일삼는 대낮에는
정녕 조상을 끄려서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약보다는 좋은 효험(效驗)이라 생각하였다.
부엉이는 또한
싸움으로 일삼는 낮에사
푸른 나무그늘 바위틈에서
착하디 착하게 명상하는 기쁨이
복이 되곤 했었다.
모든 영혼이 쉬는 밤
또 하나의 생명과 영혼이 태어나는 밤
이 밤이 좋아서 신화는
부엉이를 눈을 뜨게끔 하였다
어둠 속에서
별이 반짝이며 이슬을 보낸다
나무가 숨쉬며 바람을 보낸다
꽃이 피려고 향을 훈긴다.
비 오는 길
주막(酒幕)도 비를 맞네
가는 나그네
빗길을 갈까
쉬어서 갈까
무슨 길 바삐 바삐
가는 나그네
쉬어갈 줄 모르랴
한 잔 술을 모르랴
삶
지나가버린 것은
모두가 다 아름다웠다.
여기 있는 것 남은 것은
욕(辱)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옛날에 서서
우러러보던 하늘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마는.
아 꽃과 같던 삶과
꽃일 수 없는 삶과의
갈등(葛藤)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
잠깐이라도 이 낯선 집
추녀밑에 서서 우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삼방(三防)에서
사람도 올 수 없이 막았다
구름도 올 수 없이 막았다
바람도 올 수 없이 막았다
그래서 삼방이라 하였는가
하늘을 찌르는 칠전팔도(七顚八倒)의 험산이
모조리 올 것을 막아버린 천험비경(天險秘境)에
구비구비 곡수(曲水)는 바위에 부딪혀 지옥이 운다.
죽음을 찾아가는 마지막 나의 울음은
고산(高山) 삼방 유명을 통곡한다.
죽음을 막는가
바람도 없어라
부엉이는 슬피 우는가
하늘이 쪼각난 천막에
십오야 달무리는
내 등뒤에 원을 그린다.
생명(生命)의 노래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히려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 꽃같이 서러워라
한세상
한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
손가락 한 마디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어머니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신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신
말이 없는 어머니.
업계(業界)
소년아
네 무엇을 찾으려고
또 하나 그 위태한 눈을 떴니.
하늘 한가 둥둥 구름 떠가는
높고 푸른 지엄을 우러러
어리디어린 보람을 조약돌로 팔매쳐보는 것.
아서라
네 아무리 하늘 끝간 델 보았다 하자……
눈물로 걸음걸음 이르런 곳
그래 여기가 바로 어느 동서남북이란 말이냐.
아득히 하늘 아득히 바라보던
너의 망원경 렌즈에 아련한 부끄러움을
어찌할 테냐.
인골적(人骨笛)
아득히 아득히 몇 억겁을 두고 두고
울고 온 소리냐, 인골적(人骨笛) 소리냐
엉 엉 못살고 죽은 생령(生靈)이 운다
아 천한절통(千恨切痛)의 울음이 운다
몽고라 하늘끝 아시아의 북벽
유수(幽愁)와 사막이 맞서는 통고사(通古斯) 죽음의 밤에
라마승은 오늘밤도 금색 묘당에
신에 접한다고 인골적을 불며
상형문자 같은 주부(呪符)의 경전을
회색에 낡은 때묻은 얼굴로 악마를 중얼거린다.
라마는 몽고의 신
천상천하 다시 또 없는 제왕의 제왕
이 절대자는
생살여탈권도
심지어 나어린 처녀의 첫날밤 마수걸이로
교권의 절대 앞에 지상에도 천국에도 없는
오, 오소리티여
신성과 은총과 구원이
인골적 울음 없이는 금구무결이 있을 수 없다고
선남선녀의 부정(不淨) 없는 생령(生靈)을
생사람 산 채로 죽여 제물로
도색(桃色)이 풍기는 뼈다귀를 골라 피리감으로
다듬어 다듬어서 구멍 뚫어서 피리로 분다
강동*이라 인골적
몽고의 오소리티여
인골의 피리가락은
낮이나 밤이나 삭북(朔北)의 유수(幽愁)와 몽매한 암흑에
교권 정치의 우미(愚迷)한 고집의 절대 앞에
생과 환희를 모르는 채
영영 쓰러진 사랑의 삼라만상의 시혼(屍魂)이
사막의 풍우로 버려진 풍장(風葬)의 시혼이
사막에 떠돌아 위령 없는 처절한 원차(怨嗟)로
그 몹쓸 자 바이칼 살풍에 산산이 부서진 사령(死靈)이
단장 터지는 곡소리가, 무수한 곡소리가
한가닥 인골의 피리에 맺혀 우는 호원(呼寃)
천한절통의 울음으로 흐흐 느낀다
교권의 독성의 자행과 착취
그 악순환은
옥토 몽고 대평원을 고비 사막으로 황폐시킨다
성길사한(成吉思汗) 세계정패의 대제국이
암흑으로
성병으로
완전히 멸망에 잠겨버렸다
천지창조의 신은
한 떨기 꽃에
한 마리 새에
한 가람 강물에
평화와 행복의 계시와 은총을 주셨으니
신을 매복(賣卜)한 라마의 악의 업보는
천지창조의 신의 분노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삼라만상의 태반(胎盤)인 산천마저 사막으로
한 떨기 꽃도 피어날 가지 없이
한 마리 새도 쉴 나무숲도 없이
별이 쉬어갈 샘물도 없이
천애지애(天涯地涯) 평사만리(平砂萬里)로 황폐시켰고
인간의 존귀성마저 유린한 채
나라를 망해먹고
민족마저 망해먹었다
라마승은
Z기가 날아가는 원자(原子)의 이 찰나에도
사랑의 뼈다귀 인골의 피리를 불며
악마의 경전을 중얼거리며
아직도
절대지상이라는 교권으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
나어린 처녀의 첫날밤 마수걸이를
오, 오소리티여
인골의 피리는 엉 엉
못살고 죽은 선남선녀의 생령이
한 떨기 꽃을
한 마리 새를
한 가람 강물을 찾으며 운다.
인골적(人骨笛),
인연(人煙)이 끝인 황사만리(荒砂萬里) 절역(絶域)에
엉 엉
천한절통(千恨切痛)의 울음으로 흐흐 느낀다.
* 강동 : 인골(人骨) 피리의 몽고어.
자벌레의 밤
나의 상류(上流)에서
이 얼마나 멀리 떠내려온 밤이냐.
물결 닿는 대로 바람에 띄워보낸 작은 나의 배가
파도에 밀려난 그 어느 기슭이기에.
삽살개도 한 마리 짖지 않고……
아―여기서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불러보아야 하나.
첩첩한 어둠 속에 부표처럼 떠서
가릴 수 없는 동서남북에 지친 사람아.
아무리 불러보아야
답 없는 밤이었다.
자화상(自畵像)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
한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飽滿症)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매워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쩔룸 쩔룸 다섯 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창경원(昌慶苑)
꽃 보러 꽃이 가지요
꽃 볼려고 단 한 분 삶을 봤지요
꽃이 꽃을 기다리지요
피고 질 삶이 기다리지요
꽃이 꽃을 보지요
사람이 꽃이지요
꽃이 사람이지요
꽃을 밟고 사람이 오지요
꽃이 사람을 밟고 돌아가지요
추석(秋夕)달
추석달은 밝은데
갈대꽃 위에
돌아가신 어머님 환영(幻影)이 쓰러지고 쓰러지곤 한다.
추석달은 밝은데
내 조상에
문둥이 장손은 다례도 없다.
추석달
추석달
어처구니없는 8월 한가위
밝은 달이다.
추야원한(秋夜怨恨)
밤을 새워 귀또리 도란도란 눈물을 감아 넘기자.
잉아 빚는 물레 소리에 밤은 적적 깊어만 가고,
청상스리 한숨 쉬며 어이는 듯한 그리움에 앞을 흐리는 밤.
눈물은 속될진저 오리오리 슬픈 사연을 감아 넘기자.
바람에 부질없어 문풍지도 우는가
무삼일 속절없는 가을밤이여.
추억(追憶) 2
일곱해 맞이 해해 맞이
기울어진 지구가 되어
쩔뚝이며 빗길로 찾아와보니
모난 하늘이 동쪽으로 삐뚤어졌네
어느새 동쪽으로 삐뚤어졌네.
오늘도 붉은 꽃 파리는
머언 해중(海中)으로 흘렀나본데
기다렸던 해변은
그 여인의 넋인 양 슬픔인 양
추루룩 추루룩 울고만 있네.
추우일기(秋雨日記)
아치라운 일이다
네 싸늘히 서글픔을 눈으로는 노려보지 말아라.
모두다 모두가 다 이름있는 모든 것이다.
가느다란히 정맥에 살아서 숨쉬는
나무며 풀이며 잎잎 떨어지는데.
싹 다린 옥색 모시치마 사뿐히 꽂아지른 옷맵시.
참다못하여 부서질 듯이 돌아서면서
흐느껴 눈물로 옷깃을 적시는가.
춘곤(春困)
꽃샘바람은
꽃이 시새워서 분다지만.
초근목피에 주린 배를 채우면
메슥메슥 생목만 올라
부황증(浮黃症)에 한속(寒粟)이 춥다.
노고지리는
포만증(飽滿症)을 새기느라
진종일 울어야 하지만
아예 배고픔을 내색 않는 문둥이는
얼마나 울어야 하는 이야기인가.
굶주림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
아지랭이는
아지랭이는
비실비실 어질병만 키운다.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하운(何雲)
나 하나 어쩔 줄 몰라 서두르네
산도 언덕도 나뭇가지도.
여기라 뜬 세상
죽음에 주인이 없어 허락이 없어
이처럼 어쩔 줄 몰라 서두르는가.
매양 벌려둔 저 바다인들
풍덩실 내 자무러지면
수 많은 어족(魚族)들의 원망이 넘칠 것 같다.
썩은 육체 언저리에
네 헒과 균과 비(悲)와 애(哀)와 애(愛)를 엮어
뗏목처럼 창공으로 흘러 보고파진다.
아 구름 되고파
바람이 되고파
어이없는 창공에
섬이 되고파.
한하운의 문학인생
『원한이 하늘을 찢고 우는 노고지리도 알아보는 제 고향 인정이래도 이제부터 준령(峻嶺)을 넘어넘어 <고향55> 전문(全文) - 어려서부터 객지를 떠돌았던 한하운에게는 인정만 있다면 어디든지 그의 고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 인심은 야박했고, 고향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때때로「지금 나는 옛날 성하던 계절에 서 있고 / 지금의 나는 여기 있는 것 같지도 않다」고 절규하면서 육신의 고향으로 상념의 나래를 펼치고는 했던 것이다.
자서전이라 할 <나의 슬픈 반생기>에 따르면 한하운은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태영(泰英)이었다.「부계(父系)의 가문을 살펴 보면 대대로 선비 집안으로 과거를 3대나 계속하여 급제한 집안이며 함흥 지방에서는 떵떵 울리고 권세 좋게 살던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을 공부시키기 위해 그가 여섯 살 나던 25년 함흥으로 이사하여 나갔다. 이듬해 그는 함흥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예능 계통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며 죽 우등생으로 다녔다. 그러나 그가 5학년이 되던 31년 봄, 몸이 무겁게 부어서 아버지를 따라 한달 남짓 온천과 삼방(三防) 약수터를 다니며 요양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나병의 시초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5학년 졸업반이던 36년 봄이었다. 몸 전체의 말초부 양역(陽域)에 콩알 같은 결절(結節)이 생기고 궤양이 끝없이 퍼져 나가자 여기저기 진찰을 받다가 성대(城大)(현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37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그의 병은 다소 낫는 듯 했다. 그래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성계고등학교라는 곳에 입학했다. 그러나 2년 남짓 지나면서 다시 병세가 악화하여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했다. 열심히 치료를 하면 병은 또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중국 북경으로 가서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에 입학했고, <조선 축산사(朝鮮畜産史)>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졸업했다. 그것이 43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환부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직장의 상사마저 그가 나환자라는 것을 알아채었다. 그는 다시 함흥 중앙동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때부터 두문불출,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낯익은 이목을 피해 밤을 이용했다. 전신에 고름이 흐르고 방안에는 악취가 풍겼다. 그 무렵부터 48년 그가 월남할 때까지 4년간이 가장 처절한 투병 기간이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 자유를 구가하려고 했다. 이름마저 본명을 버리고 하운(何雲)이라고 고쳤다.
『나는 푸른 하늘 푸른 노래 나는 '파랑새'가 되고자 하는 것은 동경이요, 이상이었다. 현실은 지옥이었다. 살아가는 것은「한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기」위해서였다. 게다가 기뻐해야 할 8ㆍ15 광복은 그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겨 주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산을 몽땅 빼앗기고 나자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아우의 뒷전을 따라다니며 노점 책장사를 했고, 돈이 조금 모이자「건국서사](建國書肆)라는 책점을 차렸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1946년 3월 13일 함흥 학생 데모를 구경하다가 혐의를 받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나오는 곤욕을 치렀던 그는 47년 4월 북괴를 전복하겠다는 의거를 꿈꾸던 아우가 체포되는 바람에 그도 연루되어 원산 형무소까지 끌려 갔었으나 나병이 악화되자 겨우 병보석이라는 명목으로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를 정성껏 간호해 왔던 R 여인도 아우와 함께 끌려갔고 그 전 해에 어머니는 세상을 따나고 없었다. 그때 그는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는데, 아마도 목적은 자신의 약을 구해 보려는 데에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서울을 거쳐 나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대구의 애락원(愛樂園)을, 부산의 나요양소인 상애원(相愛園)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대구 동산병원(東山病院)에서 '다이아송' 60알과 서울의 천우당(天佑堂) 약방에서 '대풍자유(大楓子油)' 3병을 구해 6월 하순에 다시 월북,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불심 검문에 걸린 그는 병보석을 어기고 남한에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다시금 원산 송도원이 가까운 어느 건물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거기서 보초자를 속이고 탈주를 감행하여 도보로 동두천을 거쳐 재차 월남을 했으니 그것이 그해 8월이었다. 자유를 찾았으나 나환자인 그에게는 몸을 쉴 단칸 초목도 없었다. 그는 유류표박의 집시처럼 남한 각지를 떠돌며 깡통을 들고 구걸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서울로 와 47년 동지까지는 헌 가마니 한 장으로 쓰레기통 가에서 밤을 지새며 보냈다. 밤사이 옆에서 자던 한 동료 거지가 죽었다. 무서웠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했다.
명동 거리에서 바, 다방, 음식점, 상점 같은 곳의 출입구를 막아서서 돈을 받아내거나 시를 팔아 연명했다. 어느덧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진 한하운은 몇몇 문인들을 사귀게 된다. 그리하여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한하운 시초>라 하여 무려 13편의 시가 한꺼번에 실렸다. 선자(選者) 이병철(李秉哲)은 거기 <한하운 시초를 엮으면서>라는 글에서「내가 불우의 시인 천작(天作)의 죄수 하운 형(何雲兄)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첫여름이었다. 친구 박용주(朴龍周) 형의 간곡한 소개로 정처없는 유리(遊離)의 가두(街頭)에서 방황하고 섰는 걸인 하나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쓰면서 그의 시를 처절한 생명의 노래요, 높은 리얼리티를 살린 문학이라고 소개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낯선 친구 만나면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신을 벗으면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소록도로 가는 길에>란 부제가 붙은 이 시는 커다란 반응을 일으켜「정음사」에서는 무조건 시집을 내겠다고 나서 그는 명동 성당의 방공호에서 원고를 정리했다. 그리하여 그의 첫시집인 <한하운시초>(26편 수록)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해 8월 경기도 수원 세류동 정착촌인 하천 부락에 입주한 그는 이듬해 경기도 부평 소재의 성계원으로 이주, 회장이 되고 52년에는 그곳 도로 건너에「신명보육원」을 창설하여 세상에서 천대받는 미감아 아동을 10여 명 수용했다. 그런데 53년 여름 그와 그의 시가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른바「나시인사건」(癩詩人事件)으로, 발단은 아마도 <한하운시초> 재판이 6월에 나오면서부터로 보인다. 여기에 사실 확인을 하기 위해 취재를 지시한 사람이 서울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있던 오소백(吳蘇白)이었다. 이 사건을 취재토록 하면서 사건을 확대했다 하여 오소백과 사회부 차장이던 문제안(文濟安) 기자가 신문사로부터 파면을 당하는 불행을 겪었다. 그러나 그 취재 과정에서 한하운으로부터 그의 대표작인 <보리피리>를 얻어 내었다. 신문사를 찾아왔다가 그는 편집국 안에서 즉석에 <보리피리>를 썼던 것이다. 이 시는 55년에 간행된 제2시집의 표제시가 되었다.
56년부터 그를 사귀었던 김창직(金昌稷)은「그는 떡대가 크고 씨름대장처럼 생겼지만 보기보다는 내성적이고 깐깐한 편이었다」고 그의 성격을 말하면서도 술도 보통 이상으로 잘 마셨다고 한다.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보리피리> 이후의 작품들이 그 전의 작품들에 비해 처진다는 데에 일치한다. 나병이 치유되고 유명해짐으로써 그만큼 치열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문단의 일각에서 추리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병철)의 첨삭이 들어 있었던 까닭일까. 그렇다면 그가 남 앞에서 직접 쓴 <보리피리>의 탁월성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는 <보리피리> 이후에도 유수한 문예지에는 그의 시가 거의 실리지 않았다. 그는 73년 여름 수뢰(受賂) 혐의로 당국에 구속되었다가 오소백의 진정으로 풀려 나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병인 간경화를 앓다가 75년 십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김용성(金容誠): <문학사 탐방>(한국 일보1982.11.20) - <자료출처: 문선생언어논술>
「시가 나에게는 제2의 생명이다. 아니 전생명을 지배하고 있다.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나에게 스스로 백광(白光) 같은 빛을 마련해 주고, 용기와 의지의 청조(晴條)길로 나를 인도한다」라고 했듯이 시인 한하운은 시 작업을 그의 모든 것과 일치시킴으로써 절망과 고독을 딛고 나병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보리피리>와 같은 한스러움이 넘쳐 차라리 아름다운 한국적 가락을 읊어내는 위대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40년대말 방랑 끝에 문득 문단의 국외자(局外者)로 등장했다. 그러나「유리(遊離)의 가두(街頭)」에서 하루아침에 시인이 되었던 그의 생애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받았고 나시인(癩詩人)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홀대를 감수하기도 했다.
험살이 돋친 쑥대밭이 제 고향인데
인목(人木)도 등 넘으면
나는 산 넘어 산 넘어 봐도
고향도 인정도 아니더라.
고향 없는 마을을 볼 지
마을 없는 인정을 볼 지.』-
그는 32년 봄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의 의사를 좇아 이른바「내선공학(內鮮共學)」이라는 이리(裡里)농림학교에 들어가 수의축산(獸醫畜産)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리농림학교는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듯 함남도청 관내 19명의 응시자 중 유독 그만이 합격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장거리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상급학교 수험 공부를 하라는 꾸지람 때문에 3학년 겨울부터 운동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발자크, 앙드레 지드, 헤르만 헤세 등의 번역 소설을 탐독하고 시의 습작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가 나중에 월남할 때까지 그의 병고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병 간호를 했다는 R이라는 고향의 여학생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기다무라(北村淸一) 박사는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피부를 찌르곤 하였다. 진찰이 끝난 뒤 에 조용한 방에 나를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小鹿島)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뇌성벽력 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 - <나의 슬픈 반생기>에서 -
귀국하여 일단 고향으로 간 그에게 아버지는 기분 전환을 하라고 함남도청 축산과에 그를 취직시켰으나 집에서 다니기가 싫었던 그는 도내 장진군 개마고원으로 들어갔다.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집념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은 추위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는 다시 남쪽 지방을 지원하여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해 갔다. 1945년 봄이었다. 「결절이 콩알 같이 스물스물 몸의 양역에 울뚝불뚝 나타나는 것이었다. 검은 눈썹은 자고 나면 자꾸만 없어진다. 코가 막혀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은 코먹은 소리다. 거울을 쳐다보니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문둥이 그 화상이었다」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파랑새55> 전문 -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전라도 길49> 전문 -
「1953년 8월 1일부터 주간지 '신문의 신문'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타이틀로 한하운을 문화 빨치산이라 말한 데서 사건은 일어나고 심지어 한하운이라는 나의 아호마저 국가 멸망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며, 시의 내용마저 적색시라는 것이며.... 또한 혹독하게도 나 자신마저 허구의 인물이라고 날조하여 떠들어 댔다」- 한하운: <보리피리에 관하여>에서) -
최초의 한하운시초 중에 <데모>라는 시가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 '피빛 기빨이 간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당시 평론가 이모라는 사람이 정음사(正音社)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모양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 동기는 시시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경찰뿐만 아니라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되었으나 한하운이란 인물이 실존함은 물론, 그의 시도 불온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 오소백 회고담 -

반야월 작사 / 박시춘 작곡 / 남인수 노래 하늘도 날 버리고 세상도 날 버리고 돌에도 나무에도 붙일 곳 없는 신세 한강수 푸른물에 던지고 싶은 이 목숨 살아서 사람이지 사람이 아니외다 손구락도 발구락도 내 것이 아니외다 사랑도 날 버리고 친구도 날 버리고 날 보면 피해 가네 침 뱉고 돌아가네 달리는 철길 우에 깔리고 싶은 이 목숨 이름만 사람이지 사람이 아니외다 다 빠진 두 눈썹도 내 것이 아니외다
한하운 추모곡에 대하여
한센병(문둥병)으로 슬픈 운명을 살던 한하운이 시를 쓰면서 세상의 화제가 되자 반야월이 글을 쓰고 박시춘이 곡을 붙여 가수 남인수가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 가사가 정말 가슴에 박힙니다. 이 병에 걸리면 100촌 까지도 결혼을 꺼린다는 문둥병. 발가락 손가락이 떨어지고 얼굴이 문드러지는 그 고통을 자신이 아니고서 어찌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하운은 어쩌면 그 병 때문에 더욱 치열하게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정작 이 세상을 뜰 때는 한센병이 아니라 간경화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그의 애환을 충분히 짐작케 합니다.
이 절절한 노래가 음반으로 나가서 알려지자 음반 판매업소에서 문둥이 노래라 재수가 없고 내용이 너무 처절하여 가사를 바꾸지 않으면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했답니다. 할 수 없이 가사를 바꾸었는데 이 노래를 들으려면 위 노래를 정지시키고 아래 음악창 플레이 버튼을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님의 통곡(개사곡)
반야월 작사 / 박시춘 작곡 / 남인수 노래
해 지는 백사장에 내일을 언약하며
청춘을 노래하던 그 추억만 남겨두고
머나먼 그 길을 님만 어이 홀로 갔으니
인생은 세월에 속아 살지만
봄비는 추억인 양 옷깃을 적십니다
하늘도 캄캄하고 바다도 캄캄하고
불러도 소리쳐도 대답 없는 그 님아
이 모진 세상길에 눈바람 몰아쳐 와도
뼈저린 그 고생을 참으며 살자더니
그 맹서 어디 두고 쓸쓸히 갔단 말요
세월도 날 속이고 인정도 날 속이고
서리는 향불 속에 대답 없는 그 님아
달 뜨는 백사장에 청춘만 꽃 피워 놓고
한 줌의 흙이 되어 영원히 가시다니
산천도 서럽구나 봄비도 서럽구나
<자료출처:김기홍시인의 꿈과 희망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