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2일 부활4주간 목요일 (요한13,16-20)
“인간이 자기합리화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오늘은 며칠 전 가톨릭 일꾼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은 내용을
살짝 인용해볼까 합니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기보다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금세기의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트 카뮈가 한 말이라고 하는데,
말장난 같지만 탁월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카뮈는 합리화로부터 자유로웠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인간은 온전히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이외에는 누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 역시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만약에 지금 내 위치가 온통 내 주변에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만 있는,
만일 내가 그런 인기나 권력을 가졌다면
정말 나 역시 누구처럼 한껏 어깨에 힘을 주고
손가락 하나로 그들을 움직이는 갑질을 일삼지는 않았을까?
또 만일 내가 부임한 본당에 돈과 자원이 너무 풍족해서
예산 걱정 안 하고 그것을 내 권한으로 맘껏 쓸 수 있는 위치였다면
나는 어떤 모습의 사제였을까?
혹은 어쩌다 나의 선행으로 사람들이 모두 나를 칭찬할 때,
나는 정말 우쭐거리지 않고 겸손하게 하느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모를 일입니다.
그 상황에 처해 보지 않고서는
장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굳이 가정을 해본다면
적어도 나는, 그동안 내가 비판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이 하는 일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 역시 또 다른 합리화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해서는 합리화하는 동물입니다.
저는 인간이 합리화할 수 있는 능력에는
제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어떤 매체를 통해
어느 개신교 대형교회 목사의
말도 안 되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는 교회 건축을 예로 들면서
신도들에게 봉헌 얘기를 하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집 있는 사람은 집을 팔아
건축헌금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전세로 가고,
전세 들어 있는 사람은 전세금을 빼서
건축헌금을 하고 월세로 가고,
월세를 살고 있는 사람은 보증금을 헌금으로 드리고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간 후에
몇 년이 지난 후 어떻게 되는가를 보라‘고...
‘하느님이 어떻게 되갚아 주시는지를 보라’는 설교를
버젓이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구역질 나는 설교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명백하게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뒤집어서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선이라 한 것을 악한 것으로 선포합니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 또 그들은
자신을 비판하거나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귀”도 아니고 “마귀 새끼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자기 자신이
이미 마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저께 대통령 취임식에서 ‘비문명’을 들먹이며
다수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세력을 ‘비문명’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인 것입니다.
자기를 반대하면 죄다 ‘비문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탐욕입니다.
탐욕은 타인을 지배하려고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보고, 잘 생각해볼 일입니다.
개신교 목사의 예를 들었지만
‘오늘날 교회의 사목자들이 교인들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교인들을 지배하면서도 뻔뻔하게
자기는 교인들을 섬기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그리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실행하는
화려한 이벤트와 본당의 프로그램들은
그런 강도 심보를 적당히 가리려는 가림막으로 사용되는 건 아닌가?‘
본질은 뒤로 한 채 얄팍한 이벤트에 목을 매면서
그것이 능력 있는 신부라고 생각하는 사제들이 꽤 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이루어내는 성과는
얼핏 보면 교회 활성화, 성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배를 합리화하고 사랑을 소멸시키는 아주 못된 악인 것입니다.