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종에서 후궁이 된 여성-장녹수에게는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
장녹수(張綠水.?-1506)는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지만 실체로는 정확하게 밝혀진 부분이 많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장녹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장한필(張漢弼)이다. 그는 1469년(예종1년) 문과시험에 합격해 지방수령까지 지낸 사람이다.
장녹수는 궁궐에 들어가기 전에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 이현(李琄)의 집에서 여종으로 있으면서 그 집 남자 종과 혼인하였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지방 수령까지 지낸 장녹수는 왜 여종이 되었을까?
1506년(연산군12년) 장녹수의 친언니 장복수(張福壽)는 후궁이 된 동생 덕분에 내수사(內需司)의 여종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었다. 아버지가 양인인 상태에서 장녹수나 친 언니가 오랫동안 여종으로 살았다면 어머니가 천인일 가능성이 높다.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천인이면 자녀들도 따라서 천인이 되는 것이 조선의 신분제 였다.
장녹수는 천첩 소생으로서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녹수가 집이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하고 혼인도 여러번 했다고 한다.조선시대 양인 계층 이하 신분의 남녀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가 헤어지는 일은 흔한 일이였다.
여종으로 고된 일상을 보내던 장녹수가 노래와 춤을 접한 것은 제안대군의 남자 종과 혼인해 아들을 낳은 이후였다. 장녹수는 궁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남편과 아이까지 딸린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후궁이 되었을까?
장녹수가 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1502년 연산군이 쫓겨나기 4년 전으로 연산군 나이 27세 때다.이 때 종4품인 숙원(淑媛)으로 연산군과 사이에 영수(靈壽)라는 딸까지 낳았다.
장녹수는 30세 전후에 궁에 들어갔고 예상과 달리 뛰어난 미모는 아니었고 다만 30세 초반인데 16세 소녀처럼 동안이라고 한다. 그 당시 30대가 되면 고된 노동으로 50대로 늙어 보인다는 시대에 그녀의 젊음을 유지 한 점이 출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노래와 춤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맑은 소리를 냈다고 전한다.
예술적 감각이 풍부하던 연산군이 장녹수 이야기를 듣고 궁으로 불러 들인 것이다.이 때 연산군의 당숙 제안대군의 추천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연산군은 격노하다가도 장녹수만 보면 희색을 띨 정도로 교태스럽고 요사스러웠다.장녹수는 연산군의 마음을 쥐고 흔들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마음껏 이용했다.
연산군은 19세에 왕위에 올라 지원 세력이 없는 고립무원 속에서 마음 둘 곳이 없는 고독한 인간으로 변해갔다.
연산군은 폐위되기 9일 전인 1506년 8월 23일에 사랑하는 후궁 장녹수와 전전비(田田非)등을 거느리고 후궁에서 잔치를 열면서 마음이 울적하였는지 직접 풀피리를 불면서 비감에 젖어 시한수를 짓고 눈물을 주룩 흘렸다.
인생여초로 (人生如草露) 인생은 풀입의 이슬같아
회합부다시 (會合不多時) 마날때가 많지 않아.
이 때 장녹수와 전전비도 같이 따라 눈물을 흘리자 연산군은 앞으로 일을 예감한듯 “지금 태평한지 오래이니 어찌 뜻하지 않은 변고가 있겠느냐만 만약 변고가 생기면 너희들도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하면서 장녹수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고 한다.
1506년 겨울 왕위에서 쫓겨난지 두달만에 강화도 교동에서 연산군은 세상을 떠났다.장녹수는 연산군이 교동으로 유배되던 그날 참형을 당하였다.
장녹수,그는 신분의 한계와 고단한 삶을 이기고 젊은 나이에 왕의 여인이 되었지만 권력을 가진 공인의 삶을 저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이 눈을 감을 때 다른 말은 없고 왕비 신씨가 보고 싶다고 했다고 전한다.그렇다면 장녹수는 연산군에게 아무것도 아닌 여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국왕 연산군의 파멸을 방치한 장녹수는 스스로 폐주의 여인이 된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