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집총간 > 계곡집 > 谿谷先生集卷之十二 > 墓碣 > 장유
有明朝鮮國司憲府監察贈嘉善大夫禮曹參判宋公墓碣銘 幷序
粤昔壬辰倭寇之難, 爲東萊守臣而抗賊死義者。 曰宋公象賢。 先是, 宋公之出東萊也, 倭釁已成, 朝暮且有變, 而東萊當賊初衝, 人皆危之。 時東萊公之父監察公, 尙在已老矣, 獨毅然曰: “不辭難, 臣職也。 死將焉避?” 東萊公竟赴官以死, 君子謂東萊公誠烈士, 乃其義方之訓有自來云。 居三歲, 監察公亦卒, 後用東萊公原從勳, 例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 越三十有六載, 次子象仁, 爲南原府使, 始樹碣于墓, 請維銘之。
按公諱復興, 字武先。 宋氏出礪山, 鼻祖淑文, 仕高麗爲政堂文學。 九傳而至諱益孫, 策靖難功臣, 封礪山君, 公之高祖也。 曾祖曰瑚, 社稷署令, 祖曰承殷, 考曰琠, 皆不仕。 妣安東全氏, 部將瑗之女, 以嘉靖丁亥生公。
少孤, 鞠於祖母朴氏。 力學攻文詞, 屢魁解額, 所與交皆名人。 中壬子司馬試, 自是屢擧輒不第。 晩爲親老筮仕, 爲平陵道察訪, 屢遷宗簿寺主簿、陽智・龍安・平康三縣監、司憲府監察。 歲庚寅, 由松禾縣監, 擢文科, 時公年六十四歲, 全夫人已踰八十。 而東萊公雅望重一世, 方爲御史中丞, 一時稱以爲異事。 明年, 棄官歸, 無何丁全夫人憂。 又明年倭亂作, 公持服避兵, 寓居于湖南之古阜郡, 勞毁成疾, 竟不起, 得年六十八。 葬于郡東泉谷之山艮向之原, 從先兆也。
配曰贈貞夫人安東金氏, 高麗名臣方慶之後, 考曰忠義衛承碩。 夫人善內治, 婦道甚備。 年七十一, 後公三歲而卒, 祔于公之墓。 生二男二女: 男長卽東萊公, 次南原公, 亦以文科進, 歷官臺閣, 坐言事貶今官。 女壻學諭張彦悟, 生員韓孝祥。 東萊公有二男一女: 男仁及, 文科禮曹正郞; 孝及, 進士。 南原公有二女。 學諭有二子: 大生、克生。 生員有三子: 必震、必恒、必升。 內外曾孫男女略干人。
公少數奇, 久困公車, 旣老而獲一第, 竟未顯以沒。 而東萊公能樹立大節, 卓然有聞於天下後世, 至今人稱東萊公之懿者, 必歸美於庭訓, 豈所謂有子考無咎者耶? 是可以銘。 銘曰:
禔身以德, 敎子以忠。 子服父敎, 殉國以躬。 人誰無子? 亦孰無死? 子死而義, 是謂有子。 赫赫家聲, 垂之雲仍。 後必食報, 吾銘可徵。
유명조선국 사헌부감찰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송공 묘갈명(有明朝鮮國司憲府監察贈嘉善大夫禮曹參判宋公墓碣銘) 병서 - 宋興復
옛날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난리를 일으켰을 때 동래(東萊)의 수신(守臣)으로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 의롭게 전사한 이가 바로 송공 상현(宋公象賢)이다.
이에 앞서 송공이 동래로 나가려 할 때에 왜구와 이미 틈이 벌어져 언제 변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동래야말로 왜적과 맨 처음 맞닥뜨리는 지역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그런데 이때 동래공(東萊公)의 부친인 감찰공(監察公)이 아직 늙은 나이로 생존해 있었는데, 공만은 홀로 의연히 말하기를,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다. 죽을 곳이라고 해서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동래공이 결국 관소에 부임하여 죽었는데, 이에 대해 군자들이 말하기를,
“동래공이야말로 진정 열사(烈士)이다. 그 의로운 행동은 본디 가르침을 받은 곳이 있었다.”
하였다.
그 뒤 3년 있다가 감찰공도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뒤에 동래공이 원종(原從)의 훈작(勳爵)을 받음에 따라 규례대로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에 증직(贈職)되었다. 36년이 지나 차자(次子) 상인(象仁)이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된 뒤 비로소 묘갈을 세우려 하면서 나에게 명(銘)을 청해 왔다.
상고하건대 공의 휘(諱)는 흥복(興復)이요 자(字)는 무선(武先)이다. 송씨의 계보는 여산(礪山)에서 비롯되는데, 비조(鼻祖)인 숙문(淑文)은 고려 조정에 벼슬하여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그 뒤 9대를 내려와 휘 익손(益孫)에 이르러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호(瑚)는 사직서 영(社稷署令)이었고, 조부는 승은(承殷)이고 부친은 전(琠)인데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모친 안동 전씨(安東全氏)는 부장(部將) 원(瑗)의 딸인데 가정(嘉靖) 정해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조모인 박씨(朴氏)의 양육을 받았다. 학문에 정진하면서 문사(文詞)에 공력을 들여 누차 해액(解額 초시(初試) 향시(鄕試))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으며 교제하는 이들이 모두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임자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한 뒤로 여러 차례 대과(大科)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급제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어버이가 늙으신 관계로 은혜를 입고 벼슬길에 올라 평릉도 찰방(平陵道察訪)이 되었고, 몇 차례 옮겨 다니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와 양지(陽智), 용안(龍安), 평강(平康) 등 3곳의 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경인년에 송화 현감(松禾縣監)으로 재직 중 문과(文科)에 뽑혔는데, 이때 공의 나이는 64세요, 전 부인(全夫人)은 이미 팔순을 넘겼다. 그리고 동래공의 아망(雅望)이 한 시대에 중히 여김을 받으면서 바야흐로 어사중승(御史中丞)에 몸담고 있었으므로 당시에 사람들이 기이한 일이라고 일컬었다.
이듬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가 얼마 뒤에 전 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또 이듬해에 왜란이 일어나자 공이 상복을 입은 몸으로 병란을 피해 호남 고부군(古阜郡)에 우거(寓居)하였는데, 피로와 슬픔이 겹쳐 병이 들어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향년 68세였다. 이에 군(郡) 동쪽 천곡산(泉谷山) 간향(艮向)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선영의 예에 따른 것이었다.
부인 증 정부인(贈貞夫人)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고려의 명신(名臣) 방경(方慶)의 후예로서 충의위(忠義衛) 승석(承碩)의 딸이다. 부인은 집안을 잘 다스렸고 부도(婦道)가 완벽했는데 나이 71세로 공보다 3년 뒤에 작고하여 공의 묘소에 부장되었다.
슬하에 모두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이 바로 동래공이고, 차남 남원공(南原公) 역시 문과를 통해 조정에 진출하여 대각(臺閣)의 직책을 거쳐 언사(言事)에 걸려 지금의 관직으로 좌천되었다. 사위는 학유(學諭) 장언오(張彦悟)와 생원 한효상(韓孝祥)이다.
동래공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인급(仁及)은 문과 출신으로 예조 정랑이고, 효급(孝及)은 진사이다. 남원공은 2녀를 두었다. 학유에게 아들 둘이 있으니 대생(大生), 극생(克生)이고, 생원에게 아들 셋이 있으니 필진(必震), 필항(必恒), 필승(必升)이다. 내외의 증손으로 남녀 약간 명이 있다.
공은 젊어서 몇 차례나 불운을 당한 나머지 오래도록 급제를 하지 못한다가 노년에 접어들어 대과에 합격하였는데 끝내 현달(顯達)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동래공이 대절(大節)을 수립하여 우뚝 천하 후세에 그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동래공의 훌륭함을 일컬을 때면 반드시 가정의 가르침에 그 아름다움을 돌리곤 하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부자(父子) 모두 흠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이 정도면 명(銘)을 남길 만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덕으로 몸 추스르고 / 禔身以德
충성으로 아들 가르침에 / 敎子以忠
부친의 교훈 받들고서 / 子服父敎
나라에 몸 바쳤도다 / 殉國以躬
누군들 아들 없고 / 人誰無子
누군들 죽지 않으랴만 / 亦孰無死
대의 위해 몸바쳐야 / 子死而義
참으로 아들 두었다 하리 / 是謂有子
빛나도다 가문의 명예 / 赫赫家聲
자손 대대로 이어지리니 / 垂之雲仍
뒷날 반드시 보답받아 / 後必食報
나의 이 명 증거하리라 / 吾銘可徵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