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 가는 길
이성상
명절이 가까워졌다. 신정보다는 구정이 우리의 설날로 실감이 난다. 가족이 모여 좋아하는 음식도 만들고 조상에 대한 제례도 치른다. 한동안 못 보던 사촌들도 다시 만나 가족의 정을 뜨겁게 다지기도 할 것이다. 아울러 돌아가신 선대들의 묘소도 찾아볼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이때다. 방학이라고 늦잠이 습관 된 두 아이들을 깨워 오늘은 주말인데 산소에 가자고 얘기를 한다.
우리집안 선대들의 산소는 거의 경기도 북쪽에 있다. 은평구에서 오래 살게 되면서 자연히 돌아가시면 가까운 곳에 모신다는 것이 벽제나 용미리에 유택을 쓰고 오산리에 납골을 모시기도 했다. 전부 찾아뵈려면 여섯 군데를 들려야 되고 시간이 좀 걸린다. 그래서 참배에 동참하기를 꺼려하는 아들 딸 아내까지 즐거운 마음이 되게 머리를 쓴다는 것이 야유회 나가듯 수선을 떨기도 하는 것인데 잘 안 따라 준다. 그러면 맛있는 음식을 대며 오다가 들린다고 선포를 한다. 그래도 잘 내키지 않는 표정들 일 때는 용돈 얘기로 회유해 보기도 한다. 그러면 ‘또 속는 것 같다’며 마지못해 셋이 일어나기도 한다. 더 나가다간 ‘야구방망이’ 소리 나오기 전에 애비 말을 그냥 들어 주는 게 편하다는 걸 이젠 터득들을 한 것 같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탄다. 뒷좌석에 우리부부가 앉고 앞자리 옆은 딸이 앉아서 자기가 운전 하겠다고 우기기도 하며 티격태격한다. 그 동안 이 세 식구 식솔들을 애비인 내가 혼자서 도맡아 싣고 다녔다. 이제는 키워놓은 보람(?)이 있는 것인가 뒷좌석에 어느 회장님처럼 앉아 본다. 어느새 격세지감도 느끼며 성묘 길을 나선다.
첫 번째 참배는 큰 아버님 묘소다. 애들한테는 할아버지가 되시지만 아내도 얼굴한번 뵙지 못한 분이시다. 건설회사 현장소장님으로 계실 때 3층에서 낙상사고를 당해 혼수상태로 거의 2년을 중환자실에서 보내시다 돌아가신 분으로 우리집안의 리더이셨던 분이다. 장손이 미국서 사는 바람에 누이들이나 가끔씩 찾는다. 용미리 공원묘지 조성이 시작 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 35년이나 되었나 보다. 해서 자리를 맨 아래에 차지하고 계셔서 첫 번째로 찾게 된다. 비석 앞에 자리를 깔고 눈도 치우고 가져온 재물과 술을 따른다. 애들과 같이 절을 하고 자리에 둘러앉아 음복도 하며 종횡으로 질서 있게 자리한 주변 묘들을 살펴도 본다.
하얀 눈 속에 잠든 공원묘지는 또 다른 설국으로 조용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2월의 찬바람이 묘지 위를 꽉 채우고 있지만 밝은 햇빛이 있어 오히려 따스해 보이기도 한다. 푸른 솔 나무 들은 눈 속에 파묻힐 듯 운치를 더 하고 몇 마리 까치 떼가 날개 짓을 하며 모여 있다. 한가롭고 평화스러워 보이는 어느 공원의 오후 같다. 눈 위의 발자국만이 인적이 왔다 감을 얘기한다. 우리 같은 마음으로 찾은 듯 한 참배객이 꽤나 보인다. 더 이상 산소자리가 없어 보이고 이젠 매장허가도 안 나기도 한다며 화장하여 유골만 안치 할 수 있는 납골당이 한쪽에 큼지막하게 서 있다.
큰아버지 산소 옆은 기독교신자 인 듯 십자가 밑에 권사누구라고 표시되어 있는 비석의 산소가 있다. 그것을 언뜩 본 아들아이는 할아버지는 교회 안 다니셨다는 얘기를 듣고 옆에 누워계시는 아주머니한테 엄청 시달리며 지내시겠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한다. 비신자를 보면 기어히 교회 나가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어느 분 생각이 났나보다. 자기엄마한테 또 한마디 핀잔을 듣는다. 이 녀석이 요리조리 핑계를 대며 요즘은 교회를 나가질 않아 집사람한테 그야말로 시달림을 받고 있다. 아내의 표현으로 ‘불쌍한 중생’이 되고 말았다.
다음 산소로 이동을 한다. 둘째 아버님이 계신 곳이다. 벌써 동생네가 다녀간 듯 술잔과 꽃이 놓여 있다. 말년에 많이 아프셔서 이 분도 역시 오래 사시질 못하고 운명하셨다. 임종 시에도 내가 멀리 중동에 있어 함께 지켜드리질 못했다. 항상 죄스럽고 면목이 없다. 같은 식으로 자리 깔고 술 따르고 절하고 청소도 한다. 즐겨 하시던 담배 한 개비를 불붙여 재단에 놓고 일어선다.
우리가족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떠난 경우가 많다. 위치상 세 번째로 찾게 되는 내 사촌누이 산소가 또 그렇다.
내가 군대 제대할 때 쯤 누이는 갑자기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큰집에서 같이 보낸 어린 시절이 많아서인지 성격 좋고 활달해서 제일 좋아도 하고 잘 살줄 알았는데 애 둘 낳고 갑자기 세상을 뜨다니 충격이었다. 그 당시 누이의 죽음을 애도라도 하듯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로 시작되는 미국영화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에 나오는 음악이 있었다. 좀 애잔하고 가라앉은 듯한 이 노래 소리가 종로거리나 다방, 라디오에서 이상하게 많이도 울려 나왔었다. 가사는 다른 내용이지만 나는 그 곡을 들을 때마다 누이가 가엾어서 더 슬퍼했고 애상(哀傷)에 젖어 밤거리를 한 없이 걷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슬픔과 애석(愛惜)함속에 먼저가신 고인들의 못다 한 삶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분들이 평소 했던 언행과 체취 그리고 가족들과의 끈끈했던 정, 남겨진 그리움들이 이젠 우리에게 뭔가 가르침을 주고 인생의 깊이를 알게 하는지도 모른다. 욕심내지 말고 돈 때문에 너무 무리 하지도 말 것이며 건강도 생각하며 살라고. 그리고 이웃까지도 돌보며 서로 사랑을 많이 하며 살다가 오라고 하는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아버님 어머님 유골함이 모셔져 있는 오산리기도원 납골당을 찾았다.
생전에 얼굴 뵙고 귀여움도 받으며 자라서인지 이곳에선 아이들도 참배 성의가 보인다. 아내가 구성지게 추모기도를 올리고 다같이 인사하고 나온다.
다른 형제분처럼 넓은 공원묘지 같은 곳에 모시질 못했다. 좁은 유리 상자 같은 곳에 계시게 해 답답해하실 것 같아 올 때 마다 마음에 걸린다.
우리가 나올 때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려 상복차림들로 영정 들고 유골함 앞세우고 납골당을 들어선다. 명절이 가까워 마음들이 분주한 이때도 상관없이 사람들은 다시 못 올 먼 곳으로 떠나기도 하고 새로 태어나기도 한다.
죽어서 떠난 이들의 텅 빈자리는 항상 허전하다. 한 생명의 죽음은 그가 애써 살아오면서 닦아 놓은 모든 것을 허망하게 한다. 이승의 삶을 마치고 땅속에 묻히거나 화장이 되어 유골함에 들어가 있는 고인들의 마지막모습을 볼 때면 한 인생이 살다가 간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인지? 아득해 진다. 우린 내 뜻이 하나도 없이 이곳에 왔다가 잠시 살다 갈 때도 내 뜻이 아닌 체 떠나지 않는가. 내 차례가 언제인지도 아무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도, 미움과 원망도 또 다른 모든 걸 그대로 놔둔 체 어디서 부르는 대로 조용히 적확(的確)하게 혼자서 간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다시 되돌아오는 법도 없다.
그래도 인생의 참 의미는 깨달아 보고 사는데 까진 굳세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참배를 다 마치니 오후2시가 되었다. 조금 투덜대는 가족들에게 점심을 거 하게 사줄 요량으로 걸 맞는 식당을 찾았지만 못 찾고 원당까지 와서는 그냥 내가 좋아 하는 보리밥쭈구미집 에서 늦은 점심을 마치고 집에 온다.
2010년 2월 16일
첫댓글 저의 친정은 파주에 선산이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 일 년에 몇 번씩 다녀 오곤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잠시 추억에 젖어 보았습니다.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강원도 갔다가 길막혀 오늘 오전에 와서 답글 씁니다. 시원찮은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따뜻하다고 봐 주신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대하면 늘 소탈하고 활기차게 사시는 듯합니다. 글에서 날(生) 맛이 느껴져서 읽고나면 기분이 좋아지네요. 좋은 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제가 소탈은 한데 활기는 좀 처지는것 같습니다. 저 보다 좋은글 쓰시는 분으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감사 합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친정어머니생각, 몇 해 전 이승을 떠난 동생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천국에서 잘 계시겠지요.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집집마다 고인들은 다 계시군요. 때론 미워하던 사람도 돌아가시면 애뜻함으로 바뀌고 다 용서하고 사는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