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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한국바둑 산증인 조남철 9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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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재력만 뒷받침되면 특별한 학식이나 내세울 만한 경륜이 없더라도 아무나 책을 펴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적어도 회고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거나 어느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뤘다거나 하는 따위의 일정한 자격과 조건이 요구된다 하겠다.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 졸부나 허명에 눈먼 얼치기 야심가들이 ‘나의 한평생’ ‘…에 바친 나의 삶’과 같은 제목으로 회고록을 펴내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이는 그렇지 않아도 혼탁한 세상에 허접한 종이쓰레기 한더미 보태는 것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이 책은 2002년 8월부터 올해 7월까지 월간 ‘바둑’에 3년 동안 연재된 ‘조남철 회고록’을 근간으로 한국기원 양형모 홍보팀장이 그의 구술을 받아 재구성한 것이다. ‘세번의 눈물’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번 회고록에는 15살때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가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 문하생으로 바둑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이래 ‘기도보국(棋道報國)’의 일념 하나로 한국 바둑의 뼈대를 세울 때까지 겪은 갖가지 일화와 희로애락이 그대로 녹아 있다. 자연인 조남철의 개인사이자 한국 현대바둑사인 셈이다. 서울 일원동 자택에서 병마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 노기객(老棋客)을 만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터뷰를 가졌다. 그의 지병은 20대 청년시절 무리한 구도(求道) 탓도 있다고 한다. 불패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청년기사 조남철은 49일 동안 산에 들어가 도가에서 전해오는 조식법(調息法)으로 심신을 연마했는데 이때 폐를 크게 상했다는 후문이다. 폐기종 외에도 관절염에다 기력이 떨어져 휠체어없이는 기동도 못한다는 그는 “아무런 욕망도 없이 그저 하늘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힘없이 말했다. 청력도 눈에 띄게 떨어져 고함을 질러대야 간신히 알아듣는 그였지만 바둑 얘기가 나오자 주름투성이 얼굴에 웃음기를 보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첫번째가 도일한 지 4년 뒤인 1941년 입단 직후 벌어진 승단대회에서였다. 일본기원에서 벌어진 대국에서 점심시간이 되자 상대기사와 수많은 관전자들이 모두 자리를 떠 대국장에는 18세 소년기사 조남철 혼자만 남게 됐다. 반상에 얼굴을 묻고 수읽기에 골몰하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 바깥 풍경을 보는 순간 울컥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순간 그의 머리에는 ‘기도보국’이란 말이 떠올랐다. 조남철은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통해 민족에 헌신하고 학자가 학문으로 사회에 보답하듯 일단 기사가 된 이상 바둑으로 동족들에게 보답하자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같은 결심은 세 아들 중 막내인 조남철에게 바둑으로 일본을 이겨줄 것을 강조한 선친의 뜻이기도 했다. 이미 서울이 북한군 수중에 떨어진 그 당시 조남철은 자신이 주도해 세운 조선기원(한국기원의 전신)의 사정이 궁금했다. 기원은 이미 쑥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건물은 포격으로 심하게 파괴됐고 바둑판은 불에 타버렸으며 바둑알은 흑백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시커멓게 변해 잿더미 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조남철은 “바둑알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깨끗이 닦고 있으려니 계속 눈물이 나왔다”면서 “일본기원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기원을 다시금 세울 것이라고 눈물을 닦으면서 결심했다”고 말했다. 67년 11월 종로구 관철동에서 한국기원 기공식이 있던 날 부이사장인 조남철은 축사를 하면서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앞이 부옇게 흐려져 몇번이나 연설을 중단해야 했다. 해방되던 해인 45년 한성기원이란 이름으로 첫발을 내디딘 이래 22년 만에 제대로 된 문패와 집터를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조남철은 “그때까지 조선기원, 대한기원 등으로 기원 이름이 바뀐 것만 네 차례였고, 16번이나 셋방살이를 전전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고 말했다. 국내 최초의 체계적인 바둑입문서인 ‘위기개론(圍棋槪論)’을 비롯해 ‘행마의 기초’ ‘행마의 급소’ 등 불후의 이론서를 잇따라 내놓는가하면 일본어 일색이던 바둑용어를 ‘단수’ ‘빵때림’ ‘끝내기’ 등 우리말로 바꿔 놓음으로써 조남철은 ‘걸어다니는 바둑 법전’으로 통했던 것이다. 그는 “그때 체계적으로 한글 이론공부를 한 상태였다면 좀 더 예쁘고 우아한 우리말로 바꿔 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중앙정보부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지낸 이후락의 경우 뭇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조남철에게는 ‘바둑을 몹시 좋아하는 아마추어’일 뿐이었다. 이따금 자신의 집으로 직접 ‘당대 최고의 고수’를 불러 ‘맨 입’으로 지도대국을 두던 이후락에게 조남철은 어느날 “낼 것은 내고 바둑을 배우라”고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조남철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던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조금 심했나’ 싶었지만 어차피 엎지러진 물이라 그냥 있었다”고 말했다. ‘과외수업료’를 내지 않았던 이후락은 나중에 한국기원 이사장을 맡고 기원 건립에도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고향은 조남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가를 복원하고 바둑박물관·바둑학교 건립계획을 발표하는가 하면 2001년 7월 군내 부안초등학교에서 제1회 조남철배 전국 어린이바둑선수권대회를 열었다. 그때만 해도 거동이 자유로웠던 조남철은 김인·이창호·이세돌 9단 등 프로기사 및 한국기원 관계자들과 함께 대회장에 나타나 거의 증손자뻘 되는 1,000여명의 꼬마선수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한국전쟁 도중 뒤늦게 징집돼 부상을 입은 ‘상이용사’이기도 한 그는 입영열차 앞에서 울먹이는 부인에게 ‘대마불사(大馬不死)니까 절대로 걱정하지 마라’고 껄껄 웃으며 위로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조남철은 “바둑에는 묘수(妙手)·독수(毒手)·괴수(怪手) 등 갖가지 수가 있지만 인생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면서 “정석(定石)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