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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십자군2 :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 다마스커스성으로!
1096년에 일어난 제1차 십자군은 1099년에 예루살렘을 수복하고는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왕이 되었으며 1100년에 동생 보두앵에 2대왕이 되고 1118년에
사촌 보두앵 2세가 3대 예루살렘왕에 올랐으며 1131년에 장녀 멜리장드와
데릴사위 풀크가 4대왕이 되었다가 1143년에 풀크왕은 낙마사고로 인해 죽습니다.
이제 멜리장드가 여왕으로 통치하는데 다음해인 1144년 기독교 에데사 백국이 이슬람 모술
의 태수 장기에게 함락되자 놀란 유럽에서는 교황 에우제니우스가 클뤼니수도원
보다 더 급진적인 시토파 수도원의 베르나르도를 보내니 1145년에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 콘라트 3세 독일왕이 이끄는 2차 십자군 이 일어납니다.
제2차 십자군 원정(1145년 - 1149년) 은 제후 십자군을 넘어 왕들이 참가하기 시작한
첫번째 십자군으로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중동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왕들의
고집 때문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병력과 물자만 낭비한 대실패로 막을
내렸는데 동맹인 다마스쿠스를 공격해 이슬람권의 반십자군 동맹을 결성시킨 전쟁입니다.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2세에 이어 멜리장드 여왕과 풀크 왕이 지배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물론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자리도 물려받았지만
안티오키아는 오랫동안 섭정과 부재자의 지배를 받아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려웠으니 이슬람 세력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강력한 통치자를 새로 앉혀야 했습니다.
풀크왕은 안티오키아의 전 지배자인 보에몽 2세의 9살 된 딸 콩스탕스를 34세의
푸아티에의 레몽과 결혼시켜 레몽을 안티오키아의 지배자로 삼았는데...
이때에 모술과 알레포의 아타베그 였던 장기는 다마스커스 정복에 매진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성전에 대해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장기가 십자군 국가들과 접하는게 싫은 풀크왕은 이슬람 다마스커스와 연합하여 장기의 다마스커스
공략을 저지했지만 모술과 알레포를 지배하는 장기의 세력은 막강했고 남쪽에선 아스칼론의
이집트 군대가 공세를 취하고 있었으니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구호 기사단과 십자군 기사들이 성채를
세우고 예루살렘 왕국의 방어를 맡았으니 이때 세운 요새 중 하나가 유명한 크락 데 슈발리에 입니다.
1143년에 풀크 왕이 낙마사고로 죽고 멜리장드가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되는데 기독교 안티오키아와
에데사의 관계가 갈수록 악화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지자 예루살렘의 왕위 교체와 십자군 국가들
간의 관계 악화를 장기는 놓치지 않았으니 1144년 11월 말 장기는 에데사 백국을 공격했는데
하필 에데사의 지배자 조슬랭은 주력 군대와 함께 이슬람 영주와 싸우느라 텔바시르에 있었습니다.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은 조슬랭의 요청을 거절했고 예루살렘의 멜리장드는 망설이느라 너무
늦게 원군을 보냈으니, 12월 24일에 장기의 군대는 에데사를 점령하고 대학살을 벌였는
데, 제일 먼저 수립된 십자군 국가 에데사 백작국은 사라졌고 안티오키아는 강력한 완충
지대 방벽을 잃었으며 이슬람 교도들은 십자군 국가를 언젠가 없애버릴 존재로 인식합니다.
십자군 에데사 백국의 멸망에 유럽이 충격과 경악에 휩싸였으니, 1145년 12월 1일 멜리장드의 십자군
파견 요청을 받은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콴툼 프라이데케소레스”란 교서를 발표했으니 1차 십자군
의 영광을 재현하고 성지를 지키기 위한 십자군의 결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는데 교황은 재산 보호,
채무 변제 등을 조건으로 내걸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십자군을 결성할 것을 독려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십자군을 일으키는건 소극적이었는데 이는 이탈리아 남부의 노르만인들과 교황령
의 충돌에서 신성로마제국이 교황측에 원조해야 했기 때문으로... 프랑스는 국왕 루이 7세가
원정대를 꾸리려 했지만 왕의 고문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의 만류에 실행에 옮기진 않았는데
이때 십자군을 본격적으로 독려한건 클뤼니파의 라이벌인 시토파 수도원의 베르나르 도 였습니다.
당시 프랑스군대는 파리 동쪽 150km 마을을 공격했는데 1,300명 주민들이 숨어든 교회를 왕의 병사들이
불을 질러 모두 화형을 시킨 사고가 일어나 전 유럽에 소문이 나니 교황은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성무정지령”을 발표했으니 결혼식과 장례식 및 태어난 아이 세례를 줄수도 없으니 왕비 엘레오노르는
아이를 임신중이니 당황해 베르나르도를 찾아가니 성무정지령은 풀렸다는데 에데사 함락 8개월 전입니다.
베르나르도는 프랑스왕실을 설득하기는 쉬웠지만 이미 예루살렘에 기독교도 왕국이 세워진지 50년이 흐른
후라 성지를 되찾자는 주장은 1차 십자군 때와 달리 먹히기 힘든지라 베르나르도는 십자군 참가 그
자체가 구원이라는 요지의 주장을 설파했으니 결국 루이 7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베르나르도
앞에서 십자군에 참석할 것을 서약했고 엄청난 숫자의 프랑스의 영주들이 그 자리에서 참가를 맹세합니다.
베르나르도는 자신이 은자 피에르의 행보를 답습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이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을 의식해 십자군 참가독려와 더불어 유대인을 박해해선 안된다는 것도
강조했지만 같은 시토 수도회의 라둘프 등은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군을 조직해 유대인
을 학살하자 베르나르도는 허겁지겁 라인란트로 달려가서 라둘프를 크게 꾸짖어 수도원에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이 일이 독일 전역에 대대적 십자군 열풍을 불러일으켰으니 십자군 참가에 회의적이었던
콘라트 3세도 베르나르도의 설교에 무릎을 꿇고 수백명의 독일 귀족들과 함께 십자군 참가
를 서약하고 말았는데... 성지를 향한 십자군만 조직된 것이 아니었으니많은 독일인들이
엘베강 너머의........ 이교도 슬라브인들인 웬드족을 정벌하는 십자군을 결성할 것을 요구합니다.
2차 십자군의 목적이 성지 탈환이 아니라 구원에 있었으니 이 요구를 거절한 명분은 없는지라
결국 웬드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한 웬드 십자군이 결성되었으며 또 스페인의 이슬람
교도들을 몰아내기 위한 레콩키스타를 지원하는 십자군 역시 결성되었으니스페인과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제노바 사람들과 힘을 합쳐 스페인을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을 결성합니다.
시칠리아의 왕 루지에로 2세는 동로마 제국 영토도 점령할 겸 프랑스 십자군들을 팔레스타인
까지 수송해주겠다고 제안했는데 서유럽에선 동로마 제국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돌았고
동로마 황제에 대한 온갖 음해를 쏟아냈으니 프랑스 조정은 반 동로마 세력이 강한지라
루이 7세에게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지만........ 왕은 고드프루아가 걸었던 육로를 선택합니다.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2차 십자군의 결성이 룸 술탄국과 겨우 맺은 평화관계를 깨뜨리고
신성로마제국 - 교황 - 베네치아를 잇는 대 노르만 동맹을 해칠 것이라 믿어 불만스러워
했으며 십자군이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지 않을 것은 전례를 보아 자명한지라 투르크족과
정전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서유럽은 그리스도의 적과 동로마가 거래를 했다고 분노했습니다.
1147년 5월 19일 플랑드르, 노르만, 잉글랜드에서 결성된 십자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따라 남하하자
리스본을 공격하던 포르투갈 국왕 알폰소 1세의 구원 요청을 받았으니 왕은 "이슬람의 리스본
을 점령하고 약탈할 권리를 주겠다" 고 제안했고...... 십자군이 찬성해 1147년 10월 24일
3개월 공방전 끝에 리스본을 점령해 막대한 재물을 얻은 십자군은 1148년 봄에 항해를 재개합니다.
콘라트 3세의 독일군은 1147년 5월 레겐스부르크를 떠나 9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는데 동로마 제국
은 독일군의 약탈에 못마땅했지만 관계를 망칠 생각은 없어 접촉을 시도했지만 콘라트 3세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콘스탄티노플 교외를 계속 약탈하니 견디다 못한 마누엘 1세는 이들을 소아시아로 보내
주자 콘라트 3세는 프랑스 십자군을 기다리지않고 1차 십자군의 이동 경로를 따라 안티오키아로 향합니다.
독일 십자군은 1차 십자군 처럼 도릴라이움 에서 투르크 군대와 조우했는데....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투르크 군대는 십자군들을 무참하게 살육했고 2만명 중에 1만 8천을 잃으며 전멸당한
콘라트 3세는 살아남은 기병대와 함께 니케아로 간신히 달아나서 프랑스 군대를 기다렸습니다.
루이 7세의 프랑스 군대는 1147년 6월 프랑스를 떠나 10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는데
시칠리아왕 루지에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로마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지만 루이 7세는 기독교 제국을 공격하는 일을 거부하자 마누엘 1세는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를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했고 그후 왕과 왕비는 소아시아로 향합니다.
니케아에서 콘라트 3세와 합류한 루이 7세는 독일군이 극소수만 남았다는 것을 알았고, 이번
원정의 성패가 프랑스 군대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콘라트 3세와 루이 7세는
위험한 아나톨리아 중부 내륙 대신에 에게해와 지중해 연안의 동로마 영토를 따라 행군
하는데..... 비잔틴황제가 뒤에서 투르크군과 밀약을 맺은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2차 십자군은 스미르나를 거쳐 에페수스 까지 진군했지만 에페수스에서 독일왕 콘라트 3세는 중병에
걸려 눕고 말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는데 콘스탄티노플에서 마누엘 1세의 간호로
병을 회복한 콘라트 3세는 동로마에 대한 감정을 회복하고 배를 타고는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합니다.
하지만 루이 7세의 프랑스 군대는 동로마 내부에서도 투르크 군대의 공격에 시달렸으니투르크
군대는 십자군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동로마 도시들을 공격했고 십자군도 동로마 도시들을
약탈했기 때문에 동로마 군대와 십자군과의 교전이 자주 벌어졌으니 루이 7세는 동로마가
투르크와 연합하여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하였고 그런 의심은 십자군 전체로 확산됩니다.
십자군은 겨우 아달리아에 이르렀지만 안티오키아까지는 멀었으니 결국 루이 7세는 동로마 함대를
고용하여 배를 타고 성지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성직자와 귀족들을 태우자 더 이상 배가
없었으니 루이 7세는 자신의 주력에게 안티오키아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지만프랑스 군대는
라오디케아에서 투르크 군대에게 패해 전멸했고 극소수만이 안티오키아에서 루이 7세와 합류합니다.
라오디케아는 옛날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으며 알렉산더가 죽은후 셀레우시드 왕가의
안티오쿠스 2세가 부인 라오디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도시로 300m 언덕 위에
위치했는데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 목욕탕 등의 유적이 남아 있는데 양모가 풍부하고
안약 등 의약품이 유명했으나...... 1710년과 1899년의 대지진 때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요한묵시록에는 서머나, 베르가모, 디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등과 함께 소시아 7개 교회
의 하나로 서술되는데 라오디게아 교회 터는 유적지에 위치하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으니 성경(계 3:14)에는“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
하고 있는데...... 재물의 유혹과 생활의 편안함으로 미지근하다고 욕을 먹은 것 같습니다.
한편 2차 십자군 최대의 적이었던 장기는 갑작스런 최후를 맞았으니 평소 거칠고 엄격한 성격에
불만을 품었던 노예가 술에 취해 잠든 장기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만 것인데 사망 소식을
듣고 조슬랭 2세는 에데사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했고 장기의 아들
누레딘은 보복으로 에데사의 기독교도들중 남자는 죽이고 아녀자는 노예로 팔아 버립니다.
안티오키아공국의 레몽(프랑스 푸아티에 출신)과 옛 에데사 백작인 조슬랭의 관계는
여전히 나빴고 다들 십자군이 오기를 학수고대했지만 성지에 도착한 십자군은
대부분이 아나톨리아에서 죽고 소수에 불과했으니 에데사 탈환은 어림도 없을 판
이었습니다만 그래도 프랑스왕 루이 7세는 많은 자금과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안티오키아공국의 레몽은 누레딘이 모술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과 다투는 틈에 알레포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금욕적인 성향의 루이 7세는 미남 레몽을 좋아하지 않았고 시큰둥했으니 레몽은
조카인 엘레오노르를 대신 설득하려 했는데 두 사람 관계가 단순히 숙질 관계가 아니라는 소문이 도니
루이 7세는 매우 불쾌해 하자 왕비 엘레오노르는 알레포를 공격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협박(?) 합니다.
엘레오노르가 강하게 나간 이유는 그녀는 프앙스 서남부의 아키텐 공작령과 가스코뉴
백작령 및 끼엔느 백작령의 상속자이니 프랑스왕 보다 훨씬 넓은 영지의 상속녀
인지라 기가 셌기 때문인데... 엘레오노르와 루이 7세는 1137년 7월에 와인의
산지인 보르도에 있는 생 탕드레 사원 Cathedrale St. Andre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노르만족의 파리 습격이 계속되면서 프랑크족의 카롤링거왕조의 후손이 단절된후 프랑스귀족들은 987년
6월1일 파리백작인 위그 까페 Hugues Capet 를 프랑스왕으로 선출하는데 이는 파리가 프랑스의
중앙인데다가 그의 영토와 세력이 작았기 때문이니 파리백작 보다 더 큰 영지를 가진 제후들이 9명
이나 있었으니 루이 7세 는 5번째 왕이었으니 카페왕조는 제후들의 영지를 호시탐탐 노리던 시절입니다!
아키텐의 상속녀인 엘레오노르는 숙부가 안티오키아 공작이니 그를 원조하기 위해 알레포
공격을 강요했던 것으로 안그래도 마눌에 대한 소문에 마음이 상해 있던지라 격노한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를 연금시켜버린 다음 예루살렘으로 떠나버렸으니 예루살렘에
도착한 루이 7세는 프로방스에서 도착한 십자군을 보충받아 다시 대군을 거느리게 됩니다.
한편 콘라트 3세 독일왕도 용병들을 고용하여 다시 군세를 회복한 상태였으니 여기에 예루살렘
왕국 군대가 합세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원래 목표인
에데사 탈환은 모두 관심이 없었고 알레포를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은 루이 7세가 이미
거부한 바가 있으니.... 결국 그들은 엉뚱하게도 예루살렘의 우방국인 다마스커스를 공격합니다.
십자군이 에데사 탈환이나 알레포가 아닌 다마스쿠스를 공격한 이유는 다마스쿠스를 함락
시키면 예루살렘의 방벽이 된다고 보았고 바그다드의 투르크계 수니파와 카이로의
아랍계 시아파의 통합을 저지할수 있으며....... 서유럽에서는 에데사나 알레포 보다는
다마스쿠스가 지명도가 훨씬 높았으니 "큰 명성" 을 얻을수 있다고 본 허영심 때문입니다.
또 누레딘의 딸이 다마스커스의 아타베그와 결혼한 것이 예루살렘왕국을 자극한 것인데...
새로 온 십자군들은 이교도와의 동맹 따위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으니 1148년
7월 24일에 다마스커스 공략이 시작되되는데 4월 초에 회의를 하고도 공격이 3개월
이나 늦어진 것은 루이 7세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및 나사렛을 성지순례했기 때문입니다.
다마스쿠스는 고대에 6개의 로마도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고 주변의 농경지가 많아 부유한데다가
수공업도 발달했으니 유럽에서는 두꺼운 비단천에 호화로운 무늬가 들어간 직물을 “다마스쿠스
옷감” 이라 부를 정도이니...... 시리아에 통일국가를 세울 자라면 당연히 노리니 북쪽에서
장기의 아들 누레딘이 압박하는 가운데 남쪽에서는 우방이라 생각햇던 십자군이 쳐들어 옵니다.
당시 다마스쿠스 태수는 우누르였는데... 인근 소영주들은 십자군이 두려우니 구원오는
자가 없는지라 결국 내키지 않앗지만 알레포에 사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니 누레딘
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등 유럽 상인들과 무역하던 아랍상인들을 통해 십자군
의 규모가 별 것 아니라는 정보를 입수했는지 구원 약속만 하고 서두르지는 않습니다.
아코(아크레)에 집결한 십자군의 전력은 독일황제 콘라트의 기병 2천명, 프랑스왕의
기병 7백명, 플랑드르백작의 기병 6백명, 예루살렘왕 보두앵 3세와 제후들의
기병 5백명에 보병 6천명, 템플기사단 기병 130명, 성요한 기사단의 기병 70명
합쳐서 기병 4천명에 보병 6천명인데..... 기병에는 보병 3명과 하인 2명이 따릅니다.
1차 십자군은 먼저 예루살렘을 공격해 성을 함락한 다음에야 지도자들이 성지순례에 나섰는데
2차 십자군은 거꾸로 성지순례부터 먼저했으니.... 따라서 싸우기 좋은 계절인 4~5월을
놓치고 열사의 나라 사막에서 가장 뜨거운 7월 하순에 진껴을 해서는 7월 24일
다마스쿠스 남쪽 4km 메제야발에 도착해 진영을 세우니 다마스쿠스군의 야습이 격렬합니다.
독일 기병은 말에서 내려 중무장 보병으로 싸우는 가운데 26일에는 일부가 다마스쿠스성 서쪽벽에
까지 진출했지만 공성기를 준비하지 못한데다가 공성탑을 만들 생각조차 못햇으니....
도대체 공성전에 대해 이렇게도 준비가 허술하다는 것이 놀랄 지경인데 7월 27일과 28일 성벽
에서 몇 km 나 떨어진 곳에서 전투에 쫃기고 있었으며 총사령관이 존재하지 않았던게 큰 약점입니다.
도시를 빨리 점령하기 위해 물과 그늘이 있는 자리를 버리고 공격을 위해 고지로 올라가자
햇볕이 가장 뜨거운 7월 하순이라 강철 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에게는 물과
그늘이 없으니 사기가 떨어진걸 보고는 원래의 주둔지로 다시 이동하니 고지로
주둔지를 옮겼던 사이에....... 이슬람 군대가 차지하고 있었으니 전과는 지지부진해 집니다.
7월 28일밤 누레딘이 알레포군을 이끌고 닷새 거리인 홈스까지 접근해 왔다는 급보를 받고는, 29일
철수하는데 적과 싸우기 시작한지 불과 나흘만이라? 1차 십자군의 안티오키아성 공격은
무려 8개월간에 걸친 악천고투 전투와 인내의 결과였고 예루살렘공략도 멀리 떨러진 강에서 식수
를 길어오고 먼 산에서 나무를 찍어와서 공성탑을 만들었는데 2차 십자군은 아무 준비가 없었습니다.
명예롭지 못한 철수를 거부하고 남은 제후는 플랑드르 백작이 유일하며... 1148년 9월 8일 콘라트 3세는
살로니카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가서는 황제의 환대를 받고는 마누엘 1세와 가까워진 그는 루지에로
2세가 통치하는 시칠리아의 기독교도 왕국인 노르만 왕조를 공격할 계획을 짜면서 혼담을 주고받습니다.
한편 루이 7세는 바로 귀국하는게 창피하니 1149년 부활절까지 성지에서 머물렀는데 엘레오노르는
이혼하겠다고 외치고 있었고 루이 7세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느라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으니
원정도 실패하고 아내까지 잃은 루이 7세는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해 시칠리아왕 루제로의 영접을
받으며.... "이게 다 동로마 때문이다." 를 외치면서 동로마에 반드시 복수 하겠다고 이를 갈았습니다.
루이7세는 훗날 막내딸 아녜스를 복수하겠다며 이를 갈았던 동로마에 시집보냈는데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는 5촌 아저씨 안드로니코스 콤네노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60대의 안드로니코스는 황제로
즉위하면서 아녜스까지 강제로 차지했으니 유부녀, 근친을 가리지 않는 희대의 난봉꾼이었는데 쿠데타
로 처참하게 처형당하고 일족이 몰락했으나 아녜스는 무사히 살아남아 비잔틴 귀족과 세번째 결혼을 합니다.
루이 7세의 왕비 엘에오노르는 프랑스 서남부 아키텐·가스코뉴 공작에 푸아티에 백작으로 아들도 없으니
왕과 이혼하고는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이며 친척인 9세 연하 헨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하는데
1154년 10월 25일에 헨리가 외할아버지 헨리 1세가 죽자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가 되었고......
엘레오노르는 성탄절에 다시 영국 왕비로 즉위하는데 훗날 아들 리차드는 3차 십자군을 이끌게 됩니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국왕이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원래부터 갖고 있던 프랑스 내의 노르망디와 앙주,
거기에 결혼으로 아키텐과 푸아티에 등의 방대한 영지를 가진 셈이 되어서 프랑스와의 100년
전쟁의 씨앗이 된 셈인데 플랜태저넷 왕조의 이런 수법은 200여년 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어받아 남형제가 없는 공주들과 결혼하는 방식으로 유럽의 절반을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베르나르도는 십자군의 대실패에 충격을 받고 고뇌에 들어갔는데... 그는 그리스도교 세계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이 유럽에 승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유럽의 죄를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지만 로마 교황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신앙심 부족 탓으로 돌립니다.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십자군원정으로 끝났는데 괜히 우방인 다마스커스는 적으로 돌리고
인력과 물자만 낭비했으니 다마스쿠스는 전투 직후 시점에는 어느 쪽에도 점령되지 않은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나, 2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이미 반(反) 십자군 정서가 팽배하게
되어...... 영주인 무인 앗 딘 우누르가 죽은 뒤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장기 왕조에 포섭됩니다.
이로써 장기 왕조가 시리아- 자지라 전체의 패권을 쥐게 되었으며, 이는 장차 아이유브 왕조의 성립
로 십자군 세력이 파멸하는 단초가 되며 실패한 루이 7세는 독일왕과는 정 반대로 노르만
왕조와 연합해 동로마를 칠 십자군을 결성하자고 난리치는 통에 십자군의 지원 세력이 되어야 할
동로마만 혼란스러워져서 기독교도들 간의 분열이 가속됐고 십자군 국가들의 안보 공백은 커집니다.
그나마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거둔 성과라면 십자군의 일파가 포르투갈에 중도하차
하여 이슬람 세력이 400년간 지배하던 리스본을 함락시킨 것 정도니 사실 이
리스본 함락은 이베리아 반도의 레콘키스타에 중요한 변환점이 되었기 때문인
데... 하지만 정작 원래 목표인 우트르메르(레반트의 십자군 국가)는 좌절만 맛봅니다!
1187년에 쿠르드족 장기를 이어받아 아랍세계를 통일한 이집트 술탄 살라딘이 3만으로 레몽의 갈릴리
티베리아 요새를 함락하고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3만의 예루살렘왕국의 왕 기 드 루지앙등 십자군
을 대파하는데 생존한 십자군은 3천에 불과한 반면에 인명 피해없이 십자군을 격파하고 지도부 까지
생포한 살라딘은 여세를 몰아 10월에 예루살렘을 함락하니 영화 “Kingdom of Heaven" 에 그려집니다.
"하느님이 원하신다" 는 구호를 내걸고 이교도 이슬람으로 부터 에루살렘성을 회복해 기독교
왕국을 세웠는데 다시 이교도들에게 뺏겼으니... 충격에 빠진 교황 우르바노 3세는
또다시 국왕들에게 호소하니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프랑스의 필리프, 영국 리처드
의 3차 십자군이 일어나지만...... 술탄 살라딘의 선방으로 결국“예루살렘 탈환은 실패”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