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불교를 믿으십니까? / 장휘옥
“왜 불교를 믿으십니까?”
불교에 입문한 지 한 참된 고참자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자에게 똑같이 물었습니다.
신참: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고참: 내가 깨달으면 부처인데 부처님의 가피가 어디 있습니까.
신참: 그러면 죽어서 극락 가기 위해서겠지요.
고참: 지난번 법문에서, 마음의 정토를 찾아야 한다는
유심(唯心) 정토에 대해 배웠으면서 아직도 극락세계를 찾고 있어요?
신참: 그렇다면 성불하기 위해서겠지요.
고참: 성불하기 위해서요? 성인이었던 석가모니도
몇 겁씩이나 닦아 겨우 성불했다고 하는데,
우리 동네 성인도 못 되는 우리가 어느 세월에 성불하겠습니까.
신참: 고참 보살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그렇지만 만일 부처님의 가피가 없다면 불상 앞에서
조석으로 예불 드리고, 칠일 기도니 백일 기도니 하는 기도는 왜 드립니까.
또 극락세계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 착한 일을 하고,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칭하여 극락에 태어나려고 하는 것도
소용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성불하기가 힘들다면 참선이나 여타의 다른 수행은 왜 합니까.
고참: 그게 문제입니다. 불교를 기복적으로 믿으면
미신이나 맹신이라 하고, 교리적으로 파고들면 신심이 떨어지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신참 보살처럼 처음 불교에 입문했을 때는
부처님의 가피도 받고 열심히 수행해서 깨달음도 얻겠다는 생각에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했었어요.
그런데 불교 책도 어느 정도 읽고, 법회도 많이 다닌 지금은
부처가 바로 내 마음 속에 있는데 하는 건방진 생각만 남아 있을 뿐,
오히려 신심이 더 떨어지는 것 같아요.
아무튼 불교는 알면 알수록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신참: 뭐가 뭔지 모르기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저 기도나 열심히 하면서 소원 성취를 비는 것이 불교인줄 알았는데…….
대학 다니는 우리 아들이 엄마는 무식하게 불교를 맹신적으로 믿는다고
퉁을 줄 때는 무시당하는 것 같아 속상해요.
위의 대화는 현재 우리 나라 불교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교를 왜 믿느냐에 대한
두 보살님의 의견은 어느 쪽도 틀리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어느 쪽이 완벽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교교리는 온몸으로 받아 들여서
그것이 저절로 행동으로 나타나야 참다운 가치가 있습니다.
불교를 온몸으로 받아 들여 실천하는 자는
부처님의 가피도 입을 수 있고, 성불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교리를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들면,
교리를 알수록 잘난 체하면서 말 많고 건방진 행동만 보이기 쉽고,
불교에 대한 신심도 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어떤 인격적 대상을 신앙하는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소위 자각(自覺)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미신적인 면이 있을 수 없고,
본인의 선업(善業) 없이 은혜나 구원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불교를 철학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철학이 자각(自覺)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불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철학에서의 자각은 사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 반면,
불교에서의 자각은 일상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실천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적 자각은 학문의 범주에서만 검증받아도 유효하지만,
불교적 자각은 반드시 자각한 그대로 살 수 있을 때에만
그렇게 불릴 수 있습니다.
만일 불교가 우리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불교, 곧 죽은 불교이지 참불교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생명은 바로 이 순간의 삶을
진실 되게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불교를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지식으로 배운 불교교리가 생활에 그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앎과 삶이 따로 노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불교에 대한 앎이 실천으로 옮겨질 때,
생활 그 자체가 바로 불교가 됩니다.
이제까지 불만으로 가득 찼던 나의 하루하루의 삶은
불교의 모든 모습이 드러나는 현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삶을 떠나 어딘가에 불교라는 신비한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생활 그 자체가 불교가 되면
불교를 “믿는다” “안 믿는다”라는 말이 소용없게 됩니다.
불교가 생활 그 자체인데 믿고, 안 믿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생활 그 자체가 불교가 된 사람, 곧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거나 남이 도와 준 것도 아니지만,
그저 그러한 삶의 결과로서 부처님의 가피를 입게 되고,
극락세계에도 태어나게 되며, 성불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활 그 자체가 불교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활 그 자체가 불교가 된다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들이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먼저 불교교리에 대해 올바로 알아야 하겠지요.
예를 들면, 부처님의 가피란 무엇이며, 기도는 왜 필요하며,
보시는 어떻게 해야 하며, 삼법인은 왜 알아야 하는가 등에 대해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삼법인 가운데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의미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해서 모두 다 변해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삿된 욕망으로 사물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고통이 없어지고,
고통이 없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생기면 남을 돕고 이해하게 되고 등등 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되고,
삶을 삶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불교교리를 올바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머리로만 이해해서는 소용이 없고,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 들여 저절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은
불교교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입니다.
수행을 통해 불교의 기본적 교리가 온몸으로 받아 들여졌을 때,
우리는 나 이외의 생명체가 존재하고,
나의 삶은 이러한 무수한 생명체들과 천지만물의 도움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또한 이들 생명체들도 나만큼 행복해지고 싶어 하고
나만큼 고통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어떠한 것과도 분리된 나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를 깨달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름 모를 들꽃, 손등을 타고 오르는 풀벌레,
우리를 비추고 있는 햇볕까지도 나와 한 몸임을 사무치도록 자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생활 그 자체가 바로 불교가 된 경지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결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 대한 태도나 마음가짐은 이러한 경지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천지만물의 도움으로 자신의 존재가 살아갈 수 있고
그들과 자신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이웃과 직장 동료에게
마음에 생채기 내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들도 자신만큼이나 괴로움을 싫어하고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자각하고 있는데 그런 행동이 나오겠습니까?
매일 만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 내가 바른 마음가짐을 가질 때
생활 자체는 불교로 되어 갑니다.
이런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게 하는 것이 불교교리 공부와 수행입니다.
그 결과 부처님의 가피도 입고, 극락세계에도 태어나며,
성불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하루하루의 생활을 떠나
불교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面相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口裏無瞋吐妙香).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心裏無瞋是珍寶)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無染無垢是眞常).
장휘옥 / 오곡도 수련원장. 전 동국대 교수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